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아 문명충돌론으로 본 탁록대전 이는 국사책이 흩어져 없어진 데도 원인이 있기는 하나 후대의 학자들이 소홀이 했다는 질책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다. 왜 우리는 지금 치우를 다시금 엄급해야 하는가? 단순히 동이족의 영광을 다시 찾기 위해서 인가? 물론 그러한 면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치우의 존재 의미는 그 이상이라고 본다. 그 의미란 우리가 지금 치우를 재 천명하고 재 조명하지 않으면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를 바로 세울 수 없고 나아가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치우에 대한 연구는 한 영웅의 이야기를 캐나가는 작업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 한국, 중국, 티벳, 중국 남부의 여러 민족의 묘족, 이족, 여족, 장족의 상고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출발점이다. 또한 우리 한민족은 치우와 황제의 탁록대전 이후 난하, 대능하, 요하, 송화강을 중심으로 고조선을 세우고 역사활동을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것은 북방 초원문명, 황하 중상류 하은주 3대 문화와 함께 동아시아를 3등분하고, 3각 세력을 이루며 동아시아 역사를 주도해 나가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오정윤, 2001, 71). 실로 인류 문명사는 동서 충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슈메르와 바빌로니아의 전쟁을 비롯하여 징기스칸의 구라파 정벌은 모두 동서간의 충돌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그리고 19세기는 서양이 신무기로 동양을 침략하여 일본과 태국을 제외한 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서양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드디어 서양의 보수주의 정객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 출동론 clash of civilization'을 내놓게 되었다. 즉, 앞으로의 전쟁은 서양 기독교 문명권과 동양의 유교 문명권이 충돌하는 역사가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부쉬의 MD 구축론도 모두 이런 문명 충돌론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랄 산맥을 경계로 하여 지구는 크게 동서로 나뉜다. 두뇌의 모형을 보면 그것은 지구와 같은 공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뇌량 (腦樑, Corpus collosum) 에 의해 좌우반구는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지구의 모습을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누어 보면 언어적 특징, 문화적 특징, 사고의 유형의 특징이 서로 다름을 발견하게 되며 바로 그 차이란 뇌의 좌우반구의 차이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동양과 서양의 차이로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서양 안에서의 동서의 충돌 그리고 같은 동양 안에서의 동서의 충돌이 있어왔다. 이를 두고 현대과학에서는 ‘프랙탈’ 현상이라고 부른다. 필자는 이런 프랙탈 현상이 두뇌 안에서도 일어난다고 본다. 즉, 뇌의 우뇌는 동양 문명적 특징을 그리고 좌뇌는 서양 문명적 특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인다는 것 이다. 그리고 좌뇌는 이성적이고 우뇌는 감성적이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런 특징이 그대로 동서 문명권 속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성이 감성과 갈등을 빚듯이 동서도 서로 갈등 양상을 노출시킨다. 이 말은 동서가 서로 조화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뇌에 좌우가 있고 지구에는 동서가 있다. 이것을 자연스런운 현상으로 이를 두고 ‘양단 兩端’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이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려 할 때에는 ‘양단 兩斷’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동북아에는 분명히이 서쪽에는 ‘화하계’가 있었고 동쪽에는 ‘동이계’가 있었다. 실로 동북아 유교, 도교 등 문화는 두 문명권의 兩端的현상으로 창조되 왔다. 그런데 중국이 마치 모든 동북아 문명의 화하계의 창조물인냥 여긴다는 것은 오해이다. 이는 동북아 문명을 ‘兩斷的’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이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미국같은 강대국은 자기의 타민족으로 ‘minority'라 한다. 그리고 중국은 ’소수민족‘이라 한다. 그러나 생각하기로는 이런 용어부터 고쳐야 할 것이다. 이런 용어 자체가 이미 강한 자 중심으로 부쳐진 이름일 뿐이다. ‘소수민족’이란 개념이 절대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만 보더라도 한 대에 이르러 ‘한 漢’족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그 때 까지만 하더라도 소수 민족이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묘족이나 다른 민족이 소수 민족이지만 고대 상고사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치우에 관한 역사이다. 치우가 우리 속에서 재조명되어져야 할 이유란 다름 아닌 동북아 일대의 현재 잘 못된 역사 인식을 근본 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건이 바로 탁록대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과학의 뇌이론과 프랙탈 이론을 역사에 도입함으로 양뇌가 뇌량에 의하여 연결되어 상호 작용을 해야 하듯이 앞으로 아시아 특히 동북아 국가들이 서로 역사 이해를 兩端的으로 이해함으로 평화 공존 할 수 있게 계기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미국의 부쉬 전 대통령은 앞으로의 10년을 뇌 연구의 해라고 선포할 만큼 뇌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는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한가지 괄목할 만한 사실은 뇌의 구조를 문명사에 적용해 보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뇌의 양반구 이론을 문명사에 적용해 본 가장 훌륭한 저작이 있는 데 Julian Janes, 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Boston : Houghton Mifflin Company, 1976) 이다. 뇌 이론을 신학분야에도 적용되고 있는 데 대표적인 것은 애쉬부룩James B. Ashbrook, The Brain and Belif (Bristol : Wyndham Hall Press, 1988) 이다. 