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계산기를 자주 사용할 일이 생겼다. 일상적으로 익숙한 사물이지만, 평소 거의 사용하는 일이 없었던 탓에 이 사물과의 만남이 내게는 조금 낯설다. 손바닥만 한 계산기를 두들기면 머릿속의 어지럽던 연산이 바로 숫자화되어 나타났다. 계산기의 숫자는 짧은 자릿수나 긴 자릿수나 여지없이 분명해 보인다. 내가 직접 계산기를 두들기든, 타인이 계산을 해서 보여주든 계산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단 한 치의 오차 가능성도 의심하지 않는다. 간혹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계산과 계산기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도리어 '머리'지 계산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계산기는 소수점 단위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전적인 '믿음'에 의해 존재하는 사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믿음의 역설이다. 계산기는 이 사물을 만들고 사용하는 우리 자신의 '머리', 인간의 계산능력에 대해 스스로를 불신하게 만든다.
이런 믿음의 역설은 이 사물이 소수점 단위의 아주 긴 단위까지 정확하게, 그리고 거의 즉각적인 수준에서 계산해 주는 속도 때문이다. 치밀한 정확성과 속도로 인해 계산기는 언제나 인간 두뇌를 이기는 사물이 되었다.
사회학의 고전이 된 마셜 맥루한에 따르면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확장을 뜻하는 도구적 삶 전반 키다. 그는 '메시지'라는 말을 문자나 말이 전달하는 내용이 아니라, 신체 확장으로서 미디어가 변화시키는 삶의 모양새와 효과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작고 간단한 외형 속에 엄청난 효율성을 자랑하는 계산기는 뇌의 기능적 일부를 연장한 매우 편리한 '미디어'가 될 것이다. 생각해 볼 점은 역시 '메시지'다.
문명의 도구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심은 효율성의 비약적인 증대와 더불어 무엇의 약화와 위험성을 가져오는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계산기의 C 버튼(C는 clear를 뜻한다)이다. 정밀하게 계산된 숫자들을 간단히 초기화 상태로 되돌리는 C 버튼은 나타난 숫자가 절대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계산기에는 계산을 지울 때 쓰는 C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