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1)) † 여섯 번째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대환란 전의 휴거와 하나님 성전의 기둥(3:7-13)
빌라델비아 교회는 헬라어로 형제 사랑을 뜻한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교회의 표준으로서 형제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합당한 교회 생활을 예시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합당하고 모범적이며 이상적인 교회로서 모든 교회가 지향해야할 성경적인 교회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세계 각지에서 가장 성경적인 교회라고 주장하는 여러 교회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나 자부심과는 별개로 세월이 가면서 그들도 결국 변절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쩌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표준적인 기준으로서의 교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속한 교회만이 성경적이고 개혁적인 빌라델비아 교회라고 주장해온 교회일수록 그 나머지 교회로부터 그 교리나 성경 해석상 이단이라고 지목된 교회가 많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이의 탈피를 위해 더욱 경쟁화하고 더욱 결속하여 자기들만의 왕국으로 성장한 경향도 아울러 주목할 수 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마치 사데 교회로 예시된 개혁 교회, 곧 개신교회가 두아디라 교회로 예시된 변절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반응이었듯이, 형제 사랑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죽은 개신교회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므로 이 반응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변절한 로마가톨릭교회와 타락한 개신교회 모두에 대한 반 증언(anti-testimony)으로 계속 남을 것이다.
결국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취는 우리가 감히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극단적인 교회 하락의 시대에 독단적으로 스스로 자기 교회를 빌라델비아 교회라고 여기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한 것은 역시 이러한 일들을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하는 그분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역사 가운데 사데 교회, 곧 개신교회 이후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이 한 단계 높은 교회가 성경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 교회의 위치에 이르도록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데 교회, 곧 개신교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로 떨어진다. 다만 몇 마디 말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 초엽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계 여러 곳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이름을 충성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의미 있는 믿음의 활동을 전개시키며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빌라델비아 교회도 결국은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로 추락한다는 것이다.
계시록 3장 7절은 “필라델피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한다.
빌라델비아 교회 역사는 가장 흥미 있으며, 믿는 이들에게 교회의 기준이 되는 방향을 제시하므로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교회에 대하여는 주님께서 칭찬만 하셨지, 책망의 말씀이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비록 교회 역사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표준적인 교회 상황이, 비록 짧은 단기간에는 가끔 나타나 주목을 끌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 교회는 존재했던 적이 없었지만, 그러나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이런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난의 환경이 그들을 방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촉진 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소수의 그들이 빌라델비아 믿는 이가 되는 조건이었다. 만일 우리에게 빌라델비아 성도의 영이 있다면, 우리가 교회 안에 있든지 세상에 있든지 상관없이, 모든 고난이나 죄악들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더욱 빌라델비아 믿는 이가 되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질을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데 교회(개신교)로 대표된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사데 교회는 의심할 바 없이 종교개혁 후의 수많은 국립교회와 수없이 많은 교단으로 분열된 사립교회를 가리킨다. 그 안에서 성령은 종교개혁 시에 나타났던 능력을 이미 잃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다 기독교화 되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계3:1)였다.
비록 사정은 이러했지만, 그들 가운데에는 살아있고 충성스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 자기의 의복을 더럽힌 적이 없는, 바로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데 교회(개신교) 가운데 있었지만 사데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실 사데는 바로 세상이며, ‘기독교화’된 세상으로서, 다만 소수의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가운데 흩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는 원칙상 이것과 완전히 상반된다. 형제 사랑(빌라델비아의 어원상 의미)의 원칙은 바로 생명의 결합이다. 이것은 진실한 교회를 회복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비록 진실한 교회는 사데 교회의 분란 중에 잃어버린 바 되었지만, 성령은 도리어 그리스도의 몸을 연합하는데 있어서 일체의 명칭 외에 형제 사랑을 그 근거로 삼는다.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접근해보자! 사데, 곧 개신교는 이미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의 권세와 교회의 권위, 동정녀와 여러 성인들과 천사 숭배 사상, 미사, 연옥과 같은 이단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며 자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바로 중요한 진리인가? 외면적으로는 가장 정통파 개신교도가 될 수 있겠지만, 내면적으로는 조금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광을 돌보지 않고, 숱한 이단 논쟁과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사실 나는 이 서신에서 많은 위로와 소망과 격려를 받아왔다. 왜냐하면 이 서신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땅 위에서의 권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서신은 오늘날 믿는 이들에게, 세상에서의 교회 역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의 눈이 주의하시고 감찰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해준다. 곧 세속화되고 하락한 로마가톨릭교회과 개신교를 뛰어넘어 주님의 갈망이 신실하게 스며있는, 우리 믿는 이가 지향해야 하는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인 것이다.
