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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30. [역경의 열매] 이영호 <1-10> 일제강점기에도 예배드린 믿음의 가정서 태어나
다섯 살 때 관절염으로 왼쪽 발 장애… 주일이면 업혀서 삼척읍 교회 참석
가난 때문에 내겐 어릴 적 사진이 없다. 1966년 강원도 홍천군 창촌면 창촌감리교회에서 형·누나와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찾았을 뿐이다. 왼쪽부터 형 이진호 목사, 둘째 누나, 큰누나, 여동생, 그리고 필자.
내 이야기가 국민일보에 소개된다니 영 어색하다. 숱한 가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내게 과연 내세울 만한 열매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격동의 시기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인 중의 하나였노라 인정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나는 1938년 5월 15일 강원도 삼척 정라진에서 태어났다. 5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항구에서 어업중개소 일을 하셨다. 난 어려서부터 결점이 많았다. 어머니는 내가 세 살 때까지 앞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섯 살 때 결핵성 관절염을 앓은 뒤 왼쪽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장애를 얻었다. 한의사가 고쳐 보려고 온몸에 침을 놓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동침(銅鍼·구리로 된 굵은 침)이 튕겨질 때마다 아파 진저리를 쳤다.
부모님은 삼척읍으로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와 형은 날 번갈아 업어가며 교회로 데려갔다. 밤이 되면 종종 우리 집에서 교회 모임이 열렸다. 어머니는 교회 분들이 오면 빨강과 검정색 겹으로 된 두꺼운 천으로 창문을 가렸다. 일본 순사들의 감시가 심해서 그랬다고 한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극렬해지는 것을 걱정했다. 정라항에 잠수함이 들어올 수 있게 바다 바닥을 파는 작업이 이어지자 아버지는 첩첩산중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우리는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줌치리라는 곳까지 들어갔다. 어릴 땐 기와집에 사람이 살고 초가집에 돼지가 산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이 바로 돼지가 사는 곳이었다. 이사 온 이듬해 해방을 맞았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난 9살이 돼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한글과 구구단을 아버지에게 배웠다. 아버지는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의 가사를 써 놓으시고 “이것이 ‘예’자 이것이 ‘수’자니라”고 하셨다. 구구단은 한문으로 “사사(四四) 십육(十六)이니라”고 쓰며 알려주셨다. 친척 누나가 인근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계셨는데 한낮 집 주변을 쏘다니는 내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입학시켜 줬다. 담임선생님은 책을 읽고 구구단을 안다며 날 2학년 반으로 넣어주었다.
3학년 때 축구시합이 열렸다. 난 지게 작대기를 짚고 선수로 뛰었다. 우리 반이 옆 반을 이겼다. 옆 반 선생님은 “야 이놈들아, 병신이 들어가서 뛰는 반에도 지느냐”면서 단체 기합을 줬다. 이 말은 내 마음속에 큰 상처가 됐다. 이후로 누구에게도 져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누군가와 싸움을 하게 되면 죽기를 각오하고 덤볐다. 어차피 ‘너나 나나 둘 다 죽는데 나는 병신으로 죽고 너는 성한 놈으로 죽으니 네가 더 손해’라는 생각을 했다.
6·25전쟁이 나기 한 해 전에 아버지는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상군두리의 조그만 기도처로 전도사 파송을 받았다. 홍천읍 교회 장로였던 아버지가 교역자가 된 것이다. 형과 나는 홍천읍에 남아 공부했는데 전쟁이 나자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초등학교 공부는 거기까지였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영호 <1> 일제강점기에도 예배드린 믿음의 가정서 태어나
* [역경의 열매] 이영호 <2> 인민군 "하나님이 센가, 총이 센가" 어머니에게 총질
* [역경의 열매] 이영호 <3> 80리 산길 걸으며 13곳 교회 돌본 아버지
* [역경의 열매] 이영호 <4> 신학교 중단 고민할 때 일깨워준 아버지의 편지
* [역경의 열매] 이영호 <5> 합심 기도로 귀신 들린 여자 정신 돌아오게 해
* [역경의 열매] 이영호 <6> 나눔·섬김 몸에 밴 아내 덕에 목회 순풍
* [역경의 열매] 이영호 <7> 우리 가정에 4대 걸쳐 15명 목회자 세우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이영호 <8> 믿음만은 부자였던 '양잠 속장님' 기억에 생생
* [역경의 열매] 이영호 <9> 첫 목회지 홍천 산골… 30리 길 다니며 성도 살펴
* [역경의 열매] 이영호 <10·끝> 부족함에도 평생 목회 사역에 쓰심을 감사
약력=△1938년 강원도 삼척 출생 △58년 홍천농업고등학교 졸업 △62년 감리교 신학대학교 졸업 △74년 선교대학원 졸업 △62년 4월 서석교회 담임 △65년 외산포교회 개척 △66년 동홍천교회 담임 △67년 2월 홍천감리교회 담임 △73년 2월 춘천서부감리교회 담임 △80년 2월 남춘천 감리교회 담임 △89년 5월 한길교회 담임
***[역경의 열매] 이영호 <2> 인민군 “하나님이 센가, 총이 센가” 어머니에게 총질
총알 두 차례나 빗나가자 칼 꺼내… “하나님 뜻” 알아듣고 “살려달라”
6·25전쟁 때 어머니의 기도는 우리 가족을 살렸다. 1966년 강원도 홍천군 창촌면 창촌 감리교회서 촬영한 사진 속 어머니(왼쪽 두 번째). 어머니 좌우로 큰형수와 아버지가 앉았고, 오른쪽은 내 아내다.
