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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晉寶 | 1530 | 1585 | 晉州 | 德哉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재(德哉), 호는 영모정(永慕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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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來庵集) 정인홍(鄭仁弘)생년1536년(중종 31)몰년1623년(인조 1)자덕원(德遠)호내암(來庵)본관서산(瑞山)봉호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특기사항조식(曺植)의 문인. 대북(大北)의 영수
來庵先生文集卷之十二 / 行狀 / 司諫河公行錄 代作
遠祖諱拱辰。仕高麗爲左司郞中。使契丹不屈而死。贈門下侍郞同平章事。高祖諱起龍。通德郞通禮門通贊。曾祖諱鮪。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祖諱禹治。通訓大夫安州牧使。考諱淑。承仕郞。妣咸從魚氏。嘉善大夫司諫院大司諫得江之女。公以嘉靖庚寅六月初四日生。生而岐嶷。氣骨超凡。聰明過人。讀書不過三遍。而輒成誦不忘。壬子丁外艱。乙卯登文科。始選爲承文正字。薦爲藝文館檢閱,奉敎,待敎。爲承政院注書。爲侍講說書,司書。癸亥。以兵曹佐郞。充冬至使書狀官赴京。公能漢語。不須譯官。華人稱之。使還踐歷臺省。則正言,持平獻納掌令也。轉遷各曹。則兵,禮,刑佐郞,正郞也。除成均館者三。司成,司藝,典籍也。差災傷御史者四。關東,湖西,湖南也。此等歷職。皆在癸亥以後。而日月先後。未可考也。丁卯秋。除善山府使。庚午罷。壬申除安州牧使。中道病辭。癸酉入爲宗簿寺正,司僕寺正。尋拜掌令。遞爲司藝。復出爲星州牧使。乙亥秋。以災傷罷歸。丙子冬除尙衣院正。丁丑除禮賓寺正。以推鞠敬差官。治忠淸道淫婦獄。入爲司藝。遷右通禮。以病遞。秋除金海府使。戊寅冬。以司諫召。中道辭病。己卯冬。除密陽府使。壬午夏。以南川船破當遞。一府士民遮道圍城。城門外鎖者月餘。事聞。朝廷仍任焉。癸未。以事罷歸。凡內外除授。皆兼春秋。晩年亦薦錄弘文。乙酉拜左通禮。恩命未至而公已易簀。十月十五日也。享年五十六。翌年二月初七日。葬于烏咎達好音山先塋之側坎山之原。公德性寬厚。風神秀偉。平居無疾言遽色。友愛出天。人無間言。畦畛不見於外。而是非有嚴於內。喜稱人之善。而於不善。不與焉。其在臺官也。彈刻尹元衡。而南冥先生致書賀之。又論雪府使河珽之冤。河以己卯之禍匿金湜事。被誅而久未得伸者也。至於莅官。淸儉自守而務祛弊政。以恩愛撫民而民懷其德。以嚴明御吏而吏不敢欺。簿牒雲堆。剖決如流。斷訟必循公道而作紙未嘗捧木。尤留意學校。力加勸導。行養老宴。必親自執爵以酬。春秋釋奠。社稷城隍等祭。必齊沐親行。凡衣服之資。絲布之備。必令家奴出家穀換用。未嘗責辨於官吏。自奉甚薄。而於親族窮乏。無不極力周恤。人以厚族稱之。星州倉穀幾三十萬石。陳腐相因。名存實無。民不勝其弊。公郞散以二分。歛以一分。以耗穀充其元數。民用蒙惠。思切去後。謀擬立石。而爲裵德文所阻。裵以士豪。曾爲公所制者也。金海則府多逋欠。取積久難徵者。悉焚其券。節費而充其數。有去思之碑。至於密陽。民俗尙鬼。府中有一神祠。士女奔趨。有求必禱。公命曳出神像。沈之于江。由是妖孼遂除。舊汚盡革焉。又習成好訟。婦人多入訟庭。每以廉恥曉之。有恥且格。末年無是弊。社稷城隍位板。例置官廳。汚衊莫甚。公建宇壇邊以藏之。又立齋舍於外以爲所。其去也亦立石頌德焉。公於仕宦之際。未嘗枉道干進苟冀顯。雖公議不遺。欲其陞秩。薦望同副承旨及東萊府使。而皆未受點。位不稱德。終於堂下。命也。公於家食之日。日與兄弟。怡愉一堂。有酒醑我。和樂且湛。或至夜分乃罷。雖風雨。未嘗一日廢也。友愛之篤。人皆歎服。與守愚堂崔先生。交遊最密。往來源源。及公之病革也。先生馳到。問疾救藥。及其纊也。親恤歛殯。備盡哀禮。本家無棺板。先生以內外棺槨之材賻焉。葬時又爲留山所。以克襄事。平日相與之意。可見矣。星州密陽二邑之鄕校書院以及鄕所。各遣校生院生品官。爲文弔祭而又致賻焉。其愈久不忘之意。亦可想矣。公先配全義李公度之女。進士貞胤之孫。生子女俱夭。中配晉州宣傳官鄭受益之女。水使殷富之孫。生一女。壻曰鄭沇。後娶靈山辛汝謹之女。光州牧使崙之孫。生一女而夭。副室生男女。女夭。男曰同寅。丁酉被虜。
[주-D001] 士 : 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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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 제12권 / 행장(行狀) / 사간(司諫) 하공(河公) 행록〔司諫 河公 行錄〕 남을 대신하여 지었다.
