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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27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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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육체를 위한 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위한 스트레칭도 가끔씩 해줘야겠습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담당하던 업무가 하루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도면을 보거나 그리던 일이었습니다. 그탓인지 구부정한 자세가 습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이 틈만 나면 제게 그랬습니다.
“허리를 좀 쭉 펴세요! 고개도 꼿꼿이 쳐들고!”
요즘 와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허리를 쭉 펴는 것, 고개를 위로 쳐드는 것이 육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에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허리는 육체의 중심이요 삶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허리를 쭉 펴줘야 신진대사도 원활해지고, 마음 자세도 당당해집니다. 고개를 위로 자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 역시, 육체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당신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21장 28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하란 말씀입니다. 그날이 다가오면 육체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라는 당부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하루 온종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엉뚱한 것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티비 화면이나 컴퓨터 모니터에, 단 한치 눈앞의 이익이나 재미에 온 신경이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끔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스트레칭을 해줘야겠습니다. 육체를 위한 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위한 스트레칭도 가끔씩 해줘야겠습니다.
주일미사만으로는 부족한 듯 합니다. 가끔씩 평일 미사에도 참석해줘야겠습니다.
가끔씩 하루 피정도 가줘야겠습니다. 가끔씩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영성서적을 손에 들어야겠습니다. 가끔씩 봉사 활동도 나가줘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의 키가 쑥쑥 자라나고, 주님 오시는 날에 합당한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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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시련 때 어디를 바라보느냐가 나의 존재를 확증한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에서 한 거인이 탄생하였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간디의 별칭입니다.
간디는 인도에서 변호사로 크게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위대한 영혼으로 칭송받게 된 계기는 남아프리카에서 겪게 된 한 사건 때문입니다.
간디는 회사에서 끊어 준 일등실의 차표를 가지고 기차에 탔습니다. 그런데 어느 승객이 간디를 보고는 역무원을 불렀습니다.
역무원은 간디를 보자 짐칸으로 가라고 내쫓았습니다. 일등실의 차표를 보여주었지만 역무원은 코웃음을 치며 일등실에는 백인 외에는 탈 수 없다며 잘라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일등실 차표가 있는데 왜 짐칸에 타야 합니까?”
역무원은 간디의 항의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간디를 열차 밖 정거장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날은 몹시도 추운 날이었습니다. 간디는 대합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권리를 주장하며 싸워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인도로 돌아가야 하나?"
깊은 고민 끝에 간디는 결심을 합니다.
"그렇다. 이 문제는 나 개인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인종차별이다!"
다음 날, 간디는 다시 열차에 탔습니다. 그러고는 일등실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나가지 않고 버텼습니다.
차장이 주먹으로 간디를 마구 때렸습니다. 하지만 간디는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수모와 아픔을 꾹 참고 목적지까지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마찬가지로 비폭력주의로 부당함에 맞서 인도가 독립을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시련이 닥칠 때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련에 굴복하여 두려움 속에서 살고 어떤 사람들은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각자에게 닥치는 시련은 그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판별하는 척도가 되어줍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세상에 오실 때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구원될 백성과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질 사람들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굳이 심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전 인류에게 무서운 시련이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러 오실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큰 재난이 닥쳐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머리를 들고 하늘의 표징을 보는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땅을 보며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심판 때문에 두려워 까무러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들과 땅을 보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는 하느님의 표징이 나타나고 땅에는 두려움뿐일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종말에만 일어난다면 복음말씀이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 각자에게 다 적용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와 같은 시련을 각자가 겪고 있다고 보아야합니다.
살다보면 힘든 일이 어차피 닥치게 되어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삶을 대하는 두 상반된 자세가 결국 지금도 우리를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8년 10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측은 방송 말미 심현희 씨의 사망 소식을 전했습니다. 심현희 씨는 수술 후 재활치료를 받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머리에 부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두 살 때 녹내장을 앓던 심씨는 13세에 시력을 잃고, 피부와 중추신경계 이상으로 나타나는 신경섬유종으로 인해 눈코입의 형태를 거의 잃은 모습으로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무너져 내린 얼굴로 살아갔던 故 심현희씨가 남긴 메시지는 “절대 긍정, 절대 감사”였습니다. 방송이 나가고 후원이 빗발치자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방송 이후에 사랑의 손길로 저에게 작은 정성과 마음을 모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을 향한 넓은 시야로 씩씩하게 살겠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평생 그 고마운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살겠습니다.”