6·25전쟁이 터졌지만 우리는 피난을 가지 못했다. 잘 걷지 못하는 나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인민군 두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목사인 아버지를 못 찾겠으니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했다.
인민군 한 사람이 툇마루에 서서 어머니 멱살을 잡고 “하나님이 센가, 이 총이 센가, 내가 똑똑히 보여주겠다”며 총을 쐈다. 어머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총알이 빗나갔다. “어, 이거 봐라?” 두 번째 총알이 발사됐다. 이번엔 어머니 머리의 비녀를 맞히고 빗나갔다. 성난 병사는 총에 대검을 꽂고 어머니를 찌르려고 했다. 어머니가 대검을 쥐면서 말했다. “젊은이, 총에도 죽지 않게 하신 하나님이 이 칼에 날 죽게 하시겠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민군들은 덜덜 떨었다. 그리곤 어머니 앞에 꿇어앉으며 살려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1·4후퇴 때는 우리 가족도 피난을 갔다. 횡성을 지날 때 산골짜기 빈집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간 그 집은 경찰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졸지에 경찰가족으로 몰렸다. 게다가 보따리 속에서 나온 성경과 찬송가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게 탄로 났다.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가 인민군 둘에게 끌려갔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지금 가도 되지만 집에 있는 저 자식은 어미도 없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저를 불러주실 때에 그 아들도 불러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고 눈을 떴는데 인민군 중 한 명이 동료에게 말했다. “동무, 우리 할아버지가 장로인 거 알지? 우리가 이 사람 하나 죽이고 간들 무슨 득이 되겠나.” 그러더니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곤 어머니를 풀어줬다. 총소리를 들은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하는 생각에 집 앞에 앉아 울었다. 그런데 저 멀리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가 걸어오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내가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 나갔다. 그런데 나를 본 어머니는 더 깜짝 놀랐다. “이 자식이 이제 걷는구나.” 그때부터 나는 지게 작대기 없이 걷게 됐다.
어머니에겐 신유(神癒)의 은사가 있었다. 서울 삼각산 기도원 박신출 원장으로부터 어머니를 소개받은 대구의 정규만 장로라는 분이 어머니를 찾아온 적이 있다. 심한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장로를 위해 어머니는 간절히 기도했다. 정 장로는 건강을 회복했고 대구에서 한의원을 크게 운영하며 서현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헌신했다.
어머니가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서울 용산의 한 교회에 가셨을 때 일이다. 첫 집회를 마치고 그 교회 장로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쪽진 머리에 남자 고무신을 신은 저 시골 아낙네가 어떻게 이런 집회의 강사가 될 수 있느냐, 이 집회를 계속할 것이냐가 회의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제단에서 기도하는데 장로들이 이런 회의를 한 것이 환상 중에 보이더란다. 어머니가 강단에 서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저는 이제부터 강단에 서지 않고 밑에서 기도하겠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것입니다. 이 집회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끌어간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과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회의를 했던 장로님들을 비롯해 그날 그 교회 전체에 임한 회개의 역사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역경의 열매] 이영호 <3> 80리 산길 걸으며 13곳 교회 돌본 아버지
교회 오가는 길에 만난 강도… 어머니가 ‘주여’ 외치자 몸 굳어
필자의 아버지 고 이종원 목사와 어머니 고 박병생 사모가 1981년 강원도 홍천군 서석교회에서 찍은 사진. 이제는 두 분 모두 천국에 계신다.