먼 조상 하공신(河拱辰)은 고려에 벼슬하여 좌사낭중(左司郞中)을 지냈으며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굽히지 않고 죽어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휘 기룡(起龍)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을 지냈다. 증조부 휘 유(鮪)는 창신교위로 충무위 부사과(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를 지냈다. 조부 휘 우치(禹治)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부친 휘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었다. 모친은 함종 어씨(咸從魚氏)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낸 득강(得江)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6월 4일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고 기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남달리 총명했다. 책을 읽을 때는 채 세 번을 읽기도 전에 문득 외고 잊어버리지 않았다. 임자년(1552, 명종7)에 부친상을 당했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봉교(奉敎), 대교(待敎)가 되었으며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設書), 사서(司書)가 되었다.
계해년(1563, 명종18)에 병조 좌랑으로 있으면서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는데, 공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역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중국인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사신 갔다 돌아와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두루 거쳤으니 곧 정언, 지평, 헌납, 장령 등이었다. 각 조를 두루 거쳤으니 곧 병조, 예조, 형조의 좌랑과 정랑이었다. 성균관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이었으니 사성, 사예, 전적 등이다. 재상어사(災傷御史)로 차출된 것이 네 번이었으니 관동, 호서, 호남 등이었다. 이러한 관직을 거친 것은 모두 계해년(1563, 명종18) 이후지만 날짜의 앞뒤는 살펴볼 수가 없다.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 가을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경오년(1570, 선조3)에 파직되었고, 임신년(1572, 선조5)에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6)에 조정에 들어가 종부시 정(宗簿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되었으며, 이윽고 장령이 되었다가 체차되어 사예가 되었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성주 목사가 되었다. 을해년(1575, 선조8) 가을에 재상(災傷)으로 인해 파직되어 돌아왔다. 병자년(1576, 선조9) 겨울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고 정축년(1577, 선조10)에 예빈시 정(禮賓寺正)이 되었다가, 추국경차관(推鞠敬差官)으로 충청도 음부옥사를 처리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사예가 되었다가 우통례로 옮겼는데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가을에 김해 부사에 제수되었다.
무인년(1578, 선조11) 겨울에 사간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기묘년(1579, 선조12) 겨울에 밀양 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임오년(1582, 선조15) 여름에 남천(南川)의 배가 파선하는 바람에 체직되었는데, 밀양의 선비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성을 에워쌌다. 성문을 밖에서 봉쇄한 지 한 달이 넘자,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그대로 두었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어떤 일로 파직당해 돌아왔다. 내직과 외직에 제수된 것이 모두 겸춘추(兼春秋)였다. 만년에 또 홍문관에 천거되어 을유년(1585, 선조18)에 좌통례에 제수되었으나 임금의 명이 이르기 전에 졸하였으니 10월 15일이었다. 향연 56세였다. 다음해 2월 7일에 오곡(烏谷)의 달호음산(達好音山) 선영 옆 감좌(坎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중후하였으며 풍채가 빼어났다. 평소에 다급한 말과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애는 타고나서 아무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훌륭함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시비를 가리는 일에는 마음속으로 엄격했다.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칭찬하는 것은 좋아하였으나 불선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자 남명 선생이 서신을 보내 치하하였다. 또 부사 하정(河珽)의 원한을 논하여 풀어주었는데, 하정은 기묘사화 때에 김식(金湜)을 숨겨주었던 사건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여 오래도록 신원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벼슬에 있을 때는 청렴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폐정을 힘써 없앴다. 은혜와 사랑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니 백성들이 그 덕을 마음에 간직하였고, 엄격하고 분명하게 관리들을 부리니 벼슬아치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다. 장부와 문서가 구름처럼 쌓여도 물 흐르듯 처리하였고, 송사를 결단할 때는 반드시 공정한 도리를 따랐으며 작지(作紙)에는 곤장을 치는 일이 없었다. 학교에 더욱 마음을 쏟아 권면하고 인도하는 데 힘썼으며, 양로연을 베풀 때는 반드시 직접 술잔을 잡고 술을 따랐다. 봄가을 석전(釋奠)과 사직단, 성황당 등에 제사지낼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행했다.
의복에 쓸 옷감이나 면포를 준비할 때는 반드시 하인에게 명하여 집안의 곡식과 바꿔오도록 하였고 벼슬아치들에게 처리하라고 맡긴 적이 없었다.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매우 박하였으나 친족이 궁핍한 경우에는 온힘을 다해 도와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가 일족에게 후하게 대한다고 칭송하였다.
성주 창고의 곡식이 거의 삼십만 석이었는데, 계속 썩어서 명목으로는 남아 있으나 실제로는 남은 것이 없었기에 백성들이 그 폐단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공이 곧 창고의 곡식을 풀어 헤쳐서 둘로 나눈 다음, 반은 그대로 쓰고 나머지는 모곡(耗穀)으로 원래 숫자를 채웠다. 백성들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가 떠난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다가 배덕문(裵德文)의 저지를 당했는데, 배덕문은 토호(土豪)로서 일찍이 공의 제제를 받았던 사람이다.
김해부에는 포흠(逋欠)이 많았기 때문에, 오래 누적되고 징수하기 어려운 것을 골라서 그 문서를 모두 태워버린 다음 소비를 줄여서 그 숫자를 채웠다. 그래서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밀양(密陽)에 부임했을 때는 민간에 귀신을 숭상하는 풍습이 있었다. 밀양부 안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사대부 집안 여자들이 다투어 몰려들어서,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기도를 올리곤 했다. 공이 신상을 끌어내어 강에 빠트리라고 명을 내리니, 이로 말미암아 요사스런 귀신이 마침내 제거되고 오랜 악습이 모두 혁파되었다.
