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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세계와 주요 인물들
卍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Sakyamuni)
본명은 Gautama Siddhartha. 인도 코살라 왕국 샤키아 공화국 카필라바스투~? 인도 마가다 왕국 말라 공화국 쿠시나라. BC 6~4세기경에 활동한 불교의 창시자다.
석가모니라 칭할 때, 석가(釋迦)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Sa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며, 같은 취지에서 세존(世尊:또는 釋尊)으로도 불리는 등 많은 호칭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붓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불'(佛)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하며, 교리의 전개 과정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제자로서 다수의 붓다를 상정하여 소위 '부처'로 통용된다. 남방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는데, 고타마(Gotama:산스크리트로는 Gautama)는 석가모니의 성이다. 일부의 경전에서는 BC 1~AD 2세기 무렵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인도에서 널리 사용된 사카력(曆)을 만들어낸 사카(Saka)족도 석가로 쓰는 예가 있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항에서는 전설화된 석가모니의 생애를 가능한 한 역사상의 실재인물로 묘사하고, 그가 거의 신적으로 초인화된 인물로 신앙을 갖게 되기까지의 배경과 경과도 취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사상, 즉 가르침에 대해서는 '불교' 항목이나 개별적인 교리 항목으로 넘기고 세부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그의 가르침으로 취급할 수 있는 개별항목은 '무상ㆍ무아ㆍ법ㆍ사성제ㆍ삼법인ㆍ연기ㆍ열반ㆍ자비ㆍ중도ㆍ팔정도' 등이다.
1. 시대적 배경
BC 1500년경 서북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침입한 아리안족은 서서히 동남으로 이주하여 갠지스 강 상류에 정착했고, BC 9세기 무렵까지 베다 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다시 동쪽의 중류 지방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의 혼혈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구성과 문화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이 약화되고 새로운 사고가 양성되어 BC 6세기 무렵에는 새 계급이 출현했다. 비옥한 갠지스 강 유역에서 산출되는 농산물 등의 물자가 풍부해짐에 따라 점차 상공업이 성행하게 되어 다수의 소도시가 성립하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를 무너뜨렸고, 이와 동시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군소국가가 구성되어 귀족정치나 공화제적 정치가 실행되었으며, 이런 국가들은 이윽고 국왕이 통치하는 대국으로 병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시의 발전은 화폐의 유통을 성행하게 했으며, 상공업자들은 각기 조합을 구성하여 도시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더불어 종래의 고정적 사상이나 종교에 만족할 수 없었던 토착부족이나 혼혈화된 새로운 부족의 지위도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사상을 품은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와 코살라라는 두 대국을 중심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혁신적인 자유사상가들은 사문(沙門:노력하는 사람)이라 불렸다. 이들은 보통 6사외도(六師外道)로 분류되는데, 그중에도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푸타, 유물론자인 아지타, 회의론자 또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인 산자야, 도덕부정론자인 푸라나, 결정론자인 마칼리 등이 특히 잘 알려져 있었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그런 사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 탄생
석가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네팔과 인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한 지방인데, 현재의 지명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의 북방이다.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남으로는 갠지스 강으로 유입하는 많은 지류가 있어서 풍부한 물을 이용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국이었으며, 일종의 공화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다만 남쪽의 대국인 코살라국에 인접한 탓으로 주권은 코살라국에 종속되었지만, 자치권은 인정되고 있었다. 그런 석가족의 우두머리인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석가모니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마야(Maya)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반왕이라는 호칭에서 나타나듯이 석가족 집단의 우두머리는 라자(raja:왕)라고 불렸지만, 이는 통치자를 의미하는 군주의 칭호가 아니라 단순히 행정상의 수장(首長)이라는 직권을 의미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BC 6세기 혹은 BC 5세기에 석가족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약 100년의 시차로 견해가 갈리는 많은 이설(異說)이 있고, 특히 남방의 불교도는 BC 624년에 태어난 것으로 믿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은 태몽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석가모니를 낳기 전 아름답고 은처럼 하얀 코끼리가 그녀의 옆구리를 통해서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왕비와 수행원은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데바다하에 있는 친정으로 가던 중에 두 도시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던 룸비니(Lumbini)라는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부인이 살라나무에 오른쪽 팔을 올려 가지를 붙잡았을 때, 그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석가모니가 탄생했다고 한다. 석가족의 토템인 살라나무 숲은 룸비니라는 지모신(地母神)을 받드는 곳이었으므로 출산의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것은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신의 양팔로부터 발생했다는 《리그베다 Rigveda》 이래의 전승과 관련되어, 석가모니가 크샤트리아 계급의 출신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와 같은 종교적 위인은 보통의 방식으로는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또 인도에서는 오른쪽을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성립했다고도 볼 수 있다. 탄생 장소는 현재 룸민데이라 불리며 네팔의 영토에 속한다. BC 3세기의 유명한 아소카 왕이 그 탄생지를 기념하여 세운 석주가 후대에 그곳에서 발견되어 석가모니의 출생지임이 확인되었다. 생후 7일째에 어머니 마야 부인은 산후의 상태가 악화되었던 탓인지 사망했고, 석가모니는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에 의해 양육되었다. 생후 5일째 또는 7일째의 명명식에서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산스크리트로 '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뜻이므로 아마도 후대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의 성(姓)인 고타마는 '가장 탁월한 수소'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부족사회에 있었던 동물숭배, 특히 인도에서의 뿌리 깊은 소에 대한 숭배 관념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의 탄생에 관한 또 하나의 유명한 전설은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의 예언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날의 별자리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으므로 정반왕도 이 방면의 대가들을 불렀다. 아시타는 이 아이는 위대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든가 아니면 부처(覺者)가 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자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성장한 후의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탄생 전설은 석가족의 관심이나 의례를 고대 인도 당시의 표현형식으로 전하고 있는 점이 많고, 경전 역시 마찬가지로 고유한 표현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그 하나하나를 해명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관해서는 2월 8일, 베사카 달의 후반 8일 혹은 후반 15일 등 여러 전설이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를 취급한 것으로서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4월 8일이라 하는데, 이는 번역자가 인도의 베사카 달이 음력 4월에 상당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탄생일로 믿고 있으나, 남방의 불교도는 베사카 달의 보름날에 탄생ㆍ성도ㆍ열반이 있었다는 전승에 근거하여 '베사카 제(祭)'를 성대히 시행하고 있다(스리랑카에서는 '웨삭제'라고 함).
3. 젊은시절
브라만교의 문화는 이미 쇠퇴해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갠지스 강의 중류지역은 둘째 계급인 왕족과 셋째 계급인 서민들 사이의 신흥계급이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군소국가들이 서로 할거하면서 세력을 다투고, 비정통파의 사상가들도 많이 출현하여 논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왕인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국가를 통일하길 바라는 한편, 사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 즉 석가모니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가 속하는 나라는 예속적인 국가였으며, 그 세력을 미루어 보더라도 국가를 통일할 만큼의 힘도 없었다. 그는 사색에 잠기길 좋아하는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소극적이었으므로, 정반왕은 그 성격을 밝게 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증지부 增支部 Anguttaranikaya》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자신이 뒷날 그의 양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몹시 세심하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내 아버지의 거처에는 연꽃이 덮인 못들이 있었다. 하나는 푸른 연꽃의 못이고, 또 하나는 붉은 연꽃의 못이며, 다른 하나는 하얀 연꽃의 못이었는데 이것들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카시에서 산출된 최상품의 천으로 내 두건을 만들었고, 카시산(産)으로 내 상의와 속옷과 외투를……나에게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 지낼 곳과 여름에 지낼 곳과 우기(雨期)에 지낼 곳이었다. 비구들이여, 비가 내리는 4개월 동안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오직 악사들에 둘러싸여 즐기면서 궁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반왕은 문무에 걸쳐 특출난 능력을 보였지만, 싯다르타 왕자는 그런 경향을 지니지 않았다. 왕은 그를 결혼시키기로 생각하고 야쇼다라(Yaodhara)를 그의 배필로 맞게 했다. 석가모니의 청년시대를 말하는 전기는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이어서 그 진위를 판별하기란 매우 곤란하다. 경전에는 사촌동생인 데바닷타 등과 무예를 겨루고서 승자가 되어 아내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2가지 혼인방식이 묘사되어 있다. 승자가 됨으로써 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과 많은 여성들 속에서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인도의 서사시에도 자주 등장하므로 오히려 당시의 풍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서사시적으로 각색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도 생각된다. 왕인 아버지는 호사와 안락을 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를 만족시키려고 전력을 다했어도 젊은 왕자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고, 다른 관심사에 몰두했다. 석가모니는 나중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스스로 늙어가는 것이며, 그것을 피할 수 없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노쇠함을 보고는 골똘히 생각하여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나 역시 늙어가며 늙음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바로 늙어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늙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이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청년이면서도 청년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나 역시 병들 것이며 병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건강하면서도 건강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나 역시 죽을 것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생존해 있으면서도 생존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관심사는 다음에 소개할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과 직결된다. 싯다르타는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곤란에 봉착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나자 그는 "라후(障害ㆍ惡鬼)가 생겼다. 속박이 생겼다"라고 말한 데서 '라훌라'라고 이름 지었다고 경전에 나타나 있다. 이무렵의 일로 유명한 것이 사문유관의 전설이다. 어느 날 마부와 함께 동문을 거쳐 외출했을 때, 싯다르타 왕자는 허리가 굽고, 막대기에 의지하면서 걸을 때마다 비틀거리는 백발의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왕자에게 마부는, 그는 늙었으며 모든 사람은 오래 살면 노인이 된다고 했다. 그는 되돌아가서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념은 다른 문으로 나섰을 때 목격한 광경에 의해서도 계속된다. 어느 날 남문을 거쳐 다시 외출했을 때는 심한 병으로 쓰러져서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허위적거리고 있는 병자를 어떤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았으며, 마부로부터 이는 병든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은 병들기 쉽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서문으로 나섰을 때는 장례식의 행렬과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북문을 거쳐 나섰을 때는 한 사문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사람의 평화롭고 침착한 태도에 감명받은 왕자는 고통 속에서도 그토록 평정함을 견지할 수 있는 연유를 깨닫기 위해 결국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동서남북에 늙음ㆍ병ㆍ죽음ㆍ출가를 배치한 것은 시적 묘사에 지나지 않고, 세속의 삶과 그로부터의 이탈을 대비하여 출가의 동기를 교묘하게 묘사해낸 것이다. 충분히 성장한 나이에 이른 그가 노인과 병자와 장례식 혹은 시신을 보지 못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이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자면 심리학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현상이라도 그것은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사람에게 심리적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전설에서 늙음ㆍ병ㆍ죽음은 대체로 인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공통적인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연민에서 그는 출가하여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비록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된 전설이긴 하지만, 석가모니가 인생의 고뇌를 어떻게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출가로 유도하려는 암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석가모니의 젊은시절에 대한 전설은 그가 원래부터 사색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지만, 당시의 약육강식이라는 국가간의 다툼을 보고 석가족의 운명을 생각할 때, 젊은 싯다르타 왕자로서는 아무래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나라는 코살라국에 의해 공략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가 출가한 뒤에는 마침내 코살라국에 병합되었다. 자신의 나라를 둘러싼 불길한 분위기를 석가모니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 상극의 와중에서 비록 향락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심증의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혜택을 누리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가정을 버리고 출가 생활을 지향하는 의지는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4. 출가수행
본래 사색적인 성격인데다가 석가족이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점이 그의 출가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여기에 아들 라훌라의 탄생은 출가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더이상 지체했다가는 가정의 속박으로 인해 출가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당연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란 사문이 되는 것이므로, 그가 출가했다는 것은 브라만에 대항하는 신흥사상가들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사문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항상 편력하면서 숲에서 수행하고, 마을로 가서는 법을 설했다. 석가모니는 "나는 29세에 선(善)을 구하여 출가했다"고 술회했다 하여, 일반적으로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그가 출가하는 정경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자마자 그는 마부이며 시종인 찬나에게 그의 백마 칸타카에 안장을 얹게 하고는 침실로 가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 올 것을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나 찬나가 이끄는 말을 타고서 성문을 나섰다. 그날 밤으로 그는 시종 찬나와 함께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새벽녘에는 아노마 강을 건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장신구들을 찬나에게 주고, 찬나와 칸타카를 아버지에게 되돌려보내 출가의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지나가는 사냥꾼과 옷을 바꿔입어 고행자의 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석가모니의 전기는 그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빔비사라 왕을 만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빔비사라 왕은 그가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교제를 하게 된 인물인데, 여기서 그와의 만남을 전제해 둔 것은 전기작가의 문학적인 복선일지 모른다. 어쨌든 고행자가 된 싯다르타는 남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영적인 고행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그리고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에 도착했다. 라자그리하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번역어로 통용되는 지명이며 현재의 라지기르에 상당하는 곳이다. 낯선 고행자의 잘생긴 외모와 침착한 인품에 감명받은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는 언덕 기슭에 앉아 있는 그를 찾아갔다. 왕은 그 고행자가 예전에 왕자였음을 알아낸 후 그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고, 자신의 왕국을 분배하여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싯다르타는 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포기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시는 아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빔비사라는 그에게 깨달음을 성취하면 다시 라자그리하를 방문해주기를 요청했으며, 싯다르타는 이에 동의했다. 싯다르타가 가르침을 구하러 나서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라는 선인이었는데, 그는 명상에 전념하는 수행자였다. 싯다르타는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여 그로부터 대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고 오로지 말로 통하는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다음에는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의 곁으로 갔다. 그에게서는 이전보다 더 높은 신비적 경지를 배웠으나, 싯다르타는 이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경전에서는 알라라 선인이 추구했던 경지를 무소유처(無所有處)라 하고, 우다카 선인의 그것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한다. 