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 유종인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 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 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신문의 쓰임은 무엇인가? 정보를 얻거나, 세상의 소식을 전달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닌가? 그런데 시인은 신문이 그저 하나의 종이처럼 언론이 아닌 다른 용도로 쓰일 때를 좋아한단다. 누에 발톱을 깎을 때 쓰는 받침으로 춘란의 썩은 뿌리를 다듬거나, 낙관에 인주를 묻혀 찍어보는 종이로, 소고기를 싸는 포장지로 자신의 손을 따라 본을 떠서 손을 대보는 성찰의 대상으로 신문을 사용한다. 신문의 본래 용도와 가치를 부정하고 신문의 또 다른 쓰임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익살스런 능청이 새롭다. 그런데 왜 시인은 신문의 다른 쓰임에 주목할까? 그 이면에는 신문이 신문답지 않은 것에 대한 야유와 비판의 시각이 있다. 편파와 과장 왜곡된 시각으로 국민을 속이고 분열 시키는 신문에 대한 지독히 냉소적인 통찰이 번뜩인다.
서상민 시인
첫댓글 용도와 가치를 부정하고 또 다른 쓰임을 발견하는 것이 착상의 일단계이기도 하구요.
시와 시평.다시 새로이 읽고 갑니다
박시인하고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 생각나네~~
@서상민 참 치열 했었지 그립다. 그 시절
신문이 불쏘시게로 전락해버린 현시대의 무관심 그 속에 숨은 매서운 질책이 곁눈질로 깨어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이렇게 곡진하고 능청스럽게 언론을 비판하는 시인의 혜안이 통괘합니다~~
신문의 어원을 찾아보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이나 사실을 알리고 해설하는 정기 간행물> 이라고 나옵니다. 그 신문이 언제부터인지 사실을 알리는 역할 대신 거짓으로 도배되고 있고, 권력자들이 악용하는 지면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을 바르게 전달하지 않는 언론인도, 알릴 권리와 의무를 저버리는 언론도 문제라는 사실에 우리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쓰임이 많은 신문으로 살아야 할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가야 할까? 요즘 내 문제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강한 부정과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어렵지 않은 비유로 표현하고 있네요~~♡♡ 서시인님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