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반쪽
최해숙
입구에 신발들이 가득하다. 내게는 아직 새벽인데 많은 이들이 온 모양이다. 목욕탕 문을 열자 바가지 소리, 물소리, 이야기 소리가 마중이라도 하듯 왁자하게 뛰어나온다. 소리에 뒤질세라 때를 미는 사람들, 물을 끼얹는 사람들의 눈길이 촌각의 지체함도 없이 내 몸에 달라붙는다. 목욕 가방으로 앞가림을 하고는 바가지를 챙겨 욕탕 언저리에 자리를 잡는다.
뜨거운 물 몇 바가지를 연달아 끼얹어 몸을 헹군다. 머리까지 감고는 한참 동안 탕 안에서 뒹군다. 자고 눈뜨자마자 빈속으로 왔더니 허기가 지는지 탕 속에 더 있기가 힘이 든다. 얼른 물 밖으로 나와 가방을 뒤적인다. 목이 마를까 싶어 감귤 한 알을 챙겨 왔었다.
껍질을 벗겨 한 조각을 입에 문다. 아무 생각 없이 귤 조각을 씹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옆에 사람이 있다. 순간, 들고 있던 귤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진다. 저 사람도 목이 마르지 않을까? 콩 반쪽도 나누어 먹는다는데 곁에 사람을 두고 혼자 먹어도 될까? 한 조각 떼어 줄까? 생각만 분분할 뿐 선뜻 내밀어지지 않는다.
먹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멍해 있다가 돌아보니 곁에 앉은 사람은 자신의 바구니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고 있다. 그래, 탱자만 한 귤 한 알인데 나누어 먹을 게 있나. 저 사람도 내게 우유 좀 먹어 보란 말 하지 않는 건 매한가진데……. 알몸을 목욕 가방으로 가리듯, 엉거주춤하던 마음을 그의 손에 든 우유로 가린다. 잠시 동안의 번뇌와 반성의 마음은 사라지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돌이켜 보면 내 것을 나누는 데 참으로 인색한 삶을 살아왔다. 오늘처럼 아무런 연고가 없는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피를 나눈 형제에게조차 내 것을 선뜻 내주지 못했다.
십여 년 전이었나. 동생이 제집의 압력솥이 고장 나서 못 쓰게 되었다고 했다. 마침 내게는 쓰고 있는 것 외에 새것이 있었다. 우리 집에 새 솥이 있다는 말은 뱉었지만 솥을 순순히 주지 않았다. 어떤지 한 번 써 보고 주겠노라고 했다. 자그마한 게 모양이 예뻐 손이 오그라든 것이다. 막상 써 보니 손에 익지 않아 불편하고 아이들이 왕성하게 먹을 때라 솥이 너무 작았다. 그제야 선심 쓰듯 동생에게 주었다.
젊은 날의 처신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탓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도 안다. 그 시절 서민들의 살림이야 내남없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이웃에 제 것을 나누며 살고, 동생 또한 나와 달리 제 것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 비해 나는 살아오며 남에게 무엇을 주기는커녕 늘 받으며 살고 있다. 좋게 보면 인덕이 있다 할 수 있겠으나, 물질이든 정신이든 남의 것을 받기만 하는 삶이 제 것을 주는 삶보다 아름답고 행복하다 할 수는 없음이다.
가끔 대중매체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온몸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사는 사람을 보았다. 또한 살아서는 대중의 영혼을 위해, 사후에는 그들의 육신을 위해 자신의 신체를 내어 주는 성직자를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 삶도 저러해야지 하다가도, 현실로 돌아와 내 것을 내 놓아야 할 때는 주춤거리는 자신이 돌아 보여 얼굴이 붉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누지 못하는 것은 물질뿐이 아니다. 현대는 가상공간의 활용이 일상화된 시대이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많은 이들이 다양한 내용의 글을 올린다. 마음을 흔드는 음악에 귀감이 되는 글과 정보를 전하는 글 등, 몇 날을 다듬고 정성을 들여 올렸을 그 글에 누군가가 댓글을 달면, 더욱이 그것이 용기를 주는 내용이면 글을 올린 이들은 알게 모르게 힘을 얻을 것이다. 슬플 때는 슬픈 대로, 기쁠 때는 기쁜 대로 마음 한 자락 내려놓으면 될 터이나, 메마른 내 마음은 그마저도 주춤거린다.
이유는 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인터넷에 들락거리느라 수월찮은 시간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의 감정 노출로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 걸 보기도 했다. 내가 그런 일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 감정부터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시간을 할애한다.
가끔은 컴퓨터 자판 글쇠를 누르다가 지우기를 반복할 때도 있다. 내가 하는 몇 마디가 이 사람한테 도움이 될까? 혹 오해를 하지는 않을까? 타인에게 용기를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움츠린다. 음식을 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웃과 나누어 먹을까 생각하다가도 이 음식을 저 사람이 좋아할까, 맛없다고 흉을 보지 않을까, 주저하다가 그만 마음을 접는다.
누군가 나눔은 사랑이라 했다. 희망이라 하기도 했다. 내게 나눔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콩 반쪽이라도 내 진심을 담아 주변과 나눌 수 있으려면 뒷걸음부터 멈추어야 할 터이다. 사랑이 있으면 나누고픈 마음이 절로 인다고 하겠지만 용기 없는 내게는 사랑도 희망도 그다음이다.
불자인지라 타 종교의 내력을 알지는 못하지만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 속사정이 어떻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해석을 하건 간에 그 이야기야말로 나눔의 이야기, 세상이 존재하는 근원인 생명 나눔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듯 콩 반쪽의 의미는 나눔의 의미이다. 여태의 내 삶은 누군가 내민 콩 반쪽을 받기만 한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그 반쪽의 반이라도 누군가에게 내밀어야 할 일이다. 콩 반쪽은 다가올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씨앗이 될 것이며, 사람살이는 혼자보다는 함께할 때 더 따뜻하니까.
목욕탕 안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물 끼얹는 소리, 바가지 부딪는 소리가 뽀얀 수증기를 타고 오르내린다. 소소한 일상을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도 날개를 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