국내에서는 송준만 교수가 펴낸 마음과 두뇌 (서울, 교문사, 1981)는 양반구 이론을 통해 동서문명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있어서 특이하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위의 두 학자들의 이론들을 도입하여 탁록전쟁의 문명사적 의미를 진단해 보려고 한다. 전자는 건축양식에서도 고딕형으로, 그리고 후자는 돔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했다(Ashbrook, 1988, 14~26). 여성해방운동도 물론 분할뇌 이론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같은 동양이라 하더라도 인도는 좌뇌형에 그리고 중국은 우뇌형에 가깝다. 극동의 경우에도 중국은 좌뇌형에 그리고 우리나라는 우뇌형에 가깝다. 이렇게 나누면 더 작은 지역에서도 끝없이 좌‧우뇌형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프랙탈’ 또는 ‘양단(兩端)’현상이라고도 했다. 양단은 되먹임의 되먹임을 하면서 문명이 전개되고 의식이 복잡해진다. 애쉬부룩은 뇌의 우반구와 좌반구는 서양기독교 안에서의 ‘서방기독교’와 ‘동방기독교’의 특징을 두드러 지게 나누는 특징이 된다고 했다. 서방기독교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카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를 의미하고, 터키와 그리스 러시아 지방의 그리스 정교회를 의미한다. 서방 기독교는 첨탑형 고딕식 Gothic 건물을 만들었는 데 벽돌을 쌓아 올려 ‘하늘 지향적’인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뇌의 좌반구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동방기독교는 돔식 Dome 건물을 만들었는 데 이는 비 합리적 감정을 바탕으로 한 ‘땅 지향적’인 우반구적 특징이 두더러 진다고 했다. 그래서 서방기독교는 권위주의적이고 합리적이다. 교황청의 권위가 엄격하고 교리가 철학에 바탕을 둔 매우 합리적으로 전개되었다. 반면 동방기독교는 그렇지 못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무려 60여명의 교황이 살해될 정도라고 했다. 서방은 이성으로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었는 데, 동방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인즈는 우반구는 신비적 그리고 마술과 신화가 가득차 있고 우반구는 이성 그리고 합리성으로 가득차 있는 데 서양에서는 기원전 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좌우 양반구의 균렬이 생기지 않아서 트로이 전쟁 때 에 유리씨즈가 이성이 아닌 신탁을 받아 전쟁을 수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8세기경 부터 양반구 사이에 균렬이 생겼고 좌뇌가 우뇌를 억압하면서 좌반구적 합리성이 서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8세기란 소위 야스퍼스가 말하는 ‘차축시대 Axial Age'로서 그리스, 인도, 동북아에서 합리적 그리고 윤리적인 자아가 대거 등장할 때이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 부다, 공자와 노자 같은 인물들이 모두 이 무렵에 등장한다. 동서양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모두 이성 우위의 감정 억제가 그들 철학의 주종이 되고 있다. 그 때부터 뇌의 양반구에 치유 불능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애쉬부룩에 의하면 물론 양반구의 균렬은 정신병의 원인이며 현대는 바로 이런 균렬에서 발생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을 더 연장시켜 보면 매우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한국의 송준만 교수는 뇌의 좌우반구는 거시적으로 보아서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의 특징이라고 보고 있다. 애쉬부룩이 서방 기독교와 동방 기독교를 좌우반구로 나눈 반면 송준만 교수는 그것을 서양 전체와 과 동양 전체로 나누고 있다. 즉 서양은 좌반구적 특징을 동양은 우반구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동반구인 동양은 뇌의 우반구가 가지고 있는 성향들 - 형태적, 직관적, 비언어적, 비직선적, 비연속적 - 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에 반하여 좌반구가 가지고 있는 성향들 - 언어적, 수학적, 분석적, 직선적, 연속 적 - 은 특히 서반구 (서양) 에서 강조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송준만, 205 우반구적 특징은 동양의 불교, 도교, 유교 등에서 쉽게 찾아진다.) 204-21 그리고 좌반구적 특징은 서양철학 속에서 쉽게 발견된다고 했다. 대하여 송준만 교수는 거시적으로 그것을 서양과 동양으로 나누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양안에서 다시 동서로 나눌 때에 뇌의 우뇌의 좌뇌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동서의 구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안의 동서가 나뉘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도 동양 안에도 동서가 나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소위 이런 현상을 현대과학의 카오스 이론에서는 ‘프랙탈 fratal'이라고 한다. 보통 ’프랙탈‘리아 물 회오리의 경우 소용돌이 속의 소용돌이를 두고 말 할 때에 쓰는 말이다. 문명에도 이러한 소용돌이 현상 즉 프랙탈 현상이 있는 것이다. 좌뇌를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사람이 우뇌 만으로도 좌뇌적인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이 전체를 반영한다는 홀로그램 이론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주로 칼 프리브람 박사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그 이후 좌뇌는 다시 그 안에서 좌우뇌로 나뉘어질 수 있고, 우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구 분활을 사실상 끝이 없다고 보아야 하며 뇌의 모든 부분을 좌우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 안에도 동서로 분활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적용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치우롸 황제의 전쟁 곧 탁록대전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프랙탈 현상으로 파악함으로서만 문화 제국주의와 국수주의의 아집 그리고 문화 패배주의 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일본의 교과서 왜곡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래의 전쟁은 문화 전쟁이 될 것이다. 