내 아버지 고 이종원 목사는 6·25전쟁이 터지기 한 해 전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상군두리 시골 교회의 교역자로 파송됐다. 당시 아버지가 받은 사례비는 옥수수 두 말과 납작 보리쌀 서 말이었다. 아버지는 성도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려고 최대한 검소하게 살았다. 틈틈이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해 스스로 사택 난방문제를 해결했다. 아버지는 상군두리를 거점으로 서석면과 내촌면, 창촌면 등에 퍼진 기도처들을 돌봤다. 매주 한 개 면씩 순회했는데 각각 70∼80리 길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30㎞ 내외의 거리다. 이렇게 도보로 산길을 오르내리며 돌본 곳은 서광교회, 서석교회, 문암교회, 율전교회, 광원교회, 동창교회, 광암교회, 창촌교회, 방내교회, 성내교회, 운두교회, 장평교회, 내촌교회 13곳에 이른다.
아버지는 70∼80리 길을 오가는 동안 배고프면 솔잎을 따서 씹다 뱉었고 목마르면 황톳물을 마셨다고 한다. 교회를 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기도 했다. 한낮에 문암교회를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어떤 건장한 사내가 “서울 매형”이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모르는 사람이어서 갈 길을 가는데 따라오더니 “아니 내가 매형하고 불렀으면 쳐다봐야 할 것 아냐”라면서 멱살을 잡았다고 한다. 그가 아버지를 해치려고 손을 든 순간 어머니가 그의 몸을 붙잡고 “주여!” 하고 외쳤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떨리면서 사지가 굳었다. 덜덜 떨던 그의 소매에서 칼이 툭 떨어졌다. 혀마저 어눌해진 그는 살려달라며 사정을 했다. 어머니는 “우린 목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성경과 찬송가 외에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며 가방 안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자 경직됐던 그의 몸이 풀렸다. 부모님은 그에게 착하게 살라고 타이르고서 길을 떠났는데 그가 보이지 않게 된 순간부터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쳤다고 한다.
난 1962년 신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가 계신 지역으로 파송을 받았다. 아버지가 개척하신 서석교회를 담임하면서 율전교회와 장평교회 그리고 청량리 기도처를 순회하고 돌봤다. 아버지의 방식과 비슷했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도 있었다. 아버지는 걸어서 순회했고 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성도들의 가난은 그러나 바뀌지 않았다. 명절이 와도 떡메 치는 집은 하나 없었다.
67년 3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홍천읍 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 교회는 아버지가 6·25전쟁 전에 장로로 시무했던 곳이다. 지역에선 춘천중앙감리교회 다음으로 큰 교회였다. 부임 직후 첫 심방을 갔는데 목사님 대접한다고 차려진 밥상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껏 그렇게 푸짐한 밥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식사 기도를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 종이 무엇이기에…” 하고 말하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평생을 산골 교회로만 다닌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무지 이런 상을 차릴 수 없는 성도들과 박한 음식을 드셨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아버지는 77년 창촌감리교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지난해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아버지가 목회하셨던 교회들을 돌아봤다. 이제는 동네에서 어엿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교회들을 보노라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역경의 열매] 이영호 <4> 신학교 중단 고민할 때 일깨워준 아버지의 편지
“오직 우리들이 가질 마음은 ‘주여 내 중심에 오시옵소서’ 뿐이다”
아버지 고 이종원 목사가 59년 전 내게 보낸 편지.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았지만 마치 디모데서를 읽는 듯 아버지의 사랑과 신앙관이 담겨 있다.
1959년 10월 6일 아버지에게 받은 편지 한 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신학교 2학년생이던 아들의 우문(愚問)에 현답(賢答)해 주시기도 한 데다 아버지의 신앙 결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모데를 향한 사도 바울의 애틋함이 잘 담긴 디모데전후서의 또 다른 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난 학업 중단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가난 속에서 날 공부시키느라 허리가 휜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기도 했고 교단의 비리 또한 신학생 의분으로 참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런 뜻을 담은 서신을 시골집으로 보냈더니 아버지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가아(家兒) 영호는 받아 보아라. 어제 네게서 온 편지는 잘 받았다. 네 심정과 신앙관도 잘 알았다. 네 편지의 사연이 옳다고 인정한다. 인간은 무릇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내 생활 전폭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야 평안하고 기쁜 것이다. 살다 보면 개인이나 가정, 교회는 물론이고 사회와 국가가 다 각기 위치에서 문제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내가 선히 살고자 해도 그 뜻에 복종치 못하고 오히려 원치 않는 일에 굴복케 되니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 부족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도움을 기다리는 자만이 사죄함을 얻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네가 경제적으로나 성경적으로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는 우리도 동감한다.
