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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재
앞서 살아온 누군가도 여기 이렇게 견고한 스스로의 다짐을 다독이고 새겨 놓았다. 부대끼고 흔들려 어지러운 세상, 크고작은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찾아도 좋을 곳. 바로 누정(樓亭)들이다.
정자는 그냥 과거의 건축물이 아니다. 그곳에는 현재에도 유효한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 작은 누정을 앉히고, 스스로의 뜻을 가꿔온 이들을 만날 수 있다. 담양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누정들이 많은 곳이다.
무등산 서쪽 봉우리에서 발원해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증암천(창계천)을 옛 사람들은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다. 냇가에 선 붉은 배롱나무꽃(백일홍, 자미)이 물결에 일렁이는 이 자미탄 주변에는 굴곡 많은 시대를 살다간 옛사람들의 고뇌와 서정이 깃든 누정들이 자리한다.
- 면앙정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살아가는 뜻
담양의 누정을 찾아가는 길, 그 첫 시작은 면앙정( 仰亭, 전라남도기념물 제6호)에서 시작된다. 동쪽 뒤로는 제월봉이, 서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는 제월산 기슭, 담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지은 이는 면앙정( 仰亭) 송순(1493~1583). 송순은 담양 출신으로 일찍이 관직에 나서 두루 요직을 지내다 1533년 권신 김안로가 세력을 잡자 대사헌에서 물러나 이곳에 면앙정을 지었다.
애써 꾸미거나 덧붙여 '과시할' 요량의 집이 아니었다. 무심한 듯 평범한 그래서 더욱 크게 느껴지는 '무작위작'(無作爲作)의 소박한 정자이다. '구름 탄 청학이 천리를 가리는 듯' 유난히 커다란 지붕을 덮어 아름다움에는 여분의 관심도 없다는 듯 평범한 외관을 갖고 있지만,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는 풍류 속에 우주를 제집처럼 느끼며 자연을 다 들여놓고 살고자 했던 송순의 의지가 담긴 곳이다.
당쟁이 난무하던 시대 그는 "맑은 바람이 불어 지남이 없었던들 술에 취한 어두운 한평생을 어떻게 면했을까?" 라고 토로하며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죽임을 당한 선비들을 '상춘곡(傷春曲)'을 지어 기렸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흐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
누정의 이름처럼 살아가는 일이 마냥 쉬운 일이 아닌 요즘, 이곳이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이다.
- 송강정
울울이 들어선 소나무 사이로
면앙정 가까이에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기념물 제1-2호)이 있다. 정자의 앞을 흐르는 창계천의 옛 이름이 '송강'이고, 정자의 주인 역시 '송강'인 까닭에 정자의 이름도 '송강정'이 되었다. 울울이 들어선 소나무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른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잔 세며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이 죽은 뒤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매 지고가나/ 화려한 꽃상여를 만인이 울며 따라가나>(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중)파란만장한 굴곡의 역정을 살았던 정철(1536∼1593)은 삶의 고비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 머물렀다. 벼슬살이 동안 모두 4번을 창평으로 낙향했다. 가사문학의 백미라 일컫는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도 이곳에서 나왔다.
동서붕당 대립의 중심에는 늘 그가 있었다. 술을 즐기고 절창의 시를 짓던 시인 정철의 모습과 서인의 영수로서 타협을 모르며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정치인 정철의 모습은 여전히 탐구의 대상이다.
- 명옥헌
연못에 비친 배롱나무꽃의 아름다움
송강정을 지나 후산마을로 발길을 옮기면 배롱나무에 감싸인 명옥헌(鳴玉軒, 명승 제58호)이 있다. 백 년은 족히 넘은 세월을 제 몸에 품은 기품어린 배롱나무들이 어깨를 나누며 '옥이 부서지듯(鳴玉)' 맑은 물소리를 담아낸 연못에 그림자를 두르고 서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무엇보다 늦여름 짙푸른 녹음 속 붉은 백일홍꽃을 피워낼 때의 모습은 불꽃 속에 환히 타오르는 선연함으로 각인된다.
이곳에 못을 파고 정자를 세운 이는 장계(藏溪) 오이정(1619∼1655). 그의 아버지 명곡(明谷) 오희도(1583~1623)가 광해군 시절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망재(忘齎)'라 이름붙인 서재를 지어 은거하던 중 인조때에 이르러 벼슬에 나아간 지 1년 만에 돌아가시자 생전의 뜻을 기려 아버지가 거닐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조촐한 정원을 만들었다.
명옥헌은 결국 한 선비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남겨있는 공간인 셈이다. 평생을 올곧게 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잇고자 한 아들의 마음이었다.
명옥헌 한편에는 '세 번 찾아보았다'는 뜻인 '삼고(三顧)'란 현판이 걸려 있다.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서 유래한 이 말에는 인재를 찾던 능양군(뒷날의 인조)이 인조반정 전 오희도를 찾아왔다는 일화가 담겨 있다. 인조가 타고 왔던 말을 매었던 후산리 은행나무에도 '인조대왕 계마행(繫馬杏, 전라남도기념물 제45호)'이란 이름이 붙었다.