이것은 초기의 불교사상에서 명상 수행의 정신적 경지를 단계적으로 표시하는 4무색정(四無色定)에 포함되는 것인데, 당시의 명상 수행자들은 여기에 역점을 두어 선정을 닦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도 "잘 정신차려 무소유를 기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함으로써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수타니파타 Suttanipata》, 1069)고 하여 무소유처의 명상을 가르치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자도 아니고, 잘못 생각하는 자도 아니며, 생각이 없는 자도 아니고, 생각을 소멸한 자도 아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무릇 세계가 확대되는 의식은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수타니파타》, 87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최초의 불교 사상이 발전해가는 과정이 발견된다. 아집을 버리는 무소유의 경지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서, 또는 허무론적으로 이해되는 경향도 있었던 탓인지, 이것도 타파했음이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석가모니는 고행주의자를 찾아 편력한다. 알라라ㆍ우다카의 곁을 떠난 석가모니는 마침내 힌두교의 성지인 가야에 도착한다. 네란자라 강 근처에 있는 우루벳라는 마을 부근의 숲에는 많은 고행자들이 있었다. 석가모니는 수정주의로부터 고행주의로 향하는 하나의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경전은 이런 수행의 시기에 대한 석가모니 자신의 많은 회상을 싣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전기(轉機)가 된 하나의 큰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석가모니를 단적으로 묘사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간다라의 고행상(2~4세기)이지만, 경전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모든 수족은 마치 울퉁불퉁한 뼈마디들로 되어 있는 쇠약해진 곤충처럼 되었고, 내 엉덩이는 마치 물소 발굽과 같았고, 내 등뼈는 공을 1줄로 꿴 듯이 불거졌고, 내 늑골은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았고, 내 두 눈의 동공은 마치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물이 반짝이는 양 눈구멍 속에 깊이 가라앉은 듯했고, 내 머릿가죽은 마치 덜 익은 채 잘려 쓰디쓴 조롱박이 태양과 바람에 의해 쭈그러지고 오그라든 것처럼 되어버렸고…… 내 뱃가죽은 등뼈까지 붙게 되었다. 내가 대소변 등 생리적 요구로 움직이고자 할 때는 즉시 그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으며, 내 사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같이 수행하는 석가모니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수타니파타》425~449). 고행으로 명상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곁으로 악마 나무치가 다가와 이런 식으로 유혹한다. "그대는 이제 곧 죽을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다. 베다를 학습하는 자로서의 청정한 행동을 하고 성화(聖火)에 공물을 바쳐야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러한 고행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나로서는 세간의 선행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에게는 신앙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라고 답하여 그 결의를 피력했다. 악마와의 문답은 많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바라문 우위의 관습에 대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것들을 초극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볼 수 있다. 다른 악마와의 문답에서도 석가모니 자신 속에 있는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부터 전래된 사상이나 번뇌와의 대결 등이 뒤섞여 있는 갈등이다. 거기서는 탐욕, 배고픔과 목마름, 쾌락 등 여성명사로 표현되는 악마도 보이며, 고행에 대한 석가모니의 고뇌도 묘사된다. 이런 악마의 유혹은 그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절정에 달한다. 악마는 석가모니 자신의 마음에 있는 또다른 일면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혹에 직면할 때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대결하여야 비로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고 석가모니는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도의 고행 생활이 6년간 계속되었다고 말하지만, 더 오랜 기록에서는 7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고난의 수행은 6년 또는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깨달음' 6년 혹은 7년에 걸친 고행이 결국 목적을 달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극도로 여윈 몸으로는 안락을 얻기 어렵다. 이제 나는 실질적인 음식인 우유죽을 섭취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함께 수행해 온 5명의 동료는 그가 우유죽을 먹는 것을 보고서 혐오하여, 그는 탐내고 노력하길 포기했다고 말하며 떠나 버렸다.
이 사건은 우루벳라의 세나니라는 마을에 사는 처녀 수자타(Sujata)가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나무의 신이 나타났다고 믿고서 석가모니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던 것이라고 예로부터 전해져 있다. 그러나 격렬한 고행으로 쇠약해져 있던 석가모니에게 이 우유죽은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체험은 나중에 그의 교리에서 중도(中道)로 반영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중에 보드가야라고 불린 장소에서 명상에 잠겨, 드디어 "아사타 나무 아래서 깨달음(보리)을 열었다"라고 표현되는 성도(成道)의 날이 도래했다. 경전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악마를 등장시켜 그의 가장 위대한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욕망 세계의 지배자요 유혹자인 악마 마라는 그를 굴복시켜 깨달음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큰 무리를 이끌고 석가모니에게 접근하여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지만, 석가모니는 전혀 동요됨이 없이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어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정진에 관한 가르침'인 《파다나수타 Padhanasutta》에 의하면, 마라는 그에게 접근하여 "당신은 야위었고 창백하며 거의 죽을 것 같다. 살아라, 그대여, 삶은 더 좋은 것이다. 가치있는 행위를 하라! 그러한 분투노력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욕망은 첫째, 너의 군대, 둘째, 고결한 삶에 대한 혐오, 셋째, 굶주림과 목마름, 넷째, 갈망, 다섯째, 무감각과 게으름, 여섯째, 겁많음, 일곱째, 의심, 여덟째, 위선과 냉혹함, 아홉째, 칭찬과 명예와 그릇된 영화, 열째,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다. 마라여, 이들이 너의 대군들이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그들을 이겨낼 수 없으나 오직 그들을 정복함으로써만 사람은 최상의 기쁨을 얻는다. 나는 네게 도전하노니, 만약 패배한다면 내 삶을 비난하라! 싸움에서 죽는 것이 패하여 사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결국 마라는 낙담하고 사라졌다. 이 싸움은 신화화된 선과 악의 투쟁, 즉 내적인 갈등이었다. 이 갈등의 극복으로 그는 정각(正覺)을 얻어 비로소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아사타 나무가 흔히 보리수(菩提樹)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날을 베사카 달의 보름날이라 하는데, 태양력으로는 5월경이 된다.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 하지만, 이는 음력 12월 8일에 상당하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날을 성도일로 경축해왔다. 석가모니의 나이 35(또는 36)세였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진리(法)를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인다. 그러자 '범천'으로 번역되는 브라마 신이 나타나 빨리 설법하기를 권한다. 소위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전설이다. 아마도 석가모니의 심중에는 설법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망설임이 오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망설임과 설법하려는 결의가 경전에서는 인도의 최고신으로 권위있는 범천이 권유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결의와 아울러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또 새롭게 발견한 법에 대한 기쁨을 음미하면서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7주간의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추구한 것은 인생의 모순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정주의자를 거쳐 고행주의자로 편력하면서도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양측에 분명히 인생도피의 경향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우유죽을 먹은 것도 이런 입장에서 이해된다. 즉 신체를 고행으로 심하게 괴롭혀도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서 그 고행으로 체험한 결과를 토대로 삼아, 몸은 현실생활의 상태로 두면서 불안을 해소하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항상 현실생활에 입각한 입장에서의 해결이 중시되었다. 이는 고행을 칭찬하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종교보다도 좋은 수행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점과도 연관된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전들마다 설하는 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12지인연,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관철하여 깨달았다고 한다. 이 도리에 의해 그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고서,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불변하고 항구적인 것 또는 사람의 안이나 밖에 영혼이라든가 자기 또는 자아와 같은 절대적인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게 된다. 석가모니 생존시에 체계화된 연기설이 성립되었을 것임은 확실하지만 당시는 훨씬 간단한 연기관(緣起觀)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달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조직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45년 동안 전도의 과정에서 성숙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현실의 생활 속에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거기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고자 노력했다.
여러 전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석가모니가 인간의 이법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법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 그 자체에 입각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중에 불교사상이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는 그 맹아가 여기서 발견된다. 석가모니가 항상 고정된 방식으로 설법하지 않고, 때에 따라 설하고 삶에 부응하여 설하는 소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중에 체계화되어 가긴 했지만, 연기의 본질적인 사고방식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당연했다.
5. 설법과 전도
석가모니는 7주간의 명상 끝에 이 법을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두 선인과 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미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베나레스로 떠나 갔던 5명의 동료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법을 전하고자 전도 여행길에 나섰다. 당시의 베나레스 교외에 있는 프르가다바는 녹야원(鹿野苑)으로 번역되는 곳으로 현재의 사르나트인데, 이곳은 수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거기에 와 있던 옛 동료인 5명의 수행자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석가모니가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맞이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깨달은 법을 정식으로 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설법이었다. 예전의 동료였던 5명은 그 법에 귀를 기울여 부처와 동일한 경지를 깨닫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유명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처음에는 친한 보살에게 법을 설하여 그것이 이해되자, 석가모니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하기에 이른다.
이 베나레스에서 상인의 아들인 야사와 그의 친구 3명, 다시 그들의 친구 50명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서 출가했다. 그러나 사문은 한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한 길을 둘이서 가지 말라"고 설하여 각각의 제자들을 전도의 여행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그 자신도 몇 사람의 제자들을 데리고 편력한다. 드디어 불을 섬기는 브라만으로서 마가다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카사파라는 이름의 3형제와 그들의 무리 1,000명을 귀의케 했다. 또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도 귀의하여 증대하는 불교 수행승들을 위해 나중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또 가섭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카사파도 제자로 삼았는데, 그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불교 교단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의 명성을 떨치게 했던 사람은 2대 제자로서 유명한 사리불(舍利弗 riputta)과 목건련(目連 Moggallana)의 귀의였다. 이들은 당시 불가지론자인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스승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사지라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탁발하며 지나가는 것을 본 사리불은 탁발이 끝나길 기다려 그에게 질문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일단을 설하는 그의 말에 감복하여 사리불과 목건련은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이끌고 집단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산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본래의 불교가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넘어 회의론 및 불가지론을 일단 통과한 입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이미 유명하던 사리불과 목건련이 석가모니 곁으로 무리를 끌고 전향했던 사건은 마가다에서 석가모니를 일약 유명하게 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받고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는 단서가 되었다. 경전에서는 "1,250명의 제자와 함께 머물고 계셨다"는 표현이 정형화되어 있는데, 그 숫자는 카사파 3형제가 이끄는 1,000명과 사리불 등을 비롯한 250명을 총칭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당시에 그만큼의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항상 전도 여행을 계속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舍衛城), 여기에 인접하는 바지국, 그리고 석가모니 생존시에 코살라국에게 멸망된 석가족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당시 갠지스 강 중류지방에는 사문들의 탁월한 지도자 6명이 잇달아 출현했다. 불교측에서는 이들을 '6사외도'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제자들과 문답하여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제자들 속에는 사촌동생인 아난(阿難 Ananda)과 아나율(阿那律 Anuruddha), 자신의 외아들인 라훌라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왕인 정반왕과 자신의 부인이자 라훌라의 어머니인 야쇼다라도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불교의 이단자로 간주되었던 사촌동생 데바닷타도 제자가 되었으나, 그는 실천에 관해 가장 보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불교에서는 가장 사악한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부처가 되기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석가모니에게 무엇보다도 비극이었던 것은 실질적인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사리불이 돌연히 죽고, 목건련도 바라문에게 맞았던 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교단의 지도자인 이 두 사람의 죽음은 실로 애통한 일이었다. 한편 일반 신자들 중에서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 코살라의 국왕 파세나디(Pasenadi),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기증한 것으로 유명한 수다타(Sudatta)가 있었다. 특히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수다타는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에 사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라자그리하에서 만난 석가모니에게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어 석가모니를 사바티에 초청하고 그를 위해 제타(Jeta 祇陀)라는 왕자와 원림[祇園]에 수도원, 즉 정사를 세웠다. 이것이 기원정사이다. 이곳은 사실상 석가모니가 활동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설법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밖에 비사카(Visakha)라는 여인이 기증한 녹모강당(鹿母講堂), 코삼비에 있는 정사로서 흔히 미음(美音)정사라고 번역되는 고시타원, 베살리의 대림중각강당(大林重閣講堂) 등 많은 정사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왕이나 부유한 상인이 불교 신자로 귀의했던 점이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동시에 신자가 증대되는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석가모니는 어느 사문 지도자보다 일찍이 출가승들의 집단생활을 도입했다. 그것을 상가(Samgha)라 한다. 흔히 말하는 승가(僧伽)가 이것이며, 불교의 교단을 가리킨다. 베나레스에서 5명의 수행자가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을 때를 승가의 성립으로 삼고 있는데, 그 승가에는 큰 특색이 있었다. 즉 출가 이전에 속했던 사회적 계급을 불문하고, 하루 또는 한 시간이라도 일찍 출가하여 계(戒)를 받은 자를 윗자리[上座]에 앉혔다. 이렇게 출가하여 수계한 이후의 햇수를 법랍(法臘)이라 한다. 이리하여 교단 내부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철저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교단에서의 이러한 평등주의는 기존의 사회 제도를 비판한 것인데, 그것이 교단 내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석가모니의 적극적인 이상주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승가에서 수행자 개인은 3개의 옷과 하나의 밥그릇[鉢盂]만을 소유하도록 한정되었고, 기증된 것은 모두 승가의 공동소유로 삼았다. 비가 쏟아지는 계절인 우기가 되면 수행자들은 정사를 중심으로 한 곳에 머물러 그간의 생활에 대한 반성과 학습에 전념했는데, 이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드디어 우기가 끝날 때면 포살(布薩 uposatha)을 실행하여 이제까지의 생활을 반성하고 참회했으며, 그 마지막 날에는 자자(自恣)를 실행하고 새로운 의복을 분배했다. 한편 제자 아난의 진력에 의해 여성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사부대중(四部大衆) 또는 사중(四衆)이라 불리는 불교 신도의 구성이 완결되었다. 사중이란 남성 출가자인 비구(bhikkhu), 여성 출가자인 비구니(bhikkhuni)ㆍ우바새(upasaka)ㆍ우바이(upasika)라고 재가(在家)의 남녀 신자를 말한다. 높은 이상을 내걸었던 승가의 정신은 인도의 고대사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6. 입멸
석가모니는 80세의 노령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45년 동안의 전도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노령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안 석가모니는 생애의 종말이 다가옴을 느끼고서 수도 라자그리하를 떠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 쪽을 향해 최후의 여행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질서에 관한 지침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아난에게 석존은 이제까지 남김없이 법을 설해 왔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처럼 감추어둔 진리는 없음을 밝히고,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유훈을 설한다. "아난아, 너 스스로를 너의 섬으로 삼고, 또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서 살아라. 법을 너의 섬으로 삼고, 법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라. 그밖의 어느 것도 너의 의지처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섬의 기원어가 '등'이라는 뜻도 지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 설법을 '자등명 법등명'으로 번역했다.
