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통한 시조 근대화 작업, 가람에 의해 비로소 완성
22세 때 주시경 선생 만나면서 국어를 통한 민족 사명감 생겨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년여 옥고를 치르고 창씨개명도 거부
신재효 관련 자료 등 수천 권의 고서 수집, 국문학의 기초 제공
가람이 주장한 ‘서민정신’의 이론, 근대의 기점을 18세기로 끌어올려
가람 이병기.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 가랴 하니 /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 불어온다 /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든다 / 찬 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위 작품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의 연시조 ‘시름’이다. 전주시 다가공원의 가람시비에 새겨 있는 작품으로 일제강점기를 견디며 살아온 시인의 뼈저린 내면 풍경을 다소나마 헤아릴 수 있게 한다. 시대적 절망감 속, 시조 관련 작업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왔으리라. 시 창작을 주제로 하는 다음 시에서 이를 엿보게 한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 이생의 영과 육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 할 수 없고나”(‘시마’(詩魔) 일부)
가람은 1891년 조선 말기에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서당에서 8세부터 18세까지 한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차후 수천 권의 고서 수집과 한문학 연구의 기초가 된다. 중국의 사상가인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읽고 신학문에 눈을 뜬 가람은 전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만에 마치고(1910년), 그해 서울의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1912년에는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수강하며 국문법과 신문명에 몰두하게 된다. 1926년 ‘카프’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국민문학파가 형성되었고, 육당과 춘원을 중심으로 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육당을 중심으로 한 시조운동은 계몽적 성격을 띠어 이전 시대의 시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바, 진정한 의미의 시조부흥운동은 이병기, 이은상, 정인보, 조운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시조문학사에서 도구적 언어가 아닌 존재론적 언어의 시 창작을 지향했다. 그중에서도 가람 이병기는 사물 탐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존재론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어떤 이념이나 관념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미학적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별’ 일부)
가람은 시조에 대한 근대적인 미의식을 체계화된 논리로 제시하였다. 그의 시조 근대화 노력은 1920~1930년대에 《동아일보》, 《신생》 등에 20여 편의 시조론을 발표하며 구체화된다. 이론뿐 아니라 시조의 창작에서도 현대시의 기본적인 속성 중의 하나인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매우 중시했다. 그가 이루고자 한 시조의 근대화 노력은 민족이나 이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 시조 자체의 내용과 형식이 지니고 있는 미적 차원의 문학운동이었다.
우리 민족 유일의 정형시 시조를 통한 가람의 실천은 그 자체가 민족적 가치를 띤 작업이었고, 전통의 계승이었으며, 아울러 혁신을 내세워 변화를 시도하는 창조적 수행이었다. 그때는 1930년대 서구의 이미지즘이 도입되는 시기였는데, 이미지즘의 유입은 가람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시조는 혁신하자’라는 가람의 여섯 가지 주장과 당시 이미지즘의 주장은 그 일치하는 바가 크다. 가람은 시조 혁신의 여섯 가지 구체적인 방법으로 ① 실감실정(實感實情), ② 취재 범위의 확장, ③ 용어의 변화, ④ 격조의 변화, ⑤ 연작 쓰기, ⑥ 쓰는 법, 읽는 법을 제시하였다. 이를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도락성(道樂性)의 탈피와 리얼리티의 확립, 둘째 자율적인 감정의 구조와 정형(整形)으로 요약된다. 이는 사물에 본질적으로 접근하여 얻어지는 내밀하면서도 실감 있는 정서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작가 자신의 자율적인 감정 구조에 맞는 가락을 찾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람의 다음 시조들은 내용의 정밀감과 우리말 고유의 섬세한 가락을 조화시켜 생명의 순수성과 고결함, 인간 내면의 애틋한 정서를 ‘실감실정’의 차원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 하겠다.
