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강설
21.그침이 움직이면 움직임이 없다
泯其所以하야 그 까닭이 없어져서
민기소이
不可方比라 견주어 비할 데가 없느니라
불가방비
진리의 본질은 인간의 의사표시에 의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도가 왜 있는가? 할 때 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도상(修道上에) 있어서도 도를 닦으면 왜 깨달아지는가? 할 때도 그 이유는 없다.
으례이 그렇게 되는 것이요 본래가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깨달음의 세계를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라 한다.
이는 말로서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리자체인 도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고 사유심(思惟心)으로써 상상할 수가 없다.
<원각경>에 “사유심으로써 여래의 원각경계를 헤아리는 것은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다.” 하였다.
묘법(妙法)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이런가 하면 이렇지 않고 저런가 하면 저렇지 않다.
이렇고 저렇지 않으면서 이러하고 저러하다.
止動無動이요 그침이 움직임은 움직임이 없고
지동무동
動止無止니라. 움직임이 그침은 그침이 없느니라.
동지무지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적 개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동정(動靜)의 개념이다.
그침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침이 움직임을 덮어서 움직임이 그침 속으로 들어갔으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움직임이 그침을 덮어 그침이 움직임 속으로 들어갔으므로 그침이 없다.
이것은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융통자재하고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곧 중도의 이치를 밝히면서 동중정(動中靜)과 정중동(靜中動)이 함께 통하고 함께 자취가 없는 묘(妙)를 나타내었다.
다시 말하면 동정(動靜)이 근원이 한가지이며 근본에서 보면 모두가 공했다는 말이다.
兩旣不成이라 둘이 이미 성립되지 않으니
양기불성
一何有爾아. 하나인들 어찌 있겠는가.
일하유이
움직임과 그침이 상대적인 것이다.
때문에 움직임이 없으면 그침도 없고 그침이 없으면 움직임도 없게 된다.
둘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하나는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양견(兩見)의 상대적 입장이란 대개 긍정하는 논리와 부정하는 논리로서 서술된다.
이를 표전(表詮)과 차전(遮詮)이라 한다.
소금이 짜다는 말은 표전이지만 소금은 싱겁지 않다고 부정하여 말하는 것은 차전이다.
한 가지로 같은 것을 두고 긍정으로 말하고 부정으로 말하는 논리의 차이는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같은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모든 대립적 개념인 유(有)․무(無)와 선(善)․악(惡)과 시(是)․비(非) 등이 근원적 본체에서 보면 모두가 하나며 이 하나도 실체는 없다고 한다.
하나다 둘이다 하는 것은 모두 객관을 설명하는 말이며, 객관을 설명한다는 것은 곧 분별이다.
- 지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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