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者 猶如有無有性 故得爲空 是名曰空 如是空無空性 故得作有 是名空空 如是空空 在生滅門 둘째는 있고 없고 하는 성품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空이다. 그래서 空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空도 그 空한 성품이 없다. 하지만 어떤 것들을 있게 만든다. 그래서 空空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空空은 생멸문 속에 있다.
세상은 마술과도 같다. 마술에는 실체가 없다. 눈으로 보면 분명히 실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착란을 노린 속임수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 손놀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온 마음이 빼앗긴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착시를 유도하는 움직임에 감탄을 하고 그 결과에 박장대소를 한다.
범부는 이 세상을 착시로 본다. 이 세상은 없다. 없는 것에서 온갖 것들이 튀어 나온다. 사실인 것 같지만 착시다. 눈이 있어도 세상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자연의 소리를 명확히 듣지 못한다. 그래서 갈피를 못 잡고 그 현상에 빠져든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은 인연으로 만들어지는 환영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인연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웃으며 즐긴다. 고양이에게 형광으로 된 가짜먹이를 돌리면 진짜인 줄 알고 정신없이 달려든다. 인간은 그 어리석음을 보고 웃는다. 딱 그렇다. 보통의 사람과 현명한 사람이 세상을 보는 차이가 정확히 이것과 같다.
세상은 아지랑이와도 같다. 목마른 사슴에게는 시원한 물만큼 바라는 것이 없다. 그런 사슴에게 저 멀리 아지랑이가 보인다. 사슴은 그것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라고 여겨 그곳을 향해 뛰어간다. 아무리 달려가도 물은 없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없다. 결국 그 사슴은 목이 말라 죽고 만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물속에 비친 달과도 같다. 달은 하늘에 있다. 물속에 있는 것은 허상이다. 그것은 가짜다. 있는 것 같지만 물 속에는 달이 없다. 시성이라는 이태백이도 그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는데 유아나 일반 범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태백이는 술에 취해 그랬다고 하지마는 범부들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이미 어리석음에 취해 있는 상태다. 그래서 실체도 없는 명예와 부귀를 잡으려고 한다. 결국 생사의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세상은 허공과 같다. 허공의 색이 무엇인가. 푸른색이라고 하여 청천이라고 한다. 청천의 실체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국민학생 때는 하늘을 파란색으로 칠해야 했다. 선생님이 하늘은 파랗다고 그렇게 칠하라고 했다.
하늘은 색깔이 없다. 하늘이 푸르게 보이지마는 그것은 아무 색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색깔에 속지 마라. 인간이 보는 색깔은 이미 본색으로부터 벗어난 다른 빛깔이다.
세상은 메아리와도 같다. 심산유곡에는 언어가 없다. 아무런 인간의 소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가서 고함을 지르면 거기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계곡이 답을 해 준다고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것이 자기 목소리인 줄 안다.
그처럼 세상에는 언어라는 것이 없다. 우매인은 사람의 언어에 실다움이 있다고 하여 집착심을 내지만 그것은 가짜다. 대나무 그림자가 밤새도록 계단을 쓸어도 계단에 있는 먼지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백 천의 언어로 떠들어 봐도 진실의 모습은 건드리지 못한다.
세상은 건달바성과도 같다. 건달바성은 피곤에 지친 자가 보는 환상의 궁전이다. 기력이 쇠잔하면 뿔 달린 도깨비가 보이듯이 피로에 쩐 여행객에게 나타나는 오아시스다. 성벽이 보이고 움직이는 행인들이 어렴풋이나마 보이지만 눈을 닦고 자세히 보면 그것은 없다. 그러다가 또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뭔가 있을 것 같은 세상이지만 막상 거기에 도달하면 또 아무것도 없다. 그때 다시 저 앞에 또 환상의 아름다운 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간은 실체가 없는 유토피아세계를 끝없이 동경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꿈과도 같다. 꿈은 실사가 아니다. 망령된 마음이 만들어낸 제목 부재의 단편극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들은 거기에 집착한다. 꿈 풀이를 하고 꿈의 길흉을 점친다.
"로또번호가 당첨이 되었습니다. 좋은 꿈입니까?" "개꿈입니다."
세상은 풍경화와도 같다. 그림은 평면의 종이 위에 그려진 가짜의 형상들이다. 하지만 잘 못 보면 그 속에는 높낮이와 원근이 사실처럼 보인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마술같은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환쟁이라고 불렀다.
드라마 속의 세상은 평면의 TV화면에 펼쳐지고 중생들이 사는 세상의 무대는 마음의 표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엔 굴곡과 심천과 상하가 원래 없다.
세상은 거울 속의 물상과도 같다. 그것은 허상이다. 아무러한 생명력이 없다. 그저 나타났다 그대로 사라질 뿐이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의 거울에 잠시 나타났다가 내 마음이 움직이면 거칠게 요동친다. 내 마음이 인간에 와 있으면 인간세상이 나타나고 축생에 가 있으면 축생의 세계가 현현하게 된다. 화엄경에서 여태림보살은 이것을 정확히 말씀하셨다.
마음은 요술쟁이다. 온갖 중생의 몸을 만들어 낸다. 일체 우주 가운데서 어떤 것도 내어놓지 않는 것이 없다. 마음에 부처도 만들어 내듯이 부처와 중생도 만들어 낸다. 마음과 부처 중생은 셋 같지만 차별이 없다.
세상은 무대 속의 모습과도 같다. 깨달음을 이룬 성자들은 필요에 의해 진짜처럼 만들어 낸다. 즉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남녀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거나 생로병사의 일들을 보여 주기도 한다. 하지만 실체는 없다. 잠시 교화의 무대를 만들었다가 사용이 끝나면 바로 없애 버린다. 이런 화술은 마귀와 귀신들도 흉내를 낸다. 그들은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런 요술을 행한다는 것이 불보살과 다르다.
위에서 말한 이런 말씀들은 대승경전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전들은 바로 대품반야경이나 능가아발다라보경에 이어 유마경이다. 논서는 물론 空觀을 풀이한 대지도론이 이런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ㅡ계속ㅡ
첫댓글 염생사고 구열반락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