정자 왼편의 물을 타고 오르면 작은 연못과 그 아래 바위 면에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 새긴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남아 있다. '명옥헌(鳴玉軒)'이란 이름은 정철의 아들 기암 정홍명에 의해 유래했다. 정명홍은 '명옥헌기'에서 "한천(寒泉)에 가득찬 물은 울타리를 따라서 흘러내리는데,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옥이 부서지는 소리 같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더러움이 사라지고 청명한 기운이 스며들어 온다"고 했다.
- 식영정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광주호 끝자락 '별뫼'라 불리는 성산(星山) 언덕에 선 작은 정자는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뜻을 지닌 식영정(息影亭, 명승 제57호·전라남도기념물 제1-1호)이다.
이곳은 1560년 서하당(棲霞堂) 김성원(1525∼1597)이 스승이며 장인인 석천(石川) 임억령(1496∼1568)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식영정은 빼어난 경치와 석천의 인품 덕에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 백광훈, 송익필, 김덕령, 정철 등 호남 사림의 명현들이 즐겨찾던 곳이었다.
특히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일 많건만은/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 아니 나오시는고>로 시작되는 정철의 <성산별곡>의 무대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식영정에 오르면 가까이 무등산이 보이고, 곧게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와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광주호의 물빛이 있어 정자의 풍치를 새삼 되새길 수 있다.
- 취가정
김덕령의 못다 이룬 충절의 염원
식영정 옆에는 담양의 누정들을 배경으로 시작된 가사문학과 관련된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는 가사문학관이 있다. 천을 건너면 사촌(沙村) 김윤제(1501∼1572)가 을사사화 때 낙향하여 세운 정자인 환벽당(環碧堂,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과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환벽당에서 창계천 물길을 따라 약 200 미터쯤 오르면 취가정(醉歌亭)에 이른다. '취가정'이란 정자의 이름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1567~1596)의 못다 이룬 충절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石洲) 권필(1569∼1612)의 꿈에 김덕령 장군이 나타나 '취시가(醉時歌)'를 불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이름 받들고자>
절절한 노랫가락이 못다 핀 청년장수의 기개와 회한을 오늘도 말없이 들려준다.
- 소쇄원
구분의 경계가 사라진 통합의 정원
환벽당에서 다시 천을 건너면 조선시대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소쇄원(瀟灑園, 사적 제304호)이 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인 정암(靜庵) 조광조(1482∼1519)의 죽음을 지켜본 제자 양산보(1503∼1557)가 낙향해 터를 잡은 빼어난 원림이다.
소쇄원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세속의 명리를 향한 욕망을 비워내고 맑고 깨끗한 세상에의 염원을 구현한 곳이다. 입구의 대숲조차 어느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치밀하게 계획되고 설계된 인위의 공간이지만, 건축인지 정원인지 모를 자연 본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양산보는 은일의 삶을 추구했지만 세상과의 단절만을 꾀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그의 철학은 소쇄원 오곡문(五曲門) 옆 담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담을 쌓아 계곡의 물길을 돌리거나 막기보단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담을 쌓아 자연스런 '길'을 내줌으로써 '소통'을 택한 셈. 이런 주인의 배려와 철학이 배어 있는 이곳에 기대승, 송순, 정철, 백광훈, 고경명, 김인후 등 당대 수많은 시인묵객들과 사림의 선비들이 찾아든 것은 당연했다.
특히 장성 출신의 하서 김인후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담은 '소쇄원 48영'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소쇄원은 은일의 공간만이 아닌 나누고 교유하며 시를 짓고 현안을 토론하는 '열린 공간'이었다.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霽月堂) 등의 건물이 자연 속에 스미듯 이어지는 것처럼 어떠한 막힘도 없이 소통하는 소쇄원은 '구분의 경계가 사라진 통합의 정원'이다.
- 독수정
고려 말을 살았던 선비의 외로운 기개
담양 누정길의 끝은 독수정(獨守亭, 전라남도기념물 제61호)이다. 무등산 그림자 짙게 드리운 산음동 자락에 나무로 둘러싸인 북쪽을향해 터를 잡은 이는 고려말의 선비 서은(瑞隱) 전신민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세상 잇속과 권력에 부화뇌동하며 살아가기보단 '독수(獨守)'라는 이름처럼 일생을 홀로 자신을 지키고자했던 고려 말의 선비의 외로운 기개가 담긴 곳이다. 그는 아침마다 북쪽을 향해 절을 했다. 망한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기보다는 스스로 지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서늘한 '다짐'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을 하나로 묶는 단어는 '소신'이다. 소신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의 서늘한 징표였다. 호남 선비들이 걸었던 절의의 길을 따라 걷는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음모의 세상에서 선비들은 이념과 현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부패한 현실 앞에 제 모든 것을 내놓고 싸웠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진정한 선비에게는 개인과 사회가 둘이 아니었다. 개인적 삶 속에 사회적 삶이 있었고, 사회적 삶 안에 개인의 삶이 깃들었다. 죽음의 겁박인 사약도 선비들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실천으로 말의 뼈대를 삼았으므로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호남의 선비들을 찾아나서는 길은 무등산 북쪽 능선에서 시작한다.