나 자신 또한 그 부류의 사람이다. 우리에게 재산이 있어서 네게 신학을 공부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너를 어릴 때부터 주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뜻을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신 것이다. 네가 신학을 안 한다 해서 우리 집 경제가 보장되거나 교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집 형편에 널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간에게는 아무 도움 없을 줄 안다. 난 다만 부정한 돈으로 네게 거룩한 성경공부를 시키지 않기 위해 근검절약하고 있다. 어느 교회나 주님의 이름 팔아 너를 돕는 것이 아니다. 외인에게나 형제에게나 무리한 일은 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널리 반영하지 못하고 일편 인간성만 바라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되거나 남을 용납하지 못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배움의 시기는 배움의 시기요, 외침의 시기는 외침의 시기다. 예수님도 때를 찾으시고 순응하셨다는 것을 알고 평안한 마음으로 배우라. 너는 아직 성장한 시기는 아닌 줄 안다. 성장한 신앙생활이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에나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사는 것이다. 또 흠이 없는 완전한 성격을 갖춰야 하고 또는 남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주님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요, 지도자일 것이다.
네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난 지금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마음으로 기뻐한다. 차후로 네 포부 그대로 변치 않기를 기도하며 미가야 같은 하나님의 사신이 되기를 바란다. 오직 우리들이 가질 마음은 ‘주여 내 중심에 오시옵소서’일 뿐이다. 또 세상 사람에게 주님을 연결시키는 것이 내 사명이다. 모든 일에 주를 위하여 인내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는 뜻을 이루어라. 네 건강과 주님 은혜 풍성하기를 바라며 주님께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이영호 <5> 합심 기도로 귀신 들린 여자 정신 돌아오게 해
춘천 시민 체육대회를 주일에 개최해… 성도들 탄원서 모아 시청에 변경 요구
1962년 신학교를 졸업한 뒤 파송 받은 강원도 홍천군 서석교회에서 성도들과 찍은 사진(가운데 검은색 정장이 필자). 서석교회는 아버지가 6·25전쟁 이후 기도처로 개척한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중학교 다닐 때 식목일이 주일과 겹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식목일 행사를 한다며 학교에 나오라고 했다. 주일성수는 반드시 해야 하니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 조퇴한 뒤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갈 생각이었다. 식목일 아침 일찍 십 리 떨어진 학교로 갔다.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교무실에 갔는데 오시질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데 교감선생님이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운동장에 나가자 교감선생님이 장작 몽둥이를 빼 들고 말씀했다. “식목행사 하는 줄 알면서도 준비물을 갖고 오지 않은 놈들은 이리 나와.”
조퇴를 생각했던 내겐 준비물이 없었다. 나와 여러 명이 나갔다. 교감선생님은 사정을 듣지 않고 모두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내 약한 쪽 다리는 땅에 닿을 듯 처져 있었다. 난 한쪽 다리로만 엎드려뻗쳐를 했다. 교감선생님이 장작으로 성한 쪽 다리를 때렸다. ‘퍽’ 소리가 났고 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거의 기다시피 집으로 갔다. 평소 한 시간 거리인데 그날은 네댓 시간이나 걸렸다. 주일 예배는 이미 끝나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아버지가 눈물과 땀으로 범벅된 날 발견했다. 방에 들어가서 바지를 내려 보니 장딴지에 시커먼 피멍이 들고 검은 피가 터져 나와 말라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주일성수를 하는 사람이 겪는 어려움 중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 하셨다.
훗날 내가 춘천 교역자연합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춘천시에서 시민 체육대회를 주일에 개최한다고 했다. 목사님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게 중요합니까, 체육대회 하는 게 중요합니까. 성도가 예배를 놓치면 교회가 무너집니다”고 호소했다. 성도들의 탄원서를 받아 시청을 방문했다. 그러나 체육대회 날짜를 옮겨 달라는 우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춘천시는 시민 체육대회를 주일에 강행했다. 기도 외에는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춘천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그 주일에 예배를 드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홍천읍 교회에서 박재봉 목사님을 모신 부흥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석해 아픈 다리가 완전히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던 중 회개가 터졌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남의 집에서 널어 말리던 정어리 콩깻묵을 집어먹은 일부터 시작해 중·고등학교 때 서리해온 콩을 밭에서 구워 먹은 일까지, 내가 벌인 크고 작은 잘못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구역질까지 해가며 저녁 집회 때 시작한 기도에 열중했다. 20분쯤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여전히 주변이 어두웠다. 달력을 보니 이틀이 지나 있었다. 부모님은 이틀 동안이나 내 기도를 막지 않고 지켜보셨다고 한다.