석가모니의 최후를 기록한 경전의 묘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도중에 대장장이 춘다(Cunda)가 공양한 음식이 쇠약해 있는 석가모니에게 심한 설사까지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나를 위해 2그루의 살라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누울 자리를 깔아달라. 아난아, 나는 피곤하다. 옆으로 눕고 싶다"고 말하고, 옆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했다. 특히 그는 슬픔에 싸여 울고 있는 아난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난아, 울지 말아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지워진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 또 석가모니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온 수바다(Subhadda)라는 이름의 고행자가 석가모니의 안녕을 걱정하는 아난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대화를 우연히 들은 석가모니는 그 고행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그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명확히 알고자 원하는 어떠한 의심이나 질문이 있다면 물으라고 3번이나 말했다. 그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그러면 비구들이여,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조건지워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대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설법이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 바로 곁에서 부축하고 있던 자가 아난과 아나율이라는 사촌동생이었던 점도 인상적이다. 석가모니의 사후 교단의 지도자가 되는 가섭이 석가모니가 임종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쿠시나가라로 달려온 것도 비감이 넘치는 장면이다.
편안하게 숨을 거둔 석가모니의 임종은 아름다웠다. 그날을 북전(北傳)에서는 2월 15일, 남전에서는 베사카 달의 보름이라 한다. 베사카 달은 인도의 달력으로는 둘째 달이고 보름은 15일이므로 실제로는 같은 날이다. 한국에서는 음력 2월 8일을 열반절로 기린다. 흔히 불멸(佛滅)의 연도라고 통칭되는 것으로서, 석가모니가 열반한 입멸(入滅) 연도에 대해서는 고래로 수많은 설이 있으나, 그것들은 남전과 북전으로 크게 양분된다. 석가모니의 탄생 연대도 이 입멸 연대로부터 역으로 계산한 것이다.
남전(南傳)에 의한 대표적인 것은 BC 543(또는 544)년 설로서, 현재 스리랑카ㆍ미얀마ㆍ타이 등지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는 특히 학술적인 근거가 희박하나 오랫 동안 널리 통용되어온 전승이어서, 현재 한국의 불교 종단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이것을 채택하고 있다. 북전에 의한 대표적인 설은 중성점기설(衆聖點記說)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매년 율장에 점을 하나씩 계속 찍었다고 중국에 전해진 전설이다. 이에 의하면 입멸 연도는 BC 483년으로 계산된다. 일본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 일본 일부에서 승인되기 시작한 것은 BC 386년 또는 BC 383년 설인데, 아소카 왕의 즉위를 불멸 116년이라고 하는 캐시미르 지방의 전승을 유력한 자료로 삼은 계산이다.
한편 아소카 왕의 출현은 불멸 후 218년이 된다고 하는, 스리랑카의 사료(史料)를 토대로 BC 486년이 불멸 연도라고 계산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많은 불전과 논서에서 전하는 아소카 왕의 즉위 연대는 불멸 후 100~160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어떠한 추정도 단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다만 연대에 무관심했던 인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만큼이나 상세하게 연도를 추정할 수 있다는 자체가 경탄할 만하다. 1주일 후 그의 시신은 쿠시나가라에서 말라족에 의해 화장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을 놓고서 말라족과 마가다ㆍ베살리ㆍ카필라바스투와 같은 몇몇 왕국 지도자들의 사절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도나(Dona)라는 늙은 사문이었던 브라만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그는 평화를 설파했던 분의 유물을 놓고서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합의를 통해 유물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8부분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그 유물을 안치하고서 석가모니의 유덕을 경모하는 구조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스투파(stupa), 즉 불탑(佛塔)이다.
이 불탑은 후대에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가르침을 집성한 결집(結集)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하자 제멋대로인 견해를 저마다 그가 설한 것인 양 내놓을 우려가 있음을 염려한 가섭은 제자들 중에서 500명의 정통 비구들을 선발하여,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 교외에서 경(經 sutta)과 율(律 vinaya)의 결집을 행했다. 아난이 암송하는 경 하나하나를 전원이 찬성함으로써 경장(經藏)이 편찬되고, 우팔리(Upali)가 암송하는 율의 조항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율장(律藏)으로 편찬되었다. 이로써 석가모니의 일반적 가르침인 경과 출가자의 교단생활을 규정한 율이 정식으로 제정되었다(→ 결집, 삼장).
7. 당대의 평가
그는 위대한 교사요, 사람들의 조련사로서 독특한 명성을 가졌다. 코살라의 왕에게조차 공포의 대상이었던 살인자요, 악한인 앙굴리말라(Angulimala)에 대한 그의 대화와 교화는 그의 위대한 능력과 재능이 드러난 본보기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거나 그의 가르침을 듣고서 매혹되었으며, 반대자들은 그가 어떤 '유혹적인 속임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서는 매우 빠르게 개종했다. 이런 사실은 코살라 국왕의 논쟁으로써 석가모니를 꺾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갔던 이들이 결국에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자비와 지혜로 가득 찬 그는 각자의 소질이나 수준에 따라 그들의 구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았음이 인정된다. 그는 단 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도 먼 거리를 갔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자들에게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던 그는 언제나 그들의 행복과 진보에 대해서 물었다. 정사에 머물러 있을 때면 그는 매일 환자들의 병실을 방문했다. 언젠가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방치한 병든 수행승을 돌보면서, "병든 이를 돌보는 자는 나를 시중 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회개혁자로서의 석가모니는 인도에서 오래 전에 확립되어 고수하고 있던 카스트 제도를 비난했고, 인간의 평등을 인정했다. 또 그는 경제적인 부와 도덕적 진보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형벌을 통해 죄를 억압하려는 것은 헛되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가난은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므로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이 증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전륜왕사자후경 轉輪王獅子吼經》을 비롯한 초기의 여러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바른 직업에 종사하고 진실을 말하며,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여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신뢰를 얻어 명예와 재산을 획득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러나 재산을 일방적으로 획득하는 데 그치고 단지 자신의 자본으로 보존해두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으며, 자신이 이용하는 동시에 타인과 같이 향수케 하여 유효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광야를 여행할 때의 길동무처럼 가난한 가운데서 나눠주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원한 법이다"라고 말하여 서로 협조하여 나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당시의 불교도는 국가의 문제에 관해서 국왕은 힘으로써 민중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서, 먼저 출가자들 사이에서만이라도 완전한 이상사회를 구축한 연후에, 그 정신적 감화를 통해 일반사회의 개혁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승가를 제정한 정신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국가를 완전히 무시하고 사회적 이상을 실현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연히 국가의 지도자를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몇몇 경전에서 국왕의 자질을 거론하고 있으며, 바지족의 공화제 정치를 칭찬했다고도 전한다. 불교 교단의 운영 방식에는 당시의 공화정치나 조합을 모방한 점이 있음이 인정된다. 국가에 대한 그의 지론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가란 진리인 법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석가모니는 엄격한 교사였다. 강대한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은 어떻게 석가모니가 비구들의 공동체에서 그러한 질서와 계율을 유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왕으로서도 인민은 물론이고 자신의 왕실에서조차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는 서로의 사랑ㆍ애정ㆍ존경에 기초하여 질서와 계율을 유지시켰다. 그에게는 많은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는 신통력에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다. 어느 때 제자들 중의 1명이 대중 앞에서 신통력을 과시하자 석가모니는 그를 꾸짖고서 재가신도들 앞에서 신통을 행하지 말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통이란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석가모니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종합해보면, 그는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이성적인 사상체계와 생활방식으로 인간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결심했으며, 그것을 실천했던 위대한 지혜와 자비의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위대한 지혜의 소유자요, 위대한 자비의 실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어서 교단 내부의 문제까지도 그의 지시에 따라 해결했지만, 그가 입멸한 후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를 사모하는 귀의자들에게 그의 입멸은 커다란 지표를 상실하는 사건이었다.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으라"라는 유언이 있었지만, 석가모니 부처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은 더 커져가기만 할 뿐이었다. 인간인 석가모니 부처가 사모의 정을 품고 있던 제자들에 의해 초인간적 존재로 바뀌어가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먼저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가 이미 신격화된 표현으로 불리게 된다. 이어서 그는 '부처'로 불리고 '고타마'라는 인간으로서의 성(姓)은 결코 사용되지 않으며, 이윽고 부처의 10가지 호칭, 즉 여래10호(如來十號)가 정해진다. 그것은 ① 완전한 인격자인 여래(如來), ② 존경해야 할 사람인 아라한 또는 응공(應供), ③ 바른 깨달음을 연 사람인 정변지(正遍知) 또는 정등각(正等覺), ④ 밝은 지혜와 실천을 구현하고 있는 사람인 명행족(明行足), ⑤ 행복한 사람인 선서(善逝), ⑥ 세간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인 세간해(世間解), ⑦ 최상의 사람인 무상사(無上士), ⑧ 거친 자를 제어하는 사람인 조어장부(調御丈夫), ⑨ 신들과 인간의 스승인 천인사(天人師), ⑩ 세상에서 존귀한 분인 세존(世尊)이다. 모든 것을 완수하여 불가능한 일이 없는 부처는 신체적으로 뛰어난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해석되기에 이르는데, 그 특징은 '32 상(相)'과 '80 종호(種好)'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인도인들이 신봉하는 신의 특징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이상적인 신체적 특색을 부처에게도 적용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법을 깨달은 자가 부처이므로 그가 아무리 초인적인 취급을 받더라도 석가모니 이외에도 부처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 7인의 부처가 있었다는 과거불(過去佛) 사상이 등장했다. 부처가 신격화됨과 아울러 부처에 대한 신앙도 강조된다. 아소카 왕 시대에는 이미 그러한 경향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편 석가모니 부처 사후의 교단 지도자들은 석가모니 한 사람만이 부처이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부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아라한과(果)라는 경지를 얻는 것만이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하여 석가모니와 구별했다. 이로부터 부파 불교의 고정관념이 시작된다. 이것은 현재 남장 상좌부의 기본적 사고의 하나로 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그뒤에 탑을 세움으로써 시작된 사리탑 또는 불탑에 대한 신앙은, 석가모니 부처의 육신이 남긴 사리에 대한 존경뿐 아니라 그가 남긴 모든 것에 대한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남긴 머리카락이나 가르침에도 신앙의 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후대에는 경전을 사리탑에 봉안하여 신앙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 자신에게 귀의했겠지만, 그가 입멸한 후에 이루어진 귀의는 모두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근거로 한 것이다. 아무리 진리인 법이 부처의 입을 통해 설해진 것이었다 하더라도 불멸 이후의 귀의는 법 그 자체에 대한 귀의와 동일시되고, 우주의 진리는 부처 그 자체라고 간주되었다. 불탑 숭배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소위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크게 전개되어, 법신ㆍ보신ㆍ화신이라는 3신설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법신(法身)이란 우주의 진리 그 자체를 부처의 신체라고 간주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진리, 즉 법의 영원성을 자각한 대승불교도가 부처에 대한 귀의를 표명하여 발전시킨 사상이다. 보신(報身)이란 부처가 되기 위해 과거에 위대한 수행을 완수한 그 보답으로 나타난 부처의 훌륭한 모습을 의미한다. 아촉불이나 아미타불 등의 구체적인 부처들은 보신이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누구라도 부처가 됨을 의미한다. '부처가 될 가능성'(佛性)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그 가능성이 번뇌에 덮여 있어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사고의 발전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부처가 된다고 설하는 데까지 전개된다. 또 무한한 선행을 거듭 쌓은 결과로 미래에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는 보증을 주는 사상도 생겼는데, 이를 수기(授記)라고 한다. 끝으로 화신(化身) 또는 응신이란 부처가 중생제도를 위해 수많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현실 세계에 내려와 나타내는 신체이다. 여기에도 상좌부 계통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입장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보살의 입장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양측 모두 석가모니 부처를 숭배하고 있지만, 후자로부터는 석가모니 부처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기본적 명제를 제창하면서 부처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대승사상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수많은 사상적 발전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의 영원성을 구하고자 노력한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석가모니의 전기가 집성된 것은 그가 입멸한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 산스크리트 계통의 것으로는 《마하바스투 Mahavastu》ㆍ《랄리타비스타라 Lalitabistara》, 마명(馬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슈바고샤(Avaghoa)의 《붓다차리타 Buddhacarita》가 있다. 중국에서 번역된 《불본행집경 佛本行集經》 60권은 《마하바스투》와 유사한 점이 있어서 이의 번역이 《불본행집경》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근래에 이러한 견해는 오해라고 밝혀져 있다. 《랄리타비스타라》는 《보요경 普曜經》 8권과 《방불대장엄경 方佛大莊嚴經》 12권에 상당하며, 《붓다차리타》는 중국에서 《불소행찬 佛所行讚》으로 변역되었다. 산스크리트 원전 없이 한역(漢譯)으로만 전하는 것은 《과거현재인과경 過去現在因果經》 4권, 《중허마하제경 中許摩詞帝經》 13권, 《불본행경 佛本行經》 7권, 《중본기경 中本起經》 2권 등이다. 한편 팔리어로 쓴 전기의 집대성은 《니다나카타 Nidanakatha》인데, 이는 그 이전에 성립된 전기들을 하나로 조직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느 것이나 후세에 집대성한 것이어서 그 내용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밖에 그 이전의 오래된 자료로는 단편적인 것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지만, 팔리어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는 《수타니파타》, 《상응부 相應部 Samyutta-nikaya》의 《사가타바가 Sagathavagga》, 그리고 《비나야 Vinaya》, 즉 율장을 비롯하여 더욱 발전된 니카야(Nikaya) 종류, 또 한역으로는 《아함경》 등이 있다. (鄭承碩 글)
참고문헌 (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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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아타 :, 법정 역, 정음사, 1974
卍 가섭존자(摩訶迦葉)
부처님의 많은 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엄격한 수행으로 뛰어났던 마하가섭은 그러한 수행정신 때문에 흔히들 그를 두타제일(頭院第一)이라고 하거나 행법 제일(行法第一)이라고 후세인들은 일컫는다. 그는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검박하고 간소한 생활 규율과 엄격한 금욕생활을 지켰다. 그러한 수도정신은 지금도 모든 수도자들의 귀감이되고 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선종(輝宗)에서는 그를 부처님의 법을 이은 제일대(第一代) 조사(租師)로서 받들어 왔다.