시련이 심현희씨가 하늘에 합당한 사람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심현희씨는 긍정적일 것이 하나도 없고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어보여도 절대 땅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긍정하고 감사했습니다.
이 짧은 모범적인 삶이 우리가 시련 속에서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심판받는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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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1,20-28: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창조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땅의 주민들이 견디기 힘든 공포에 휩싸일 때부터 무서운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것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임신한 여인들이 불행한 것은 몸이 무거워 위험을 피해 달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4절)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도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포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에 의해 성령의 쌍날칼(히브 4,12) 아래 놓일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자기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 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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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날에 오실 사람의 아들, 곧 당신의 재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예언서와 에제키엘 예언서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재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즐기시는데, 이번에는 당신의 재림에 관하여 언급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여러 징표들도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적군에게 포위된 뒤 황폐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 큰 재난이, 하느님의 진노가 닥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에제키엘이 이미 기원전 6세기에 경험한 바빌론 유배 사건과 비슷한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이미지를 통하여 종말을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마는 그러한 심판의 날이 아닙니다. 그날은 하느님을 멀리하는 이들에게는 심판과 파멸의 날이지만, 주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속량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다리우스 임금은, 바빌론을 멸망시킨 인물로, 이스라엘에 구원의 날을 가져다준 페르시아 임금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다리우스 임금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기에, 그가 이방인임에도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라고 여겼습니다.(이사 45,1 참조) 그러나 그를 통하여 주어진 구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참된 메시아, 구원의 날을 가져다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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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지막 날의 재난과 심판>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0-24)
예수님의 말씀을 ‘예루살렘’이라는 한 도시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예루살렘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아서 ‘마지막 날의 재난’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이미 멸망했고, 그 일은 이천여 년이나 지난 옛날의 일입니다. 그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고, 큰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인류 전체에게 ‘마지막 날의 재난’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마지막 날의 재난은 사실상 ‘최후의 심판’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재난이 닥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것이 마지막 날의 재난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산으로 달아나라.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휩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죄를 짓는 것이 문제입니다. 직접 죄를 짓지 않더라도 죄에 물들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징벌의 날’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직접 징벌을 내리시는 날이라는 뜻인데, 이 말에는 그 재난이 최후의 심판과 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을 언급하신 것은, 그 재난이 얼마나 무서운 재난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이방 민족들에게 짓밟힌다는 표현은 그 재난이 전쟁처럼 무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포로가 되어서 끌려간다는 말이 세상의 종말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언급된 ‘모든 민족들’과 ‘다른 민족들’은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들은 하느님의 일꾼들인가? 또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꾼들이 아니고, 그들도 심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의 일꾼들처럼 보이고, 하느님을 대신해서 재난을 집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재난은 그들에게도 재난입니다. (침략을 하든지 침략을 당하든지 간에 전쟁은 인간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고, 전체 인류에게 재난이 되는 일입니다.)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는, 표현으로는 “이방인들이, 즉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들을 때까지”인데, 실제로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고, 지금 말하는 재난이 최후의 심판의 일부라면, 그리고 예루살렘이 죄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짓밟히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든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모두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그 재난은 대단히 무서운 일이라는 것과 ‘지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서 태평스럽게 살다가 그 날이 닥치면, 그때는 이미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가 될 것입니다. (그 재난의 무서움이 강조되어 있긴 하지만, 회개란, 재난과 징벌과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과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무서워서 하는 회개는 억지 회개이고,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5-28)
이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표징들은, 마지막 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들이 아니라, 그 날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 날이 되면 전 우주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가 마지막 날을 맞이하기 때문에, 그 날의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우주 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서 숨으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곳은 없습니다.) 여기서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라는 말씀과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죄인들이 겪게 될 공포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 공포는 구원받을 의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심판자로서 재림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볼 것이다.’ 라는 말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가 심판이 시작되는 때이고, 그 심판은 시작하자마자 끝나게 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은 속량된 사람의 자세, 즉 자유인의 자세입니다. 멸망을 당할 죄인들은 두려움으로 까무러치겠지만, 구원받을 의인들은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도 ‘지금’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구원받을 사람으로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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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백광현 마르첼로 신부님]
<증거>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은 불안과 공포입니다. 국제 공동체에서 공부할 때 같은 수도회의 인도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마친 신부님은 본국에서 수련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는데 마피아들의 부당한 요구 앞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선택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곧 그들의 손에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끝까지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유서 아닌 유서를 보냈습니다.
