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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05. 간도(間島)
[민족유일당운동과 3부 통합운동]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으로부터 일제를 구축하기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간도 지역에는 50여 개에 이르는 각 종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 각기 나름대로의 독립운동의 방략을 실천에 옮기며 일제를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사태의 변화에 따라서 때로는 통합,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1925년에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925년 6월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통치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자 중국동북군벌과 이른바 미쓰야협약(三矢協約)을 체결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조건이 악화되자 민족 진영과 공산 진영에서는 중국의 국민당과 소련의 공산당의 영향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만이 분산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으며, 근대적인 정당정치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첩경이라 생각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북경·상해·남경·광동 등지와 간도, 그리고 국내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강력히 추진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물론 일제의 방해 공작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였으나, 그보다는 독립운동계 자체 내의 문제가 더 큰 요인이 되었다.
즉, 개인 본위 조직론과 단체 본위 조직론이라는 방략상의 의견 대립이 가장 큰 장애 요인이었으며, 그밖에 사상대립·지연·혈연 등 봉건적인 요소들의 대립 등도 실패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단체 본위 조직론을 주장한 세력은 민족유일당협의회로 발전하였으며, 중심은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이에 반해 개인본위조직론자들은 민족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였으며, 경상도 및 강원도 출신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측이었던 김동삼(金東三) 등은 1928년 4월 신민부의 김좌진을 방문하고 3부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다시 한번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기에 가담하고자 하였던 세력으로는 이른바 정의부 탈퇴 파인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의 군정파, 그리고 참의부의 주류인 김승학(金承學) 계열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의 줄기찬 방해 공작과 신민부와 참의부 자체 내의 내분 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독립 운동가들은 계속해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만이 일제를 한국으로부터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28년 12월 정의부측의 김동삼, 참의부의 김승학, 신민부의 김좌진 등이 참가한 가운데 잠정적인 조직으로서 혁신 의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한편, 혁신 의회에 참가하였던 인사들, 특히 신민부의 군정파인 김좌진 등은 1929년 7월에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무정부주의를 수용해 한족총연합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으로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
한편, 1929년 4월 신민부의 민정파와 참의부의 심용준파(沈龍俊派), 그리고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고활신·이탁(李鐸) 등이 길림에 모여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국민부는 그해 9월 20일에 개최된 제1회 중앙 의회에서 ‘국민부는 동포 사회의 자치 행정만 담당하고, 혁명 사업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수행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2월에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으며 당군(黨軍)으로서 조선혁명군을 창군하였다.
1931년에 일제가 동북사변(만주사변)을 일으켜 간도지역을 장악하려 하자,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각각 간도 지역의 중국 항일군과 제휴해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1932년 3월에 시작해 그해 7월에 끝난 영릉가(永陵街) 및 흥경현전투(興京縣戰鬪)는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전투에서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의 병력 1만여 명은 중국 의용군과 합작해 일본군과 정규전을 벌여 적의 맹공을 물리쳤던 것이다. 결국, 관동군의 공습작전에 못 이겨 퇴각하였지만, 이때 일본군의 사상자수는 막대한 것이었다.
한편, 한국독립군이 중국군 군대와 협동작전을 펼친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를 들 수 있다. 이 전투는 비록 한중 연합군에 의한 전투였다 하더라도 주도권을 한국독립군의 지청천이 가지고 있었으며, 동북사변 이후 위세를 떨치고 있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중 연합 작전에도 불구하고 만주 지역이 완전히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한국독립군은 1933년에 그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혁명군은 그 뒤에도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1938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해체는 곧 만주 지역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투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자 재만 독립군 가운데 일부는 중국 본토로 이동해 끝까지 항쟁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주선으로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설반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후일 광복군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공헌하였던 것이다.
중국이 1982년에 실시한 제3회인구조사에 의하면, 중국 전역에는 현재 176만3000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숫자는 중국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가운데 4위에 해당되며 이들 동포들은 만주 지역인 길림성·흑룡강성(黑龍江省)·요령성(遼寧省) 등 동북3성에 주로 모여 살고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있는 길림성에 104만명, 흑룡강성에 43만명, 요령성에 17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 밖에 내몽고 자치주에 5만명, 북경·상해 등 대도시와 산동·광동지방의 주요 도시에는 지역에 따라 100명에서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한인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은 중국 변방에 설치된 29개의 민족 자치주 가운데 하나인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로 1952년 9월 3일에 설립되었다.