마하가섭은 마가다 사람으로 바라문 출신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음택(欲澤)이요 어머니의 이름은 향지(香至)였다. 전둥록(傳燈錄)에는 마하가섭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아주 오랜 옛날 비바시불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사부대중이 탑을 세웠는데 탑 안에 외신 불상의 얼굴에 금빛이 조금 파괴되어 있었다. 이 때에 어떤 가난한 여자가 금구슬을 가지고 단금사에게 가서 불상의 얼굴을 장식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같이 서원을 세우되 「우리들 두 사람은 육체관계(뼈)가 없는 부부가 되자」고 하였다.
이 까닮에 91겁 동안 몸이 모두 금빛이었고 뒤에 하늘에 태어났다가 하늘의 복이 다한 뒤엔 중인도(中印度) 마가다의 바라문의 집에 태어나서 가섭이라 이름 하였다. 마하가섭은 그의 다른 형제와 함께 처음에는 고행과 불을 섬기는 무리에 끼여 었다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부처님의 교단으로 들어온 분이었다. 마하가 섭이라는 이름도 그의 형제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었기 때문에 다른 형제와 구별하여 부르기 위하여 마하(大)가섭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만년(曉年) 입적할 즈음에 가섭은 마가다국에서 전도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처님께서는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섭은 제자들을 데리고 부처님의 열반지에 이르렀다. 너무나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하고 있는 마하가섭에게 이미 열반에 드신 부처님께서는 관 밑으로 양쪽 발을 내밀어 부처님의 마음을 부촉하였다. 그 때까지 아무리 다비(茶略)를 행할려고 부처님의 유해가 든 관에 불을 불이려 하였으나 관에 불이 붙지 않았다. 그러나 마하가섭이 불을 붙이자 곧 불이 붙으며 다비를 할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곽시쌍부의 일화이고, 부처님이 다자탑상에서 설법하실 때 껄법좌를 어디 갔다 늦게 온 마하가섭에게 자신의 자리의 반을 내어 주며 가사를 둘러 주시며 “이 가사를 너에게 부촉하노니 이 가사를 잘 지니고 있다,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할 때까지 단절함이 없도록 하라”고 부촉했다는 이야기를 일러 삼처전심이라고 하고 곧 이는 마하가섭에게 부처님의 정법을 부촉했다는 구체척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일화보다 가섭존자의 위대한 행적중의 하나는 그가 부처님의 정법이 오래 가지못할 것을 염려하여 칠엽굴에서 최초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5백명의 아라한과 함께 결집(結集) 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하가섭은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될 만한 분이며 이 땅에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한 위대한 공덕을 남긴 위대한 성자였다.
부처님의 제자중 부처님의 심법(心法)을 계승한 제자는 첫째로 마하가섭을 꼽는다. 그러기에 선종에서 가섭존자를 제1조로 하는 것이다. 마하가섭은 부처님의 10대제자 중 두타 제일로 이름이 있다. 두타행은 의식주에 탐착이 없는 간소하고 어려운 생활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마하가섭은 그와 같이 수행하여 부처님의 법을 얻고 후세에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 유명한 고사를 남겼다. 세곳에서 마음을 전했다 하는 그 첫째는 다자탑 앞에서 법을 설하였을 때 늦게 도착한 말석의 가섭과 부처님의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이고, 둘째는 대법천왕이 부처님께 꽃을 공양하였을 때 부처님이 꽃 한송이를 잡아 대중에게 들어보이시나 대중은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데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 이를 보신 부처님이「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槃妙心)을 가섭에게 전한다.」하신 것이고
세째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가섭이 부처님 곽 앞에서 「어쩌면 세존의 입멸이 이같이도 빠르십니까?」하고 슬퍼하니 부처님이 곽 밖으로 두발을 내어 보인 이것이다. 마하가섭은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온전한 법을 계승한 자로 인정되는 것이다. 마하가섭이 두타제일이라는 점과 아난존자와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난존자는 전번에 말한 것처럼 부처님의 종제이며 부처님의 시자다. 그러나 아난은 역시 마음의 법은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가섭존자의 지도를 받아 깨치게 되고 가섭을 이은 선종의 제2조가 된다.
경전에 나온것을 보면 가섭과 아난과는 서로 성질이 같지 않아 보인다. 가섭이 아난에게 「너의 제자무리들은 다 버렸다. 너의 무리들은 파계되었다. 너의 연소한 동자들은 분수를 모른다.」한데 대하여 아난은 「존자여, 저의 머리카락이 이제 반백이 되었는데 아직도 동자라 하는 것은 그만 안했으면 좋겠읍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한 비구니가 마하가섭을 비난하기를 「이교도였던 자가 정통의 부처님 제자인 아난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잘못이다.」하였다. 이말을 들은 마하가섭은 「세존께서 친히 입으시던 가사를 나에게 주셨으니 부처님의 옷을 받은 나야말로 법의 상속자다.」라고 자신껏 말하였던 것이다. 아난이 어느 날 비구니에게 설법하러 가자고 마하가섭에게 말하였을 때 마하가섭은 「당신 혼자 가시오. 당신은 일도 많은 사람이군.」하였다.
두사람 사이에는 이야기도 많았다. 마하가섭은 난행 ㆍ 고행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형인 철저한 수행인인데 비하여 아난은 모든 사람에게 사뭇 친절하고 자상하여 일도 많았던 모양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세존의 곽은 마하가섭이 도착할 때까지 타지 아니하고 가섭이 온 후에 다비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분명히 마하가섭은 부처님 교단의 첫째가는 대 제자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하가섭은 부처님의 가사를 받은 책임을 느끼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500비구를 모아 부처님의 경전을 결집하였다. 이것이 제1결집이라 하는 것인데 오늘날 경을 대하는 우리들은 저때의 마하가섭 존자의 호법정신을 훈훈히 느껴오는 것을 금할 길 없다.
卍 목련존자(目連尊者)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에서 목련 존자를 신통 제일이라 한다. 목련은 왕사성 근처에 있는 코오리다촌에 살았기 때문에 코오리다라고도 불렀다. 사리불과 친한 사이여서 한 때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산자야의 제자가 되었었다. 그후 사리불의 인도로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는 산자야 교단에서도 뛰어난 존재였으며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사리불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할때는 250명의 제자들과 집단 개종하였다.
부처님 교단에서 목련은 사리불과 함께 비구의 표준격이었다. 그만큼 부처님 교단의 기둥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목련 존자가 신통제일이라 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는날 세존은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사리불과 목건련은 거기서 멀리 떨어진 마갈타국 왕사성에 있었다. 그때 목련이 사리불에 말하기를 「지금 내가 어떤 사람과 법담하였다.」하니 사리불이 「도대체 누구와 이야기 하였다는 것이요?」 물으니「나는 세존과 법담하였다.」라고 목련이 대답하므로 사리불은 사뭇 의아해 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세존은 먼 사위성에 계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목련은 이와 같이 대답하고 있다.
「내가 신통으로써 세존 앞에 간 것도 아니고 세존도 신통으로써 내가 있는 곳에 온 것도 아니다. 나도 세존도 다같이 청정한 천안과 천이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목건련 존자도 사리불과 같이 세존의 열반에 앞서 입멸하였다.
卍 수보리(須菩提)
금강경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수보리 존자를 기억할 것이다. 수보리는 반야부 경전에 있어 절대적 대고중(對告衆)이며 기청자(起請者)다.
경에는 「나의 제자 중 다툼이 없는 삼매를 이룬 자는 수보리가 제일이다.」하였으며, 또한 「공양 받을 자의 첫째다.」라고도 한다. 수보리는 공(空)의 도리를 제일 잘 안다 하여 부처님의 10대 제자중 해공 제일이라고 한다. 그는 기수급고독원을 부처님께 봉헌한 급고독 장자의 동생인 수마니의 아들로서 사위성에서 태어났다. 수보리 존자는 기수급고독원을 부처님께 봉헌하던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였다.
장로게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나의 암자는 지붕이 잘 이어졌고 바람도 없으며지내기 편안하다. 하늘이여, 마음껏 비를 내려라. 나의 마음은 삼매에 머물어 있으며 해탈을 얻었다. 나는 열심히 여기에 머문다. 하늘이여 비를 내려라. 이 게송에 대한 주석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왕사성의 빈비사라왕이 수보리 존자를 존경하여 자그마한 집을 기증하였다. 그런데 그 집은 어떻게 잘못되어 지붕을 잇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는 법력으로 천신을 움직여 비가 오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가뭄으로 괴로워하다 왕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고하고 마침내 수보리 존자의 암자의 지붕을 잇게 하였다고 한다. 경에 의하면 수보리 존자는 항상 보시에 힘썼고 공의 도리를 이해하는 데는 첫째라고 하고 있다. 부처님 교단 내에서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수행에 있어 중요한 조건이다. 경에도 이러한 수행조건에 대하여 많은 말씀이 있는데 그중에 「다툼이 있는 법을 알아야 하며 또한 다툼이 없는 법도 알아야 하느니라.」그리고 그 끝에 수보리는 「참으로 다툼이 없는 도를 행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수보리를 공양을 받을 만한 원만한 인격자라고 말 한 것이다.