어느 날 마피아들이 도착했을 때 오늘이 그 날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감지한 그는 다른 모든 형제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밖에 나가서 벗과 교회와 복음을 위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억압과 공포 앞에서 머리를 들고 하느님의 구원을 피로써 증거한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지막 날이 참된 해방이 되는 것은 신앙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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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선택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방탕과 교만의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가장 큰 징벌은 바빌론 유배라는 뼈아픈 상처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를 계기로 율법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메시아를 갈망하는 희망의 신앙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성취하셨는데도 신약의 유다인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징벌의 표징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전쟁으로 말미암은 참혹한 결과를 맛보았습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전쟁의 공포가 얼마나 두려운지를 압니다. 어떤 이는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하고, 마치 전쟁이 나면 자기들은 피해를 입지 않고 적군만을 무찌를 수 있다는 환상도 갖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늘날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무고한 이들의 죽음과 공포, 모든 윤리적 가치가 훼손되고 오직 생존의 욕구만 남아 인간 잔악성이 광란을 일으키는 세상을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혼란의 시기일수록 적대감과 분열을 조장하는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고 교란시키는 일은 사탄의 세력과 담합하는 행위입니다.
대화와 합의를 통한 평화만이 우리가 함께 공존하며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표징들이 나타날 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된 신념과 왜곡된 정보로 말미암아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경고입니다.
거짓 뉴스와 악의적 보도들이 난무하는 우리 세상에서, 보편적 상식에 어긋나고 공동선을 해치는 헛된 소문이나 편협한 정보에 눈과 귀를 닫는 노력도 필요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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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래전에 감명 깊게 보았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반성은커녕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사형수가 죽기만을 바라다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나서 늦었지만 죽기 전에 “이젠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죽고 싶은 이유는? 살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해서겠지만, 정작 사랑만이 살아갈 참다운 이유를 주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죽고 싶다.’라고 말씀합니다. 어쩌면 진정 살아있다고 느낄 때는 죽음을 직전에 두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주님이 오셨고, 그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제 곧 다시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요즘 우리는 세상 종말에 관한 이야기와 세상 종말에 일어나는 징표들의 말씀을 읽고, 듣고 있으니 그 마지막 때가 매우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종말을 두려워하는 저희 마음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종말은 그렇게 기다리던 우리의 ‘신랑’과 만나는 기쁜 날입니다. 죄인들만이 두려워 떨어야 하는 날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옆에 끼고 친구처럼 지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무일도 끝 기도에 항상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은 잠자리, 이것은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는 증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기다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기다림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을 통해 서로 만납니다. 기다림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종말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기다림의 대가입니다. 그런데 프란츠 카프카라는 소설가가 우리가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
“인간의 큰 죄는 2가지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는, 조급함이요. 또 하나는, 게으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는 것, 그것을 준비하는 성숙한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옛날 어린 왕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해지는 풍경이 좋아, 해지는 구경을 하려면 해가 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밤은 어둠과 두려움이 아니라 빛을 기다리는 환희의 시간을 만들어 내고, 또한 늙은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마지막 날이 오더라도 축복처럼 수의를 입을 수 있는 은총, 그것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기도하며 깨어 사랑하며 사는 것임을 생각합니다.
특히 지금, 이 순간에도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주님과 행복한 시간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이 미사가 내 생애의 마지막 미사로, 오늘 모시는 성체가 내 생애의 마지막 성체로, 오늘 만나는 사람이 내 생애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는 은혜로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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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29)
♧♧ 시편 63편 11절….
"칼날에 내맡겨져 여우들의 몫이나 되리라."
* 칼날에 내맡겨져...
