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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장로회 조사였던 사회주의자 이동휘의 명암
조선인 사회주의자 1호, 이동휘
코로나 팬데믹의 장기화로 새해가 되었어도 새해 같지 않고 입춘이 와도 마음이 설레지 않고
설날이 와도 무덤덤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책에 파묻혀서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보내면서 새 하늘과 새 일에 대한 기대와 흥분, 환상을 접어서 그럴 것이다. 유일한 즐거움은 동굴에서 묵상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평상시 생각하며 곱씹었던 것들을 하나씩 둘씩 꺼내며 혼자 세계에 몰입한다.
연변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이동휘는 약방의 감초다. 민족학교와 독립운동 단체 설립에 그가 끼지 않는 곳이 없다. 캐나다장로회 교회 교우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북간도의 조선인들의 민간단체였던 ❮간민교육회❯, ❮간민회❯도 그의 조언을 받아서 설립되었다고 하고 구춘선의 ❮간도국민회❯도 그의 지시에 따라 활동했다고 한다.
이동휘의 영향력과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이지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팩트를 무시한 서술이라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책들이 그런 기술을 이동휘에게 상투적으로 적용한다.
나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몰아서 그의 공로처럼 서술하는 ❮카더라통신❯식의 기술을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진위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동휘가 조선인 1호 사회주의자로서 최초로 사회주의 단체인❮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인물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시조에 대한 연변 후학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을 공부하며 독립운동이 독립운동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정치활동이며 권력다툼이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에 대한 신격화, 영웅화 작업의 허상을 보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사의 최대 비극인 ❮자유시참변❯의 한 축을 그가 담당하고 있었고 다른 축은 이르쿠츠크파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제 공산당으로부터 유일한 고려 공산당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극동공화국과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를 끼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며 청춘의 열정과 순수로 독립운동에 몸 바친 조선 청년들이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된 ❮자유시❯ 막다른 골목에 이르도록 암투를 벌였다. 결과적으로 1921년 6월 28일❮자유시참변❯이라는 무력 충돌이 일어나 조선독립을 꿈꾸며 독립군에 자원한 무명의 청년들이 서로 총질을 하며 죽어갔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정당화, 미화 될 수 없는 <자유시참변> 이후에 이동휘도 이르쿠츠크파도 자기들의 극단적인 권력 투쟁이 빚은 억울한 희생과 죽음에 대하여 일말의 양심적 가책이나 반성이 없었다. 그들은 끝까지 서로를 비난하며 상대방에게 참변의 책임을 묻는 성명서를 냈을 뿐이다.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에 유일한 고려 공산당으로 인정받고 레닌정부가 약속한 조선독립 자금을 독점하여 그 자금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며 대대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던 그의 심정과 생각을 읽어보지만 ❮자유시참변❯을 전후하여 그와 ❮한인사회당❯이 보인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행위가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역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그의 명암을 짚어보고 싶었다.
가끔 1922년 코민테른 출두명령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로부터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해산 명령을 받고 코민테른 극동국 산하에 꼬르뷰로(고려국)을 설치하여 그들의 지도하에 고려공산주의 운동을 통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해파❮고려공산당❯중앙위원장 이었던 그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다. 또한 그가 살아서 스탈린의 민족차별정책의 일환으로 1937년 연해주에 거주했던 17만 여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을 당하는 고통을 몸소 겪었다면 조선인 사회주의자 1호인 그의 감회가 어떠했을까도 종종 묵상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인 대 수난 이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우리는 그에게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보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만약에 그 때가 그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독립운동의 역사와 그 뒤 한국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동휘는 독립운동의 예언자나 순교자는 아니다. 그는 조선이 망하고 망국 백성들이 억압과 수탈을 당하는 그 시대 그 상황 속에서 조선독립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무장독립 투쟁을 부르짖은 세계의 흐름을 읽은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헌신을 기역하며 그가 캐나다장로회 전도사로 활동한 것과 그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가 계기가 되어서 만들어진 당파(계파)와 독립운동계의 분열의 문제를 짚으며 코로나 이후 시대를 고민하는 분들과 이동휘의 명암을 나누고 싶다.
