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욕, 산바람에 멱 감고
김열규
요즘도 이틀에 한 번씩은 산에 오른다. 하루는 바닷가를 거닐고 또 다른 하루는 산길을 걷는 게 버릇이 되어 있다. 일상으로 산전수전 다 겪는 셈이다.
한데 산에 오른다는 말이 좀 계면쩍어진다. 높이라야 고작 해발 300미터 정도니까, 언덕이라고 부르는 게 더 알맞을 것 같다. 산세도 워낙 다소곳 하다보니 그야말로 비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집을 나서서 어정어정, 반 시간도 못 미쳐서 다다르게 되니 산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바로 그 탓에 우리 집 뒷산은 고분고분하고 안존하다. 정겹다. 산이라기보다 조금 높다란 뒤뜰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뒷동산이다.
“뒷동산 올라가 구름을 타고
삿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달자‘
이 귀여운, 재주 덩어리의 노랫말처럼 구름을 타지도 달을 따지도 못하지만, 뒷동산 오르는 것만으로도 구름 타는 기분에 젖곤 한다. 얕은 오르막을 타고는 산에 다다르자 말자, 별세계에 들게 된다. 언덕바지의 허리에 난 오솔길 위아래를 가르고는 소나무 숲이 자우룩하다.
숲을 헤치다시피 하면서 한참을 비교적 곧게 이어지는 길을 가면 가파르지는 않는 오르막에 다다른다. 커다란 바위가 웅크린 곁에 자리 잡고 앉는다. 풀밭에 다리 뻗고는 반은 눕다시피 해서 한숨 돌린다.
한겨울이 아니면 한참을 쉬다가 웃옷을 벗는다. 워낙 남녘 땅, 따뜻한 곳이라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은 물론이고 이른 겨울에도 예사로 웃통을 벗어젖힌다. 근처에는 누구 하나 얼씬하지 않기에 계면쩍어할 것 없이, 숨을 크게 쉰다. 들이켜진 숲 기운으로 온몸에, 온 살갗에 푸른 기운이 설렌다.
손바닥으로 어깨며 가슴팍을 가볍게 문지르고는 한참을 고추 앉는다. 온몸에서 힘 빼고는 묵상하듯, 참선하듯 한다. 그러고는 몸을 바람에 내맡긴다. 여린 바람은 살갗을 간질이며 스쳐 간다. 조금 드세다 싶은 바람은 살결을 훑다시피 하고는 지나간다. 바람결의 강약이며 지속과 장단 맞추어서 피부가 설렌다.
이것을 일러서 풍욕(風浴)이라고 하면 어떨까싶다. 바람 멱 감기라고 풀어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왕 내친김에 ‘바람 샤워’ 아니면 ‘윈드 샤워’라고 부르면서 우쭐 대어도 괜찮을 것 같다.
더러는 바람에 냉기가 심해서 살갗에 소름이 돋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상쾌한 쾌감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렇게 나의 숲속의 풍욕은 한참을 계속된다. 바람의 촉감에 취해서는 눈 감고 묵상에 잠기면 나도 어느 새엔가 바람이 되어 있다. -2013. 8월호 한국수필(통권제222호)
김열규(金烈圭, 1932년~2013년 10월 22일)
1932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민속학을 전공했다. 1963년 김정반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1962년-1991년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하버드-옌칭 연구소 객원교수.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석좌교수. 인제대학교 교수. 《아흔 즈음에》. 휴머니스트. 2014년. 《한국인 한국문화(상징으로 말하는)》. 일조각. 2013년. 《한국신화 그 매혹의 스토리텔링》. 한울. 2013년. 《이젠 없는 것들 1,2》. 문학과지성사. 2013년. 《한국인의 에로스》. 궁리. 2011년. 《도깨비본색 뿔난한국인》. 사계절. 2010년. 《한국인의 돈》. 이숲. 2009년. 《기호로 읽는 한국 문화》. 서강대학교출판부. 2008년. 《한국인의 자서전》. 웅진지식하우스. 2006년. 《한국인의 신화》. 일조각. 2005년. 《한국인의 화》. 휴머니스트. 2004년. 《동북아시아 샤머니즘과 신화론》. 아카넷. 2003년. 《한국의 전설》. 한국학술정보. 2003년. 《한국인의 유머》. 한국학술정보. 2003년. 《우리 민속문학의 이해》. 한국학술정보. 2003년.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사계절. 2003년. 《한국인의 죽음과 삶》. 철학과현실사. 2001년. 《한국의 문화코드 열다섯가지》. 도서출판 마루. 1997년. 《한국문학사의 현실과 이상》. 새문사. 1996년. 《한국여성 그들은 누구인가》. 자유문학사. 1990년. 《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 자유문학사. 1988년. 《한국인 그마음의 근원을 찾는다》. 문학사상사. 1987년. 《한용운연구》. 새문사. 1987년. 《한국문학사》. 탐구당. 1983년. 《문화의 자장》. 평민사. 19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