이는 '불의하게 칼을 사용하는 자는 다 칼로 망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마태오 복음 26장 52절. 참조) 왜냐하면, 다윗에게 칼을 뽑아 반역의 깃발을 들었던 압살롬은 불행히도 다윗의 심복인 요압의 표창 셋에 맞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하였기 때문입니다.(사무엘 하권 18장 14-15절. 참조)
* 여우들의 몫이나 되리라...
‘여우...’는 하이에나 종에 속하는 들짐승으로서(이사야서 43장 20절. 참조) 황폐한 사막 지역에서 살며(이사야서 13장 21절. 참조) 죽은 짐승의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것으로 알려진 동물입니다. 따라서 시신이 여우의 밥이 된다는 말은 시신이 황폐한 곳에 버려지는 것을 뜻하는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시신이 아무렇게나 취급되는 것은 하느님의 크나큰 저주의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한편 다윗을 대적했던 압살롬은 전쟁터에서 무참하게 죽임당해 그곳의 큰 구덩이에 묻히고 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사무엘 하권 18장 17절. 참조) 역시 이 구절의 경고가 실제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시편 63편 12절….
"그러나 임금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은 모두 자랑스러워하리라. 정녕 거짓을 말하는 입은 틀어 막히리라."
* 임금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여기서 ‘임금’은 물론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다윗이 하느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개인의 기쁨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느님의 구원 섭리로 인해 즐거워할 온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기쁨을 말하게 되리라는 확신의 말입니다.
*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은 모두 자랑스러워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서만 맹세를 합니다.(신명기 6장 13절. 참조)
한편 하느님을 두고서 하는 ‘맹세’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로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기 마련이니, 하느님 안에서 늘 기뻐하며 자신들의 궁극적 만사형통을 희망하며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악인이 이 땅에서의 일시적 형통을 자랑하지만, 그 마지막은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 정녕 거짓을 말하는 입은 틀어 막히리라...
여기서 ‘거짓을 말하는 입...’이란 단순히 사람을 기만하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일삼는 자를 뜻합니다. 시편 63편에서 이는 구체적으로 거짓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압살롬을 가리킵니다.(사무엘 하권 15장 1-6절. 참조) 거짓으로 하느님께 맹세함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에 대한 징벌의 경고는 십계명 중 3계명의 내용입니다.(탈출기 20장 7절. 참조) 마침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해위를 일삼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존엄하신 징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압살롬의 비참한 최후는 이 같은 사실을 저희에게 강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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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람으로 ‘우사인 볼트’를 뽑을 것입니다. 그의 100m 기록은 9초 58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기록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웬만한 남자는 아무리 못 뛰어도 20초 이내면 충분히 100m를 뛸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13초 이내였으니까, 저와는 불과 3~4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잘 뛰지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도 10초 이내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10초라는 시간이 긴 시간입니까?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아침에 자녀를 깨우면 곧바로 벌떡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계속 깨우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10분만…….”
10초라는 시간이 길다면 “10분만”이 아니라 “10초만”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10분도 길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10초는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짧고 금세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이 짧은 시간도 중요하다는 것을 100m 달리기에서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더 줄이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쯤이야’라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작은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큰 실망과 함께 거부하고만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굳이 하셨을까요? 말씀하지 않아도 어차피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까?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표징들을 보면서 회개하고 하느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표징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장 하느님 뜻을 따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다가올 날입니다. 따라서 지금 해야 할 하느님의 뜻을 뒤로만 미룬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작은 사랑의 실천에도 충실할 수 있다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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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 3가지 경우}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할 때.
둘째, 원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해야만 할 때.