- 충장사
충효로써 죽음을 삼았던 김덕령
무등산 자락 충장사(忠壯祠)에 간다. 봄이면 신록이 싱그럽고 여름이면 백일홍의 붉음이 빛나고, 가을이면 단풍 호젓하게 물드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덕령(1567~1596)의 삶과 죽음이 거기 있다. 김덕령은 조선 의병의 총수였다. 겹치는 음모의 늪에 빠져 의병장 김덕령은 엿새 동안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매는 먼저 살을 파고 들어와 정강이뼈를 부숴 놓았다. 매는 자백을 강요했지만 그는 지은 죄가 없었으므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596년 8월21일, 김덕령은 형장에서 옥사했다. 끝내 고문을 이기고,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했다.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 억울했지만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죽음 앞에서 끝까지 초연했다.
김덕령의 혐의는 역모였다. 1596년 여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해 7월14일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의 전령을 받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다. 김덕령이 함양을 거쳐 운봉을 목전에 둔 것은 7월17일, 그때 이미 반란군이 진압되었다는 도원수 전령이 다시 도착했다. 김덕령은 군사를 물려 진주로 되돌아간다. 진주 군영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음모였다. 도원수 권율은 반란군에 가담한 혐의로 김덕령을 체포해 옥에 가뒀다. 김덕령은 영문도 모른 채 역모의 배후가 됐고, 옥에 갇혔다.
충장사 유물관에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지극한 사랑이 있다. 김덕령의 의복이다. 김덕령은 장례조차 쉽지 않았다. 조정에서 감시의 목적으로 사람을 보냈다. 역모자는 마지막까지 편하게 떠날수 없었다. 조정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장례를 치렀다.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는 직접 만든 수의를 죽은 김덕령에게 입혔다. 그 수의는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됐고,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됐다.
김덕령의 무덤에는 잔디만 푸르다. 1661년 김덕령은 누명을 벗었다. 현종이 그의 신원을 허락했고, 병조판서를 추증했다.
김덕령의 서늘한 한을 완전하게 녹여낸 임금은 정조다. 1788년 정조대왕은 김덕령에게 시호 '충장공'과 '정려비'를 내리고,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충효리'란 이름을 하사했다. 그리고 1789년에는 종1품 좌찬성을 추증했다. 김덕령은 죽고 나서 200년이 지나서야 하늘 아래 부끄럼 없는 이름을 남겼다.
-환벽당
선정으로 백성을 품었던 김윤제
사방에 푸른 대숲을 두르고 있다 하여 환벽당(環碧堂,광주 환벽당 일원, 명승 제107호)이라 이름붙였으리라. 환벽당은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다. 자미탄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의 남쪽이다.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1501∼1572)는 식영정을 지어 장인인 임억령을 모신 서하당 김성원의 삼촌이다. 그는 김덕령의 정신적 스승이었고,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김윤제는 김덕령의 종조부였다.
환벽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지극한 정치를 현실 안에서 실현하려 나섰던 호남 선비들의 정신을 새기며 오른다. 환벽당은 16세기 호남사림들의 집결지였다. 주인 김윤제는 덕이 깊었고, 명망이 높았던 선비들이 그를 찾아 환벽당에 자주 모였다. 송순·양산보와는 오랜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김인후와 기대승 역시 김윤제와 막역한 사이였다. 정철은 그의 손으로 키워졌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와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어느 날 김윤제는 점심을 먹고 낮잠에 빠졌다.
꿈이 이상했다. 아래 개울에서 청룡 한 마리가 승천했다. 꿈은 현실처럼 선명했다. 김윤제는 하인을 시켜 개울로 나가보게 했다. 웬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더라고 하인이 고하자 김윤제를 그소년을 데려오게 했다. 그 소년이 정철이었다. 김윤제는 정철을 제자로 삼아 10년을 가르쳤으며 훗날 손주사위의 연을 맺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환벽당은 공 들여 지은 정자다. 환벽당에 달이 뜨면 닫혀 있던 세상이 열린다. 바람이 선비의 정원을 거닐고, 댓잎이 조용히 떨어진다. 눈을 감으면 달이 하늘을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백일홍은 조용히 백일을 피었다 지고, 동백은 붉은 모가지를 떨어뜨리며 죽는다. 작은 연못에서는 물이 바람에 쓸린다.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는 호남 사림의 정점이었다.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지냈던 그는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아주 벼슬을 버렸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나주목사였다. 그는 삶의 가치가 뚜렷했던 사람이다. 중앙에서 벼슬을 할 때는 조정에서 뜻을 폈고,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는 선정으로 백성을 품었다. 늙어서 벼슬을 버린 뒤에는 젊은 선비들을 가르쳤다. 김윤제의 후덕함은 백성들에게도 뻗었다. 그는 백성들이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짓도록 ‘강남보’를 막았다. 또 자신의 재산으로 관개수로를 개통해 가뭄에 시름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첫댓글 20여년전 마포 망원정 옆에살때 추석때마다 망원정에 술상들고 올라가 놀곤 했었는데.....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