“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솔직히, 여보, 그건 내 알바 아니오.)”
이게 바로 미국이다. 그들(의 속내랄 것)은, 당신 같은 것이야 어찌되든 괘념치 않는다. 그런데, 잠깐, 거기서 멈춰 생각해보라.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이라고 공사간에 발설을 해야만 그 속내의 핵이 문득 스쳐 지나칠 정도로, 그네들의 일상은 타인에게 온통 쏠려/쓸려 있다. 이게 바로 개인주의의 아름다움이자 미덕이다. 문명의 점정에 놓인 개인주의란, 존재가 꺾이는 순간에야 도발적으로 제 노란 속을 내어 보이는 애기똥풀처럼,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늘 방긋 웃는 귀염상의 아이마냥, 좋은 이웃이 되어 주변과 함께 노오랗게 어울려 살아간다.
Panic Buying(사재기)으로 텅 빈 미국의 대형마트와, 매대 마다 물건들이 그득 차있는 한국의 마트를 견주며, ‘위대한 한국’ 운운하는 일 앞에서 나는 근심한다. 누구 말마따나 ‘국난극복이 취미’인 우리민족의 한 많고 탈 많은 역사적/지정학적 맥락을 자랑스러워 할 일도 아니거니와, 위기 앞에서 얼마나 강한지를 내세우는 ‘국격’은 이미 국격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 밑바닥을 보인 것 마냥, 그간 깊이 숨겨놓았던 치부를 드디어 드러낸 것 마냥 호들갑스러이 보도되는 일부 ‘강대국’들이 여태까지 그네들 나름의 ‘강함’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이라고 속내를 뱉어내야만 할 정도로 완전한 연극으로서의 일상을 영위해 왔던 실력 덕이라는 점을 나는 굳이 기억한다.
위기 앞에서 진지해지고, 재난 앞에서 경건해 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사람이라면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이 아닌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별 일 없는 일상을 경건히 살아낼 줄 알아야 하며, 'NO DRAMA'라는 일상의 도저한 윤리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 그 이상을 다해야 한다. 만약, 아름답고도 견실하던 연극적인 일상에 어느 날 균열이 생긴다면,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이라고 영화적인 속내를 기어이 내뱉고서 제 갈 길로 가도 좋은, 서로 아프게 갈라선대도 나쁘지 않고, 시리게 배신을 때리거나 당해도 '한' 같은 것을 쟁여놓지 않는, 그런 인간들이야 말로 참으로 강한 인간들이다.
이것은 ‘미국찬가’가 아니다. 한국을 ‘위대한 나라’라고 호명하는 일에 담긴 어떤 위험을 나는 호올로 잠시 매만지고 싶었을 따름이다. 결국, 영화적인 방식으로 제 살길을 찾아 나서야만 할 어떤 연극적 삶(들)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싶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