셋째, 나이가 들었는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
그런데 이 스트레스의 강도는 첫 번째 경우가 가장 작고, 세 번째 경우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즉, 가장 큰 스트레스는 목적의식을 상실했을 때입니다. 사실 자신의 꿈이 없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요.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목적의식이 없으면 당연히 열정도 사라지면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의 마지막 꿈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해야 할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다시금 열정을 키워서 힘차게 지금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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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쓰나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 말인데,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해저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면 그 여파로 커다란 파도가 생깁니다. 미처 피할 수 없이 파도는 해안가의 마을을 덮치고,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쓰나미가 자연의 현상이라면, 우리의 삶에도 쓰나미와 같은 상황이 생기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갑작스럽게 헤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생깁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쓰나미를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1997년입니다. 한국 사회는 엄청난 쓰나미를 만나야 했습니다. ‘IMF’라고 기억하는 외환 위기로 인한 국가 부도 사태입니다. 굴지의 기업들이 부도를 맞았습니다. 평범한 서민들은 영문도 모르고 외환 위기의 쓰나미를 바로 눈앞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22년 전의 일입니다. 금 모으기 운동,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외환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피해를 온몸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저도 쓰나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형님의 사업이 힘들어졌습니다. 저는 대출도 받았고, 부모님을 위해서 집을 얻어야 했습니다. 쓰나미는 분명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쓰나미는 가족들이 서로 위해주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풀잎 끝에 달린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할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풀잎 끝의 이슬방울,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새, 텅 빈 숲에 남은 나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풀잎의 이슬방울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곧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는 풀잎 끝의 이슬방울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 사람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에 놀란 사람들은 어쩌면 텅 빈 숲속의 외로운 나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 감성, 오성을 지닌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불안과 긴장을 평화와 일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비록 멀고, 앞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지만, 힘과 힘의 충돌만으로는 평화와 일치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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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 토요일입니다. 멀리 미국에서 한 청년이 한국으로 왔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서 멀리 태평양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불어, 스페인어를 잘하는 그 청년은 이제 한국말도 제법 배웠다고 합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영어학원 강사를 하면서 학비를 벌고, 예비 신학생들의 기숙사에 머물면서 한국말도 더 배우겠다고 합니다.
무엇이 시카고 대학을 나온 그 청년으로 하여금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청년에게 3가지를 당부했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라고 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 기도를 많이 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년의 앞길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은 동료 갈매기들과는 다른 꿈과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높이 날 수 있었고, 더욱 아름다운 비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새로운 꿈을 이루려는 청년, 조나단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함께 세계여행을 떠난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심하지 않으면,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지켜 주셨던 하느님께서 그 부부의 여행길에도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입니다.
땅만 보고 걸어서는 밝은 태양과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얼굴에 다가오는 차가운 바람을 느껴보시면 어떨는지요. 바람은 극복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꼭 10년 전 겨울에 저는 캐나다에 있었습니다. 추웠고, 외로웠고, 말을 배우는 것도 어려웠고,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봄도 맞이했고,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시스템을 이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알공킨 공원도 보았습니다. 친구와 함께 오타와, 몬트리올, 퀘벡, 할리팩스까지 먼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잘한 결정이었고, 추억의 책장에 아름다운 기억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친구의 모습으로, 우연인 것 같은 인연의 모습으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앞으로 10년은 어떻게 지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예언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이 지난날들이고, 그것이 모이면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품 대상자들의 교구장님과 면담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더 높은 꿈과 이상을 가지는 사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분명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조나단의 이야기에 잠시 웃었습니다.
“신부님! 김밥 먹고 싶어요?"
"왜!"
"김밥 먹으면 천국 가니까요?"
어렵게 배운 한국말로 ‘김밥천국’을 보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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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만 찾으며>
-영적靈的혁명의 전사戰士로 삽시다-
참 절박한 현실들입니다. 낙관적으로 보기에는 날로 심각해지는 내외적 현실입니다. 늘 말세라는 이야기가 나돌지만 요즘 상황은 심각합니다. 과연 지속가능한 세상인지 묻고 싶습니다. 무한한 욕망에 유한한 지구 자원의 현실입니다.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풍요로운 곳이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척박한 곳이다”라는 간디의 생태적 세계관에 공감합니다.
이젠 탈성장의 시대라 합니다.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비관적 관점이 날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대체 에너지를 말하지만 결국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쓰레기로 귀결된 근대문명입니다. 참으로 절제, 극기, 자제, 자발적 가난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과연 답일까요? 과연 인간은 행복할 것이며 일자리도 잘 확보될까요. 4차 산업혁명은 이뤄질 것입니다만 이와 필히 함께 가야하는 것이 인간의 영적혁명, 내적혁명입니다. 참으로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는 인간의 본질같습니다. 과연 인간이 희망이 있는 존재인가 묻게 됩니다.