또 소송을 좋아하는 습성이 생겨서 부인들이 송정(訟庭)에 자주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염치를 가르쳐서 깨우쳐주니 부끄러움을 알고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어 일 년이 채 못 되어 이런 폐단이 없어졌다. 사직단과 성황당의 위판은 관청에 줄을 세워두었는데 너무 더러워졌기에 공이 단 옆에 집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또 바깥에 재실을 지어서 제사지내는 장소로 삼았는데, 그가 떠나자 역시 비석을 세우고 그 덕을 칭송하였다.
공은 벼슬길에 있을 적에, 도를 굽혀 진급하려 하지 않았고 구차하게 현달을 바라지도 않았다. 공의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아 자급을 올려주려고 동부승지와 동래부사에 천거하였지만 모두 낙점을 받지 못했다.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아 끝내 당하관에 머물렀으니 운명이었다.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는 날마다 형제들과 어울리면서 한 집안을 화목하게 했다. 술이 있으면 서로 자기가 거르겠다고 하면서 화락한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간혹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나기도 했으며 비바람이 몰아쳐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으니 그 우애의 돈독함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
수우당 최영경 선생과 가장 밀접하게 교유하였으며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공의 병이 위중해지자 선생이 달려와서 병문안을 하고 약을 썼으며, 돌아가시자 직접 염을 하고 안치하였는데 애도와 예의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본가에 관으로 쓸 판목이 없어서 선생이 관과 곽으로 쓸 재목을 부의로 내었고 장례를 지낼 때 또 산소에 머무르면서 장사를 지냈으니, 평소에 서로 어울렸던 마음을 알 수 있다.
성주와 밀양 두 고을의 향교, 서원, 향소에서 각각 교생, 원생, 품관 등을 보내 글을 지어 조문하고 제사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또 부의까지 드렸으니 오래 될수록 잊지 못하는 뜻 역시 상상할 수 있다.
공의 첫째 부인은 이공도(李公度)의 따님 전의 이씨로, 진사 이정윤(李貞胤)의 손녀였다. 자녀를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다. 둘째 부인은 본관이 진주인 선전관 정수익(鄭受益)의 딸이자 수사(水使)를 지낸 정은부(鄭殷富)의 손녀였는데,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남편은 정연(鄭沇)이다. 셋째 부인은 영산 신씨(靈山辛氏) 신여근(辛汝謹)의 딸이자 광주 목사(光州牧使) 신륜(辛崙)의 손녀인데 딸 하나를 낳고 요절하였다. 부실이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딸은 요절하였고, 아들 신동인(辛同寅)은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었다.
[주-D001] 하공(河公) : 하진보(河晉寶, 1530~1585)로, 본관은 진양, 자는 선재(善哉),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주-D002] 재상(災傷) : 수재ㆍ한재, 또는 풍해ㆍ병충해로 인해서 발생한 곡식의 피해를 말한다.[주-D003] 남천(南川) : 현 경상남도 밀양시의 밀양강이다.[주-D004] 겸춘추(兼春秋) : 각 고을의 문관 수령(文官守令)이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 이하 관직을 겸임(兼任)한 경우에 일컫는 말이다.[주-D005] 달호음산(達好音山) : 현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월아산(月牙山)이다.[주-D006] 윤원형(尹元衡) : ?~1565.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1533년(중종28)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소윤(小尹)의 우두머리로 1545년(인종1)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大尹)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집권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배경으로 대윤 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집권 20년 만인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박탈당하고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주-D007] 김식(金湜) : 1482~1520.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는데 거창으로 피했다가 자결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저술로 《사서집》이 있다.[주-D008] 작지(作紙) : 조세를 거두어 창고에 넣는 과정에서 그 장부를 꾸밀 때 쓰는 종이, 또는 명부를 만드는 일을 말한다.[주-D009] 모곡(耗穀) : 환자(還子) 곡식을 받을 때, 곡식을 쌓아둘 동안 축이 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한 섬에 몇 되씩을 덧붙여 받던 곡식을 말한다.[주-D010] 배덕문(裵德文) : 1525~1603.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巖)이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저술로 《서암선생실기》가 있다.[주-D011] 포흠(逋欠) : 관물(官物)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주-D012] 술이 …… 거르겠다고 :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주-D013] 화락한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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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庵集 卷十二 / 行狀 / 司諫河公行錄 【代作】
