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대첩은 1920년 6월 7일에 벌어졌는데, 그보다 사흘전인 6월 4일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에서 먼저 벌어진 전투가 그 전초전이었다.
헌병 1개 소대가 전멸한 것은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일제는 보복하기 위해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월강 추격대대가 두만강을 건넌 것은 어둠이 칠흑같이 깔린 6월 6일 오후 9시경, 새벽에 독립군을 기습한다는 전략이었다. 일본군은 7일 새벽 봉오동을 향해 고려령 서편으로 진입했다....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는 이미 일본군의 보복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오전 8시 30분경에 봉오동 입구에 도착했다. 봉오동은 아무런 인적이 없었다. 홍범도 장군의 지시로 모두 숨은 것이었다.
일본군의 주력 부대가 포위망 깊숙이 들어왔다. 일시에 3면의 고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했다...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일본군 사상자가 속출했다. 포위망 안에서 무려 3시간을 버티던 일본군은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자 결국 도망갈수 밖에 없었다. 이때 강상모가 지휘하는 독립군 2중대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또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측 자료에 의하면 참패한 일본군은 도망가는 길에 봉오동에 남아있던 어린이 등 민간인 16명을 학살한 다음 패잔병을 이끌고 19사단 본부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 대첩'의 경과이다.
상해 임정 군무부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병, 경상 100여명의 큰 타격을 입었고, 아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고 발표했다.
한편 중국 신문인 <상해시보>는 이 전투를 크게 보도했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도 봉오동의 승전보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이 소식은 10여년간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던 민족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당당 한국사, 이덕일, 20017년, 도서출판 아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