일본이 경제 대국에서 문화 대국으로 나아 갈려고 하는 그 첫 시도가 바로 교과서 왜곡의 경위라 할 수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마치 동북아의 역사가 모두 중국것인 냥 생각하고 중화 중심적 문화 제국주의적 발상을 해 오고 있다. 한국은 반대로 오랜 사대주의 사관에 의하여 문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프랙탈 현상으로 탁록대전을 조명해 본다는 것은 이러한 문화 제국주의와 문화 패배 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올바른 동북아 역사관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본다. 분할뇌이론은 1960년대 초에 스페리 박사가 내놓은 이론이다. 분할뇌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두뇌는 좌뇌기능과 우뇌기능으로 분할돼 있으며 양쪽 뇌는 가운데 뇌량(腦樑) 에 의하여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양반구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좌뇌는 언어로 생각하고, 우뇌는 직접적인 개념(이미지)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좌뇌는 언어와 논리적인 사고를 다루고, 우뇌는 언어로 바꾸기 어려운 패턴을 다룬다. 그래서 우뇌 속에는 마술적, 신비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탁록대전은 기원전 25세기 경에 일어난 전쟁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양에는 12세기경의 트로이 전쟁이 있었다. 두 전쟁에 있어서 한가지 공통된 점은 아직 이들 전쟁이 신화인지 역사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전해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두고 제인즈는 그 당시에는 뇌가 아직 좌우로 구분되지 않은 좌우뇌가 ‘양원적 bicameral’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뇌 속에는 지금도 신화와 신비로 가득차 있고 좌뇌는 합리적 이성으로 이를 억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역사 서술만 하더라도 우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도무지 신의 역사인지 인간의 역사인지 구분 이 안된다는 것이다. 『태평어람』에 의하면 치우가 “큰 비바람을 일으키고 큰 안개를 삼일 간 일으키니 모두가 당혹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우뇌의 발동에 의한 신비적인 방법의 역사 기술이다. 탁록 지역은 안개가 많이 낀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 현상을 우뇌로 볼 때에는 비합리적 신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를 두고 현대 역사학자들이 좌뇌로만 역사를 제단해 버리고 이런 기록이 있는 사서들을 일언지하에 위서 운운 하면서 폐기처분하는 것은 우리 뇌의 중요한 한 부분인 우뇌를 절단해 내 버리는 것 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인즈의 분활뇌 이론에 의한 문명사 이해는 매우 옳다고 본다. 게 서술한 바 있다. 최근에는 신학에까지도 분할뇌이론을 적용하여 성서연구를 새롭게 하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에 나오는 두 인물, 나르시스와 골드문트는 분할뇌이론을 증명이나 하듯이 각각 왼뇌의 성격과 오른뇌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분할뇌이론을 인류문명사에 적용한 제인즈의 저서는 매우 도전적이다. 그는 인류역사가 두 시대로 분리될 수 있다고 이론화하였다. 즉 인류문명을 분명한 의식을 지니지 못했던 초기와 의식이 존재하는 후기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제인즈가 `uc0의식`uc0을 `uc0전의식`uc0과 `uc0의식`uc0으로 양분시켜 단적으로 문명사를 갈라 놓고 있는 것은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러나 분할뇌이론을 문명사에 적용시켜 본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제인즈는 전의식적 인간상을 고찰하기 위해서 기원전 12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씌어진 호머의 「일리 어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로이 전쟁33) 때, 희랍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아킬레스의 부인을 강탈하는 순간 아킬레스의 노란 머리를 거머쥐고 아가멤논을 때리지 못하게 경고한 것은 어떤 신이었다. 또한 아킬레스가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만든 것도 신이었다. 또 다른 신은 가도록 하였다. 사실상 트로이 전쟁은 사람이 하는 싸움인지 신이 하는 싸움인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현대 전쟁에서 지휘관이 신의 신탁을 받아 작전계획을 세운다면 기절초풍할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12세기~8세기경에는 이성과 환상이 뒤섞여 구별되지 않았었다.34) 그리고 그렇게 지휘되었던 병사들은 전혀 우리와 유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훌륭한 자동인형이었다. `uc035) 신탁이라든지 주술 같은 언어는 우뇌에서 발생한다. 전의식이란 우반구가 활성화된 의식이다. 우반구의 활성화와 그것이 좌반구의 언어중추에 미치는 환상적 효과가 결국 뇌로 하여금 양원적 마음을 갖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성 위에 환상이 덮어 씌워져 마음이 양원적으로 작동하던 시기를 기원전 12세기~10세기로 본다. 기원전 8~7세기경에 이성적 의식이 확연히 나타나기까지 양원적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양원적 마음은 문명사의 한토막을 장식하는 동시에 몇몇 형태의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험 속에서도 관찰된다는 것이 제인즈의 주장이다.36) 즉, 전의식의 단계와 그것이 좌초된 이후의 이성적 자아의식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켄 `윌버가 지적한 대로 인간의 매우 낮은 의식은 농경생활을 시작한 기원전 9000년경부터 싹 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윌버는 양원적 마음의 시기를 기원전 9000~2000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37) 그리고 자아의식은 전자아(pre-ego)와 초자아(trans-ego)로 나눌 수 있는데, 제인즈는 오직 하나의 의식적 자아만을 다루고 있다. 즉 카오스의 `uc0전자아`uc0와 비카오스의 `uc0자아`uc0만을 다루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자아를 `uc0양원적`uc0이라고 했으며 그것의 좌초를 곧 `uc0자아`uc0의 등장으로 본다. 제인즈는 양원적 마음을 `uc0환각적(hallucinatory)`uc0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원적 마음의 소지자는 거의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나 환영을 보고 결정한다. 