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티코스]의 가르침3 - 악령들
3. 악령들
우리는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로기스모이’와 악령들 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았다. 이 두 말마디는 자주 동등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악령들은 그들 고유의 실재와 인격을 지닌 구분되는 존재들이다. 악령론은「프락티코스」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프락티케’는 주로 ‘생각들’을 거스른 싸움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생각들’은 단지 수도승들을 거슬러 싸우기 위해 악령들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사실 실제의 적은 악령들이다. 금욕생활은 본질적으로 악령들과의 싸움이다. 이 점에서 에바그리우스는 고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다음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싸울 상대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권력과 권세의 악신들,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에페 6,12).
이 전통적인 개념은 사막 수도승 영성 안에 하나의 새로운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즉 사막은 특별히 악령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거기로 물러나는 수도승은 악령들과 직접 맞닥뜨려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안또니우스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로서「프락티코스」5장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사막에서의 금욕적인 투쟁은 무엇보다도 악령들을 거스른 싸움이며, 따라서 수도승은 악령들을 거슬러 싸우는 사람이다. 수도승이 ‘프락티케’의 끝에 이를 때, 그에게 승리가 주어진다.
이 전투에서 악령들이 선호하는 전술은 속임수이다. 그들은 급습하기 위하여 자주 패배하여 퇴각한 것처럼 가장한다. 악령들은 수도승들과의 싸움에서 보통 영혼의 상태를 살피곤 한다. 실제로 그들은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볼 수는 없다. 하느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실뿐이다. 악령들은 외적인 표지들을 관찰하는 일 외에 영혼의 움직임들을 알 수는 없다.
수도승들 역시 관찰을 통해서 악령들과 그들의 술책을 아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이 관찰은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는 악령들 자체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생각들에 대한 관찰이다. 관찰에 토대를 둔 이러한 경험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수도승은 ‘프락티케’ 안에서 진보하면서 ‘로고이’(logoi, 이유들)에 대한 관상에 바탕을 둔 참된 학문인 보다 높은 인식에로 들어 높여지게 된다.
「프락티코스」에서 이 싸움이 묘사될 때, 악령들은 특별히 ‘프락티케’에 반대하는 자들로 나타난다. ‘아파테이아’를 획득한 수도승이 영적 인식을 얻게 될 때, 그는 무엇보다도 그의 정신을 잃게 하고 관상을 방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다른 악령들의 표적의 대상이 된다. ‘프락티케’에 반대되는 악령들의 모든 활동은 수도승으로 하여금 ‘프락티케’의 끝인 ‘아파테이아’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영혼 안에 욕정들이 거주하는 부분을 공격하고, 생각들을 통하여 욕정들을 자극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욕정들과 생각들과 악령들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한다. 즉, 악령들은 생각들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생각들이 오래 머물 때, 우리 안에 욕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악령들이다. 욕정들을 일으키는 이런 구조에 대항하기 위하여 생각들이 우리 안에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수도승은 생각들에 대한 깨어 있음과 유혹을 받는 즉시 그것을 몰아내려는 열성을 통해서 그를 거스른 악령들의 행위를 무력화시키며, 더 이상 어떠한 욕정도 작용하지 못하는 영혼의 상태인 ‘아파테이아’에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