성재 이동휘와 캐나다장로회 구례선 선교사
함경북도 단천 출생인 성재 이동휘가 고향에서 가까운 성진의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책임자인 구례선 선교사를 찾아간 것은 1909년의 일이다. 당시 그는 구례선 선교사의 조사1)가 되길 원하였지만 당시 성진 선교부의 조사의 인력이 충분하였으므로 구례선 선교사는 그를 권서인2)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1910년 구례선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고 김계안, 김문삼, 김택서, 이종화, 이종범 등의 선배 조사들과 함께 성진 선교부 관할아래 있는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으며 때로는 구례선 선교사와 동행하여 복음을 전하며 사경회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열심히 전도하여 이원군 송당리교회(1909년), 이원군 은용덕교회(1909년), 이원군 포항리교회(1911년)의 개척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단천군 여해진교회에서 전도집회를 열어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며, 이원군 신흥리교회(1908년)와 이원군 문평리(1909년)교회에서는 권서인 한진소, 교원 이종헌, 구례선 선교사와 함께 전도집회를 열어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김계안, 김문삼, 김택서, 이종화, 이종범 등의 전도자들과 함께 오랜 시일에 걸쳐 전도하여 와연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911년 2월, 그는 성진의 ❮삼국전도회❯의 후원으로 북간도일대에서 한 달 정도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다. 그 기간 명동교회에서 집회하는 중에 이동휘는 정재면, 김약연 김하규, 박태환 등이 만든 ❮길동기독전도대❯를 ❮삼국전도회❯로 이름을 바꾸고 큰 틀에서 전도와 역사를 볼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성진으로 돌아오자마자 105인 사건에 연루 되어 구속되었고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대무의도 섬에 유배되었다.
그는 1912년 여름에 대무의도에서 풀려 나왔다.
1912년 함경노회 노회의안에 보면 그가 8월 15일 전에 풀려나온 것을 알 수 있다.
“동년 8월 15일에 함경노회 제 2회가 함흥군 신창리예배당에 회집하니 회원은 선교사 6 인, 목사 6인, 장로 8인 이더라.
신임원은 회장 업아력(A.F. Robb), 서기 이두성, 회계 전계은 이더라.신학생 취교자는 이
동휘, 김우정, 김현찬, 홍기진, 김중석과 이전 입학자더라.3)”
그러나 그는 신학교 취교생으로 문답을 하였지만 신학교에 입학하지 않았고 1913년 2월과 3월 사이에 구례선 선교사의 배려아래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망명 후에 그가 만주와 연해주에서 구례선 선교사의 조사로서 선교활등을 했는지 팩트를 확인할 길이 현재로서는 거의 알길이 없다. 그가 독립운동가로서 자기 신분의 위장을 위해 선교사의 조사를 자원한 것은 사실이고 외국인 선교사의 보호를 받으려고 선교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도 사실이지만 1913년 이후부터 1918년 4월 28일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설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전도에 전력투구하는 조사로서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교회들을 방문하고 주로 크리스천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고 활동한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가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조사로서의 신분을 유지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망명 후 그가 공산주의자로 전향하기 까지 5년 동안의 조사로서 전도와 동시에 독립운동을 한 것인지, 아니면 조사는 명목으로 유지하고 독립운동에만 전념한 것인지, 아니면 망명 직전 또는 직후에 조사직을 사임한 것인지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그의 이름은 1912년 이래로 장로회 사기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구례선 선교사와 서고도 선교사의 글에 그가 언급되는데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고 둘 다 다 그가 권서인 또는 조사로서 활동할 때의 이야기이다.
이동휘 임시정부 행 그리고 시작된 분열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이동휘는 조선인 사회주의자 1호로서 위치가 확고부동하다. 그의 위치는 거의 성역에 가깝다. 한국에서도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서 위치가 확고하다. 그는 어디서도 함부로 비판하지 못할 권위와 위엄을 갖춘 독립운동가 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최소한 3차례 분열과 파당의 단초가 되었다. 그로 인해서 시작된 분열과 대립은 오늘날 까지도 우리사회에 DNA로 전수되었으며 심각하다.
첫째, 그는 러시아 귀화한인인 원호와 미 귀화인 여호의 분열과 파당을 촉진하였다.
1919는 8월 그는 연해주에서 결성된 <대한국민의회>를 해체하고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대한국민의회>를 해체하며 원호그룹과 약속한 임시정부 개조의 문제를 지키지 않았다. 당시 임시정부 개조의 문제는 이동휘와 그의 그룹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안창호가 <대학국민의회> 주류에 속하였던 원호그룹과의 약속대로 의정원을 해산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 실망하고 분노한 주류였던 원호4)들은 <대한국민의회>를 재소집하고 임시정부 총리로 부임한 이동휘와 여호5)세력을 규탄하였다. 대한국민의회의 여호와 원호의 대립은 상해파 공산당(이동휘, 김립, 한형권, 박진순, 김규면 등)과 이르크추크파 공산당(문창범, 오하묵, 여운형, 안병찬, 한명세 등)의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1921년 자유시참변의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뿐 만 아니라 해방정국에서 이념으로 나뉜 남북 분열과 파당의 전초가 되었다.
둘째, 그는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부임하였지만 독립운동의 방법과 노선이 자기 그룹과 다른 임시정부에서 1921년에 탈퇴하므로서 민족주의운동가들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분열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독립운동계는 중국의 국공합작처럼 능동적으로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대역사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1919년 10월 28일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하자마자 비공개적으로 코민테른에 박진순, 레닌정부에 한형권을 파견하여 임시정부를 제쳐놓고 자기그룹이 러시아의 지지와 원조를 확보하도록 진력을 다하였으며 한 편으로 이승만 퇴진 운동과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그의 그룹이 발의한 불신임안이 거부되자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가 김립에게 보낸 편지가 안창호에게 발각되어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자 일시적으로 국무총리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21년 레닌자금이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미련 없이 임시정부를 떠나버렸다.
