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時着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는 몇 장 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요즈음 "봄날은 간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들려오곤 해요. 그것을 제목으로 한 시들도 많고 영화도 찍고 얼마전엔 노래도 나왔죠? 그런거 보면 K형은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카프카식 명칭으로 그냥 K라 부를게요.)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그런데 K형의 시 [봄날은 간다]와 다른 것들은 뉘앙스에서부터 많은 차이가 있어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몇 가지 말하고 싶군요.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보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봄이 오면 만화방창하여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인데 유독 황무지에선 그런 봄의 생동하는 기운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죠. [봄날은 간다]의 모티브는 바로 그 선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시인이 맞이하는 봄은 단순한 환절기로서의 봄이 아니라 황무지=현실의 가정하에 받아들이는 고통스런 봄이죠.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실패(물질적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한 삶의 한 단면이고 화자의 시선은 그런 상처받은 것들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갑니다.
/2時着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버스, 그것을 툇마루에 앉아 망연히 바라보는 여자, "서울집"이라는 선술집 상호에서 느껴지는 도시에 대한 동경과 염증, 외상값처럼 오늘 내일하다 때론 잊어버리고 날마다 무료하게 반복되는 대낮의 이미지는 황무지의 배경입니다. 2시라는 시간적 배경이 따가운 햇살로 박혀 있는 신작로에 자욱하게 날리는 흙먼지들.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그 황무지에는 여러 부류의 인간군상이 존재합니다. 젓가락 장단에 맞춰 술을 마시며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는 사내도 있고, 한탕주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화투판도 어김없이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물론 판돈이 작고 소일삼아 시간을 때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끝내는 멱살잡이를 하다 지쳐 뿔뿔이 흩어져 갑니다. 화려한 문화생활의 도시와 대비되는 소읍의 빈곤함, 이런 실제의 경험(소설이나 티비, 영화를 매체로 간접 경험한 것이 아닌)은 시인의 시세계를 이루는 근간일 뿐더러 독자들로부터 암묵적인 신뢰를 이끌어내는 작용을 합니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
소읍의 빈곤함은 문화생활 뿐만 아니라 가사노동에로 이어집니다. 세탁기는 커녕 수돗가조차 없어 시냇가까지 빨래를 이고 나가는 여자. 여자의 잔등에 피었던 풀꽃들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집니다.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는 이농현상이 상징의 기표로 남아 있는 부분인데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라는 구절이 황무지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요.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조치원이라는 시를 참고), 군대에 끌려갔다가(개인적인 생각인데 군대는 입대가 아니라 끌려가는 것.) 휴가를 받아 돌아온 앳띤 얼굴의 군인 등은 황무지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이 아니라 황무지의 현실을 재확인 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은 물질적 부의 획득에 실패한 모습이기도 하고, 술에 취해 누이 얼굴조차 몰라보는 정신의 황량한 모습으로도 드러납니다.
/여자는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술집 작부인 누이를 비몽사몽 바라보는 군인과 뭇사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돌맹이처럼 채였던 여자. 그들에게 있어 자연적 현상의 봄은 그리 반갑지 않은 황무지의 형벌이고 내용물 없이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봄날입니다. 상실되어진, 어쩌면 가난에 묻혀 기억 속에서 잊혀진 생의 봄날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을 겁니다. "넌 꿈이 뭐니?" 물으면 "대통령이요."라고 대답했던 아이도 있었고 노을이 질 때까지 마냥 들판을 걷던 아이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분가루처럼 흩날리는 햇빛을 받으며 아이들은 그림자의 길이변화처럼 빠르게 자랍니다. 그 와중에 몇몇은 헤어져 이름조차 가물하고 단지 미루나무 그늘에 함께 누웠던 얼굴만 떠오를 뿐. 어른이 된다는 건 사막의 열풍을 홀로 견뎌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씨앗을 뿌리고 새싹이 돋고...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흙과 풀, 그리고 밥짓는 연기와 냄새가 그리워지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는 몇 장 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어떻게 보면 봄날이라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령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춘하추동의 위계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와 세계관에 좌우되는... 그러기에 시인은 /봄날이 가면 그뿐/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이라도 넘어야 하는 언덕(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골고다의 언덕과 유사. [폭풍의 언덕] 참고)이고 결국에는 흙먼지들이 황무지, 아니 생명이 돋는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 것임을 시인은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던 진눈깨비가 포근한 대지의 품으로 스며들듯이.
**이제 그곳은 봄이군요.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파릇한 새순처럼 문득, 당신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벌써 3월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내년이면 벌써 서른이라는 현실과 고향을 떠나온 8년의 시간들. 상상이 되나요. 인간의 기억중 어느 특정한 시기의 공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에요. 난 말이죠. 가끔 그런 게 두려워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빠져버린 느낌. 예를 들면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 호명을 할 때 그는 대답하지 않아요. 이 세계에 분명 존재는 하지만 내 곁에 부재하는 이름들, 그들은 마치 오래된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아주 가끔 그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향냄새 가득한 들길, 노곤한 햇살의 무르팍, 그리고 차르륵 돌아가는 영사기... 당신이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을 무렵의 봄날들이 눈 앞에 환영으로 펼쳐질 때, 그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