이 지역에는 총 인구 175만 가운데 한족(漢族)이 60%를 차지하고 한인(韓人)이 약 75만명으로 4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1990년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 사는 한민족은 모두 1,920,597명으로 1982년에 비하면 많은 동포들이 도시로 이동해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한인들의 한반도 내에서의 연고지와 현재 대륙에서의 지역적 분포의 관계는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편적이고 비공식적인 보고를 종합하면, 연변자치주에는 북한, 특히 함경도 지방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많고, 흑룡강성에는 남한 출신이 대부분이며, 동남부지역에는 특히 경상도 출신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길림성의 혼춘에는 충청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안도현 영경인민공사(永慶人民公社)에는 강원도 고성 출신이, 복흥공사(復興公社)에는 전라도 출신이, 길림성 유하(柳河)에는 서울 출신이 많이 모여 산다.
또한, 길림성의 북부 지역에도 경상도 출신이 많고, 요령성의 심양(瀋陽) 일대에는 평안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며, 북부의 개원(開原) 및 철령(鐵嶺)일대에는 경상도, 특히 안동과 경주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내몽고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은 거의 100%가 남한 출신이다.
간도 거주 한인 동포들의 교육열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 이 지역으로 이주한 1세들이 대부분 영세 농민이었던 까닭에 2, 3세들에 대한 교육열이 무엇보다도 강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교육 사업의 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길림성 연변한인자치주에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기관들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정규 대학 5개교, 중등 직업 기술 학교 28개교, 중학교 251개교, 소학교 1,218개교, 유치원 657개소가 각각 설립되어 있다.
대학 교육기관으로는 종합대학인 연변대학교(延邊大學校)와 연변농학원(延邊農學院)·연변의학원(延邊醫學院), 그리고 연변사범전과학교·연변예술학교 등을 들 수 있다.
연변대학교는 1949년 4월에 설립되었다. 10개 학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학 생수는 1,600명으로 한인수는 70%가 넘는 1,180여명이다. 대학교 창립 초기에는 사범학부·의학부·농학부 등 3개 학부가 있었으나, 1958년에 의학부·농학부가 분리, 의과대학·농과대학으로 독립하였다.
현재 정치학부·역사학부·조선어문학부·한어학부(漢語學部)·일어학부·수학학부·물리학부·화학학부·체육학부 등 10개 학부가 있다.
연변의학원은 5년제로 재학생 1,000여 명, 교수 230명 정도가 있으며, 565개의 병상과 2,0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부속병원도 있다. 그리고 4,500여 명의 졸업생들은 대부분 연변을 중심으로 인술을 베풀고 있다.
한편, 길림성 장백한인자치현(長白韓人自治縣)에서도 동포들이 소학교 교육 사업을 합리적으로 운영해 학령 아동의 취학률이 97%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에는 산간 지역이 많아 촌락들이 산재하며, 생산대(生産隊)와 생산대대(生産大隊)에 각각 소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소수 한인 어린이들을 위해 ‘민족소학반’을 부설, 교육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교육이 부족할 경우에는 ‘교육 강습반’을 조직해 교원을 양성해 내기도 한다.
흑룡강성의 경우에도 1981년 6월 현재 동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수가 고급 중학교 35개교, 초급 중학교 114개교, 소학교 410개교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소학교의 경우, 한인 학교는 이 지역 소수 민족의 소학교 전체 숫자 563개교 가운데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흑룡강성에는 유일한 한민족사범학교가 있다. 사범학교는 1978년 정상현(正常縣)에서 개교하였으며, 성 전지역의 5, 6개 시와 현에서 온 한인학생 170여명이 다니고 있다.