卍 다문제일 아난존자(多聞第一 阿難尊者)
법이 아닌 바를 보는 것은 중생이며, 일상을 일상으로 듣는 것 또한 중생이다. 보살은 일상에서 법을 구하며 세상 만유萬有를 그대로 보고, 상相없이 들으니 그 자체가 법이 된다. 보살은 세상의 모든 부처님에게서 들은 바를 중생에게 회향回向하며 그 공덕功德을 마음자리에 두지 않는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대부분의 경전이 이와 같이 처음을 시작하는데, 이는 아난이 들었던 것이며, 우리가 듣는 바이다. 지금 우리가 지송하는 부처님 말씀에 아난존자가 듣고 전하지 않은 바가 없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十代弟子 가운데 한 분으로 부처님 설법과 말씀을 모두 듣고 기억하여 후세에 전한 다문제일多聞第一로 알려져 있다. 아난은 범어로 Ananda로 적으며 이는 “기쁘다” 는 뜻을 가지고 있어 무염환희無染歡喜 또는 경희慶喜로 번역하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스물다섯살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굳은 의지로 수행을 하였다. 석가모니 열반 뒤 가섭존자의 주창으로 경전 결집이 이루어지는데, 아난은 그 때까지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으므로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 때 문 밖에서 가섭이 설한 “아난아, 문 밖의 찰간刹竿대를 꺾어버려라!” 하는 말씀의 뜻을 삼일 밤낮으로 참구한 끝에 크게 깨달은 뒤 결집회의에 참석하여 경전의 완성을 보았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내었으니 이는 아난의 기억력이 바상하였다기보다는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법에 대한 겸손, 그리움이 그 누구보다 수승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의 진리가 귀함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말씀을 후세의 중생이 받아 지닐 수 있도록 했던 아난존자의 다문행多聞行은 부처님 말씀의 공덕만큼이나 거룩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많이 듣고 기억하여 그 육성을 우리에게 전해준 주역은 십대제자 중에서 아난존자라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가슴엔 진리 추구에 대한 열기가 활활 타올랐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25년 동안의 시자 노릇을 한 자로서의 체험에 의해 불교경전의 결집을 시종 리이드하여, 경전을 완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원시 불교의 성전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은 이 아난존자의 힘이 큰 것입니다. 이 아난존자가 법화경 수학무학인기품 제9에서 부처님으로부토 산해혜자재통왕불(山海慧自在通王佛)이 되라라는 수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아난존자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잠깐 설명한 바와 같이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었다 합니다. 그는 싯다르타가 아직 정각을 성취하기 전에 태어났던 모양인데, 그의 아버지 곡반왕은 그 출생 사실을 사자를 시켜 싯다르타 태자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에게 알렸습니다. 정반왕은 그 말을 듣고는 "오늘은 대길(大吉)하도다. 바로 환희로운 날이구나. 그 아들의 이름은 마땅히 아난다(Ananda)라고 해야 하리라"하고 기뻐합니다. 아난다란 바로 기쁨, 환희를 뜻합니다. 그가 태어나서 기쁘니 그의 이름을 기쁨을 뜻하는 '아난다'라고 한 것입니다. 환희(歡喜), 경희(慶喜)는 그 의역이며 아난(阿難)은 음역입니다.
아난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후 붓다가 되어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돌아왔을 때 출가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8세였지만 석가족의 자연스러운 출가 분위기에 따라 사촌들과 더불어 부처님의 교단에 발을 디디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아난에게 불교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몇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시자(侍者)로서 그 인류의 스승이 열반에 들 때까지 보필한 일이요, 둘째는 여인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하여 받아 낸 일, 그리고 경전 결집(結集)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일입니다.
부처님은 정각을 성취한 후 오랜 세월 동안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활해 나갔으나 점점 연로해져 가면서 그리고 점차 교단의 조직이 커지자 그를 옆에서 보좌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누군가에게 시자 노릇을 맡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장로(長老)들이 차례차례 그 역을 맡고 싶다고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두 나이를 먹어 체력(體力)도 쇠약(衰弱)해졌다는 이유로 그들의 제안을 물리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랐던 것은 아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제안을 받은 아난은 주저했습니다. 너무 무거운 임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난은 세 가지의 조건을 제시하고 부처님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것은
① 부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의복은 받지 않는다.
② 부처님을 위한 식사는 받지 않는다.
③ 비시(非時)에 부처님과 만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교단의 주재자이십니다. 따라서 재가 신자가 부처님을 초대해서 부처님께 특별히 식사라도 대접한다거나 특별히 좋은 옷을 공양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시자에게도 몫을 나누어 줄 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양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시자가 될 지라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모두 똑같은 불제자이기 때문에 특별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비시(非時)에 부처님과 만나지 않는다는 말은 언제든지 부처님과 만날 수 있다는 특권을, 자신의 수행상 편의 때문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아난의 자계(自戒)였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이러한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아난은 그 뒤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그 날까지 20여 년 동안 부처님을 곁에서 극진히 모시게 됩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다 보니 그는 부처님 말씀을 빠짐없이 듣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모조리 듣기 위하여 시자직을 허락한 듯 그 설법을 듣는 데서는 가히 삼매의 경지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등창이 나서 종기가 난 부분에 메스를 가했을 때도 부처님 설법을 들려 주자 그는 거의 아픔을 몰랐다고 합니다.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그의 별명은 이렇게 부처님 법문을 가장 많이 들었을 뿐더러 그 법문을 듣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성격이 다정다감한 그는 인간이 불성을 지닌 이상 남녀 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강한 신념에서 여성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합니다. 이는 여성을 하찮게 여기던 당시의 인도적 시대 상황에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난은 세 번씩이나 부처님께 여성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하는데, 네 번째 부탁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는 사실이다. 그 정경을 그려보면 이렇다.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왕자 시절의 싯다르타를 길러냈을 뿐더러 당신의 부친인 정반왕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정반왕의 사후 부처님이 카필라 성의 니그로다 정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녀는 불문에 귀의하고자 찾아왔으나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부처님은 카필라 성을 떠나 바이샬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마하파자파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머리를 깎고 누더기를 걸친 채 맨발로 부처님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발은 돌부리에 채어 피가 흘렀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부처님이 머물고 있는 바이샬리로 오자 아난이 그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하파자파티는 아난에게 자신을 비롯해 여성 출가를 부처님께 말해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아난은 그 말을 듣고 세 번씩이나 부처님께 여성의 출가를 간청했으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부처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성일지라도 출가하여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한다면 성과(聖果)를 이룰 수 있습니까?"
드디어 부처님은 침묵을 깼습니다.
"그렇다, 아난아. 여인도 법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수행하면 성과를 얻을 수 있느니라."
이렇게 하여 아난은 부처님으로부터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허락받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교단의 질서를 위하여 여성 출가자들은 따로 여덟 가지 계를 더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구니 팔경계(八敬戒)라 합니다. 이 계율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진 않지만 이렇게 해서 여성의 출가가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난의 가장 뛰어난 공적은 경전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열반 후 교단의 통솔자가 없어지자, 교단에 혼란이 발생함에 따라 교법을 통일하려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러 갈래로 분산된 수행승들 중에서 대표자를 모아서 그들이 기억한 교법을 표현하게 한 다음, 그 교의를 통일하는 편집회의를 열어 교의의 산실을 막고 교권을 확고하게 확립시키게 되는데 이것을 결집(結集)이라 합니다. 마하가섭이 주도한 경전 편찬 모임에서 아난은 가장 중요한 부처님 말씀을 외워 보인 뒤 거기에 참가한 500나한들의 지지를 받고 정식으로 경(sutra)을 성립시키는 주역으로 등장합니다. 오늘날 경전의 첫머리에 상용구처럼 따라 다니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말은 바로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그 말씀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卍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
현자(賢者)로서 인도학 및 베다학에 관하여 백과전서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4대 역경가(譯經家)들 가운데 가장 정평이 나 있는 사람으로서, 불교의 종교사상과 철학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 대부분 그의 노력과 영향력에 크게 힘입었다.
구마라집의 부모는 불교를 믿어 모두 출가했으며, 그도 그의 어머니를 따라 7세에 출가했다. 중국 카슈가르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다가 수리아사마라고 하는 대승불교도에 의하여 불교의 중관학파(中觀學派)로 개종했다. 인도에 유학하면서 두루 여러 선지식을 참례하여 여러 방면에 대해 잘 알았고,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 인도 전역에 그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후 고국에 돌아와 왕으로부터 스승의 예우를 받았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그의 덕이 뛰어나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 여광(呂光)과 군사를 보내어 맞아들이게 했다. 여광이 서쪽으로 가서 구자국을 정벌하여 구마라집을 체포했으나, 돌아오는 도중에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광 자신이 하서(河西)에서 자립하여 왕이 되어 7년간 통치했다.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다시 일어나 여광을 멸망시킨 뒤, 구마라집은 401년(동진 隆安 5) 장안(長安)에 도착했다. 요흥이 예를 갖추어 그를 국사(國師)로 봉하고 소요원(逍遙園)에 머물게 하여 승조(僧肇), 승엄(僧嚴) 등과 함께 역경에 전념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403년(후진 弘始 5) 4월부터 《중론 中論》ㆍ《백론 百論》ㆍ《십이문론 十二門論》ㆍ《반야경 般若經》ㆍ《법화경 法華經》ㆍ《대지도론 大智度論》ㆍ《아미타경 阿彌陀經》ㆍ《유마경 維摩經》ㆍ《십송률 十誦律》 등 35부 348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했다.
卍 법현(法顯, ?~?)
동진(東晋) 시대의 중국 명승으로서 속성은 공(龔)이며 산시성[山西省] 핑양[平陽] 출생이다. 위로 형이 셋이나 있었는데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화가 그에게도 미칠 것을 염려하여 3세 때 출가시켜 사미(沙彌)가 되도록 했다고 한다. 그후에도 수년간은 집에 데리고 있었으나 중병에 걸리자 걱정이 되어 절에 보냈는데, 이틀밤이 지나지 않아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후 수업을 쌓아 20세에 이르러 비구계를 받았다. 연구를 계속하던 중 중국에 계율경전(戒律經典)이 완비되어 있지 않음을 한탄하고, 399년 60세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동학 5인과 함께 고난을 무릅쓰고 히말라야를 넘어 북인도의 마투라ㆍ사위국(舍衛國)ㆍ석가국(釋迦國) 등지를 순력한 후 중인도에 도달하였다. 즉, 법현은 우선 중앙 아시아의 길도 없는 황무지를 가로질렀는데,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이 여행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사하(沙河)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늘에는 날으는 새도 없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오직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모르는 죽은 사람의 고골(枯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법현은 대상(隊商)들의 오아시스인 코탄에 도착한 후 파미르 고원을 넘을 때는 눈보라의 위협과 맞서야 했다. 게다가 산길은 지독히 좁고 가파랐다. "길은 험하고 울퉁불퉁한 산길이었으며 낭떠러지는 험준하기 짝이 없었고 오직 돌로 된 이 산은 천척 만척의 벽과 같이 서 있어 가까이 가면 어지러워서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발 놓을 곳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래로는 인더스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옛날에 어떤 사람들이 돌을 깎고 쪼아 통로를 만들고 의지할 사다리를 만들어놓았는데 그 사다리는 700계단이나 되었다."(이재창 역 《법현전》에서)
불교의 유적을 순배하고 계율경전과 그 밖의 불교경전을 베껴가지고 동인도에서 2년간 체류한 후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거기서 다시 경전을 얻고 남해로부터 해로로 귀국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자바로 피항했다가 414년 기적적으로 산둥성[山東省]에 표착하였다. 그의 일행 중 법현만이 대여행을 달성하여 최초의 인도 순례승(巡禮僧)이 되었다. 귀국까지 15년의 세월을 소비하며, 순방한 나라가 30여 개국이었다.
귀국 후 413년에 여행기 《불국기(佛國記:高僧法顯傳)》를 쓴 데 이어 계율경전 등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으나, 그가 고난 끝에 가져온 많은 경전은 소실되었고, 420년경 징저우[荊州]에서 사망하였다. 경사(京師:首都)의 도량사(道場寺)에서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와 함께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 등 6부 63권, 미완역(未完譯)인 채로 남아 있는 《장아함경(長阿含經)》 5부, 그가 쓴 여행기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실정을 소개하여 인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프랑스어 ㆍ영어로 번역 출간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卍 달마대사(達摩大師, ?~528?)
중국에 선종을 전한 인물로 알려지는 초조 달마대사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여 어느 것이 진실인지 확실치 않다. 여기에서는 널리 알려진 여러 설화를 통해 달마의 일생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 내용들은 거의 설화 및 에피소드에 기초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껏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초조 달마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는 이야기들 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달마는 누구인가
보리달마(Bodhidharma)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성을 세테이리(刹帝利)라고 했다. 단 달마는 인도가 아닌 페르시아 출신이라고도 하며 찰제리(刹帝利)라고 하는 것은 성이 아니라 인도 4성계급 중에 크샤트리아를 의미 한다고도 한다.
어느 날 반야다라 라고 하는 고승이 널리 가르침을 베푼다는 말을 듣고 국왕은 그를 왕궁으로 초청하였다. 국왕은 반야다라의 가르침을 받고는 왕에게 광채가 나는 보석을 공양하고 신자가 되기로 하였다.
한편 왕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월정다라라고 불렀으며 염불삼매의 행을 닦았다. 둘째는 공덕다라라고 하는데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셋째는 보리다라라고 불렀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이에 반야다라는 세 왕자의 지혜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질문을 던졌다.
"이 세상에서 이 보석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겠습니까?"
월정다라가 대답하였다
"이 보석은 우리나라의 보물입니다. 이 세상에 더 훌륭한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공덕다라 역시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런데 보리다라가 말하길 "스승님 이런 보석은 감히 최상의 보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보물은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기쁘게 할 뿐 입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물은 여러 가지 법 중에서 부처의 가르침이고 사람이 지닌 뛰어난 여러 가지 능력 중에서는 지혜가 가장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지혜 중에서는 마음의 지혜가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보물이 가장 훌륭할 것입니다."
반야다라는 그가 큰 그릇 임을 알고 크게 칭찬하였다. 얼마 후에 국왕이 승하하자 보리다라는 반야다라를 따라 출가하여 불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에 이름을 보리달마라고 하였다. 달마가 스승 밑에서 수행하기를 40여 년 반야다라는 임종에 이르러 달마에게 유언을 남기며 입적하였다.
