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장을 끼고 조화造化로운 정원으로 나온다. 어깨와 어깨 사이 매듭이 풀릴 때 옷소매로 팔이 나오지 않았다. 사라진 팔을 찾아 서성거리는 곳, 빅아일랜드에 나는 가자.
여보 조심히 다녀오세요.
남편이 먹다 남은 커피잔과 어제 구워 팔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치운다. 이른 새벽 발렛 일 나가는 남편의 입술은 바다향 품은 시큼한 코나 커피 향으로 가득하다.
화산을 먹어야 한다
음, 여보 오늘은 주말이라서 바빠질 거야 (나빠질 거야)
한쪽 뺨에 키스를 한 후, 손해를 본 건 뺨일까 입술일까, 궁금함으로 나는 가자, 빅아일랜드의 빅브라더처럼, 한 손에 알로아 포즈를 취한 다음 차에 오른다. 빅매치 가 종을 울린다.
두 볼 상기된 발렛 아내
코나 커피 향 가득한 엉덩이 스텝을 치며 빵 구우러 버려진 부엌으로 나는 향한다. 복화술- 속옷 바람으로 대문 밖으로 쫓겨나던 소녀의 입안 구체를 말한다. 돌돌 녹여 먹는다. 나는 움직일 수 있는 관절만 사용하면 된다. 비겁한 말이 저주의 말을 낳을 때마다 사라진 팔뚝이 움직인다. 소녀들의 관절을 숨긴 아버지, 한 움큼 금발의 나라로 가자, 눈썹이 하나 둘 질식이다.
차량 많은 주말 거리를 뚫고 가풀막을 향하여 머리에는 빵을 이고 간다. 화산 속에 사라진 팔을 던지고 내일의 팔짱은 내일로 가자.
거울 뉴런
박기준
봄빛이 창문 틈에 끼여 헐떡거리던 거실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강남스타일 노래에 아빠의 말춤을 따라 하는 천사 거울이 춤을 춘다
어머니의 늘어진 하품이 할머니 품으로 들어간다
텔레비전 귀여운 여인을 바라보며 햇살 품은 얼음같이 녹아내리고 웃음이 전염되어 온다
지옥의 문에서 향기가 솟아나고 나락의 늪에서 꽃이 피고 도파민이 만든 또 다른 세계
천지를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는 광풍 문장 속에 고립된 작은 집 식량처럼 줄어드는 단어와 안개처럼 사라지는 감정
버리지 못해 잊지 못하는 것 기억으로 포화한 행간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불완전하여 믿을 수가 없다
태곳적부터 모방의 천재 닮고 싶어 하는 욕망, 세포가 필사하는 시 늙은 베르테르가 어설픈 시어에 잡혀 시인 흉내 내다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광장 속의 거울 옆으로 늘어선 나를 흘끔 쳐다본다 나의 모습은 진짜일까
노을 낀 망각보다 무서운 거울 뉴런 깨진 거울, 부서진 조각마다 내가 갇혔다
자폐, 시
[심사평]
신춘문예는 문학 지망생에게는 모두가 설레는 자리이면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자리이다. 그러기에 이를 심사하는 심사자들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예심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을 여러 번 읽으면서 이들이 표출하는 내용들이 모두가 오늘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심사자들은 여기서 한두 가지 조건을 더 염두에 두었는데 가장 유념한 것은 신인다운 패기와 도전 정신이었다.
다음으로는 이 시인이 시 창작을 하는데 얼마만큼 지속가능한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 였다. 단순히 작품만을 보고 다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기준을 놓고 볼 때 다음의 두 작품에 눈길이 갔다. 하나는 신재화 씨의 「푸날라우 베이커리」였고 다른 하나는 박기준 씨의 「거울 뉴런」이었다.
「푸날라우 베이커리」는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과 꿈이 부부를 통해 가볍고도 상쾌하게 전개되고 있다. 생업에 쫓기는 그리 밝지만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긍정의 메타포가 생기있게 시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모더니티를 지향하면서도 비판보다는 화해의 동일화를 추구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거울 뉴런」의 작품을 통해 시적화자는 “지옥의 문에서 향기가 솟아나”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 시적 상상력은 그리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흡입력이 있다. 광장에 만약 어마하게 큰 거울이 있어 거기에 우리의 기억들이 재생된다면 광풍과 작은 집과 감정 사이의 어느 모습이 과연 우리의 참 모습일까? 정상의 말 흐름을 방해하면서 시적화자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점이 두 작품에서 다 새롭다. 문제는 틈 사이가 잘 맞지 않아 삐꺽거림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조만간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을 하였다. 두 작품을 가작으로 밀어 올린다. 정진을 바란다.
“예술적 경험 속에서 예술가는 자기 사진을 객관적 대상으로 만나게 된다.”라는 조루조 아감벤의 말이 떠오릅니다.
[당선소감]
나를 되돌아보는 변곡점의 글
“예술적 경험 속에서 예술가는 자기 사진을 객관적 대상으로 만나게 된다.”라는 조루조 아감벤의 말이 떠오릅니다.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의 직관에서 한 발 짝 물러선 자아적 관찰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해석하려는 고통의 밤이 길었습니다.
그만큼 ‘詩’ 쓰기는 저에겐 무모한 도전이었고 시의 모양도, 시의 내심도 종잡을 수 없는 허상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백이나 틈을 느끼고 싶을 땐 시집을 만지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내 안의 이야기들을 모두 토해 내고 난 뒤에야 자아를 객관화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 응모한 작품들은 이 사회의 한 사람의 딸로서,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나를 되돌아보며 자아와 화자의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변곡점의 글들입니다. 페미니즘이나 선민의식의 발로는 한 조각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저의 글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시대의 구성원으로서 나를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첫 단추임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지역 문학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열심히 쓰고 기억하고 아파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충남 보령 화산리 선산에 35년째 계신 어머니 아버지께 당선 소식을 전합니다.
신재화 시인
글로써 풍경화 그리는 설레임
가난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차비를 아껴가며 헌책방에서 시집을 사서 읽었습니다. 삶이란 무엇이지? 에 대한 물음에 해답이 나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같은 질문을 한 친구와 2년을 삶과 죽음과 존재 이유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하고 문학에서 답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뜻이 통해 의형제를 맺고 ‘밥 먹고 사는 게 먼저이다’라는 어설픈 정의를 내고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렇게 시는 노을 낀 망각보다 무섭게 거울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3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난 후 그 친구가 시집을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시는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모처럼 내리는 함박눈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점심에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하나의 풍경이다. 미리 그려진 풍경이 아니라 하나하나 내가 그려야 할 풍경이다. 그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글을 시로 만드는 작업이다.’ 김부회 시인님의 가르침대로 삶과 자연과 인간을 시의 중심에 놓고 글로써 풍경화를 그려 볼 생각입니다.
시를 놓고 싶을 때마다 따뜻한 격려를 해 주시는 김부회 선생님, 김신영 교수님 고맙습니다. 글향동인 문우들, 국민일보 신춘문예회 회원들, 그리고 언제나 나의 곁을 사랑으로 지켜주는 아내, 그 밖의 가족들 고맙습니다. 부족한 저의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오륙도 신문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오륙도 신문이 빛나도록 더욱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