이런 소리를 보통 신탁(神託)이라고 한다. 신탁은 직접 소리가 들려지거나 점복(占卜)을 통해 전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갑골문 속에는 양원적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기원전 500년경의 어느날 춘추시대 패왕 가운데 하나인 초나라의 소왕은 「상서여형」을 읽다가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 글은 기원전 11세기 말에 주나라 목왕이 여후(呂侯)에게 명령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전욱이 `uc0신하 중과 려에게 명하여 하늘과 사람의 교통을 단절시키게 했다(命重黎絶 天地通).`uc0라는 내용이었다. 소왕은 `uc0하늘과 사람의 교통을 단절시켰다(絶天地通). `uc0라는 내용이 무엇인지 옆에 있는 신하에게 물었다. 그 신하는 소왕에게 무당이 하늘과 땅을 넘나들며 신탁을 받는 내용을 들려 주었다.38) 그러면 하늘과 땅이 교통하는 것이 끊어졌다는 것은 곧 양원적 마음이 사라졌다는 말과도 같다. 춘추시대의 초나라 소왕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그 때에는 양원적 마음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었다.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고대 3대 왕조를 건설한 창립자들을 보면 모두 양원적 마음의 소지자들이었다. 하의 우임금이 홍수를 막을 때 신의 힘을 빌어 가능했으며, 은의 탕임금이 하늘에 빌어 비를 내리게 했 으며, 후직이 신탁을 받아 농작물을 다른 사람들 것보다 더 빨리 자라게 했다는 얘기는 「일리어드」에 나오는 양원적 마음과 과히 먼 것이 아니다. 인가와 찬동을 구했던 것이다. 왕자신이 길흉을 묻기도 하고, 해몽을 구하기도 했으며, 왕비의 생육, 병이 걸리지 않을까 심지어는 이가 아프지 않을까까지도 물었던 것이다. 여기 갑골문의 한 구절에 의하면, 왕이 그 다음날 제사를 하기 전에, `uc0기혜일에 점하여 묻습니다. 희생으로 羌人을 데려 왔습니다만(己亥貞?來羌). `uc0이라 묻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羌人이란 서부에 살던 종족이름인데 동쪽사람이 그를 희생제물로 데리고 왔는데, 희생제물로 가능하느냐고 묻는 내용이다.39) 사이에 그 원한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갑골문하면 그것이 은나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으레 은나라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갑골문의 발상지는 발해연안이며, 그것이 서남쪽으로 내려가 황하 이북의 은허에서 성행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갑골문자는 중국 하남성 은허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지만 초기의 갑골문화는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서남쪽으로는 대행산 이동과 황하 이북, 북으로는 흥안령 이남의 요령지방과 요동반도, 그리고 흑룡강 이남의 송화강, 두만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다. 물론 이 지역은 두 말할 나위없이 동이족이 활동하던 지역이다. 1981년에는 경남 김해에서도 발굴되어 더욱 갑골문화의 주인공이 우리였음을 실감케 한다.40) 구조가 있었으며, 이때의 인간들은 하늘과 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이런 의식상태를 두고 환상적이라고 한다. 양원적 마음구조가 파괴되면서 자연히 하늘과 땅의 교통도 단절되었으며, 그 단절의 궁금증이 춘추전국시대의 소왕의 의문 속에 남겨져 있고, 지금까지 우리 모두는 같은 궁금증 속에 있다. 2. 동북아 문명의 동서 충돌론 동북아 일대에서도 서양에서 그러한 바와 같이 동서 간의 충돌이 있었으며 그 문명의 특징이 뇌의 양반구 의 차이와 같은 특징적 차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동북아 일대의 양반구적 차이를 지역적으로 나누어 보고 다음으로 양 지역의 중심 인물 그리 고 문화적 특징을 순서대로 고찰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을 탁록대전에 연관시켜 생각해 봄으로서 세계 문명사의 프랙탈 현상을 증명해 보기 로 한다. 그리고 나아가 양뇌가 마치 교량에 의하여 연관되듯이 앞으로 동서 문명이 교류되어 하나의 이상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화하조, 동이족, 묘만족이 바로 그것이다. 그 부포 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성의 황토고현을 그 발상지로 하여 항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쪽과 중부의 일부를 포함한다. 동이족은 산동성의 남부를 기점으로 하여 북으로는 산동성의 북부와 화북성의 남부 그리고 서로는 하남 성의 동부, 남으로는 안휘성의 중부에 이른다. 그리고 동으로는 바다를 끼고 있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한다. 묘만족은 호북성과 호남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포함한다(심백강, 2001, 35). 각 부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화하계는 황제, 동이계는 치우 그리고 남만계는 축융이라 할 수 있다. 들고 있다. “구려국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서경) “ 서양 보다 그 양상이 더 심각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일어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이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어지듯이 동북아 일대에서는 중국학자 부사년 傅斯年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동서가 종족적으로 夷와 夏로 분명히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종족적으로는 말 할 필요가 없으며 그 종족의 분포 지역마저 확연히 구별되며 그 문명적인 특징 마저 달 랐다. 부사년은 그의 「夷夏東西論」에서 이러한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말하고 있다. 동한말 이래의 역사는 항상 남북으로 분열 대립한 역사였고, 하.은.주 삼대와 그 이전에 있어서는 동서로 대치된 갈등의 역사이다. 또 지역적으로는 하수 河水, 제수 濟水, 회수 淮水, 유역을 지반으로한 중국 고대 문명은 부락에서부터 제국으로 까지 발전하였다. 이 지리적 형세는 동서의 대립이었고 남북의 대림은 아니었다. 동서는 서로 계통일 달라 때로는 대치하여 투쟁하고,혼합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 민족을 분 류하여 동이와 상은 동방계에 속하고, 하와 주는 서방계에 속한다. 같은 중국학자 노간 勞幹 역시 동서는 서로 종족이 달랐으며 그 문화적인 특징 마저 달라다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이른바 중국 민족은 하.은.주 삼대를 거쳐 발달해 온 서방의 화하족이 그것이요, 동방에 있어서는 하.운. 