"내가 죽은 후 67년이 지나면 동쪽 중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전법하도록 하여라!"
남쪽에 머무르지 말고 네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북쪽으로 가도록 해라. 이에 달마는 훗날 스승의 명을 받아 중국이라는 나라로 향하게 된다.
반야다라에게는 달마 이외에 불대선 불대승이라고 하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스승의 사후 그 종지가 6종(六宗)으로 나뉘어졌으니 유상종(有相) 무상종(無相) 정혜종(定慧) 계행종(戒行) 무득종(無得) 적정종(寂靜)이었다.
각기 주장을 달리하여 서로 다투고 갈등을 일으켰다. 이를 보고 대사가 생각하기를 "이처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결코 부처님의 뜻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해탈에 이르는 길이 멀어질 것이다." 하고는 6종의 종사와 대면하여 일일이 그 고집을 꺾어 놓았다. 그리하여 6종이 모두 달마에게 귀의하였고 그의 명성은 전 인도에 널리 퍼져나갔다.
한편 달마의 첫째 형인 월정다라의 아들 이견왕이 즉위했을 무렵이었다. 이견왕은 불법이 국민과 조상을 현혹하고 있다고 오해한 나머지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달마대사가 그것을 알고는 어찌하면 그를 설복시킬까 생각하였다. 이에 달마의 제자 종승이 말하길 "제가 천박하오나 어찌 왕을 위하는 일을 마다하오리까?" 라고 하자 대사는
"너는 아직 도력이 온전치 못하니라!" 라고 하였다. 하지만 종승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홀로 왕궁에 나아가서 왕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왕의 물음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사이에 대사는 이를 눈치 채고 다른 뛰어난 제자인 바라제를 보내어 종승을 구원토록 하였다.
바라제가 신력을 빌려 구름을 빌어 타고 왕의 앞에 이르러 가만히 머물렀다. 이때 왕은 바라제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 종승을 밖으로 쫓아내고는 바라제와 문답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바라제는 왕의 물음에 답하여 불성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니 왕은 이에 마음이 열리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불법을 배우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한편 쫓겨난 종승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높은 벼랑에서 몸을 던졌으나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한 신선이 그를 받아 바위 위에 올려놓고는 계속해서 수양 정진할 것을 주문하였다. 종승은 기뻐하며 바위 사이에 앉아 불법을 닦았다.
이때 이견왕이 바라제에게 물었다. 이토록 뛰어난 법문을 전수한 스승님은 누구십니까. 바라제가 대답하기를 나의 스승님은 곧 왕의 숙부이신 보리달마 그 분이십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자신의 죄를 탓하며 곧 대사를 맞아들이게 하는 한편 종승을 부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종승은 산속에 숨어 선을 닦을 뿐 세상에 나오기를 부끄러워하였다. 궁중에서 달마는 깊이 있게 법을 전수해주었다.
얼마 후 왕이 병을 얻어서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대사에게 사신을 보내어 왕의 병을 구원하길 청하였다. 대사는 곧 왕궁에 와서 병을 위문하고 자비를 베풀고 죄를 참회토록 함으로써 왕의 병을 낫게 하였다.
2. 중국으로 건너가다
어언 60여년 반야다라가 유언한 햇수가 흘렀다. 이제 본국에서 할 일을 어느 정도 끝마쳤다고 생각한 달마는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는 왕을 찾아갔다. 왕이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지만 달마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왕은 꼭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달마의 항해를 준비하였다. 달마는 우선 제자 불타야사에게 사전답사를 떠나게 했다.
불타야사는 오랜 여정 끝에 겨우 중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접한 광경들은 달마의 가르침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들이었다. 중국의 승려들은 달마의 사상을 낯선 것으로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에 불타야사는 크게 낙심하여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에 달마는 뛰어난 제자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면서 참된 불교의 마음을 전해주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중국을 향해 출발 하였다.
한편 달마가 바닷길을 출발하는 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대사가 배를 타려고 항구에 이르자 수백 년 묵은 큰 고기가 배 드나드는 길목에 와서 죽어있는데 배가 그 길목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며 차츰 썩어서 냄새가 풍기어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는다고 하였다. 대사는 그런 불편을 없애주는 것이 모두 중생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여 나무 숲 속에 들어가 조용히 선정에 들어서 그 정신이 몸을 벗어나 신력으로 고기시체를 운반하여 먼 바다에 내다 버리고 돌아와 보니 웬걸 자신의 몸은 오간 데 없고 어떤 선인의 괴이한 몸이 있었다.
대사가 혜안으로 관찰해보니 그 나라의 이름 높은 오통선인이 숲속에 도인의 몸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몸을 벗어버리고 대사의 몸을 바꾸어 가지고 갔다. 달마의 몸은 원래는 매우 빼어난 모습인데 그 바꾼 몸은 눈이 새파랗고 수염이 많아서 얼른 보면 사람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후대에 전하는 달마도의 모습은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어려운 항해를 마치고 중국의 광주에 도착한 것이 양무제 보통(普通) 원년(520) 9월 21일이었다고 한다. 광주자사 소앙이 바로 이 사실을 무제에게 알리자 무제는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달마를 궁궐로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달마는 11월 1일 도읍인 건강에 도착하여 무제와 회견하게 되었다. 양무제는 역대 중국 왕들 중에서도 열렬한 불교 신자로 이름난 인물이다. 이제 많은 군신들 앞에서 대사와 무제 사이에 세기의 문답이 벌어진다.
양무제가 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절을 짓고 경문을 직접 옮기기도 했으며 또한 많은 승려와 비구니를 육성했소! 그러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보답을 받겠소. 가르쳐 주시오?"
기존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최대의 자비를 베푼 황제에게는 최대한의 보답이 있는 것이 당연하였다. 따라서 황제의 선행과 공덕이 넓고도 크므로 부처님으로부터 최고의 보답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을 황제는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마의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 것은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드디어 달마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무엇이라고?" 황제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달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공덕이라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렇단 말이오? 이 정도의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그건 말이 안되오?" 황제가 말했다. 달마가 응답하길
"그런 일은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 않으면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황제는 이 대답을 듣고는 화가 치밀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공덕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마음과 지혜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아무런 걱정도 없는 것! 황제는 더욱 화가 났다.
"그러면 불법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첫 번째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이에 달마는 최후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 것은 나는 모릅니다.
달마와 황제의 문답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 문답은 달마에 관한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양무제에 대해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달마는 허무한 마음과 함께 돌아서야만 했다. 양무제 역시 달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후에 무제는 이 일을 몹시 후회했다고 하나 이미 때는 늦은 법이다.
남쪽 나라에 아직 자신의 불교를 널리 퍼트릴 분위기가 성숙하지 않은 것을 깨달은 달마는 조용히 양나라를 떠나 북쪽 위나라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때 달마가 갈대를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달마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일화인 듯 하다. 이제 달마대사는 후위 효명제 정광(正光) 원년에 낙양에 도착하여 접경지역에 있는 숭산 소림사를 찾아가 그곳에 머물며 힘껏 정진에 몰두한다.
3. 달마와 그의 제자들
달마는 소림사에 자리를 잡고 법을 전할 제자가 나타날 때까지 고요히 좌선에 잠긴다. 아무 말 없이 주야로 얼굴을 벽에 대고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니 당시 사람들은 달마를 벽관바라문 이라고 불렀다. 벽을 바라보는 바라문이라는 뜻이다. 이런 수행을 수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그럴 때에 어느 날인가 신광이라는 수도자가 달마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불법의 깊은 이치에 정통하였으나 아직 무엇이 부족한 듯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리하여 달마가 깊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마에게 법을 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달마는 늘 벽을 대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눈 오는 날 뜰 앞에 신광이 서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되자 대사가 말하길 "네가 눈 가운데 서서 무엇을 구하느냐?" 그러자 신광이 말했다.
"바라건대 스승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시어 널리 중생을 제도케 하소서!" 대사가 이렇게 대꾸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정진하시어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으셨나니 어찌 적은 덕과 지혜를 가지고 최상의 도를 구하려고 하는가?" 신광이 그 말을 듣자 차고 있던 칼로 왼팔을 끊어서 대사 앞에 바치자 대사는 그가 법을 이어 받을 그릇임을 알았다.
"모든 부처님이 처음 도를 구할 때 법을 위하여 신명을 잊었나니 네가 이제 내 앞에서 구도하는 정성이 가상하도다!" 라고 감탄 하였다.
신광이 물었다.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습니다. 스승님은 저에게 안심케 하소서."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에게 안심케 하리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너의 마음을 편안케 했느니라!" 이제 신광은 달마의 가르침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어 달마의 뒤를 이을 제자가 되었다. 이에 이름을 고쳐 혜가라고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달마와 혜가의 일화도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혜가가 팔을 자른 것 등은 정확한 사실인지 확실치가 않다. 아무튼 사실이 아니더라도 일종의 일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있다. 위나라에 머문 지 9년에 대사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국으로 갈 때가 되었으니 너희들은 각자 얻은 바를 말하라. 도부라는 자가 먼저 말하기를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으며 도의 응용으로 삼나이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도다!" 비구니 총지가 말했다.
"저의 아는 바로는 한 번 보고 두 번 보지 못합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도다!" 도육이 말하길
"저의 본 것으로는 한 가지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도다!" 마지막으로 혜가가 나와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진수를 얻었노라!" 라고 하며 혜가를 돌아보며 말씀하시길
"옛날에 여래께서 정법안을 가섭에게 부촉하여 전전히 나에게 이르렀나니 내가 이제 너에게 부치노니 너는 마땅히 호지하라!" 하고 아울러 가사를 전해주면 법의 증표로 삼았다. 법의를 전해 증표를 삼았다는 이야기는 실상은 후대에 와서 꾸며진 이야기 이지만 여기에서는 큰 문제 삼지 않기로 한다. 이리하여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는 혜가에게 가사와 능가경등을 전해주며 법을 전수함으로써 이제 이조 혜가대사의 시대가 열려오게 되었다.
4. 다시 서쪽으로
달마가 혜가에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뒤 다섯 번 독약을 만났다. 내가 항상 시험하여 약을 돌 위에 놓아두니 돌이 갈라졌다. 내가 본래 중국에 온 것은 법 구하는 사람을 위함이었다. 이제 너를 얻어 법을 전하였으니 내 일은 이미 끝났도다. 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내비쳤다. 달마대사가 본디 인도에서 건너와 사뭇 새로운 선불교를 널리 가르쳤기 때문에 기존의 불교 학자들에게는 달마가 좋지 않게 보였을 듯하다.
그리하여 여러 불법학자들이 달마를 해칠 마음을 먹고 여러 번 달마에게 독약을 보냈다. 그 독을 먹어도 도력으로 다 다른 음식물과 같이 소화되었는데 여섯 번째 독약에 이르러 법을 전할 사람을 얻었으므로 독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양나라 대통 2년(528)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 시신을 웅이산에 장사지냈다. 그때 서역에 사신으로 갔던 송운이 파미르고원에서 대사를 만났다. 대사는 주장자에 신 한 짝을 꿰어들고 유유히 가고 있는 것이었다.
"대사는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묻자
"서천으로 가노라! 너의 임금은 이미 돌아가셨느니라!" 송운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작별하고 귀국해보니 과연 임금이 승하하고 다음 왕이 즉위했다. 송운이 돌아오다가 겪은 일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무덤을 파보도록 하였다. 다만 관속에는 신이 한 짝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추모하는 비문을 기록 해 본다.
"슬프도다 보고도 보지 못했고 만나고도 만나지 못했으니 지난 일 오늘날에 뉘우치고 한됨이 그지없도다! 짐은 한낱 범부로서 감히 그 가신 뒤에 스승으로 모시나이다."
卍 달마대사(達摩大師, ?~528?)
1. 달마의 생애
달마대사는 타협이나 방편을 쓰지 않고 직설로서 부처님의 핵심을 가르친 선종의 종조다. 대사는 원래 남인도 향지국왕(香至國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석존(釋尊)의 27대 제자인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가 나라 제일의 보물을 보여주며 왕자들의 지혜를 가늠하고자 했다. 첫째와 둘째왕자는 단지 보물의 진귀함과 아름다움만을 찬양하였으나 셋째왕자는 "스승님 이런 보석은 감히 최상의 보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보물은 단지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기쁘게 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물은 여러 가지 법중에서 부처의 가르침이고, 사람이 지닌 뛰어난 능력 중에서는 지혜가 가장 두드러지며, 그리고 지혜 중에서는 마음의 지혜가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가지 보물이 가장 훌륭한 보물일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비범함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반야다라존자에게 40년동안 사사 받고 마침내 스승에게서 나와 수만번 단련을 받은 큰 그릇으로서 각 종파의 대사들 사이에 내놓여졌다.