내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목회하던 교회에 귀신 들린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근처 학교 교장선생님의 여동생이 귀신에 들렸다고 했다. 여동생은 얼마나 힘이 센지 그 학교 남자 선생님 두 분과 교장선생님에게 붙들려서야 우리 집에 올 수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정신없이 날뛰는 환자를 붙들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까지 셋이 나서 간절히 기도했다. 잠잠해지고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분은 우리에게 감사하다면서 자기 손으로 밥이라도 해 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1주일 정도를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역경의 열매] 이영호 <6> 나눔·섬김 몸에 밴 아내 덕에 목회 순풍
가난했던 전도사 시절 신혼여행 대신 신학교 학장님 뵙고 첫날밤은 처가서
1965년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을 내가 다녔던 대학교 학장실로 가야 할 만큼 가난했다. 남편 이삭을 위로했던 리브가처럼 아내는 부족하고 약점이 많은 날 묵묵히 지켜줬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 24:67)”
성경에 나오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남자는 평생 어머니와 아내의 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간직했던 이삭, 그리고 이런 남편을 어머니의 사랑과 아내의 사랑으로 위로할 줄 알았던 현숙한 아내 리브가…. 이 결혼은 믿음의 결혼이었고 하나님이 맺어주신 결혼이었다.
1962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시골 교회로 파송 받았다. 나 역시 아버지가 목회하던 방식 그대로 3∼4개 교회를 순회하며 돌봤다. 64년 늦가을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가르치던 이환신 교수님이 내 목회지로 불쑥 찾아오셨다. 내가 목회를 잘하고 있나 보러 오셨다고 했다. 교수님과 며칠을 보낸 뒤 아쉬운 마음에 교수님을 따라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날 아는 장로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 장로님이 마침 잘 찾아왔다며 내게 좋은 처자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독신 목회를 결심했던 난 장로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다. 장로님은 서울 올라온 김에 만나보라고 강권했다. “만일 장로님께서도 아들이 있다면 그 처자를 며느리로 들이시겠습니까”라고 여쭤보니 숨도 안 쉬고 그럴 거라고 했다. 처자는 농협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처자의 퇴근시간을 기다려 그녀를 만났다. 마음에 들었다.
강원도로 내려간 뒤 아버지에게 서울에서 선 본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그 장로님이 추천하는 분이라면 결혼해도 좋을 것”이라고 허락했다. 그녀와 이듬해인 65년 5월 26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가난한 전도사라 달리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실이었다. 홍현설 학장님께 축복기도를 받고는 첫날밤을 왕십리 처가에서 보냈다. 다음 날 강원도 산골 임지로 돌아오자 근처 상인들은 총각 전도사님이 결혼을 했나보다며 웅성댔다. 면사무소 옆길을 지나 교회 언덕으로 올라오는데 나와 아내를 지켜보신 장로님이 교회 종을 치기 시작했다. 성도들끼리 미리 의논이 오갔던 모양이다. 성도들은 종소리를 듣고 한 광주리씩 음식을 머리에 이고 교회로 모여들었다. 장로님 인도로 성도들과 결혼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나 이영호는 아내 이광자를 아내로 맞아 이제부터 평생토록 즐거우나 괴로우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그대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따라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이 약속을 지키기로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난 이 혼인서약이 결혼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구구절절 부담되지만 이 약속에 신랑신부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오늘날 결혼 풍속을 보자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하나님은 내 약점과 부족함을 아시고 내게 꼭 맞는 아내를 배필로 주셨다. 아내는 넉넉하지 않은 교회와 가정 살림, 숱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과 5남매 아이들 양육을 묵묵히 맡아주었다. 어느 교회를 가든 성도들이 “우리는 사모님 복을 받았다”고 했다. 나누기 좋아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똑같이 섬기는 아내 덕분에 내 목회가 순탄했다. 혼자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역경의 열매] 이영호 <7> 우리 가정에 4대 걸쳐 15명 목회자 세우신 하나님
미국 인디언선교 떠나는 아들 목사 비행기표 한 장 못사줘 마음 아파
1967년 홍천 감리교회 담임목사 시절 아내와 찍은 사진. 나는 첫째 딸을, 아내는 둘째 아들을 안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부부는 2남3녀의 자녀를 뒀다.