두아디라(천주교) 안에서는 남은 자가 있었지만, 사데(개신교) 안에서는 몇 명의 충성된 사람이 있었고, 앞으로 볼 것이지만,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안에서의 소수 사람만은 기꺼이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주님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작은 무리지만 전체가 완전히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고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는 작은 무리를 얻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두아디라와 사데가 극히 교회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의 조직이 있고 질서가 있는 단체로 나타났다. 특히 두아디라(천주교)의 조직은 놀랍게도 완전한 독립된 국가이며 세계적이다. 그러나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는 도덕적인 상황에서 그들의 조직보다 뛰어났다. 빌라델비아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결코 주님이 누구인가 또는 주님이 무엇을 가지셨는가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 무엇인가이다.
사데(개신교)는 신조를 지나치게 중시했지만, 빌라델비아가 사모한 것은 그들이 믿는 주님이었다. 요한이 말한 것은 “나는 나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믿는 이가 누구인지 안다”였는데, 이것은 믿음과 사랑의 근원이다. 실로 이 서신에서 주 예수님의 신분은 다른 서신보다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분은 다른 것을 말씀하시기 전에 “거룩하고 진실하시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서신에서 주님은 결코 이렇게 그분 자신을 표명하시지 않으셨다. 전에는 그분 자신이 심판의 성질을 각 교회에게 계시해 보여 주셨는데, 빌라델비아에게는 결코 그러하지 않으셨다. 오직 거룩함과 진실함만이 주님의 마음과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스스로를 “거룩하고 진실하신”이라고 표명하셨다.
그분은 본래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셔서(고후5:21)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셨으며, 부활하셔서 그 거룩하신 분으로 칭함을 받으신다(행13:34). 그분은 언제나 죄가 없으시다. 다만 그분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사람을 위해 죄를 없이 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죄인의 위치에 서셨을 때 하나님은 그분을 버리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이제 죄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 이상 심판의 역사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 안에서 이미 심판을 받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육체를 위한 여지를 남겨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위반한 것이다.
믿는 이들 가운데 진실하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모든 갈망은 다 성령의 사역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그 진실하신 분”이시다. 오늘날 교회는 이미 진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금촛대의 증언의 본뜻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빛이시며, 참 떡이시며, 참 포도나무이시며, 참된 증인이시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복을 주셨다. 믿는 이는 그리스도 이외에 무엇을 추가적으로 더 얻을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공의가 되시며, 거룩과 구속이 되신다(고후1:30).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실재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생명은 다만 그분 안에서 이미 진실한 것이 된 모든 것을 체험하면 되는 것이다.
믿는 이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이에게 존중을 받을 때,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분의 명령이 우리의 목표가 된다면, 그분 자신이 우리의 사랑을 주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 곧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이로부터 우리에게 친근하고 사랑스럽고 생명과 생명의 공급인 유일한 “기록된 그리스도” 곧 성경이 주어진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구원을 받기 위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 기록된 말씀(성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알게 된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 하는 성령을 체험한 후에는, 우리의 마음은 이 “거룩하고 진실하신”분에게 더 긴밀하고 직접적으로 연합된다.
이러한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사랑으로 얻게 하며, 이제 이 기록된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게 할 것이다.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가져야만 우리가 미혹을 받지 않고 보존될 수 있다. 바로 그분 안에 진리가 있는, 곧 실재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영성의 가장 좋은 보호자이시다.
실재(實在)이신 그리스도만이 왜곡되고 생기 없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미혹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이시다. 교회가 그의 순수한 길을 분별할 수 없을 때나, 교회 도처의 모든 것들이 혼란되어 있을 때, 오직 한 분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더 좋은 지식은 없다. 이것이 바로 요한 서신의 요점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