주 삼대 이전부터 일찍이 발달한 비한어계 비한어계의 민족이 있었으니 이것은 곧 동이족이다”라고 하 면서 화하계와 동이계의 문화적 특징을 두고서 “동방의 이족은 채도문화 彩陶文化에 대하여 흑도문화 黑陶文化를 가지고 있어 현저하게 동서가 다른 것은 고고학상으로 확정된 것이다”라고 했다. 노간은 두 문화의 차이를 두고 서방은 ‘채도’ 그리고 동방은 ‘흑도’로 구분하였다. 류승국은 흑도와 채도 문화의 차이를 통해서 동북아에는 엄연히 다른 두 문명권이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언제부터 두 문명권이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어떻게 서로 교류하고 갈등하였는가? 이를 갑골문을 통해서 얼마든지 고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B. 흑도와 채도 흑도가 동이족과 관련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풍부하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흑도는 산동을 중심으로 한 연해지대에서 발굴된다. 중국의 서양지 같은 학자는 회도(흑도)는 동이족이 창조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흑도는 산동 뿐만 아니라 요동까지 미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강 유역에서 까지 발견되고 있다. 그래서 고고학계 내에서 내려진 결론은 흑도는 산동 지방, 그리고 동이족과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이 자기 중심으로 ‘동방’이라고 할 때에는 중국 하남의 동부 산동 지방과 회수와 서주일대를 가르 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역에서 나오는 토기들이 흑도라는 것이다. ‘한 漢’족이란 이름이 후한서(기원후 220년경)이고 보면 매우 일찍부터 ‘이’라는 종족은 그 정체성이 분명하였다. 갑골문에 의하면 끊임 없이 동방 이족을 정벌하는 기록이 등장하는 데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하여 동이 족이 살던 지역의 경계를 짐작할 수 있다. 갑골문을 통해 종족 이름은 물론 지방 소재지가 나오며 우리는 이 지방에서 흑도가 나오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흑도와 채도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이냐고 할 때에 신석기 시대 산동과 하남일대의 유물을 통해 볼 때에 그것이 채도가 아니고 흑도임은 쉽게 확인이 되고 있다. 흑도의 연대에 대하여는 제설이 있으나 신석기 시대에 산동과 하남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상징이 흑도 임은 분명하다는 것이다(류승국, 1983, 25). 여기에 동이 지역이 산동과 회수 방면이라는 사실은 갑골문 복사를 통하여 더욱 뚜렷해 졌다. 즉, 복사에 의하면 은이 동이를 정벌하는 기록이 나오는 데 회수라는 지명이 있다. 요약하면 동이 지역은 산동과 요동과 한반도 일대이다. 그리고 이 일대를 이어주는 하나의 무화 띠가 있는 데 그것은 바로 ‘돌멘 dolmen'이라는 것이다. 돌멘의 분포 지역이 화하계와는 인연이 먼 곳으로 동이계의 또 하나의 상징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화 상징에 있어서 동이족은 서쪽 화하계와는 다른 문명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좌뇌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러한 전교한 미도 없고 채색고 하지 않은 것은 우뇌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애슈부룩이 고딕을 좌뇌적 특징 그리고 돔을 우뇌적 특징으로 본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리적으로 좌뇌와 우뇌는 같은 두뇌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그 상반된 자기 특징 때문에 서로 상극을 노출한다. 마치 개와 고양이와 같이. 이성적 자뇌는 감정적 우뇌를 멸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감정을 이성의 이러한 횡포에 대하여 불만을 지니며 복수에 불타게 된다. 차축시대 이래로 서양 문명은 이성 중심의 소위 로고스 문명을 우월시 하면서 감정을 억압해 왔다. 여기에 19세기말부터 프로이트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다윈 등이 모두 인간을 관념론적이 아닌 비합리적 물질과 감정 같은 것을 토대로 본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문명은 양뇌가 조화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유물론과 관념론이 함께 공존하는 문명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좌뇌는 오른 손을 그리고 우뇌는 왼손을 조정한다. 서양이 왼손잡이을 ‘사악하다’고 한 이유도 바로 우뇌를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좌뇌적 특징이 강한 서양이 동양을 멸시하는 이유도 동양의 우뇌적 특징 때문이다. 여기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서방 기독교는 동방 기독교를 이단시 해 왔다. 그러다가 양쪽 교황이 작년부터 만나기 시작하고 있으나 아직 진정한 만남을 이루기란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과거 시대에 동북아 일대에서도 동과 서가 서로 충돌한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들어 표시하였다. 동서상쟁사 결과 위의 표는 부사년이 하초 이후부터 동북아 일대에서 벌어진 동서 충돌과 갈등상을 알기쉽게 그려놓은 것이다. 여기서 보면 동과 서는 말 그대로 일진일퇴를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세 번째 이와 주의 경우 은이 동이족인지 아닌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은이 서쪽의 화하계와 충돌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 여러 가지 문화적인 특징이 은은 동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뇌의 구조만큼이나 숙명적이게 동서의 갈등과 충돌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하초를 거슬러 올라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탁록 대전도 결국 같은 맥락의 동서 충돌이라 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바른 이해가 이루어 질 것이며 그리고 동북아 일대의 국가들이 지향하는 평화 가 무엇이라는 것도 쉽게 그 방향 설정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3. 치우와 동이 뇌 이론이 정당하려면 치우와 황제의 관계를 동이와 화하계로 비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정당해야 한다고 본다. 동북아 동서 충돌의 극치는 아마 치우와 황제의 탁록 대전이라 해 무리가 아닐 것이다. 황제가 서방의 섬서성을, 그리고 치우는 동방의 구려국 九黎國의 맹주였다. 즉, 서경 공전에 의하면 “구려국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라고 했다. ‘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서경에 보인다. ‘려’는 원래 산명이나 지명이었는 데 동이족이 그 지역에 살면서부터 ‘구려’라고 ‘구려국’이 되었다고 본다(성백강, 2001, 37). 