구약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인생이 대단했다. 야곱 또한 그에게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나왔으니 대단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있는 이삭은 믿음이 좋은 아버지를 두고 영문도 모른 채 제물로 묶여 제단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는 점 말고는 특별히 꼽을 만한 것이 없는 듯하다. 난 가끔 내가 이삭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어느 날 ‘부모님도 대단한 목회를 했고 너희들도 그렇게 뻗어갈 것이지만, 난 별것 없지 않나’ 이런 마음을 비쳤더니 아이들이 “이삭이 없으면 야곱부터는 쭉 없는 삶입니다”고 했다. 곁에 있던 둘째 사위는 “이삭은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았죠”라고 대답해 내 아내로부터 후한 점수를 얻었다. 내게 맡겨진 구간이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바통을 들고 이어 달릴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마른 막대기에서도 싹을 나게 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100년이 넘도록 4대에 걸쳐 15명의 목회자를 세웠다.
아들 이상혁 목사가 미국 애리조나로 인디언선교를 떠날 때가 생각난다. 배낭에 작은 물병과 태극기를 꽂은 아들이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비행기표 한 장 사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 내가 대학 공부를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했던 아버지 말씀처럼, 아들이 머나먼 선교지로 떠나던 그때나 서울 개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이나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아들이 인디언을 섬길 때 일이다. 어떤 분이 좋은 일이 있으니 오라고 해서 갔더니 인디언들 갖다 주라며 빵을 잔뜩 줬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이었다. 아들은 “당신 자녀들에게도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먹일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빵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아들에게 성도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춘천 한마음교회를 담임하는 김성로 목사는 내 형님의 맏사위다. 김 목사는 순수하다. 그래서 뜨겁다. 형님댁에 오면 내 어머니 곁에서 하루 종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신기한 얼굴로 듣곤 했다. 얼마 전 한마음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 김 목사의 얼굴에 있던 기쁨이 성도들 얼굴에도 가득한 것을 보고 놀랐다. 뒤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도 진실한 마음으로 건강한 교회를 일구고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김 목사와 함께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는 내 맏사위 강형식 목사와 원주 반석감리교회를 섬기는 내 형님의 아들 이상훈 목사 등을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께 거듭 감사드린다.
내 부모님도 그랬고 나와 내 자녀도 그랬듯이 목회하는 삶에는 가난과 역경이 끊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은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다. 난 앞을 보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다. 그런데 신앙심 깊은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우리 인생의 진짜 역경은 눈에 보이는 재물이나 배경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길 수 있다. 내 부모님이 그랬듯이 나 또한 내 후손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이영호 <8> 믿음만은 부자였던 ‘양잠 속장님’ 기억에 생생
가난 속 신앙생활 열심이던 속장님 양잠 한 해 매출액 전부 십일조로 내
44년 목회여정에서 만난 성도 중에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신앙심을 가진 분이 많았다. 사진은 1968년 홍천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있을 때의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
어느 분야든 최고 레벨에 도달한 사람을 일명 ‘다이아몬드’라고 부른다. 항공회사에서는 최우수 고객을 다이아몬드 고객이라고 하고 최우수 영업실적을 올린 판매원을 다이아몬드 사원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인터넷 게임에서도 최고 레벨의 유저를 다이아몬드 등급이라 부른다고 한다. 나는 신앙공동체에도 ‘다이아몬드 크리스천’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레벨은 인간이 부여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1963년 일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도 10명 남짓한 강원도 산골의 교회로 파송됐다. 종탑은 용접할 때 다 쓰고 버린 산소통을 말뚝에 거꾸로 매달아 썼다. 그걸 망치로 때리면 소리가 사방십리를 갔다. 수요예배 시간 30분 전에 예종을 쳤다. 그러면 맞은편 산에서 뽕잎을 따느라 고생한 박옥순 속장님이 뽕잎이 가득한 자루를 머리에 이고 뛰기 시작했다. 속장님은 양잠을 했는데 규모가 영세했다. 저녁식사도 못한 속장님은 뽕잎자루를 교회마당에 내려놓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머리를 찧어가며 졸았다.
