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제14장 1) † 시온산 위의 십 사만 사천명과 첫 열매(묵시14,1-5절)
<시온산 위의 십 사만 사천명>
묵시14,1절은 “또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명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십 사만 사천명(144,000)”은 문자적인 숫자이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그 숫자는 문자 그대로이지만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이 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실제의 인수(人數)인 것이 틀림없다. “십 사만 사천명(144,000)”은 12 곱하기 12의 천 배이다. 앞에서 반복해서 설명한 바와 같이 “12”는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의 완성을 나타내는 수이다. “144”는 12 곱하기 12인데, 이것은 완성 중의 완성, 곧 가장 충만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궁극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 수는 이 궁극적인 완성의 천배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십 사만 사천명”은 과연 누구인가? 7장 14절의 “십사만사천명”과 동일한 사람들인가? 그렇다. 십 사만 사천명(7,1-8절)은 승리의 어린 양에 속한다. 무서운 대환난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14장은 대답한다. 십 사만 사천명은 이스라엘백성들을 말함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다니엘서의 마지막 한 이레가 요한계시록으로 옮겨왔고, 요한계시록 내용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명이 섰는데”, 이들은 7,4-8절에 기록되어 있는 무리들과 같은 무리이다. 단지 이들은 환난을 겪은 후의 시기일 뿐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이 환상은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재림할 때까지 보존되어 있을 십 사만 사천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다.
순교를 당한 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은 그 기간 동안에 살아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남아 있는 사람의 전부는 아니고 수많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서 그리스도 재림 때 그를 맞이하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이 하늘의 장면은 많은 물소리와 큰 뇌성과 거문고 타는 자들의 소리 같은 큰 소리 때문에 매우 웅장하였다.
그들의 미혼 상태에 대한 표현은 그들이 우상숭배에 유혹받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상숭배는 구약성경에서 비유로 간음으로 지칭된다.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이것은 먼저 소속을 밝히는 것이요, 둘째로는 충성의 표시요, 셋째로는 혼동을 면하기 위함이요, 마지막으로 일종의 호신부와 같이 쓰여지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결국 메시야왕국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표일 것이다.
<새 노래를 부름>
2절은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고 말한다. 이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십 사만 사천인의 음성이며, 거문고 소리처럼 유쾌하며, 뇌성과도 같이 장엄하며, 많은 물소리처럼 요란하다.
3절은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말한다. 13장의 짐승의 세력으로 인해 신음하던 믿는 이들이 다시 승리한 이스라엘 144,000명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특별히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늘에서 웅장한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다름 아닌 새 노래다. 새 노래는 하나님을 위한 승리의 새 날을 축하하기 위해 부르는 구약의 주제를 활용한다. 그 노래는 곡조와 가사가 새로워서라기보다는 구속받은 이들이 새로운 심령 상태로 부르기 때문에 새 노래다.
<첫 열매들>
4절은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십 사만 사천인이며,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말한다.
이 십 사만 사천명이 대환난기의 복음 전도자들일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특별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볼 때, 고난을 통하여 깨달은 유대인들이 시대적 제사장 역활을 수행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순결했으며 다른 사람들같이 순교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들고 있다.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 또한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이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분에게로 돌아올 사람들에 앞서서 회개한 이스라엘 사람들임을 암시해 주는 표현이다(슥12:10; 롬11:15, 26-27).
처음 익은 열매는 초기의 이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농장에서 전체 수확전의 첫 열매들로서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로 거두어 들여질 것이다(레 23:10-11; 출 23:19). 이것은 좋은 땅의 첫 열매를 수확전에 거두어 하나님의 성전에 가져간 것처럼, 그들이 첫 열매로서 하늘로 휴거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내아이는 초대교회 사도들이나 그 이후의 속사도시대의 순교자들과 순교한 이방인들로 구성될 것이다.
14장 1-5절의 처음 익은 열매인 처음 이기는 자들이 대환난 전에 휴거되고, 14장 14-16절까지의 유대인 대다수와 첫 휴거에 실패한 이방인 믿는 이들로 구성되는 수확물은 대환난 끝에 휴거될 것이다. 사내아이는 역대로 죽은 이기는 자들로 구성되며, 사탄과 싸워서 그를 패배시키기 위한 것이다. 반면에 첫 열매는 여섯 째 인을 뗄 시점까지 살아 있는 이기는 자들로 구성된다. 첫열매는 유대인 순교자로 구성될 것이다. 첫 열매는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 양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5절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말한다. 거짓말은 사탄의 표현이자 표시이다. 요한8,44절은 “마귀는 모든 거짓말쟁이의 아비요 거짓말들이 그에게서 나온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탄적인 속임의 시대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 구절들 전체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을 십 사만 사천명의 승리를 미리 보여준 예언적인 장면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 입에서 어떠한 거짓말이나 허위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예”라고 말할 때는 그렇다는 뜻이고, “아니오”라고 말할 때는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분명하게 “예”나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거짓말쟁이이자 모든 거짓말의 근원인 사탄과 아무 상관도 없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는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의 유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상숭배는 구약 성경에서 비유로 “간음”으로 지칭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절이 있는 자, 곧 처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상숭배나 율법준수의 문제를 뛰어넘어, 주님을 위한 사랑스런 갈망의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그분을 위해 순결한 처녀로 보존되기를 열렬히 갈망해야 한다. 우리의 오감(五感)과 마음의 상태나 우리의 일상의 행위가 순결한 처녀로 유지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처녀가 되는 것의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기도하고 처녀같이 살기를 갈망한다면, 모든 해충들은 우리의 발밑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이기는 자, 곧 첫 열매 중 하나가 되는 길이다. 예표에서 처음 익은 열매는 농부의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하느님의 만족을 위해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 가져갔다.
심지어 첫 열매이신 예수님의 경우에도 동일했다(1코린15,20, 23). 부활의 아침에 주님은 마리아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요한20,17절에 의하면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나의 부활의 신선함을 내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의 부활의 신선함을 맨 처음 맛보는 분이 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누림을 위해 우리 자신을 신선하고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 단순히 어떤 두려움 때문에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만지기를 꺼려한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높은 차원에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일들을 행할 수 있도록 절제하고 거절하여 최고 높은 수준에 있어야 한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