이후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대립과 파당으로 많은 에너지와 감정을 낭비하며 서로 원수처럼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부끄럽게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이 항복할 때 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국공합작을 이루지 못하였다.6)
그 DNA 유전인자를 전수 받아서 일까? 지금도 우리는 국익과 민족의 안전보다도 자신들의 이념과 권력에 매몰되어 있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대립 속에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목격하고 있다.
셋째, 그가 직접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하여 캐나다장로회가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뉘게 되었다.
그는 1913년 북간도로 망명한 이후, 캐나다장로회 산하의 교회와 지도자들과 함께 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과 무장훈련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8년 4월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후에 많은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그 길로 안내하였다. 특별히 캐나다장로회 지 교회들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간도국민회❯ 지도자들의 공산당 가입으로 말미암아 장로회는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뉘는 내홍을 겪었으며 그 진통 속에서 교회는 안과 밖의 비난과 질타 속에서 보수화의 길을 걸었다. 진보교회와 보수교회의 대립과 갈등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더욱 첨예화되었고 교회는 체제 유지를 위해서 몸을 사리며 보수화와 만주국과의 현실타협 쪽으로 길을 갔다.
이동휘는 한 때는 레닌과 면담하는 등 기염을 토하며 자유시참변의 수많은 희생을 불사하며 국제공산당에게 인정받는 유일한 고려공산당 지도자로서 국제적인 원조를 받아 대 일본 독립전쟁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의 명령으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해산된 후, 고려 공산당의 통합을 위하여 1922년에 설치 된 꼬르뷰로( 고려국) 마저 1924년 2월에 해체되면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당 도서관장으로 배치되는 배신과 모멸을 겪어야 하였다. 그로서 그가 피압박민족의 해방이란 레닌의 기치를 그토록 열렬히 환호하며 <대한국민의회>와 결별하고, 상해 임시정부 민족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캐나다장로회 교회들과 결별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조선독립의 길은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1924년 이후 그는 국제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임명과 지시에 따라 때로는 한직, 때로는 명예직에 앉아서 1935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자택에서 63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 까지 조선인 공산주의자 1호로서 외로운 삶을 묵묵히 감수하였다.
이동휘 넘어서기
1905년을 전후로 하여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이라는 그의 삶의 목적과 의지가 분명하였다. 그의 불같은 웅변과 열정, 불도저 같은 실천력이 그를 같은 독립운동가들 속에서도 탁월하게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소위 말하는 그의 사단이라고 불리는 김립, 박애, 한형권, 박진순, 계봉우, 오영선, 김규면 등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방법론에 매몰된 나머지 자기와 생각이 다른 다양한 독립 운동가들과 협력하거나 연대하지 못하였으며 자기중심의 분열, 파당, 대립을 혁명의 과정으로 인식하였다. 그런 그의 투쟁과 정치 행태는 비록 독립운동을 위한다는 명목이 있었지만 어찌 보면 조선시대 당파 싸움의 행태와 유사하다. 그의 <대한국민의회>와 결별, <임시정부>로부터의 탈퇴는 해방 후에 있을 남북분열과 온갖 대립의 예고편으로 보인다.
독립 운동가를 성역에 모셔놓고 민족의 영웅으로 무조건 미화시키거나 우상화시키는 작업은 역사 발전과 나라의 혁신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재 이동휘의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하면서 그가 독립운동사에 오점으로 남긴 파당과 분열을 성찰하며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명암 앞에서 보다 대국적이고 대동적인 차원에서 화해와 협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2021.2.12.설날
우담초라하니
미주
1) 조사- 전도사
2) 권서인 – 매서인이라고 했으며 성서와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사람으로 선교부 산하에 있는 고용직이었다.
3)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 347쪽, 한국기독교사연구소
4) 원호 – 러시아에 귀화한 조선인들, 그들은 문창범, 최재형 등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독립운
동을 추진하였다.
5) 여호 –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고 거주만하는 망명자들로 대한국민의회 비주류 세력이었다.
6) 장개석이 원조를 약속하며 국공합작을 요구해서 김원봉계열과 김구계열이 합작하였지만
그것은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항일 전쟁을 수행하려는 자발적인 합작이 아니었다.
참고도서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한국기독교사연구소,2017
김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역사공간, 2013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인관한 신뢰의 지도자 여운형⏌, 역사공간, 2018
윌리엄 스코트 저,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로버트 그리어슨 저,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 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반병률, ⎾통합임시정부와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삼각정부의 세 지도자⏌ 신서원, 2019
리광인, ⎾겨레 항일지사들 3⏌ 민족출판사, 2007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부 ⎾개척⏌ 민족출판사, 1998
룡정3.13기년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년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최백순,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 조선 공산당 평전⏌ 서해문집, 2017
박시백, ⎾35년 1921-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비아북,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