한인자치주에는 민족교재출판기구가 있어 교재 출판과 번역, 인쇄 발행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이 출판 기구에서는 한인 중학교와 소학교들에서 사용되는 250여종의 교과서와 참고서 400여 만부도 찍어 자치주는 물론 동북3성에 공급하고 있다.
이밖에 자치주에서는 민족 교육 및 과학 연구 기구를 설립해 그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자치주의 민족이론연구회·역사학회 등은 학술 연구에도 주력해 최근에는 연변 한인들의 민족사와 한글에 대해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변한인자치주에는 최대 규모의 연변가무단(延邊歌舞團)을 비롯해 13개의 예술 단체가 있으며, 각 현과 시에는 예술 극장과 문화관 등이 있다. 한인들은 중국의 4인방축출(四人幇逐出) 이후 문예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문학·음악·무용·미술·연극 등 다방면에 걸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5년 이후 자치주에는 연변문학예술공작자연합회·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및 연극·음악·무용·미술·활영 등 5개 분회가 결성되었다. 그밖에 연변가무단·연변활극단·연변희곡별원(延邊戱曲別院) 및 7개 현·시의 문예공작인단 등 예술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지난 1956년 7월 결성된 연변한인극단(단장 허종환)은 지난 30여년 동안 <춘향전>·<심청전> 등과 외국의 번역 작품을 연평균 207회나 공연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에 조직된 한인예술단은 노래와 춤, 의상에 이르기까지 민족적 색채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최근에는 흑룡강성 목단강시(牧丹江市)에서도 한인 동포 가무단이 조직되어 공연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치주에는 문학예술연합회와 문학예술연구회를 비롯한 기구들이 조직되어 있고, 각 현에는 창작소들이 있다. 1981년에는 길림성 통화 지구에서 한인 동포 문학인들이 모여서 한인문학협회를 창립하였다.
통화 지구의 10개 시 및 현의 30여 명의 문학인들과 북경·요령·흑룡강성 등지로부터 많은 한인 문학인들이 참가하였다. 문학 협회에서는 문학잡지 ≪장백산≫을 발간하고 있다.
이밖에도 문예 잡지로 ≪연변문예≫가 문화혁명 기간 중 정간되었다가 복간되었다. 발행 부수는 약 8만 5,000부로, 중국 거주 전체 한인 동포 10명당 1부씩에 배포할 수 있는 분량이다.
길림성 거주 한인 동포들은 1957년에 설립된 연변예술학교를 통해 한민족의 문학·예술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직 단체들의 문예 간부들은 민간 문학예술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농악무(農樂舞)·검무(劍舞) 및 민간음악·무용·시가 등의 민간 예술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부채춤·정수무(頂水舞) 등을 발전시키고 있다.
한인 전통 예술과 함께 기악·성악·무용 등의 전문 예술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이 연변예술학교는 현재 131명의 중등반 학생과 50여 명의 대학전문반 학생들이 129명의 교직원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밖에도 자치주내 농촌과 시내에는 100여 개의 문화실과 800여 개의 영화상영실이 있다. 영화의 경우는 한국어 제작과 함께 중국어 제작으로 나누어진다. 가령, 중국어로 제작된 것이라도 한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길림성 연변한인자치주에는 한인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예술·과학·교양 등에 관한 한글 잡지의 발행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연변문예≫·≪소년아동≫·≪주부생활≫·≪연변교역≫·≪재정과학≫·≪아리랑≫·≪청년생활≫·≪청년과학≫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한인자치주에는 연길시 한인 동포들이 운영하는 연길교육출판사가 있다. 1947년에 창립된 이래로 정치·경제·문화·교육·과학·기술·문예 등 각종 한글 서적과 교과서 등을 1980년 말 현재까지 약 8,200여 종에 1억 3,000만부를 편집, 출판함으로써 한인문화교육사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출판과 아울러 각종 민족도서·교과서·교양잡지까지 담당하고 있어 한인 동포 문예활동은 물론, 지식 및 문화 수준의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그밖에 중국 고전을 비롯한 다수의 외국 작품들도 번역, 출판하고 있다.