『묘족간사』에는 “우리 나라에는 장강 중하류와 황하 하류 일대에 오래 전부터 많은 윈시인류가 생활 해 왔는 데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부락연맹을 형성하였다. 그 중에 한 부락이 ‘구려’인데 치우가 수령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묘족사』의 제 1장 ‘묘족의 원시시대’에는 “묘족의 먼 조상은 치우이다”라는 직접적인 기록이 나온다. 황제와 치우의 치열한 대결은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글들 속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치우는 염제를 쫓아 탁록지야에서 싸웠는 데 주위에 남은 것이라고는 없었다. 황제를 설득하여 치우를 잡아서 중익(탁록)에서 죽였다‘(일주서. 상맥편). 황제가 염제를 정벌했다(손자병법) 치우는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정벌했다. 황제는 마침내 응룡에게 명하여 그를 기주지야 에서 공격하였다(산해경). 황제는 탁록을 정벌하여 치우를 사로잡았다(전국책) 조육대는 “황제는 황제부락의 수령이고 치우는 치우부락의 수령이었다”라고 하면서 “그들 사이의 전쟁 은 원시사회 말기 중원대지상에서의 사회진보에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누가 정통이고 누가 비정통인가도 없는 ...그들의 지위는 모두 평등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 동안 치우가 잘 못 이해 된 것은 비마르크스주의의 봉근정통사관이나 대한족주의 때문이라 하면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으로 만 치우에 대한 잘 못된 이해를 고질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는 또 하나의 중화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치우에 또 다른 방법을 통한 왜곡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여러 문헌을 통하여 치우와 황제가 동과 서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과 동서가 양인을 중심으로 하여 심각하게 충돌하였다는 근거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는 긍정적인 매김을 해 둘 수 있다고 본다. 부화장)은 이어서 말하기를 “나는 치우가 단지 묘족의 선조일 뿐만 아니라 그는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화민족 역사상의 삼대인문 초조라고 생각한다”(조육대, 2001, 148)는 의미 심장한 발언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제외 시켜온 치우를 중국의 조상으로 편입시키려는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는 중국의 사학자들이 치우를 재평가하고 있으며 ‘중화민족’의 정체성을 병경 시키고 있는 것 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화민족이란 황염 연맹(황제 염제 연맹) 이라는 핵에 구려, 동이, 북적, 선비등 중화대지 위에서 생활하던 많은 소수민족무리가 순서대로 융합하여 형성된 것이며 너 속에 내가 내 속에 너가 있는 ‘다원일체적’인 대가정을 이룬 것이다”(같은 책).“ 어느 누구도 당신이 궁극적으로 어느 조상의 후손인지 분명히 구분할 수 없다. 우리는 당연히 황제, 염제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인식하는데, 그렇다면 치우 또한 우리의 선조라고 생각 하지 않는 이유가 무넛인가? 우리는 마땅히 봉건정통사상이 남겨준 치우에 대한 비마르크스주의적 부당한 인식과 정확하지 않는 태도를 버려야 하며 치우의 본래 면복을 돌려주어야 하고 선조로서의 지위를 확립시켜주어야 한다” (같은 책, 149). 먼저 그는 ‘너 속의 나 속의 나’라는 필자의 프랙탈적인 사관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랙탈은 어디에도 중심이 없는 다 중심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마르크스의 평등적 이상도 실현된다. 그러나 조육대는 분명하게 “중화민족은 강대한 응집력을 가진 민족인데 이 위대한 민족의 형성은 황.염. 치로부터 시작된다”(같은 책)고 하면서 황염을 핵으로 한 다원일체 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치우를 빙자한 또 하나의 역사 왜곡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의 미래는 모든 민족이 자문화를 중심으로 한 ethnocentrism 다 중심주의적 다원일체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황.염을 중심으로 하고 그것을 응집력으로 치우를 그것에 흡수 시켜 나가는 역사 이해는 또 하나의 중화 주의의 위험성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21세기를 지향하는 진정한 사관일 수는 없다라고 본다. 결코 아니라고 본다. 황제는 동북아 역사에서 최초로 ‘서방’이라는 의식을 자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문헌상을 통해 볼 때에 황제와 치우는 모두 같은 조상의 한 뿌리였다. 그런데 프랙탈 현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 one'은 둘로 분열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분열의 유혹에 빠진 인물이 바로 황제였다는 것이다. 그는 치우가 소위 풍사와 운사를 중심으로 통치를 하고 제세이화나 홍익인간과 같은 이념을 표방한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에 대해 서방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박선식은 ‘서토 소아주의’ 혹은 ‘서토 쇼비니즘’이라 한다(박선식, 2001, 114). 그리고 이러한 兩斷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여기서 좌우뇌의 균열은 생기게 된다. 동방의 치우 세력은 풍백과 우사 그리고 형요와 이매량과 연대했고, 서방의 황제는 풍후와 응룡 그리고 여발등 여러 토템부족들과 연대한다. 풍백과 우사는 풍후와 응룡에 그리고 이매량은 여러 토템부족과 대응하며 투쟁을 벌린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풍백’와 ‘우사’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인물들로서 환웅의 참모들이다. 그런데 이런 환웅의 참모들이 그대로 치우의 참모가 되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치우계열과 환웅 계열은 계보상 직계관계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박선식, 2001, 115). 치우와 환웅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같은 동방 계열에 속해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 서방 계열과는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미 당시 당시 문명 충돌은 집단 계열상으로도 분명하게 들어났다는 것이다. 