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외로움 / 오 늑
“자기야 혹시 2번 출구 앞으로 와줄 수 있어?” 6년간의 연애 동안 손에 꼽는 부탁이었다. 그 날 나는 모임 끝나고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마지막 계단을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뎠다. 크게 헛디딘게 아니라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욱신거릴 뿐이었고 뒤따라오던 모임원들의 걱정을 빨리 덜어주고 싶었다. 합정역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발이 아파왔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도 계속 발이 욱씬거려 내려다 보니 발이 한껏 부어 있었다. 배우자를 만나자 마자 택시 타고 응급실에 갔다. “발등 뼈가 부서졌네요. 인대도 좀 늘어난 것 같고요. x ray 로는 다 나오지 않아요. 월요일에 정형외과 가셔서 정밀 검사는 받아보셔야되는데 일단 반깁스 해드릴께요.” 응급실 의사는 랩 하듯이 진단을 내리더니 휙 가버렸다. 나는 목발 집고 반깁스 한 채 집에 돌아왔다. 2주. 길게는 3주까지 반깁스를 해야 했다. 발등뼈는 깁스하기 도 애매해서 반깁스 하며 상태를 계속 지켜봐야 했다.
정형외과에서는 3일에 한번 상태 체크하러 오라고 했다. 3일에 한번? 그저 한번 가는 것도 어려웠다. 당시 나는 용산구 언덕에 월세 방에서 살고 있었다. 처음에 집 계약 할 때는 그저 전기자전거 타고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에 3층 집이었다. 엘리베이터 없으면 운동도 되고 좋지, 생각했는데 반깁스를 하고 나니 계단이고 언덕이고 다 불가능해 보였다. 설거지 거리 쌓이는 게 보기 싫어 하루에 두 번 하던 설거지도 일주일 째 쌓여갔고 고양이 털 덕에 하루만에 수북히 쌓이는 먼지를 그저 침대에서 쓸쓸히 지켜봐야 했다. 처음에는 빨리 낫겠다는 다짐 하에 병원을 자주 가겠노라 생 각했다. 겨우 계단 밑에 도달하니 병원까지 뭘 타고 가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버스 계단도 너무 막막했고 택시는 혼자 타기 무서웠다. 마침 도와주겠다며 동생이 차를 몰고 와준 덕에 10분 거리 병원을 갔다. 주차장에서 병원 입구까지 끝도 없는 계단 지옥에다 미로였다. 우리는 한참을 헤맸다. 엘리베이터는 숨어있었고 별 다른 안내가 없었다. 병원을 갔다가 집에 와서 뻗었다. 병원 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발이 더 아파오는 것 같았다.
계획했던 모임도 다 취소했다. 5년 전쯤 은유샘의 해방촌 모임에서 가비라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거동을 도와주시는 분과 항상 함께 다녔다. 그 이후로 글쓰기 모임을 많이 했지만 비슷한 분을 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궁금했었는데 나는 한낱 깁스에 이유를 깨달았다. 페미니스트 작가 정희진 책에서 장애인에게 “어유 제 강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물어봤다가 상대가 매우 불쾌 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비장애인 입장에서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차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분명히 비장애인들이 고민 해 봐야할 문제였다. 모임을 취소하기 전에 나는 모임 장소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 없는지에 대해 조사했다. 있어야 갈 수 있으니까. 검색에는 영업시간과 위치, 블로그 후기 등은 많았지만 엘리베이터 여부, 장애인 화장실 여부 같은 건 없었다. 나도 이렇게 되기 전까지 궁금해하지 않았기에 할 말은 없었지만 씁쓸했다. 전화로 물어 보니 다 왜 물어보냐는 눈치였다. 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임 주최자에게 연락해 사정이 이러 한데 혹시 모임 장소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냐 했더니 다 없다고 했다. 장애인은 모임에 관심이 없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알게 모르게 많이 박탈당하고 있었다.
반깁스는 한달만에 풀었지만 완전히 발에 힘이 들어가기까지 6개월 정도 걸렸다. 못 참고 다시 자전거를 탄다던지 운동을 다시 시작한 탓도 있었다. 반깁스 없던 습관들로 다시 돌아가야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 상에 얼마나 힘과 도움이 들어가는지 처음 깨달았다. 나는 일시적인 장애를 겪으며 나와 장애인의 일상이 얼마나 분리될 수 있는지 느꼈다. 지하철 1호선 주안역에 엘리베이터가 생긴 이유가 떠올랐다. 어떤 장애인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달라는 민원을 여러 차례 넣었는데 반영이 되지 않자 휠체어 타고 주안역 2층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우리가 누리는 일상을 그들은 투쟁해야 얻을 수 있는 게 슬펐다. 기본적인 인권인데도 말이다. 유럽은 모든 시설이 장애인에게 맞춰져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할 때 모든 사람에게 편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아직 미흡한 게 많다. 하반신마비 유튜버 위라클만 봐도 그렇다. 턱 때문에 흔한 편의점 하나 들어가기 힘들다. 장애인들이 죄지은 것도 아닌데 다 숨어 산다. 시설을 떠나 알게 모르게 비장애인의 시선도 무시 못한다. 동정의 눈빛, 안타까운 시선도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 한 개인으로써 그 부분부터 신경 써보기로 했다. 막막하지만 당장 큰 것부터 바꿀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봐야겠다.
첫댓글 비장애인으로 반성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서울 내 지하철 엘레베이터 설치 대부분이 장애인 당사자와 연대자가 운동해 얻어낸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장애인을 위해 한 일 없이 혜택만 보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오늑님의 글에 다시 반성하고 깨달아요.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대화, 이야기, 공간을 같이 찾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최근에 발목을 삐면서 걷는 것의 불편함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대책없는 상태인지 조금이나마 경험하게 되었어요. 같은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건 참으로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구요. 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시각장애인이 대중교통 중 버스를 탈 때 가장 어려운 건 버스가 언제 오고 정류장 어디에서 멈춰있는지 아는 거라는 걸 보면서, 머리를 띵 맞은 듯 했어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서요.. 늦게나마 이렇게 배우고 고민하고 무얼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 고맙습니다:D
예전에 독서모임에 중증 지체 장애인 분이 참여하셨어요. 1년 정도 같이 하는 동안 정말 많은 걸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모임을 카페에서 하던 때인데, 전동휠체어가 못 들어가는 곳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거든요. 그분과 같이 걸으면서 인도가 끊어지는 곳도 엄청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분도 저희랑 모임했던 때가 정말 행복했다 하셨다더라고요. 모임에서 조금만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데... 저부터 더 섬세해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 더는 휠체어를 타고 모임에 오시는 분이 없어서 경사로를 치워버렸는데 반성이 되네요.
저도 같이 경험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참 어려운 나라란 사실,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알던 건 빙산의 일각이었네요. 모르고 지낸 게 많아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마지막 문단 사례는 너무 슬픈 이야기네요. 약자에게 씌어진 멍에가 너무 무거운 것 같아요.
“왜 그럴까 궁금했었는데 나는 한낱 깁스에 이유를 깨달았다.” 완전 공감해요. 저도 한 번 발목 삐끗했던 적이 있는데 진짜 턱은 어쩜 그리 많으며 엘리베이터는 왜 그렇게 외진 데에 있는지(있기나 하다면요)...“장애인들이 죄지은 것도 아닌데 다 숨어 산다” 부분도요. 저도 독일에서 워홀 끝내고 돌아왔더니 한국은 길에 휠체어도 거의 안 보이고 안내견도 없고 지팡이도...겪어보지 않으면 쉽게 잊고 사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