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에 있어 특별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왕위에 오른 초기 업적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재위 21년(A.D.366) 조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의 업적이 전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누락된 것일까? 이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임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근초고왕은 장자파로서 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었고, 비류왕은 약 80세쯤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이때 비류왕의 장자는 일찍 죽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비류왕이 죽었을 때 그는 바로 왕위에 오를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2대 계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때 백제는 장자파와 차자파 간에 왕위를 놓고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346년에 12대 계왕을 제거하고 백제 13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문제는 이때 계왕에게도 성장한 아들이 있었다. 그 계왕의 아들이 바로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광왕(武廣王)이다.
많은 사람들은 백제의 건국지를 한반도 서울부근으로 이해하나 이는 옛 기록을 아주 잘못 해석한 것으로서 백제의 건국지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일원이고, 신라는 진황도 산해관 부근이며, 가야의 건국지는 진황도 창려 부근이고,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 부근이고,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이다. 이는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소위 한사군 중의 한 군인 낙랑군의 위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 사서들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 바로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이라 기록하고 있고,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만리장성이 시작된 진황도 부근이 바로 낙랑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으며,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했고,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백제, 신라, 가야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 근초고왕과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왕위 다툼을 했을 것인데, 20여 년의 내란 끝에 결국 무광왕이 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패한 무광왕은 어디론가 도망쳐야 했을 것인데, 관세음응험기에 "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바로 대륙에서 패한 무광왕이 도망쳐 지모밀지에 도읍을 정하고 다시 백제를 건국하는 상황의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근초고왕과 무광왕이 대륙에서 20여 년에 걸쳐 왕위다툼을 벌였으므로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조에 그의 20년 간의 업적이 기록될 수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고, 설령 왕위다툼에 관한 옛 기록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김부식과 고려의 학자들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그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빼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위다툼을 했던 기록을 남겨 놓을 경우 고려의 왕실 사람들이 백제의 기록을 보게 되어 왕위다툼이 가속화 될 우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무광왕은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후 지모밀지라는 곳으로 도망쳐 그곳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는데, 그 흔적인 왕궁터와 제석사지, 왕궁리 오층석탑 등이 한반도의 익산 금마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백제 유물은 4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학자는 한반도에서 백제의 유물이 4세기 중반부터 나타나자 백제 초기 역사를 완전 부정하고 백제가 4세기 중반에야 건국되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백제가 4세기 중반에야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주장이다.
이를 보면 4세기 중반에야 백제가 한반도로 진출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백제의 왕위쟁탈전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계왕의 아들이고 그가 바로 무광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근초고왕의 업적이 본격적으로 기록되는 시점이 바로 서기 366년부터이므로 무광왕이 한반도로 도망쳐와 반도백제를 새로 건국한 시점은 서기 365-366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대륙에서는 근초고왕의 대륙백제가, 한반도에서는 무광왕의 반도백제가 100여 년 간 별개로 존속하다가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고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다시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자 그에 반대하는 해씨들이 문주왕과 태자였던 곤지를 죽이고 삼근왕을 왕위에 올리자 반도백제 모도왕은 자신의 둘째 손자이며, 죽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었던 모대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올리는데 이가 곧 삼국사기 기록 속 24대 동성왕이고, 이로써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게 되는 것이다. 모도왕은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인 무광왕의 고손자로 보인다.
따라서 동성왕 때인 488년 490년에 북위와 백제와의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일어났던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백제 최대의 강역을 이룬 때는 근초고왕 때가 아니라 반도백제와 대륙백제가 통합을 이룬 동성왕 때이다. 그리하여 동성왕 때 북위가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대륙백제를 침공했으나 백제는 통합된 힘으로 그를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