탁록 대전은 실로 동북아의 동서가 兩斷的 방향으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본다. 그 이후 동서는 부단히 충돌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위의 도표에서 보여주는 바이다. 이러한 동서 충돌에 관한 기록은 갑골문을 통해서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좌뇌와 우뇌는 서로 어는 것이 중심이 될 수 없다. 상호 프랙탈 작용을 할 뿐이다. 그래서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는 다 중심적인 현상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황.염을 핵으로 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죄뇌는 우뇌를 악마하 했다. 서양 문명사는 좌뇌적인 특징을 선-합리적인 것으로 그리고 우뇌적인 특징을 악-비합리적인 것으로 이원화 시켰다. 그리고 성적으로는 좌뇌적인 것을 ‘남성원리 male principle’에 그리고 우뇌적인 것을 ‘여성원리 female principle’에 일치 시켰다. 여기서 남성원리란 하늘-낮-정신-이성-선과 같은 것이고 여성원리란 땅-밤-물질-감정-악과 같은 것 이다. 여기서 서양의 고질적인 마녀 사냥의 역사가 시작된다. 왼손잡이를 ‘사악한 인간 wicked person'이라 한 이유도 왼손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우뇌가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지금까지 탁록대전을 이런 시작에서 보았다. 동북아 안의 동서 교전이 바로 탁록대전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렇게 본다면 탁록대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동서의 각축전은 최근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에 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그 나쁜 오리엔탈리즘도 바로 뇌 이론으로만 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서양 여성학자들은 서양의 악마란 모두 가부장제기 등장하면서 남자들이 남신을 등장 시키 면서 모계 사회의 태모 혹은 여신들을 둔갑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일부학자들은 태모의 영광을 다시 찾으려 한다. 그래서 Theology 는 남자들의 신학이고 여성들은 Thealogy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치 남자들이 실권을 잡은 다음 여신들을 악마화 시켜버렸듯이 말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황제족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치우족들을 악마화 시켰는 가를 봄으로서 동서 문명충돌론을 더욱 입증해 보려 한다. 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중국인들은 치우를 ‘어리석고 지렁이와 같이 하챦은 벌레같은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치우는 ‘蚩尤氏’ ‘慈烏支’ ‘知爲天’이라 했으며 모두 ‘옛 천자의 이름 古天子之號’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측 의미가 완전히 말살된 채 중국측 문헌에서는 치우가 악마화 된다. 중국측 문헌인 『설문해자』에 의하면 치우는 ‘사람에 재해나 재난을 일으키는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광악은 “치마를 상징으로 쓰는 치족과 개를 토템으로 하는 우족이 결합한 세력의 수장”이라 묘사하고 있다. 왕대유는 “뱀, 용, 이무기의 의미와 검은 물소의 의미가 포함된 이름”이라고 했다(오정윤, 2001, 66). 중국측의 고대 자료에 의하면 치우는 전쟁의 도발자. 침략자. 질서의 반항아로 묘사되 있으며 황제는 그 반대로 미화돼 있다(심백강, 2001, 39). 이와 같이 치우에 대한 기록은 양쪽에 상반되게 차이가난다. 중국측은 흉폭하고 난을 일으킨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한국측의 기록은 안으로는 백성을 기르고, 밖 으로는 병사를 양성하여 천도를 준수하고 영토를 개척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탁록 전투에 관해서도 중국측은 치우 세력이 패배하여 사방으로 흩어진 데 대하여 한국 기록은 황제 헌원이 도리여 패배하고 신시의 규범을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물러갔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전형적인 도깨비 모양새 그대로이다. 4개의 눈, 6개의 손을 하고 있으며 어깨에는 외날 칼, 몸통은 갑옷, 양손에 모와 극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깨비의 전형이라 할 모양새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치우의 모양새 때문에 ‘도깨비’ ‘도철’ ‘치미’등으로 전해 지고 있다. 우리는 중국과 한국의 자료가 치우에 대하여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것을 통하여 오히려 서와 동의 문명이 상이했고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좌우뇌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 때문이라고 본다. 『마한세기』에 의하면 황제 유웅씨족과 염제 신농씨족은 서로 배다른 형제간이다. 치우나 황제 모두 같은 동이이다. 이는 마치 좌뇌와 우뇌가 뇌량에 의하여 하나로 연결되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문명은 충돌하면서 동시에 공존해야 한다. 앞으로의 문명은 서로 공존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탁록 대전은 동북아의 미래 공존을 위해서도 재 조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 정립을 위해서는 그 동안 왜곡되어 온 동북아 역사관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함께 중국이 왜곡 시키고 있는 역사 왜곡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일괄 ‘소수민족의 역사’라 하여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 속에 편입 시켜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선적인 역사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이 서에 서가 동에 상호 영향을 주면서 거대한 동북아 문명권이 만들어 진 것이다. 거기에는 인류 문화의 정수리와 같은 유교와 도가 사상 같은 위대한 사상이 창출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동서의 상호 연관 관계 속에서 이런 사상들이 피어 났다는 것을 무시하고 시종일관 중국 화하계 한족이 모든 것의 주인공인냥 여기는 것은 분명히 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탁록 대전에 대한 재 조명은 무엇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싶다. 끝
김상일(한신대학교 교수)
1. 문명충돌론이란?