어느 날 한 해 동안 기른 양잠농가에 등급을 매기는 날이 왔다. 속장님은 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에 좋은 등급을 받게 해달라며 기도를 부탁했다. 난 속장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속장님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전도사님, 제가 수급(首級·가장 우수한 등급)을 받았어요!” 속장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는 엉거주춤 마당으로 나서는 내 소매를 잡고 농협 공판장으로 데려갔다. 공판장으로 가는 내내 그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시 목회자들은 무조건 검은색 넥타이를 맸다. 속장님은 넥타이와 큼지막한 사과를 사서 내게 줬다. 이어 농협창구에서 전표를 돈으로 바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침을 탁탁 뱉어가며 돈을 세더니 십일조라며 건넸다.
그런데 아뿔싸. 1년 매출액 전부를 헌금한 것이다. 속장님으로부터 받은 십일조를 점퍼 안쪽에 깊숙이 찔러 넣고 오른손엔 검은색 넥타이를, 왼손엔 사과 봉투를 들었다. 교회로 올라오는 길에 진한 감동과 행복을 느꼈다. 세상에 나처럼 행복하게 목회하는 놈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교 내내 조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속장님이 그렇게 귀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이런 속장 하나만 앉혀 놓고 평생 목회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가 그런 여종이었을까…. 엘리사에게 수넴 여인이 그런 여종이었을까…. 예수님의 발 앞에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그런 여인이었을까….
자신이 수고해 좋은 등급을 받은 게 아니라 전도사님이 기도해줘 그리된 것이라 믿는 절대적인 확신, 그만하면 됐다는데도 굳이 사과 한 알이라도 더 넣으려던 순수하고 착한 마음, 전도사가 보는 앞에서 봉투를 열고 하나, 둘, 셋 십일조를 세면서도 하나도 떨림이 없던 그 신념에 찬 손가락, 전표를 흔들며 전도사님 나와 보라고 외치던 그 기쁨 가득한 목소리….
44년 목회여정 중에 만난 성도들 가운데 박 속장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더없이 가난했던 시절, 인분지게를 지고 밭농사를 하고 산에서 뽕잎을 따는 육신의 수고를 다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던 그분께 ‘다이아몬드 크리스천’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싶다.
***[역경의 열매] 이영호 <9> 첫 목회지 홍천 산골… 30리 길 다니며 성도 살펴
홍천감리교회 거쳐 춘천으로 가게 돼… 성도들 송별예배서 눈물로 환송해줘
1967년 홍천감리교회 담임목사 재직 시절 찬양대원들과 찍은 사진. 내가 맡았던 교회들은 열정적인 성도들로 가득했다.
내 첫 목회지는 강원도 홍천군 서석감리교회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 달에 한 주씩 목회자가 없는 기도처와 교회를 돌며 말씀을 전했다. 성도 수는 적었지만 말씀을 사모하는 영혼을 만나고 돌보는 일은 기적 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율전교회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주일학교 교사였던 성도가 보이지 않아 그의 집을 심방했다. 그런데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먹을 게 없어 며칠을 굶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해 일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딱한 처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급하게 쌀과 옥수수 다섯 말을 갖다 주고 밥을 먹게 했다. 그때 심방을 가지 않았으면 어찌 됐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장마철에 강물이 불으면 자전거를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야 했다. 세찬 물살을 보노라면 기도가 절로 나왔다. 강을 오가며 주기도문을 셀 수 없이 많이 외웠다. 건물 뼈대만 남았던 외삼포교회는 성도가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매일 동네를 심방하며 교회에 나올 것을 독려하는 게 일이었다. 그때 아내는 농협에 다녔고 난 수입이 없었다. 장모님은 내게 “이 서방 올해까지만 놀 거지”라고 물었다. 그리고 전세방을 얻으라고 돈을 주셨다. 그 돈으로 물 새던 교회 지붕에 함석을 씌웠다. 비가 와도 걱정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던지. 예배를 마치면 집사님 한 분이 허리춤에서 계란 한 알을 꺼내 주시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30리 길을 오가던 수고가 계란 한 알에 녹아내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외삼포교회는 건물도 번듯해지고 46명의 성도가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곳이 됐다. 그 무렵 난 목사 안수를 받고 홍천감리교회로 가게 됐다.
