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 석방을 축하하러 통일의 집을 방문한 박형규 목사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6월 8일 박형규 목사(이하 박 목사)에게 쓴 편지에서 늦봄은, 장준하, 박형규, 백기완, 이 세 사람이 김구 선생을 이어 통일운동의 총대를 맨 다음 세대이며, 장준하가 떠난 자리에 자신이 들어서서 삼총사를 형성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나이는 다섯 살 아래지만 운동가로서는 박 목사를 대선배로 인정하는 존경의 뜻도 담겨 있었다.
늦봄과 박 목사의 첫 만남은 사실 매우 오래전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 늦봄이 유엔군속으로서 한국과 일본에 오가던 어느 날 부산에 도착하여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는 중, 똑같이 유엔군속으로서 한국에 온 그와 인사를 나눈 것이 처음이었다. 그와는 같은 신학의 길을 걷는 입장이어서 처음부터 친근한 동료이며 동생처럼 의식하고 지냈다고 볼 수 있다.
재야의 선봉장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박 목사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자, 늦봄은 그를 생각하며 네 편의 시를 썼다. 늦봄은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그가 부러워서 시를 썼다며, 그때는 같이 감옥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꽤 부끄러웠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당시 성서번역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시대의 뜨거운 바람이 늦봄 자신을 가만 앉아 있을 수 없게 들쑤셨다는 사실이 시의 창작에서도 드러난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늦봄은 76년 3.1민주구국선언 서명자에서 박 목사를 일부러 제외했다. 3월 2일 찾아가서 성명서를 한 장 전달했을 뿐이었다. 여러 차례 징역살이하는 대선배를 배려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 그때도 그가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랬을 것으로 늦봄은 기억했다. 박 목사는 자신의 이름이 제외된 것을 매우 섭섭하게 여겼다고 한다. 어쨌든 늦봄은 그를 ‘우리의 소중한 동지요 선두 주자’로 좋아했다. 그의 낙천적인 성품도 또한 좋아했다.
“껄껄껄…하하하” 언제 들어도 시원한 박형규, 조정하 내외의 웃음소리.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 낙천적인 성품. 아무래도 우리보다 한 수 위가 아니겠나 싶군요. 정말 잘 만난 짝이죠” (옥중편지 1993.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