遠祖諱拱辰,仕高麗爲左司郞中,使契丹不屈而死,贈門下侍郞同平章事。高祖諱起龍,通德郞通禮門通贊。曾祖諱鮪,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祖諱禹治,通訓大夫安州牧使。考諱淑,承仕郞。妣咸從魚氏,嘉善大夫司諫院大司諫得江之女。
公以嘉靖 庚寅六月初四日生。生而岐嶷,氣骨超凡,聰明過人。讀書不過三遍,而輒成誦不忘。壬子,丁外艱。乙卯,登文科,始選爲承文正字,薦爲藝文館檢閱、奉敎、待敎,爲承政院注書,爲侍講說書,司書。
癸亥,以兵曹佐郞,充冬至使書狀官赴京,公能漢語,不須譯官,華人稱之。使還踐歷臺省,則正言、持平、獻納、掌令也。轉遷各曹,則兵、禮、刑,佐郞、正郞也。除成均館者三,司成、司藝、典籍也。差災傷御史者四,關東、湖西、湖南也。此等,歷職,皆在癸亥以後,而日月先後,未可考也。
丁卯秋,除善山府使,庚午罷,壬申除安州牧使,中道病辭。癸酉入爲宗簿寺正,司僕寺正,尋拜掌令,遞爲司藝,復出爲星州牧使。乙亥秋,以災傷罷歸。丙子冬除尙衣院正,丁丑除禮賓寺正,以推鞠敬差官,治忠淸道淫婦獄。入爲司藝,遷右通禮,以病遞,秋除金海府使。
戊寅冬,以司諫召,中道辭病。己卯冬,除密陽府使,壬午夏,以南川船破當遞,一府士民遮道圍城。城門外鎖者月餘,事聞,朝廷仍任焉。癸未,以事罷歸。凡內外除授,皆兼春秋。晩年亦薦錄弘文,乙酉拜左通禮,恩命未至而公已易簀,十月十五日也。享年五十六。翌年二月初七日,葬于烏谷 達好音山先塋之側坎山之原。
公德性寬厚,風神秀偉。平居無疾言遽色。友愛出天,人無間言。畦畛不見於外,而是非有嚴於內。喜稱人之善,而於不善,不與焉。其在臺官也,彈刻尹元衡,而南冥先生致書賀之。又論雪府使河珽之冤,河以己卯之禍匿金湜事,被誅而久未得伸者也。
至於莅官,淸儉自守而務祛弊政。以恩愛撫民而民懷其德;以嚴明御吏而吏不敢欺。簿牒雲堆,剖決如流,斷訟必循公道,而作紙未嘗捧木。尤留意學校,力加勸導,行養老宴,必親自執爵以酬。春秋釋奠,社稷、城隍等祭,必齊沐親行。
凡衣服之資,絲布之備,必令家奴出家穀換用,未嘗責辨於官吏。自奉甚薄,而於親族窮乏,無不極力周恤,人以厚族稱之。
星州倉穀,幾三十萬石,陳腐相因,名存實無,民不勝其弊。公卽散以二分,歛以一分,以耗穀充其元數。民用蒙惠,思切去後,謀擬立石,而爲裵德文所阻,裵以土豪,曾爲公所制者也。
金海則府多逋欠,取積久難徵者,悉焚其券,節費而充其數,有去思之碑。
至於密陽,民俗尙鬼。府中有一神祠,士女奔趨,有求必禱。公命曳出神像,沈之于江,由是妖孼遂除,舊汚盡革焉。又習成好訟,婦人多入訟庭。每以廉恥曉之,有恥且格,末年無是弊。社稷、城隍位板,例置官廳,汚衊莫甚,公建宇壇邊以藏之。又立齋舍於外以爲所,其去也亦立石頌德焉。
公於仕宦之際,未嘗枉道干進苟冀顯。雖公議不遺,欲其陞秩,薦望同副承旨及東萊府使,而皆未受點。位不稱德,終於堂下,命也。公於家食之日,日與兄弟,怡愉一堂。有酒醑我,和樂且湛。或至夜分乃罷,雖風雨,未嘗一日廢也,友愛之篤,人皆歎服。
與守愚堂 崔先生,交遊最密,往來源源。及公之病革也,先生馳到,問疾救藥,及其纊也,親恤歛殯,備盡哀禮。本家無棺板,先生以內外棺槨之材賻焉,葬時又爲留山所,以克襄事,平日相與之意,可見矣。
星州、密陽二邑之鄕校、書院以及鄕所,各遣校生、院生、品官,爲文弔祭而又致賻焉,其愈久不忘之意,亦可想矣。
公先配,全義 李公度之女,進士貞胤之孫。生子女俱夭。中配,晉州宣傳官鄭受益之女,水使殷富之孫,生一女,壻曰鄭沇。後娶靈山 辛汝謹之女,光州牧使崙之孫,生一女而夭。副室生男女,女夭,男曰同寅,丁酉被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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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 사간 하공 묘비명〔司諫 河公 墓碑銘〕
공의 휘는 진보(晉寶), 자는 □□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고려 때 휘 공신(拱辰)이 좌사낭중 벼슬을 하였는데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굽히지 않고 죽어서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추증되었다. 공은 그 후손이다. 증조부 휘 하유(河鮪)는 창신교위 행 충무위 부사과를 지냈다. 조부 휘 우치(禹治)는 통훈대부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부친 휘 하숙(河淑)은 승사랑이다. 모친은 함종 어씨(咸從 魚氏)로 가선대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어득강(魚得江)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6월 4일에 공을 낳았다.
어릴 적에는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영특하였고 남달리 총명하여, 글을 세 번만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예문관에 들어가서 직책을 세 번 바꿨는데 검열ㆍ봉교ㆍ대교 등이었다. 승정원에서 주서를 맡은 것이 두 번이었고, 시강원에서 설서ㆍ사서를 역임하고 병조의 낭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경사 서장관이 되었는데, 공이 중국어에 능통하였기에 명나라 조정 사람들이 유능하다고 칭찬하였다. 뒤에 좌랑ㆍ정랑에 제수되었는데 병조, 예조, 형조에서였다. 전적ㆍ사예ㆍ사성은 성균관에서 지낸 세 관직이다. 네 번이나 재상어사(災傷御史)가 되어 해서, 호서, 호남 등지로 다녔다. 시(寺)와 원(院)의 우두머리를 지냈으니 종부시, 사복시, 상의원, 예빈시 등의 좌ㆍ우통례였다. 사간원에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는데 정언ㆍ헌납ㆍ사간이었다. 사헌부에 들어간 것이 두 번이었는데 지평과 장령이었다.