홍천교회는 지역 군수와 경찰서장, 교육장 등이 출석하는 큰 교회였다. 군수는 교회 성도들과 대화하며 주민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고마운 분이었다. 교육장은 도서관을 개관하면서 도서목록 1호를 성경책으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경찰서장은 내가 춘천 서부교회로 떠나는 날 송별예배 자리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성도들이 저마다 눈물을 흘리는 걸 봤습니다. 참 목사님의 길은 아름답고 귀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그 눈물이 부럽습니다. 목사님, 부디 춘천에서도 아름다운 목회 이어가 주세요.”
44년 목회를 돌아보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 많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내가 담임했던 교회들은 참으로 가난했다. 그래도 성도들의 마음은 부자였다. 목회자에 대한 사랑과 정성은 차고 넘쳤다. 부지깽이도 뛴다고 할 만큼 바쁜 시골이었는데도 성도들은 말씀을 사모해 반짝이는 눈으로 예배에 참석했다. 담임 목회자를 아끼고 위로해 어떻게든 순종하려고 뜻을 모으던 그 모습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결핵성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던 내게 건강을 주시고 40년이 넘도록 목회를 잘 마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 세상에 이보다 귀한 것이 또 있을까. 이 귀한 교회를 내게 맡겨 주셨으니 감격스러울 뿐이다. 내가 목회한 교회가 크든 작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하나님께서 날 써주셨다는 사실 자체로도 감사하다.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듯 나 또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사랑했노라 고백할 뿐이다.
***[역경의 열매] 이영호 <10·끝> 부족함에도 평생 목회 사역에 쓰심을 감사
병약함 극복하고 44년간 목회… 모든 것 한없이 부어주신 은혜 덕분
제대로 보지도 걷지도 못하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44년간 목회를 돌볼 수 있었다. 오늘의 열매를 위해 역경을 주신 주님께 감사기도 할 뿐이다.
어느덧 내 나이 팔순을 지나간다. 최근에 팔순을 맞은 한 대학 동창이 예배시간에 이런 회고사를 했다. “목회에서 은퇴한 뒤 그동안 만났던 성도들을 떠올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새벽 5시30분 시작된 기도가 오전 10시까지 이어져 아침식사를 거르기도 했습니다.” 대학 동기 모임에서 또 다른 친구가 김홍도 목사(전 금란교회 담임목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농담을 건넸다. “홍도야, 예배시간에 그 친구가 한 얘기 들었지? 성도를 위해 기도하느라고 아침도 못 먹었단다. 너는 성도가 수만 명이나 되는데 하루 종일 밥숟가락을 뜰 수나 있겠나.”
예전에는 인간이 강건하면 수명이 팔십이라고 했다. 난 그 나이만큼 살고 있으니 감사하다. 난 태어나서 네 살이 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했다. 결핵성 관절염을 앓아 작대기를 짚고 학교에 다녔다. 또 건강이 좋지 않고 집이 가난해 행복한 꿈을 꿀 수 없었다. 그렇게 부족한데도 하나님께선 날 아껴주시고 목회를 완주할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내게 좋은 부모님을 주셨다. 부모님은 내게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을 삶으로 가르쳤다. 나 역시 부모님의 뒤를 따라 복음과 양심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내 자녀들이 바통을 이어 목회의 길을 가고 있다.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다. 하나님은 또 내게 신앙심 깊은 아내를 허락하셨다. 아내의 소원이 참 재밌다. 하나님 앞에서 ‘난 목사의 며느리였고 목사의 아내였고 목사의 어머니였고 목사의 할머니였다’는 소리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시 128)”
성경에는 복이란, 손이 수고한 대로 소득을 얻는 것이라고 돼 있다. 복은 곧 아내와 아이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이요, 자식의 자식 곧 손주를 보는 것이다. 생각하면 누구나 받는 싱거운 복 같지만 깊이 생각할수록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일자리나 결혼, 출산 등의 문제로 고통 받는다고 하니 평범해 보이는 일상은 실상 비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아내는 물론 감람나무 같은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까지 보는 기쁨을 주셨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아버지는 평생 강원도 산골을 걸어 다니며 목회하셨다. 난 목회 초반 자전거를 탔다. 내 자녀들은 자동차를 타고 목회를 하고 있다. 아마도 손주들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목회할 것이다. 나는 엘리야의 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인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런 천연기념물 같은 성도가 있다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는 역경을 이긴 자들의 것이다. 이 시간에도 천연기념물 같은 주의 종들이 역경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한층 더 커지고 환해지고 깨끗해지고 튼튼해지고 안전해진 주님의 교회가 있길 바라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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