역시 답은 그리스도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철저한 회개입니다. 영적 삶, 내적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외적 성장, 경제 성장의 추구에서 영적 성장, 내적 성장에로의 전환입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기도해야 삽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어제 읽은 글의 마지막 결론같은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지구 앞날 전체가 위기다. 공익추구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지만 사익추구는 다다공멸多多共滅이다. 우리는 언제쯤 ‘돈과 경제성장의 신화’(물신주의)로부터 벗어나 인간해방을 이룰까?”
하여 철저한 하느님께로의 방향전환의 회개가 답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참 좋은 선물이 겸손과 지혜입니다. 그러니 물신주의의 악령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출구는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내적혁명뿐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하느님, 인간, 자연입니다. 하느님을 잊었기에 인간은 삶의 본질을, 의미를, 방향을 잊었고, 더불어 인간도, 자연도 날로 피폐해가고 망가져 가는 현실입니다. 아무리 4차 산업혁명이 이뤄진다해도 인간이, 자연이 병들고 파괴된 미래라면 그런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지금 현실을 보세요. 농촌의 붕괴와 더불어 부단한 개발과 착취로 자연도 사람도 병들어가는 현실이 아닙니까. 하느님 안에서 인간이 자연 및 온갖 피조물이 함께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참 좋은 세상입니다.
요즘 수도원에는 새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가볍게 더불어 날아다니는 새들이 주는 무공해, 무소유, 무집착의 가르침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많은 새들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수도원의 개들을 돌보는 자매들이 이런 새들을 배려해 비 가리개 우산 아래 설치해 놓은 모이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동식물과도 함께 공존공생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결국은 하느님만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사랑하여 찾을수록 필요도 점차 줄어져 최소한의 필요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영적성장이 관심사이기에 저절로 이탈의 초연한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이들은 어디에서나 한결같은 삶이요 머무는 곳이 고향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다니엘이 그 영적인간의 전형적 모범입니다. 외적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하느님만을 향해 살기에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만을 피신처, 안식처로 삼기에 어디에서나 정주의 삶에 충실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온갖 재난의 현실의 와중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그분께 눈길을 두기에 안전합니다. 재난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시작임을 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끝은 시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만 찾는 이들은 늘 주님과 함께 새로운 구원의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니엘을 보십시오. 사면초가의 유배지에서도 하느님만을 찾고 섬기는데 항구하고 충실하기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다리우스 임금도 찬송과 찬양의 사람, 다니엘을 한없이 신임하고 사랑하며 사자굴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구출됐을 때 함께 기뻐하며 조서를 내리어 다니엘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섬길 것을 권합니다.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내셨다.”
다리우스 임금의 하느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유배지에서도 다니엘은 한결같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은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하느님을 매일 새롭게 만납니다. 이런 하느님만이 우리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맛, 만남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참 행복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절대적 삶의 중심이자 의미인 하느님을 잊음이 불행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영적 혁명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부단한 전환, 회개의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 향한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말씀 공부와 실행, 끊임없는 회개가 뒤따를 때 영적혁명입니다.
평생 ‘영원한 현재 진행형’중인 끊임없는 내적초월의 영적혁명,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는 영적혁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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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현혹되지 마라>
일교차가 큽니다. 건강관리에 마음을 써야하겠습니다. 건강한 것도 나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은 따뜻한 겨울을 바라지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병충해가 덜 한 봄을 맞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겨울에 휴식을 하며 새 생명을 준비합니다. 이처럼 인생여정도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지만 그에 걸맞은 준비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인간이 지배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 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고 말씀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은 은총의 기회일 뿐입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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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구원과 징벌이 공존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종말의 날을 이어서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날이 곧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루카 21,22)이라 하십니다. 찬란하고 영화로운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이민족들에게 내어 주신 시간만큼 "짓밟힐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단어들이 두려움을 자아내지요. "포위, 황폐, 징벌, 불행, 재난, 진노, 칼날, 포로, 짓밟힘, 자지러짐, 공포, 두려운 예감, 까무러침..." 이 모두가 물밀듯이 바싹바싹 다가오는데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그런데, 다행히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자세는 자유인의 표상입니다. 종은 주인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가 초래한 모든 징벌을 능가할 해법을 가지고 오십니다. 바로 당신께서 모두를 속량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속량은 이집트 노예살이에서의 해방과 바빌론 유배에서의 귀환 등 이스라엘 역사에 강한 족적을 남긴 사건들에서 드러나지요.