일찍이 권간 윤원형을 탄핵하자 남명 조식 선생이 서신을 보내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부사 하정(河珽)이 기묘년(1519, 중종14)에 화를 입고 죽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신원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비로소 논하여 씻어주었다. 외직으로 나가 주(州)와 부(府)를 맡아 다스린 것이 모두 다섯 번인데 성주(星州)에서 목사를 한 번 지냈고, 선산(善山)ㆍ김해(金海)ㆍ밀양(密陽)에서 부사를 지냈다. 성주 창고에 저장된 양곡이 수십만 섬이었는데 썩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곡식을 빌려주고 받을 때 항상 예전 장부 숫자에 의해서 행하니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러워했다. 공은 곡식을 빌려줄 때는 두 배로 주고, 받을 때는 반만 받아서, 가모(加耗)로 그것을 보충하였다. 가모는 수령이 자기가 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는데 공은 그것을 공적인 것으로 돌렸다. 온 고을이 덕을 입었고 국가의 재정도 축나지 않았다. 공이 떠나고 나서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하려 했는데 공에 대해 감정을 품고 있던 어떤 토호가 그 일을 저지하였다.
김해는 포흠(逋欠)이 쌓인 지가 오래라 환수하기가 매우 어려워 그 해악이 장차 적지 않을 듯하였다. 공은 그 문권을 가져다 태워버리고, 관용 물자를 절약하여 채워 넣었다. 사간으로 부름을 받고 명에 따라 부임하다가 중도에 병이 들어 사직하고 돌아왔다. 백성들이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비석을 세워 그 선정을 칭송하였다.
밀양은 백성들의 풍속이 귀신을 좋아하여 밀양부 경내에 요사스런 사당이 있었는데 사대부 집안 여자들이 모여들어 서로 풍속을 더럽히고 난잡하게 굴었다. 공이 그 신상(神像)을 끌어내어 강에 던져버리니 요사스럽고 의혹스러웠던 일들이 비로소 해소되었다. 예전의 나쁜 습속이 조금 쇄신되니 마치 몽매함을 깨고 하늘의 해를 보는 것 같았다.
송사를 좋아하는 것이 습속이 되어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송정(訟庭)에 들어와 다투고 송사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공이 항상 염치로 가르치고 깨우치니 오랜 시간이 흐르자 점점 고쳐졌다. 3년이 지난 후 남천강(南川江)에서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었다. 감독 소홀로 체직을 당했는데 선비와 백성들이 성문을 닫은 채 공을 에워싸고 지키면서 한 달이 넘도록 농성을 풀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대로 두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밀양부 백성들도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내임이든 외직이든 직책에 걸맞아 백성들이 편안히 여겼고, 내직으로 들어가나 외직으로 나오나 항상 춘추관의 관직을 겸했다.
공의 너그러움과 중후함은 천성이었다. 정신과 기상은 평이하고 온화하였으며 즐겁고 평안하였다. 평생 다급한 말과 황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바라보기만 해도 그가 화락한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안에 있을 때는 우애 있고 화락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 일처리와 사람을 대할 때는 시비를 따져서 안을 밝히되 모나게 드러나는 일은 속으로 감추었다.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은 기뻐하며 칭찬하였고 불선은 용서하였으니 그 덕과 도량은 남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공무에 임해서는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송사를 처리할 때는 공명정대했다. 백성을 인애로 어루만지고 아전은 엄하고 분명하게 다스려 백성들은 공을 사랑하고 벼슬아치들은 공을 두려워하였으니 고인의 풍모가 있었다. 학교를 일으키고 노인을 봉양하였으며 인재를 기르고 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일에 힘써서 양로연을 자주 열었고 권면하고 깨우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그중에 큰 것이다. 장부와 문서를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대나무를 쪼개듯 막힘없이 처리하여 미뤄두는 법이 없었으니, 공에게는 여사일 뿐이었다. 선성을 존모하고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행했는데, 이 또한 공에게는 평소의 행동이었다.
관직에 있을 때의 의복은 집안의 힘으로 충당해서 썼고, 송사를 결단할 때는 돈을 받지 않았으니 곧 공에게는 잗다란 일이었다. 자신을 위한 쓰임새에는 박하였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는 후했으니 이것이 공이 능한 일이었다. 벼슬살이할 적에는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나아가려고 한 적이 없었다. 만년에 홍문관에 천거되었고, 또 승선(承宣)에 의망(擬望)되었으나 단지 은명을 받지 못하고 나이 56세에 돌아가셨으니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아 식견 있는 사람들이 심히 아쉬워했다.
공은 수우당 최영경 공과 마음을 터놓고 사귀었다. 공이 병들자 수우당이 직접 와서 문병하였고, 공의 병이 심해지자 직접 탕약을 조제하였으며, 공이 돌아가시자 곡을 하고 염습을 하였는데, 모두 슬픔을 다하고 예를 갖추었다. 공의 집안에 관곽으로 쓸 재목이 없자 수우당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부의로 내었다. 장례 때 어진 사람의 곡식을 구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는 것인데 공은 최공이 주신 것으로 몸에 지니는 물품을 삼았으니 그 영광으로 말하자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성주와 밀양 두 고을에서는 각기 유생을 보내 제사를 올리고 부의를 내었으니 오래될수록 공을 잊지 못한 것이다. 공은 처음에 이공도(李公度)의 따님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재취 부인은 선전관 정수익(鄭壽益)의 따님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출가하지 않고 있다가, 공이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마친 후 유학 서산 정씨 연(沇)에게 시집갔다. 연은 나의 아들인데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죽었다. 연에게는 외아들 릉(棱)이 있는데 사간 오여은(吳汝檼)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소실이 자녀를 낳았는데 딸은 어려서 죽었고 아들 동인(同寅)은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백도(伯道)에게 후사가 없었으니 사람이 어찌 천도(天道)에 유감이 없겠는가?
