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퇴계 선생 일대기
저-권오봉
출-교육과학사
독정-2023.4.1.
◉인연
1535년 6월, 35세 때 퇴계는 관리가 되어 돌래로 출장을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묻다가 고을 부사 이순과 훈도 이여를 만나 하룻밤을 지내면서 <황극내편>의 <관물내편>과 갈흥이 지은 <주역참동계> 심신 수련법을 논하였다. 훗날 유학자로서 수련법을 활용하고 정좌. 정와를 한 것은 이때 두 사람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 퇴게와 이이 율국의 만남
51세에 초당 골에 계상서당 단칸 서당을 지어 제자를 가르쳤다. 7년 후 58세 때 23세 이이 율곡이 찾아와 입문한 곳이다. 계당 건축공사 중 퇴계가 고산재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스님이마루 한 칸을 더 달아 퇴계는 서당이 너무 크고 화려하다고 늘 부끄러워하였다.
◉ 퇴계는 지식 자체에 공부의 목적을 두지 않고 생활과 실천에 목적을 두었다. 공부하는데 가장 요긴한 것은 부지럼항이다고 했다. 퇴계는 주자학에 뜻을 둔 뒤 20년간 탐구하여 43~ 56세에 주자 저서를 수입 해설. 왕명에 따라 서관에서 인쇄한 <주자대전>과 중국판 <대전서>를 비교 개정하였다. 56세에는 <주자서절요> 편찬. 57세에는 주자가 지은 <계몽전의>의 잘못을 고치로 쉽게 풀이했다. 58세 <주자서절요> 와ᅟᅡᆫ성, <자성록><고경중마방> 편찬. 59세 <백록동 학규>를 집해 60세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론> 지도
63세 <송계원명 이학통록> 완성
퇴계는 주자를 공자 다음 성현인 아성으로 존승한다고 <주자서절요> 서문에 밝히고 자자의 <이락연원록>에 견줄 수 있는 <성현도학연원>을 지어 주자를 도학의 연원으로 삼았다.
◉<爲己 之學이야지 위인 지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퇴계 학문은 정독이다. 정독이 궁리하는 독서법이라며 성성리서를 읽지 않은 책이 얿승ㄹ 만큼 읽었고 강론할 때 슬슬 외어가며 적절하게 인용하였다. 퇴계 자신의 저작이 세상에 나가 전파되는 것을 원치 않고 흘러나가면 다시 찾아 들이는데 힘썼다. <도산기>를 지어 감춰두었다가 제자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지자 두고두고 후회했다. <주자서절요>도 보이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금계 황준량이 억지로 가져가 인쇄. 반포하자 불쾌하게 여겼다. 퇴계가 규정한 위기지학 개념은 우리 인간으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지.덕,행을 실천 구행하는 것이다. 이는 군자가 되는 학문이라 깊은 산골 풀섶에 있는 난초와 같아 알리지 않더라도 종일 향내가 나서 저절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자기를 알리는 데 힘쓰고 명예를 추구하는 위인지학을 경계했다.
◉ 주고받는 것의 구분
나이 많은 연장자가 권하는 것은 사양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를 위하는 일이라도 불의가 있으면 받을 수 없다.
남의 물건을 받을 때는 의, 불의를 꼭 알아보고 박절하지 않게 해야 한다. 받은 것의 답례로 갑지 못할 것은 받아서는 안 된다. 무엇을 들고 온 사람에게 갈 때는 꼭 손에 물건을 들려 보내고 식품이나 예물을 담아온 그릇은 빈 채고 돌려보내지 않는 우리 전통 뿌리를 퇴계에게서 찾을 수 있다. 퇴계는 생후 7개월 만에 부친이 돌아가셨고, 37세에 모친을 여의어서 효성으로 봉양하지 못했다. 1526년 온계가 성균관에 유학하자 퇴계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넷째 형 댁이 들어가 5년 지냈다. 여기서 허씨 부인이 죽고 둘째 아들 채가 태어났다. 그 시대는 전염병이 번지면 산으로 피신했다. 절에서 공부 하다가도 전영명 소식을 들으면 병이 없어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티계는 어떤 예절이나 체면보다 건강을 중시했다. 아들 준이 계모의 시묘를 하다가 병을 앓았다. 즉시 시묘를 중지시키고 약을 쓰며 육식을 하도록 했다. 조카 원암 교가 시묘 중 명이 나서 걷지 못할 지경이라 하자 편지를 본애서 신묘를 중지시켰다.
퇴계가 소유한 재산이 얼마였든 궁핍한 생활을 해서 명종 때 46명 청백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올랐다. 맏아들은 처가살이 시켰고, 둘째아들은 작은 외할아버지 댁에 농사를 지으러 보냈다. 퇴계는 토지 사들이고 물건 사포 팔고 하사품 처리하는 모든 일에 이익을 버리고 의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퇴계제사법: 사람의 집에는 고기, 어물, 과일, 포ㅡ 식혜, 육장 등
때에 따라 다소, 가지 수 들이 다른데 어떻게 일정한 수아 양을 갖출 수 있으며 항상 같게 차릴 수 있겠느냐며 다 차라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퇴계 종가ᅟᅳᆫㄴ 지금오 이 가르침을 지켜 제철에 나는 과일. 사과로 제사를 지내고 호화롭게 차리지 않는다. 조상을 존경하기 때문에 종손을 공경한다는 보종을 실천하였다.
퇴계가 79회의 사퇴를 신청해도 실무 최고직과 경연의 모든 직책을 고루 거쳤으며 강의도 맡았다. 퇴계는 왕가에 근심거리가 생겼을 때나 외국 손님을 맞을 때도 사임을 피했다. 국상 중에는 혼인과 기타 행사를 줄이고 검소하게 치루었다. 시속 풍습마저도 금하거나 중지하는 게 많았다. 국가가 비상시를 위해 항상 절약할 것과 흉년 대비 3년 먹을 곡식 비축을 건의했다. 퇴계자신을 오불의를 어기면서 까지 조정에 남을 수 없다고 진언했다.
첫째: 어리석음을 감추고 자리를 차지해도 좋습니까?
둘쩨, 아파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봉록반 받아도 됩니까?
셋째, 실력은 없으면서 이름이 알려져 세상 사람이 속고 지내도 좋습니까?
넷째,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모험을 해도 좋습니까?
그가 말한 학설은 본원을 가르쳐 주고 간절히 수용하길 바란다. 모든 것을 물어서 바르게 고치고 모든 것을 신변의 일이라고 생각함을 몸소 다 실천한 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