그리고 지금 여기, 예수님께서 친히 몸값을 치르고 우리를 얻겠다고, 되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누구의 노예나 식민지 백성은 아니지만, 더 잔인하고 집요한 죄악의 노예살이에서 끄집어내 주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징벌과 속량은 심판의 두 얼굴입니다.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혹 심판을 공포스런 단죄와 징벌로만 포장하거나, 반대로 무조건적인 자비로만 채색하는 것은 하느님 마음을 얕은 수준의 계몽 강령 정도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공포나 위로가 당장의 효과는 가져올지 모르지만, 심판자시기도 하고 구원자시기도 한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어렵게 만들 뿐이지요.
제1독서는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다."(다니 6,24)
다니엘은 하느님을 성실히 섬긴 까닭에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그를 구하십니다. 극한 위기의 순간에도 믿는 이에게는 상처조차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판과 종말의 순간이 언제가 될지, 어떻게 닥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그 재난과 공포의 날에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세상이 뒤흔들리고 사자의 입과 적들의 칼날이 난무해도 다니엘처럼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 자신은 주님의 날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요? 속량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고 설레입니까? 징벌에 대한 믿음으로 두렵고 피하고 싶고 거북스럽습니까?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다니 6,28)
놀랍지 않습니까? 이방인 임금 다리우스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도 하느님을 이처럼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믿은 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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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인간의 욕망은 자유 결핍의 근원이다.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아집, 집착에서 이탈하여 爲他的(위타적)인 사랑으로 이웃과 모든 창조물을 아우르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원죄에 물들어 사욕편정에 사로잡혀서 본능적으로 자기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핑계와 변명을 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하와 때문에 그랬다고 변명을 하고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핑계를 늘어놓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고도 내가 아벨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오히려 대듭니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이 「자유에서 도피」라는 저서에서 자유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어떤 권위와 권력자에게 자유를 위탁하여 그 그늘에서 편안함과 자유를 얻으려고 하나 그것은 오히려 ‘자유에서 도피’하는 결과로 성숙하고 책임 있는 인격자가 됨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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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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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6)
<사람들이 불신에 떨어질 때 하늘에 나타날 표징들>
이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입니다. 유대인들이 두 번째로 바빌론과 아시리아의 포로가 되기 때문이지요.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포로가 될 것입니다. 칼에 유대인들이 쓰러지는 동안 적의 군대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유린할 것입니다. 온 유대아가 믿는 민족들에 의해 성령의 쌍날칼(히브 4,12 참조) 아래 놓일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참조: 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제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 참조)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서 달라지지요. 지구와 달리 달은 주기에 따라서 해의 방위에 들어가면 이지러집니다.
육체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습니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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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존재감을 어디서>
"예루살렘은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 민족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살아 숨쉬는 한, 겪어야 할 일들이 많고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살 만한 세상입니다.
짓밟히는 것이 무서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그들의 아픔이 느껴져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 이래서 ᆢ힘들어요'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하고
도와줄 친구나 이웃이 분명 있습니다.
수많은 악플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하늘로부터 평가단으로 인정받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의 존재감과 에너지를 남 괴롭히는데
쓰는 사람들, 자신을 먼저 평가하십시오!
엎질러 놓고 '무심코, 별 생각없이 했다'라는
말로 넘어가려는 회피는 몹쓸짓입니다.
내뱉은 말이 상대를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며 이제라도
자신이 무슨짓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지
깨닫고 회심해야 합니다.
"짓밟는 자를 잊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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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지는 해가 있기에
떠오르는 해가
있습니다.
삶의 시간이란
잠깐 피었다
사그라지는 꽃들처럼
빠르고 빠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끝은 속량을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삶의 끝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끝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십니다.
우리의 모두의 끝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종말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삶의
귀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와같이 종말은
우리를 위한
사랑과 구원의
가장 알맞은
때입니다.
종말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로
몰고가는 우리들을
만나게 됩니다.
종말은 우리를
결박하고 있던
집착과 욕망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때입니다.
하느님께로
가져가야 할 것은
하느님 말씀과
사랑뿐입니다.
안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량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심을
믿으십시오.
무너짐이
속량을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진실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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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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