공의 형님의 아들 성(惺)이 의리상 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공이 살아계실 적에 형님의 아들 척(惕)을 후사로 삼았는데, 척이 돌을 다듬어 묘에 세우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완성하지 못한 채 전쟁 중에 몸을 보전하지 못하고 죽었다. 릉(棱)과 진사 징(憕), 현감 성(惺) 등이 의논해서 비석을 준공하였으니 이로써 척의 뜻을 이루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월아산 한 언덕에 유택이 있으니 / 好音一岡幽宅在
조부, 부친, 형님이 이곳에 있네 / 有祖若考兄在斯
여기가 공의 묘지, 봉분은 넉 자 / 寔公塋丘封四尺
한 조각 비석을 세웠네 / 樹一片石
썩지 않을 것이 남아 있으니 / 不朽者存
산과 더불어 나란히 영원하리라 / 山與齊壽
[주-D001] □□ : 하진보의 자는 선재(善哉)이다.[주-D002] 공신(拱辰) : 하공신(河拱辰, ?~ 1011)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거란의 성종이 강조(康兆)를 정벌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고려를 침입하여 이에 맞서 싸우던 강조가 통주에서 죽자,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을 회복했다. 거란군을 피해 남행하는 왕을 쫓아가, 정전교섭을 자청하여 호부원외랑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거란병영으로 가서 성종을 설득하여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는 거란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거란 왕에게 거짓 충성을 바쳐 신임을 얻은 후 고려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연경(燕京)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거란 왕이 정해주는 여자와 혼인해 감시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그는 탈출 때 이용하기 위해서 준마(駿馬)를 사서 고려로 통하는 길목의 곳곳에 두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져 거란 왕에게 잡혀가 문초를 당했다. 거란 왕이 자신의 신하가 되라고 회유했으나, 죽어서도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완강히 거절해 죽음을 당했다. ‘하공진’으로 읽기도 한다.[주-D003] 하정(河珽) :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사휘(士輝), 호는 죽설헌(竹雪軒)이다. 김해부사로 있던 기묘년(1519, 중종14) 겨울, 김식(金湜)이 무함을 당하여 도망 중에 있을 때 하룻밤을 재워주었다 하여 권간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잡아서 죽이고 가산을 적몰하였다.[주-D004] 가모(加耗) : 후당(後唐)의 명종(明宗)이 창고에 들어가 수납하는 것을 관찰하였더니, 주리(主吏)가 많이 거둔다고 꾸짖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고는 하소연하기를, ‘창고를 관리하는 자가 가산을 다 털어 넣어 축이 난 것을 채워 넣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에 명종이 불쌍하게 여기고 조서를 내려 ‘이제부터는 한 섬당 두 되를 더 취하여 새와 쥐로 인하여 축이 나는 것〔雀鼠耗〕을 채우라.’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가모(加耗)라는 것이다. 《석림연어(石林燕語)》[주-D005] 남천강(南川江) : 현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주-D006] 연(沇) : 1571~1692. 자는 형보(滎甫)이다. 임란 때 부친을 따라 의병 활동을 하다가, 전장에서 병사하였다.[주-D007] 릉(棱) : 1590~1624. 자는 여고(汝觚)이다.[주-D008] 오여은(吳汝檼) : 1561~1633.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융보(隆甫), 호는 낙애(洛厓)이다. 1613년(광해군5)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주-D009] 백도(伯道)에게 후사가 없었으니 : 백도는 진(晉)나라 등유(鄧攸)의 자(字)이다. 백도가 난적(亂賊)을 만났을 때, 일찍 죽은 아우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버리고 갔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晉書 券90 良吏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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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庵先生文集卷之十三 / 碑文 / 司諫河公墓碑銘
