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남이는 그 동안의 공로를 적어 올렸다.
많은 도움을 받은 유자광의 공도 그대로 적어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것을 심사하여
귀성군 이준과, 함길도 절도사 허종, 진북 장군 강순, 남이 등에게
적개 공신 1등의 상을 내렸다.
그런데 유자광은 정 5품의 병조정랑에 그쳤다.
'남이 이놈, 두고 보자! 제가 나 아니었다면 어떻게 공을 세워.'
유자광은 공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조정에서는 유자광이 서자라 하여 공로를 낮추었던 것이다.
난이 진압된 뒤에도, 여진족의 한 갈래인 건주위의 무리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고 또 명나라도 괴롭혔다.
"명나라에서 여러 차례 건주위의 무리를 무찔러 달라고 하였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도다!"
세조는 강순, 어윤소, 남이에게 군사를 주어 건주위를 치도록 하였다.
남이는 군사를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만포진에 적의 소굴이 있었다.
건주위의 추장 이만주의 무리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오라캐들아! 내 칼을 받아라."
남이는 앞장서서 돌격하여 적을 마구 쓰러뜨렸다.
파저강 기슭은 적의 시체가 자꾸 쌓였다.
오랑캐들은 조선 군사들의 용맹함을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놈들을 한 명도 놓치지 말라!"
남이는 오랑캐를 마구 무찔러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세조는 서북변의 건주위를 무찌르고 온 남이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병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17살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왕가의 외손 남이 장군은,
27살에 이미 한 나라의 군사권을 쥐는 병조판서가 된 것이다.
조정의 일부 대신들은
남이의 출세를 시기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세조는 그들을 엄하게 눌렀다.
남이는 병조판서로 일을 잘 처리하였다.
하지만, 일부 대신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이를 헐뜯었다.
세조는 더 이상 남이를 두둔할 수가 없어서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다음날인 1468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상감마마……."
남이는 대궐로 달려가서 그 동안 자기를 아껴 주던 세조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 다음 임금은 예종이 올랐다.
한편, 유자광은 아직도 병조정랑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서자가 그만한 벼슬을 차지한 것도 남이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유자광은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대궐로 들어간 유자광은 예종에게 남이를 모함하였다.
"전 병조판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사옵니다."
"무엇이라고?"
예종은 깜짝 놀랐다.
자기와 동갑인 남이는 세자 시절에 세조의 총애를 받을 때도 경계한 인물이었다.
"남이는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옛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여러 사람에게 말했사옵니다."
"그 말을 한 것을 가지고 그라는 거요?"
"아닙니다! 남이가 변방에서 읊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하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나이 스무 살에는 나라를 얻고야 만다는 뜻이옵니다!"
"어허, 저런 괘씸한 놈 봤나."
예종은 즉시 남이를 잡아 가두도록 하였다.
남이는 꽁꽁 묶여 옥에 갇혀 있다가, 국문(임금이 직접 문초함)을 받으러 나왔다.
'대체 누가 나를 모함하였을까?'
아무 것도 모르는 남이는 물끄러미 예종을 쳐다보았다.
예종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놈, 역적 네 죄는 네가 알렸다."
"대체 누가 뭐라고 모함하였사옵니까?"
남이는 기가 막혔다.
"역모를 하고서도 시치미를 떼는구나!"
"저는 역모한 사실이 없사옵니다."
"저놈이 누구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느냐.
바른 말이 나올 때까지 매우 쳐라!"
고문이 시작되었다.
내금위 군사들이 남이에게 호된 고문을 가했다.
예종 옆에는 영의정 강순이 지켜보고 있었다.
강순은 남이와 함께 여러 번 싸움터에 나간 적이 있었다.
남이는 강순에게 변명해 달라는 눈짓을 하였으나,
강순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의 억울함은 영상 대감(강순)이 잘 알 것이옵니다."
남이가 겨우 말을 했지만, 강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남이는 모르는 척하는 강순의 태도가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서 누구와 역모를 하였는지 대어라!"
예종은 다시 호통쳤습니다.
남이는 고문을 받아 온 몸의 살이 터져서 살아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간신히 입만 움직일 수 있었다.
"전하, 딱 한사람과 모의하였습니다."
"딱 한 사람? 그가 누구인고!"
"영의정 강순입니다."
순간 강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남이가 변명해 달라고 했을 때 고개를 돌린 내가 잘못이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강순은 의리를 저버렸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날벼락을 맞았다.
"전하, 거, 거짓말입니다. 저자가 변명을 해 주지 않아서 앙심을 품고 한 말이옵니다."
강순은 쩔쩔매었다.
예종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갈팡질팡하였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고?"
예종이 남이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소신은 여러 번 강순과 함께 싸움터에 나아갔고,
그 때마다 임금을 없애기로 모의했사옵니다.
또 요즈음에도 강순과 함께 전하를 단칼에 목베기로 단둘이 결정하고,
동지를 모으기로 합의했습니다."
"에이, 이놈 강순도 함께 묶어라!"
예종의 분노가 폭발하자 강순은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놈, 남이야! 죽으려거든 너 혼자 죽을 일이지 왜 아무 죄도 없는 나를 끌어들이느냐?"
강순은 부들부들 떨면서 남이를 노려보았다.
"의리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영상은 빨리 죽어야 하오.
영상께서는 헛늙었소. 나이 팔십도 헛 먹었소. 벌레처럼 더 살아서 무엇하겠소?"
남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변명을 안 해 주었다고 그러느냐?"
"세 살 먹은 어린애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소.
싸움터에 나아가 목숨을 내놓고 싸운 우리가 아니겠소?
그런데 이제 와서 혼자만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니,
그게 어디 사내 대장부로서 취할 태도요?"
"우리는 지금 누군가의 모함에 빠져 죽게 되는 거야!"
강순이 감옥 안에서 외치는 소리를 먼발치에서 유자광이 듣고 있었다.
☞ 유자광의 흉계에 말려든지도 모르는 남이는
28살의 아까운 나이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강순은 남이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변명 한 마디 안해 준 탓으로 80살로 덩달아 억울하게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