2. 동북아 문명충돌론
3. 탁록대전과 동서 문명충돌론
A. 동이로서의 치우
머리말
일찍이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자는 “지금 세상에는 치우씨에 관하여 자세히 캐묻는 사람이 없다.
필자는 실로 탁록대전은 서양의 트로이 전쟁에 비견할 만한 아니 그 보다 그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토로이 전쟁이 서양사에 미친 영향 만큼이나 탁록대전이 동북아 역사에 미친 영항은 크다고 본다.
그러나 동서라는 개념을 상대적이어서 동 안의 동서가 그리고 서 안의 동서가 있게 된다.
그러나 뇌 속에서 양뇌는 노화를 이루어야 한다.
1. 腦 이론과 文明論
1960년대 초부터 뇌의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그 결과로 문명과 철학 그리고 신학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애쉬브룩에 의하면, 같은 기독교라 하더라도 서방 기독교는 좌뇌형으로, 동방 기독교는 우뇌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다.
고 딕 형 돔 형
뇌의 양반구 이론을 문명사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저작은 제인즈였다.
애쉬부룩이 뇌의 양반구 이론을 적용하여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신학을 비교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송준만 교수는 두뇌의 좌반구와 우반구를 지구의 서반구(서양)과 동반구(동양)에 견주어 보면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애쉬부룩이 뇌의 좌우반구를 서양내에서의 서와 동으로 나눈 데
1970년 대 들어와 뇌 연구에 획기적이 계기가 이루어 졌는 데 그것은 뇌의 홀로그램 hologram 현상이다.
만약에 우리가 여기서 뇌의 프랙탈 현상을 문명사에도 적용해 본다면 서양에서 그러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2.탁록 전쟁과 트로이 전쟁 비교
양원적 마음과 문명
분할두뇌이론을 문명사에 적용하여 저술을 한 학자는 제인즈이다.
로버트 오른스타인(Robert Onrstein) 박사는 분할뇌이론을 적용하여 과학, 역사, 철학 및 종교를 다양하
제인즈는 자기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역사 속에 나타난 저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제인즈에 따르면 `uc0트로이 전쟁은 환상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제인즈 이론의 문제점은 그가 의식발전의 단계를 너무 이등분시켜 단순화시켰다는 점이다.
갑골문 속의 양원적 마음
이러한 점복을 기록해 놓은 문자들을 갑골문(甲骨文)이라고 한다.
옛날 무당들은 분명히 양원적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하늘의 음성을 들어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원적 마음의 소지자가 아니면 그것은 곧 왕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10세기 이전에는 양원적 마음이 매우 성행했으며, 이 마음의 소지자는 자유자재로 하늘과 땅을
갑골문에 의하면 전쟁, 사냥, 순시 등을 나갈 때나 특별한 제사를 거행할 때에 모든 조상에게 점을 쳐 그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서 그때까지 사람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으며, 서부종족과 동부종족
아무튼 인류문명사에는 이성적 합리성이 싹트기 직전에는 좌뇌와 우뇌가 분리되지 않은 양원적 마음
A. 이하동서론 夷夏東西論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대체로 3개의 대표적인 부족 집단이 있었다.
심백강은 치우가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문헌적 증거를 「서경」과「사기」등에서 다음과 같이
문명의 프랙탈 현상은 동북아 일대에서도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라는 부족의 이름이 갑골문에 뚜렷이 등장하는 것이 갑골문의 특징이다.
여기서 뇌의 특징으로 보아서 옹기에 채색을 하고 그 모양을 인위적으로 정교하게 만든 것은 다분히
부사년은 동북아 지역의 하초이래로 동북아 일대에 있어온 동서 충돌과 갈등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표로
동 서
夷----- 夏 동서가 서로 이김
南------ 夏 동이 서를 이김
夷------ 周 서가 동을 이김
六國---- 秦 서가 동을 이김
陣項等--- 秦 동이 서를 이김
楚------ 漢 서가 동을 이김
황제와 치우의 대결 양상은 궁극적으로 위에서 밝힌 동서 충돌이라느 각도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문헌을 통해 치우의 역사적 지위와 위치한 중국인 조육대(중국 탁록삼조문화연구회
우리는 조육대의 주장에서 몇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마르크스를 빙자한 역사관의 변화라고는 할 수 있으나 결국 황제의 중화 중심적 사관에서 벗어난 것은
여기서 동북아에는 동과 서라는 兩端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兩斷으로 까지 치닫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대안적 사관으로 뇌이론을 통한 프랙탈 사관을 여기서 다시 천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치우의 악마화
지구의 서반구를 좌뇌에 그리고 동반구를 우뇌에 대비 시킬 때에 동과 서는 이런 의미에서 숙명적으로
이제 탁록에서 황제가 승자로서 치우를 잡아 죽이고 동북아의 승자로서 아니 패자로서 등장한다고 할 때에 치우에 대한 평가 절하 혹은 악마화 작업은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이라 할 수 있다.
‘치우’란 말의 원래 뜻은 ‘우뢰와 비가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한단고기』와 『삼성기』)
치우의 모양새에 관하여 『술이기』는 ‘구리 이마에 쇠이마’와 같으며 쇠와 쇠와 돌을 먹는다고 했다.
6. 동서 공존론과 탁록대전
동북아 문명은 분명히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 서로 동서로 갈라져 충돌해 온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