公諱晉寶。字▣▣。晉州人。高麗時。有諱拱辰。仕爲左司郞中。使契丹不屈死。贈門下侍郞同平章事。公其後也。曾祖諱鮪。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祖諱禹治。通訓大夫安州牧使。考諱淑。承仕郞。母咸從魚氏。嘉善大夫司諫院大司諫得江之女。嘉靖庚寅六月四日生公。幼時岐嶷不羣。聰明絶人。讀書三遍。輒不忘。乙卯登文科第。爲承文院正字。入藝文館。三遷職。檢閱也奉敎也待敎也。於銀臺。爲注書者再。於待講院。爲說書爲司書。轉爲騎曹郞。充赴京使書狀官。公
通華語。天朝人稱其能。後除佐郞正郞。兵禮刑曹三也。典籍司藝司成。成均館三職也。四爲災傷御史。海西,湖西南等路也。爲寺院長。宗簿司僕,尙衣,禮賓左右通禮也。入諫院者三。正言也獻納與司諫也。入柏府者二。持平與掌令也。嘗劾權奸尹元衡。南冥曺先生致書稱奬。府使河珽。被乙卯禍。死久未伸。始論雪之。外知州府事者凡五。牧一星州也。府三。善山,金海,密陽也。星之倉儲數十萬斛。陳腐不可食。散收常依舊數。民甚病之。公散二而收一。用加耗補之。加耗。守令認爲己用。公擧歸之公。一州飮德。國計亦不屈。公旣去。民追其惠。將立石記績。有土豪挾撼者沮止之。金海之逋欠積久。徵還甚難。爲害將不細。公取其券燒之。節官用以足之。以司諫召赴命。中途病辭歸。民久而不忘。立碑頌其政。密則民俗好鬼神。府境有妖祠。士女坌集。仍相穢亂。公曳出神像。投之江。妖惑始解。舊染稍新。如發蒙覩天日。好訟習成。士家婦女多入庭爭訟。不以爲恥。公常以廉恥曉諭。久而漸革。越三年前江船敗。有溺死者。照監當遞。士民閉城門圍守。月餘不解。事聞許令仍任。府民亦立石頌德焉。內任外治。職稱而民安之。出入常兼春秋。公寬厚天性也。神氣平和樂易。平生無疾言遽色。望之知其爲愷悌君子也。居家友愛和樂。人不間焉。其臨事接物也。是非內明。圭角外藏。喜稱善而容不善。德量有人所不及者。莅官淸儉。聽訟公明。撫民以仁愛。御吏以嚴明。民懷吏畏。有古人風。以興學養老。育人才尊高年爲務。頻設老宴。勸誨不倦。此其大者也。至於簿牒望委。剖斷無滯。特公餘事耳。尊先聖祭社稷。必齋沐身親。亦公之庸行也。在官衣服。辦用家力。決訟不受紙貨。乃公之細行也。薄於自奉而厚於恤窮。是公之能事也。仕宦未嘗枉曲干進。晩錄弘文。又擬承宣。特未蒙恩命。年五十六而終。位德不稱。識者深惜之。公與崔公守愚心交。公病。守愚親來問疾。其革也。親用湯劑。其沒也。臨哭襲歛。皆哀盡而禮備。家無棺槨材。守愚擧所儲賻焉。葬得仁者之粟。古人所榮。公得崔公賜爲附身具。其榮孰大焉。星密兩邑。各遣儒生。來祭致賻。愈久不忘也。公初娶全義李公度女。生子女俱夭。再配晉州宣傳官鄭壽益女。生一女。未出家。公下世喪畢。嫁幼學瑞山鄭沇。沇。仁弘之子也。不幸短命死。只有一子棱。娶司諫吳汝穩女。生子女俱幼。小室生子女。女夭。男同寅。被倭奴擄。伯道無嗣。人豈得無憾於天道也。公之兄子惺。以義承公祀。公在世以兄子惕後。惕伐石將樹墓。不幸未果。兵火中身亦不保。棱與進士憕,縣監惺等謀。竣石役。以成惕志焉。銘曰。
好音一岡幽宅在。有祖若考兄在斯。寔公塋丘封四尺。樹一片石。不朽者存。不朽者存。山與齊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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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庵集 卷十三 / 碑文 / 司諫河公墓碑銘
公諱晉寶,字□□,晉州人。高麗時,有諱拱辰,仕爲左司郞中,使契丹不屈死,贈門下侍郞同平章事。公其後也。曾祖諱鮪,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祖諱禹治,通訓大夫 安州牧使。考諱淑,承仕郞。母咸從魚氏,嘉善大夫司諫院大司諫得江之女,嘉靖庚寅六月四日,生公。
幼時岐嶷不羣,聰明絶人,讀書三遍,輒不忘。乙卯,登文科第,爲承文院正字。入藝文館,三遷職,檢閱也、奉敎也、待敎也。於銀臺,爲注書者再,於待講院,爲說書、爲司書,轉爲騎曹郞。充赴京使書狀官,公通華語,天朝人稱其能。後除佐郞、正郞,兵ㆍ禮ㆍ刑曹三也,典籍、司藝、司成,成均館三職也。四爲災傷御史,海西、湖西ㆍ南等路也。爲寺、院長,宗簿、司僕、尙衣、禮賓,左ㆍ右通禮也。入諫院者三,正言也、獻納與司諫也。入柏府者二,持平與掌令也。
嘗劾權奸尹元衡,南冥 曺先生致書稱奬。府使河珽,被己卯禍死,久未伸,始論雪之。外知州府事者凡五,牧一星州也,府三,善山、金海、密陽也。星之倉儲數十萬斛,陳腐不可食。散收常依舊數,民甚病之。公散二而收一,用加耗補之。加耗,守令認爲己用,公擧歸之公。一州飮德,國計亦不屈。公旣去,民追其惠,將立石記績,有土豪挾撼者沮止之。
金海之逋欠積久,徵還甚難,爲害將不細。公取其券燒之,節官用以足之。以司諫召赴命,中途病辭歸,民久而不忘,立碑頌其政。
密則民俗好鬼神,府境有妖祠,士女坌集,仍相穢亂,公曳出神像,投之江,妖惑始解,舊染稍新,如發蒙覩天日。
好訟習成,士家婦女多入庭爭訟,不以爲恥。公常以廉恥曉諭,久而漸革。越三年,前江船敗,有溺死者。照監當遞,士民閉城門圍守,月餘不解。事聞,許令仍任,府民亦立石頌德焉。內任外治,職稱而民安之,出入常兼春秋。
公寬厚天性也。神氣平和樂易,平生無疾言遽色,望之知其爲愷悌君子也。居家友愛和樂,人不間焉。其臨事接物也,是非內明,圭角外藏。喜稱善而容不善,德量有人所不及者。
莅官淸儉,聽訟公明。撫民以仁愛,御吏以嚴明,民懷吏畏,有古人風。以興學養老,育人才、尊高年爲務,頻設老宴,勸誨不倦,此其大者也。至於簿牒望委,剖斷無滯,特公餘事耳。尊先聖祭社稷,必齋沐身親,亦公之庸行也。
在官衣服,辦用家力,決訟不受紙貨,乃公之細行也。薄於自奉而厚於恤窮,是公之能事也,仕宦未嘗枉曲干進。晩錄弘文,又擬承宣,特未蒙恩命,年五十六而終,位德不稱,識者深惜之。
公與崔公 守愚心交。公病,守愚親來問疾。其革也,親用湯劑,其沒也,臨哭襲歛,皆哀盡而禮備。家無棺槨材,守愚擧所儲賻焉。葬得仁者之粟,古人所榮,公得崔公賜爲附身具,其榮孰大焉?