그는 14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법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길을 떠나 3년 만에 천만리 떨어진 중국에 도착한다. 한편 달마대사의 모습에 대해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항구에 이르자 수 백년 묵은 큰 물고기가 배가 드나드는 길목에 와서 죽어있어 배가 그 길목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으며, 차츰 썩어서 냄새가 인근에 진동하여 주민들의 불편이 컸다. 이에 대사는 숲 속에 들어가 조용히 선정에 들어서 그 정신이 몸에서 벗어나 신력으로 고기 시체를 먼 바다에 내다버리고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숲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몸은 온데간데없고 어떤 괴이한 몸이 하나 있었다. 대사가 혜안으로 가만히 살펴보니 그 나라의 이름 높은 오통선인이 숲 속에 대사의 수려한 몸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몸을 그 자리에 벗어두고 대사의 몸을 바꾸어 가지고 갔던 것이다. 갈길이 바쁜 대사는 하는 수 없이 그 선인의 괴이한 몸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달마의 용모는 원래 빼어났는데 그 바꾼 몸은 배가 불뚝하고 눈이 파랗고 수염이 많아서 괴상하게 되었다. 후대에 전해지는 달마도의 모습이 괴상하게 그려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긴 여정을 거쳐 중국에 도착한 대사는 구불교의 폐해에 빠진 중국의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일념으로 무제(武帝)를 알현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문답이 벌어졌다. 양무제가 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절을 짓고 경전 번역도 했으며 또한 많은 승려를 육성했소.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시주를 했는데 이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이에 대사는 "所無功德, 황제의 공덕은 하나도 없다"라고 대답했다. 대사는 아직 그 나라에 자신의 불교를 널리 퍼트릴 분위기가 성숙하진 않은 것을 깨닫고 양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향했다. 이 때 달마가 갈대를 꺽어 양자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그것은 대사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일화인 듯하다.
그렇게 하여 달마는 위나라 소림사(小林寺)로 들어가 면벽좌선하면서 때가 성숙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혜가(蕙可)가 팔을 잘라 가르침을 구함으로서 비로소 가사와 '능가경'을 전해주며 법을 전수하게 되었다. 이 후 그의 가르침은 널리 퍼져 당송시대(唐宋時代)이르러 극성하게 된다. 소승불교(小乘佛敎) 뿐만 아니라 모든 석학홍유(碩學鴻儒)들도 선화(禪化)시켜 달마를 종조로 삼는 선종(禪宗)은 각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사의 면벽구년(面壁九年)의 연묵(淵默)은 무궁한 뇌성을 울리게 했고, 진인(眞人)의 법력이 종횡으로 치달아 서로 교통하게 하니 대사의 눈은 각지를 꿰뚫어 신령스런 기운을 천지간에 충만케 했다.
2. 달마의 무심론
지극한 이치는 말이 없으나 말을 빌려야 그 이치가 드러나고, 큰 도는 모양이 없으나 사물을 통해서 그 형체를 드러낸다. 이제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무심'에 대해서 함께 논해보기로 하자.
제자가 스승께 물었다.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음이 없다"
"마음이 없다고 하신다면 무엇이 보고 느끼고 알며, 무엇이 무심인 줄을 압니까?"
"도리어 이는 무심이다. 이미 보고 느끼고 알지만 도리어 이 무심이 무심임을 능히 안다."
"마음이 없다면 지금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 없어야 할텐데, 어째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있게 됩니까?"
"나는 마음이 없으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다면 마음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없다할 수 있습니까?"
"그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대로가 무심이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말고 오다 따로 무심이 있겠느냐. 그대가 이해하지 못할까 하여, 내 낱낱이 설명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겠다. 가령 보는 것을 예로 들자. 종일토록 보나 그것은 보는 것 없는 데서 나오므로 보는 것 역시 무심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로 종일토록 들으나 그것은 듣는 것 없는데서 나오므로 듣는 것 역시 무심이다. 느끼는 것도 종일토록 느끼나 그것은 느낌없는 데서 나오므로 느끼는 것 역시 무심이다. 알아보는 것도 종일토록 무엇을 알아보지만 그것은 앎이 없는데서 나오므로 아는 것 역시 무심이다. 또 종일토록 짓고 만드나 짓는 것이 지음이 없으므로, 지음 역시 무심이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이 모두가 무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무심인 줄을 알 수 있습니까?"
"그대가 자세히 추구해보면 된다. 마음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마음이란 것이 과연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마음인가, 마음이 아닌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아니면 중간에 있는가? 이렇게 세 군데로 따 져서 마음을 찾아보나 전혀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어디서나 찾아보아도 아무데서도 얻을 수 없으니, 무심인 줄을 알아야 한다."
"스님께서 모든 것이 다 무심이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죄도 복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중생들은 육취에 윤회하며 생사가 끊기지 않습니까?"
"중생이 어리섞어 무심 가운데서 헛되이 마음을 내어 갖가지 업을 짓고 헛되이 있다고 집착하여, 마침내는 육취에 윤회하며 생사가 끊이지 않게 된 것이다. 비유컨데 어떤 사람이 어두운 데서 나무 그루터기를 도깨비로 보거나 새끼줄을 뱀으로 보아 공포심을 내는 것과 같다. 중생의 망집도 그러해서 무심 가운데서 헛되이 마음이 있다고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지으나, 실제로는 육취에 윤회하지 않음이 없다. 이런 중생이 만일 대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고 죄선을 하여 무심을 깨치면, 모든 업장이 다 녹아 없어져 생사가 끊긴다. 마치 어두운 곳에 햇빛이 한 번 비치면 어둠이 싹 가시듯, 무심을 깨칠 때 모든 죄가 없어지는 것도 그러하다."
"제가 어리섞어 마음이 아직도 석연치 않습니다. 6근이 작용하는 모든 곳, 즉 대답하고 말함과 갖가지 움직임과 번뇌. 보리와 생사 열반이 무심이란 말입니까?"
"그럼, 무심이다. 다만 중생이 마음이 있다고 헛되이 집착하여 번뇌. 생사. 보리. 열반 등 모든 것이 있게 된 것이니, 만일 무심을 깨치기만 한다면 번뇌. 생사. 보리. 열반 등이 모두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래는 마음이 있는 자를 위해 생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보리는 번뇌를 상대로 생긴 개념으로써,모두가 다스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얻을 마음이란 것이 없다면 번뇌. 보리도 얻을 것이 없고 나아가 생사.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
"보리도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과거 부처님들이 모두 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습니까?"
"다만 세속이치인 문자로 말해서 얻었다는 것이지. 진실된 이치에서는 사실상 얻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도 '보리란 몸으로도 얻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하였고, [금강경]에서도'조금도 얻을 법이 없으니, 모든 부처 여래는 다만 얻을 것 없음으로 얻으신다'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스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나 돌도 무심인데 어째서 (마음은) 목석과 다릅니까?"
"내가 무심이라 할 때 그 마음은 목석과는 다르다. 어째서 그런가? 마치 하늘 북이 전혀 마음이 없으나 갖가지 묘한 법을 저절로 흘려내어 중생을 교화하듯, 여의주가 전혀 마음이 없으나 갖가지 변화된 모습을 자연히 지어 보이듯, 나의 무심도 그러하여 비록 마음이 없으나 제법실상을 잘 깨달아 참된 반야를 갖추어, 3신이 자재하여 응용에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보적경]에 '마음이 없이 행동을 나툰다.'고 하엿으니, 어찌 목석과 같겠는가. 이 무심이란 곧 진심을 말한다. 진심이 바로 무심인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마음 속에 짓는 것이 있으니, 어찌 수행해야 합니까?"
"무엇에서든지 무심을 깨닫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이지 따로 수행을 둘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으면 일체가 적멸하여 그대로가 무심이다."
제자가 여기서 홀연히 크게 깨쳐, 마음 밖에 물건 없고 물건 밖에 마음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모든 행동에 자재를 얻어 의심의 그물을 끊고, 다시 걸림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어나서 절을 하고 무심을 마음에 새기고는 노래로 읊었다.
신령한 마음 아주 고요하여 빚깔도 없고 형체도 없나니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소리 없어라.
어두운 듯하나 어둡지 않고 밝은 듯하나 밝지도 않아
버려도 없어지지 않고, 가져도 생기지 않네.
크기로는 법계를 감싸고 작기로는 털끝도 용납치 않나니
번뇌로 뒤섞어도 흐려지지 않고 열반으로 맑혀도 맑아지지 않네.
진여는 본래 분별이 없으나 유정과 무정을 가려내니
거둬들이면 아무것도 설 자리 없고 흩어놓으면 모든 중생에 두루하여
그 신묘함은 앎으로 헤아릴 바 아니며 정각에는 수행이 끊겼네.
없어져도 그 무너짐을 보지 못하고 생겨나도 그 이뤄짐을 보지 못하니
대도는 고요함이여! 모양이 없고 만상은 그윽함이여! 이름 없어라
이처럼 자재가 운용이 모두가 그대로 무심의 정묘함이로다.
스님께서 다시 일러주셨다.
"여러 가지 반야 중에 무심반야가 으뜸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는 '심의도 없고 수행도 없으나 외도를 모두 꺾어버린다.'고 하였다. 또 [법구경]에서는 '만일 얻을 마음이 없음을 알면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죄도 복도 얻을 것이 없으며, 생사도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 나아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니, 얻을 것 없다는 그것마저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노래로 말씀하셨다.
지난날 미혹할 때는 마음이 있더니 이제 깨닫고 나니 무심이어라. 무심이긴 하나 비추고 쓰나니 항상 고요한 비춤과 쓰임은 그대로 여여하여라.
다시 노래로 말씀하셨다
무심하여 비춤도 없고 쓰임도 없나니 비춤 없고 쓰임 없는 그것이 무위로다.
이것이 여래의 진실된 법계라. 보살. 벽지불과는 같지 않도다.
여기서 무심이란 망상 없는 마음을 말한다.
또 물었다
"무엇을 태상이라고 합니까?"
"태는 크다는 뜻, 상은 높다는 뜻이다. 가장 높은 묘한 이치이므로 태상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태는 크게 통달한 지위를 말한다. 3계의 하늘들이 수복 강녕을 누리나 복이 다함으로써 결국 6취에 윤회하게 되니, 크다 할 수는 없다. 10주 보살도 생사는 벗어났지만, 묘한 이치를 다하지는 못했으므로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10주 수심도 유를 없애고 무에 들어가, 유무를 동시에 떨쳐버리는 것마저 없긴 하나, 중도를 잊지 못했으므로 그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나아가 중도를 잊어 세 곳이 모두 다해야만 묘각의 지위인데, 보살이 세 곳을 다 떨어버리기는 했으나 묘하다는 당처를 없애지는 못했으므로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그 묘함을 잊으면 지극한 불도라도 설 자리가 없고,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면 생각없다는 것마저도 함께 잊어서, 심과 지가 영원히 쉬고 각과 조가 동시에 다하여 적연무위하니, 이것을 크다고 하는 것이다. 태는 이치가 극에 다다랐다는 듯이며, 상은 견불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태상이라 하는 것이니, 바로 부처 여래의 다른 이름이다. ('고경'중에서)
2. 라즈니쉬가 말하는 달마 대사
보리달마는 14세기 전, 남부 인도의 한 왕국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곳에는 아주 큰 왕국, 팔라바스(Pallavas)라는 이름의 왕국이 있었다. 그는 그 나라 왕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던 달마는 모든 상황을 지켜본 뒤에 왕국을 포기했다. 그는 이 세상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세속적이고 하찮은 일들에 자신의 시간을 낭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자신의 본성(本性)을 아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한, 결국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달마는 왕국을 포기하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아버지께서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없다면 그때는 나를 막지 마십시오. 죽음을 초월한 그 무엇을 찾아가도록 날 내버려 두십시오."
그 시대는 아름다운 시대였다. 특히 동양은 그러했다.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막지 않으리라. 너의 죽음을 내가 막아 주진 못하니까. 너는 나의 축복 속에 너의 추구를 계속하라. 나로서는 슬픈 일이지만 그것은 나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나의 집착이다. 나는 네가 나의 후계자가 되어 위대한 팔라바스 왕국의 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너는 그것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을 선택했다. 나는 너의 아버지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널 막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너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너의 죽음을 막아 줄 수 없다면 널 막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그대는 뛰어난 지성을 지닌 달마의 수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점은 고타마 붓다의 추종자이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고타마 붓다보다 더 높이 비상한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고타마 붓다는 여성을 자신의 승단에 입문시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달마는 한 깨달은 여성의 제자로 입문했다. 그녀의 이름은 프라기야타라(Pragyatara)였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달마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에 대해서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달마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지시한 것은 그녀였다. 달마가 중국으로 건너가기 6백여년 전에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다. 그런데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그러한 일은 없었다. 고타마 붓다의 메시지는 순식간에 중국사람 전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상황은 이러했다. 중국은 오랫동안 공자 사상의 영향 아래 있어왔고, 사람들은 그것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공자는 도덕주의자이고 청교도일 뿐 삶의 내면적 신비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내면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부정한다. 모든 것이 외부적이다. 그것을 세련되게 하고, 빛을 내고, 교양있게 하고, 최대한 아름답게 하라.
공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노자나 장자, 또는 열자 같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비가였을 뿐 스승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공자에 대응할 만한 어떤 운동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래서 거기에 공백이 자리 잡았다. 공자는 매우 뛰어난 합리주의자였다. 노자나 장자, 열자 같은 신비가들은 공자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 아니었다. 그들은 극소수의 제자만을 데리고 그들의 사원 안에 머물러 있었다.
불교는 중국에 건너가자 즉시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그들은 몇 세기 동안 목이 말랐는데 불교가 하나의 비구름이 되어 나타난 것과 같았다. 그것이 그들의 목마름을 더없이 채워 주었기 때문에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그것을 목말라했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기다리고 있어 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전체가 불교로 개종했다. 6백년 뒤에 달마가 그곳에 갔을 때, 중국에는 이미 3만 개의 절이 있었고 2백만 명의 불교 승려가 있었다. 2백만 명의 불교 승려란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중국 인구의 5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였다.