가람 문학관. 익산시 여산면 소재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 한두 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 가려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오동꽃’ 전문),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 본대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난초·4’ 전문)
가람은 주시경 선생을 만난 이후 언어를 통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다. 31세 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고, 40대 이후에는 수년 간 전국을 순회하며 우리말 강연을 하였다. 1942년(52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그의 강직한 성품은 둘째 아들의 회고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정직한 분으로 불의를 보곤 참지 못하는 성품으로 관료사상과 권력, 재물에는 무관하셨으며, 조선어학회 홍원형무소 피검자 30여 명 중에서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않으신 어른이었다.”
『가람문선』에 수록된 165편의 시조는 조선어학회사건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기 시조(72편)는 ‘선비의식의 서정 미학’으로, 민족의 격동기 시인의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후기 시조(93편)는 ‘민족적 휴머니즘의 구현’으로 요약된다. 특히 후기 시조에는 암담한 시대 상황 속 인갑답게 살고자 하는 생존의식과 ‘귀거래’의 고향의식을 담고 있는바, 다음 ‘국제시장’은 6·25전쟁으로 인한 삶의 비참한 현실과 그런 속에서도 느껴지는 훈훈한 인정미를 그려냈다. “간밤 오던 눈이 두어 자나 쌓였다 / 급행열차가 연착 이십여 시간 / 그 좁은 곳간 속에서 모두 징역을 하였다 // 다시 와서 보니 부산은 국제시장 / 눈 녹은 거리거리 사뭇 수렁이다 / 그려도 어깨를 마구 비벼대며 사람들이 밀어온다”
해방 후 가람은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관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1946년 이후 4년 동안 서울대에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6․25전쟁 이후에는 전북전시연합대학에 취임하고(1951년), 전북대 문리대 학장에 피임되기도 하였다.(1952년) 1957년 67세 때 가람은 한글날 기념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 뇌일혈로 눕게 된다.
시조부흥운동을 하면서 국어와 신문, 잡지 등의 매체를 기본으로 하여 장르 변화를 이끌어낸 가람은 새로운 대중문화를 선도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후기에 부상한 ‘서민문학’을 처음으로 주목하였고, 그 문학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가람은 『국문학전서』(1957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실사구시의 학풍은 서민층을 발판으로 줄기찬 힘을 뻗기 시작하였다. 그러하매 문학도 자연히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으니, 저 허균의 『홍길동전』은 실로 그런 문학의 효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 서민문학의 백미로 극가(劇歌) 즉 ‘판소리문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극가는 그때 천대를 받던 광대‧기생의 작이요 창이었다. 광대‧기생에는 의협 호방한 천재적인 예술가가 많았다.”
가람은 ‘서민정신’의 발흥이 근대정신의 시작이며, 근대적인 변화는 곧 ‘서민문학’임을 『국문학전서』에서 선도적으로 보여주었다. 가람이 제시한 서민정신과 서민문학 이론은 근대의 기점을 18세기 영․정조대로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즉 우리나라의 근대의식은 서구의 것이 아닌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내재적, 자생적 근대화론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서민문학’에 대한 가람의 연구는 서지학자로서 방대한 양의 고문헌 자료를 수집한 그의 내력과 무관치 않다. 그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신재효’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고, 20여 년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 신재효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는 국문학사에서 신재효의 위상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삼불을 비롯한 후대의 판소리 연구자들에게 판소리 연구의 초석을 놓아주었다.
가람은 학문 연구에서 천재성보다 ‘공정’(工程)을 중시하였다. 이는 평생 시조의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서지학자로서 큰 활약을 남긴 그의 면모와도 맥이 통한다. 1909년(19세)에 쓴 한시에서 그의 그러한 특성과 포부를 엿볼 수 있다. “만국이 각기 동서로 벌여 있는데 / 큰 학자들은 뜻이 같지 않네. /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해 천지에 나아간다면 / 육대주 가운데 영원히 홀로 설 수 있으리.”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