星、密兩邑,各遣儒生,來祭致賻,愈久不忘也。公初娶全義 李公 度女,生子女俱夭。再配晉州宣傳官鄭壽益女,生一女,未出家,公下世喪畢,嫁幼學瑞山 鄭沇。沇,仁弘之子也,不幸短命死。只有一子棱,娶司諫吳汝檼女,生子女俱幼。小室生子女,女夭,男同寅,被倭奴擄,伯道無嗣,人豈得無憾於天道也?
公之兄子惺,以義承公祀。公在世以兄子惕後,惕伐石將樹墓,不幸未果。兵火中身亦不保,棱與進士憕,縣監惺等謀,竣石役,以成惕志焉,銘曰:
好音一岡,幽宅在。
有祖若考,兄在斯。
寔公塋丘,封四尺。
樹一片石,不朽者存。
山與齊壽。
[주-D001] □□ : ‘善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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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암집(拓菴集) 김도화(金道和)생년1825년(순조 25)몰년1912년자달민(達民)호척암(拓菴)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유치명(柳致明)의 문인. 강건(姜楗), 김흥락(金興洛), 유도성(柳道性) 등과 교유
拓菴先生文集卷之二十九 / 墓碣銘 / 司諫院司諫晉陽河公墓碣銘 幷叙
公諱晉寶字德哉貫晉陽。始祖諱拱辰。高麗左司郞中贈門下侍郞同平章事。中世有諱湜晉康君。高祖諱起龍通禮門通贊。曾祖諱鮪彰信校尉。祖諱禹治安州牧使。考諱淑承仕郞。妣咸從魚氏。灌圃得江之女。公生於嘉靖庚寅六月四日。幼而岐嶷。聦明絶人。讀書三遍輒不忘。及長師事南冥先生。以爲依歸焉。甞與大兄晉平君國寶,姜淸州源入于昆陽多卛寺。竆晝夜誦讀。神疲睡至則以巾繫腰而不掇。老僧感其勤苦。每朝以白粥進之。慰曰生員勉之哉。夢有黃龍升天。二金龜從之。此非常之兆也。乙卯文科。其立朝履歷則承文正字也。藝舘檢閱也。奉敎注書也。侍講院說書也。以騎曹郞充赴京書狀官。則通解華語。嘖嘖稱善。後遷兵禮佐郞正郞也。成均司藝司成也。實簿司僕尙衣禮賓左右通禮也。獻納持平正言司諫也。其在掌令則上箚論効尹元衡。南冥先生致書稱奬焉。外知牧府者五。安州也星州也善山也金海也密陽也。又爲湖西灾傷御史。其在星州也。倉儲數十萬斛陳腐不可食。斂散常依舊數。民甚病之。公散二而收一。用加耗補之。闔境賴之。旣去民立石紀績。其在金海也。積久逋欠。徵還甚難。爲害不細。公遂取其卷燒之。節官用以足之。倡建南冥先生書院于山海亭舊址。倡起文學。州之人士立碑不忘。其在密陽也。民俗好鬼。境有妖祠。士女坌集。公取神像投之于江。士夫家婦女多入公庭。不以爲耻。公敎以禮讓。喩以廉耻。痛革其俗。又船沒前江有溺死者。照舊當遞。士民閉城門圍守月餘。事聞許仍任。府民立石頌德。名曰仁政碑。及當大故。無附身之木。守愚崔先生以棺材賻之。時人以得仁者之賻。莫不大悅。歲乙酉終。享年五十六。用禮月葬于達音山先壠之側。其後壬辰之亂。焚蕩無數。及到丹池村。禁使勿楚焚。附賊者多金海人故也。二百餘年之後。金海士林有配享山海之論。因邦禁未果。配全義李氏公度之女。後配晉陽鄭氏壽益之女。後公歿。附于墓左。無子以晉平君第七子惺爲后縣監。生四男達遠修義副尉,達悠無后,達道出后,達長進士。達遠男潽,沅以學行著。達道男洺生員,泓。達長男涑。餘不盡錄。嗚呼。公以卓異之姿。生文獻之庭。早得依歸。見聞益親。望實隆於當日。遺風及於後世。豈非附靑雲而名益顯者歟。雖然兵燹之餘。文蹟蕩然。無得而尋逐其影響。獨晉陽之誌班班可攷。師友之評表表有稱。此可以觀公之平生矣。何庸贅焉。後孫振源之請。積歲不已。故強疾叙次之。爲之銘曰。
公早摳衣。方丈之門。薰陶德性。聞見益親。以之爲官。玉署淸班。以之州郡。治績菀然。邑誌垂靑。日星聞錄。我鑱玆石。昭于無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