달마의 스승 프라기야타라는 달마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깊은 충격을 던져주었으나 그들 중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학자였고, 높은 인격과 수양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사랑과 평화와 자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깨달음에 이른 자는 없었다. 이제 중국은 또다른 고타마 붓다를 요구하고 있었다. 씨를 뿌릴 밭이 준비된 것이다.
달마는 중국에 건너간 첫 번째의 깨달은 사람이다.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고타마 붓다가 여성을 자신의 승단에 입문시키기를 두려워한 반면에 달마는 고타마 붓다의 길을 걸으면서도 여성을 스승으로 받아들일 만큼 용기있는 자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깨달은 자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달마는 굳이 여성을 스승으로 선택했다.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란 여성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것뿐 아니라 여자 스승의 문하에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그는 보여 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달마의 이름은 깨달음에 이른 모든 불교도들 사이에서 고타마 붓다 이후 두 번째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2백만 명의 불교 승려가 있었지만 달마는 그들 가운데 오직 네 명만이 자신의 제자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았다. 달마는 제자를 선택하는 데 대단히 까다로웠다. 그가 첫 번째 제자인 혜가(慧可)를 찾는 데에도 거의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9년이란 세월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달마의 동시대에 기록된 역사서들이 모두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양무제를 왕궁으로 돌려보낸 뒤 달마는 9년 동안 벽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그는 그것을 중요한 명상수행으로 만들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벽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벽만 바라보며 줄곧 앉아 있어보라. 그러면 그대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 벽처럼 그대 마음의 화면이 서서히 점점 텅 비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달마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난 그를 만나지 않겠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 그의 등 뒤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무도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은 없었다. 달마는 벽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의 등 뒤에 앉아 있어도 그는 결코 얼굴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벽과 같다. 사람들은 전혀 이해가 없어서, 그토록 무지한 인간 존재들을 바라보는 것은 큰 아픔이다. 하지만 벽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벽은 그저 벽일 뿐이다. 벽은 원래 듣지 못하니 내 가슴이 아플 이유도 없다. 누군가 행동으로써 내 제자가 될 자질을 증명해 보였을 때, 그때에만 나는 고개를 돌릴 것이다."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행동을 해야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혜가라는 이름의 한 젊은이가 달마를 찾아왔다. 그는 칼을 꺼내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서 달마 앞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당신이 돌아앉거나 제 머리가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돌아보지 않으시면 제 머리를 잘라서 당신 앞에 던지겠습니다."
달마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대야말로 진정으로 나의 사람이다. 이제 머리를 자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 사람 혜가가 달마의 첫 제자가 되었다.
우파니샤드에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한 왕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아야티였다. 그는 100살이 다된 늙은이였다.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어 저승사자가 그를 데리러 왔다. 그러나 늙은 왕은 말했다.
"내 아들 중의 하나를 데려갈 수는 없소? 난 아직 제대로 살아보질 못했단 말이오. 왕국의 일을 보살피느라 너무 바빠서, 나는 이 육체를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소. 날 데려가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오. 다른 사람들과 왕국에 봉사하느라 난 기회를 모두 놓쳤소.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 줄 순 없겠소?"
죽음의 사자가 말했다.
"좋다. 그대의 아들들에게 물어보라."
그에게는 100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아들들은 이미 교활해졌다. 경험은 사람을 교활하고 계산적으로 만든다. 그들은 이야기를 듣고는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16살 먹은 막내 아들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좋아요. 제가 갈께요."
죽음의 사자조차 안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100살된 사람도 인생을 다 못살았다고 하는데 하물며 16살짜리야. 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자는 말했다.
"너는 너무 어려서 모른다. 저기 99명의 형제는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잖니 ? 저 사람들 중에는 70이나 75살이 된 사람도 있어. 그들은 늙었고 머지않아 죽을거란다. 불과 몇 년이 문제될 뿐이지. 그런데 네가 왜?"
아이는 대답했다.
"아버지가 100년이 되도록 삶을 다 살지못했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100년의 시간이 흘러도 나 또한 다 살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것 만으로 충분해요.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거예요. 생명을 통해서는 진정한 삶을 얻을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나는 죽음을 통해서 시도해 보겠어요. 그러니 나는 죽음을 통해서 시도해 보겠어요. 허락해 주세요."
이것이 바로 산야신이 "에고를 통해서 살 수 없다면, 나는 에고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 보도록 하겠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라!"고 말한 때의 의미이다. 아들이 잡혀간 뒤 아버지는 100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나서 죽음의 사자가 다시 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 100년은 긴 시간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도 다 살지 못했소. 이것 저것 시도해 보고 계획을 잔 후 막 살기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당신이 온거요. 이건 너무 하지 않소?"
이런 일은 열번이나 반복 되었다. 매번 아들 하나가 나와 목숨을 바치고 아버지는 살아남았다. 그가 천살이 되었을 때 죽음의 사자가 와서 물었다.
"어때? 다른 아들을 데려갈까?"
왕은 말했다.
"아니오. 이젠 천년이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소. 시간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문제요. 나는 존재와 삶을 낭비하는데 익숙해져 있소. 그래서 시간은 이제 아무런 도움이 안되오."
아야티는 다음 세대에게 기억할만한 말을 남겼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천 년동안을 살았지만 나의 마음 때문에 삶을 살지 못했다. 항상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놓쳐 버리곤 하였다. 그러나 삶은 현재이다."
지금 여기를 즐기지 못하면 당신은 삶을 놓치는 것이다. 초대장은 계속해서 오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곳에 없었다. 그대는 다른 어느 곳에 가 있었다. 그리고서 그대는 자기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대는 "어째서 이렇게 비참한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비참하게 보인다. 오래사는 사람도, 오래살지 못하는 사람도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없이 모두 비참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마음이 같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레스토랑의 창문에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밖에서 서서 비참하게 보이지 말라. 들어와서 실컷 먹어라."
밖에 서있으면 비참한 것이고 안에 들어오면 마음껏 먹는다. 그런데 그대는 지금 비참하다. 마음이 비참한 것이다.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생이든 여러 개의 생이든 그것에는 차이가 없다. 문제는 그대가 지니고 다니는 바로 그 마음이 장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 그 마음을 버려라.
어느 이른 아침 붓다가 아침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신이 있습니까?"
붓다는 그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니다. 신은 절대로 없다. 결단코 있었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엉터리 같은 생각을 치워버려라."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았다. 붓다를 항상 따라다니는 아난다에게 마저 붓다의 방금 전 그 대답은 너무 노골적이고 잔인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가 붓다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붓다의 얼굴은 너무나 자비스러웠다. 같은 날 오후 다른 사람이 와서 신은 존재하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신은 있다. 신은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찾아보라."
아난다는 매우 당황했다. 아침에 붓다가 말한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묻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해질 무렵에 찾아왔다. 붓다는 나무 밑에 앉아 저녁노을의 아름다운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물었다.
"신은 있습니까?"
붓다는 단순이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사람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들은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다가 어두워질 무렵 그 남자가 일어났다. 해가 졌다. 그는 붓다의 발을 만져주며 말했다.
"응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하고는 떠나갔다.
이제 아난다는 피가 끌어올랐다. 거기에 아무도 없을 때 아난다는 물었다.
"당신께서 대답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오늘밤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날, 같은 질문에 당신께서는 세가지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는 신은 없다고 하였고, 두번째 사람에게는 신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에게는 당신께서는 소박한 사랑으로 그렇게 앉아 눈을 감으라고 몸짓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깊은 침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발을 만졌고 또한 당신의 응답에 고마움까지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거기에 있었을 때, 당신께서는 그에게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는 도무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어떤 응답도 네게 주어진 것은 없다. 왜 네가 어리둥절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질문이었고, 나의 응답이었다. 너는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아난다는 말했다.
"저는 귀먹어리가 아닙니다. 저는 거기에 있었고 단지 듣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세 가지의 응답이 저를 계속 혼란하게 합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 첫번째 사람은 유신론자였다. 그는 정말 묻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의 믿음을 내가 뒷받침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을 믿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붓다 또한 믿는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나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매우 엄격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의 관념으로 가득차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학자였다. 경전을 둘둘 말아 외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속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망치처럼 잔인하고 엄격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들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충격이 필요했다. 나는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누구의 믿음도 뒷받침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믿음은 그릇된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사람은 무신론자였다. 그 역시 학자였다. 그는 모든 종류의 관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첫 번째 사람과는 정반대 였을 뿐이다. 그 또한 같은 목적으로 왔었다. 그 둘은 서로 용납하지 않았으며 서로 적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같았다. 그는 나에게 그의 불신앙을 옹호 받고자 했다. 내가 그에게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오직 신만이 있을뿐 다른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그런 방법으로 나는 그의 불신앙을 깨뜨려 버렸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참된 탐사자였다. 그는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경험을 원했다. 그는 질문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관념도 편견도 없었다. 그는 할 수 있다면 문을 열고자 왔었다. 그는 나에게 상처받고자 왔다. 그는 지대한 신뢰감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드러내줄 것을 원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그에게 내옆에 앉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맞았습니다. 당신께서 옳았습니다. 무엇인가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깊은 침묵 속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언젠가 무엇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붓다와 같은 침묵 속에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가 어마어마하게 진귀한 것이 일어날 것이다. 그의 침묵에는 전염성이 있다. 만약 그대가 문을 열기만 한다면 그의 침묵이 그대의 존재 안으로 쏟아져 들어 올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욕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그대는 순결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깨끗하게 될 것이다. 먼지가 그대의 거울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대의 눈은 선명해 질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 대답도 내 주지 않았지만 그는 해답을 받았다. 그의 침묵속에서 모든 해답중의 해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절하면 발을 만지면서 고마워하였던 것이다."
卍 현장(玄奘, 602?~664)
중국, 당대 초기의 승려. 서역, 인도에 대한 구법승으로, 일반적으로는 삼장법사로서 알려져 있다. 속성은 진씨(陳氏). 낙양에 가까운 진류군(하남성)에서 태어났다. 13세 때에 출가해서 형 장서법사가 있었던 낙양의 정토사에 살면서 경론을 배웠다. 얼마 후에 수 ∙ 당왕조 교대기의 혼란기를 맞이해서 618년, 형과 함께 장안에 들어갔는데, 병란으로 인해서 학승의 대부분이 사천성으로 도망가서 불법의 한 강좌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천성으로 가서 공혜사로 들어갔다. 622년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얼마 후에 성도에서 장강(양자강)을 내려와서 형주로 가서, 상주, 조주를 거쳐서 안정을 되찾은 국도인 장안으로 돌아가서, 대각사에 살면서 도악, 법상, 승변 등의 학승으로부터 구사론(俱舍論)이나 섭대승론(攝大乘論)의 교의를 전수받았다. 그러나 많은 의문을 해결할 수 없고, 원전에 대해서 본토의 학자로부터 회답을 얻지 못하고, 특히 불교철학의 최고봉인 17지론, 즉 유가사지론(揄伽師地論)을 얻고자 인도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당의 법률에서는 국외로의 여행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뜻을 같이하는 승려 수명과 함께 원서를 내었는데 각하되었다. 그러나 다른 승려는 단념했지만 현장만은 국가의 법을 범해서 구법의 길에 나섰다. 629년의 일이다. 양주, 조주를 통과하고 이오에 이르렀을때 고창국왕의 사자를 만나고, 그의 간청으로 고창을 향하여 여기에서 국왕의 대환영을 받아, 인도로 왕복하는 20년간의 여비 등을 기부 받았다. 이어서 쿠챠에서 천산산맥을 넘어서 북로로 가 서돌궐의 통엽호가한을 만나고, 아프가니스탄을 거쳐서 북인도에 들어가 중인도의 마가다국 나란다사에 이르렀다. 불교학의 중심이었던 이 절에 5년간 머무르면서, 계현론사에게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무착 ∙ 세친계의 유가유식의 교학을 배우고, 인도 각지에 구법과 불적 순례의 여행을 계속해서 다수의 불전을 얻어서 귀로에 나섰다. 힌두쿠슈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호탄을 지나 17년만인 645년에 이번에는 대환영을 받으면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인도에서 가지고 온 것은 불사리 150알, 불상 8체, 경전 520권, 657부로, 이들은 홍복사에 안치되었다. 태종은 크게 기뻐해서 칙령을 내려서 즉시 역경(譯經)에 종사시키고, 고향에서 가까운 소림사에서 역경하고 싶다는 희망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흥복사에서, 후에는 대자은사에서 역경에 전념하였다. 그의 역풍은 충실히 술어역을 이루는 특징을 가져 신역(新譯)이라고 하며, 쿠마라지바 등의 구역(舊譯)과 구별된다. 문하생인 규기, 원칙, 보광 등에 의해서 신역경론에 의거한 법상종, 구사종이 일어났다. 제자인 변기에 편술시킨 여행기 『대당서역기』 12권은 그의 전기인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10권과 함께 정확 무비한 기술에 의해서 7세기의 서역, 인도를 아는 귀중한 문헌인 동시에, 소설 『서유기』의 소재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안 남교의 흥교사에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