연변자치주 연길시에는 1946년부터 한글로 발행되던 ≪길림일보≫를 개명한 일간지 ≪연변일보≫가 있다. 한글판과 한문판을 합해 발행 부수는 약 6만부 정도이고 회사 직원은 1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주로 정치 뉴스보다는 생활 뉴스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 밖에도 흑룡강성에는 발행 부수 5만의 ≪흑룡강신문≫이 있으며, 요령성에는 ≪요령일보≫와 ≪요령농민신보≫가 있다.
방송의 경우는 길림성의 연길라디오·텔레비전방송국, 장춘라디오방송국과 흑룡강성의 하얼빈 라디오 방송국 등이 있다. 한국어 방송은 1981년 8월부터 현지 교포들의 손으로 꾸려져 전파가 발사되고 있으며, 주로 문예 프로와 지방 소식 등으로 편성되고 있다. 현재 길림성 한인자치주에서는 10여 가지의 한국어 텔레비전 프로를 방영하고 있다.
한인들의 경제적 기반은 과수원과 벼농사를 위주로 한 농업이다. 특히, 쌀이 귀한 북중국지방에서 다른 작물에 비해 값이 비싼데다가 한인들은 한냉지대에서도 벼 재배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주위의 한족(漢族)들에 비해 높은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더구나 벼는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으므로 전체적으로 벼 재배를 전문적으로 하는 한인들의 농업 경제는 안정되어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 살펴보면, 농업 노동력이 부족한 가족이나 식구 수가 적어서 다른 생산 분야에 종사할 사람이 없는 가족은 일반적으로 가난하다.
그러나 이는 같은 한인 가운데에서의 경제적 지위의 상대적 차이일 뿐, 다른 중국인에 비해서는 일반적으로 비교적 나은 편이다.
중국에 있는 한민족의 경제활동은 서비스업, 무역, 제조업 등의 순이다. 이러한 경제활동은 중국이 개혁 개방을 실시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한편 최근에는 한국에서 노동일을 통해 경제적 부를 이룬 사람들도 자주 목격된다.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동포들의 경제적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다.
일반적으로 가옥 형태는 농촌 지역에서는 부엌과 2, 3개의 방,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외양간이 딸린 한국 농가의 내부 구조를 가진 소규모의 단순한 집이다. 도시에서는 일반 아파트나 벽돌로 된 중국식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집에는 장농·이불·요강·옹기단지와 독·책상·카세트·라디오·텔레비전·자전거·우마차·재봉틀 등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보급 상태는 통계적으로 조사된 것이 없다.
흑백 텔레비전은 꽤 보편화되어 있는 듯하나, 보다 깊숙한 농촌으로 들어가면 10여 호당 1대꼴로 있다. 자전거·시계·재봉틀 등은 장농과 더불어 혼인할 때 꼭 장만하는 품목으로 되어 있다.
농촌에 기계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대개 경운기와 이앙기·추수기 등이 보급되어 있지만, 생산대대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다. 최근 연산승포제(聯産承包制)라고 불리는 공동보급생산제의 실시와 아울러 개인 소유 형태의 영농 방식의 도입이 시도되면서, 이러한 기계와 농업 기구들이 어느 정도 개인 소유 형태로 이양되어 가고 있다.
의생활면에서 남자인 경우 평소에는 인민복과 작업복을 입지만 한복도 자주 입는 편이다. 여자인 경우에도 보통 생활에 편한 대로 작업복을 입지만 남자보다는 한복의 착용이 훨씬 보편적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국 옷은 거의 입지 않는 것 같다.
식생활에 있어서 평소에 먹는 음식은 반드시 한국 고유의 음식만은 아니다. 물론, 밥·나물국·콩자반·생선요리·김치·시래깃국·된장·쌈 등이 주로 식탁에 오르는 것들이며, 명절에는 떡과 경단을 마련하지만, 간단한 중국 음식도 자주 만들어 먹는다.
중국 음식은 중국인이 위주가 된 대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무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상대적으로 자주 먹는 것 같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 음식이 많으며, 그 종류나 질에 있어서는 소찬에 가깝다.
간도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다른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에 비해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음력설·정월대보름·한식·단오·추석·동지 등 절기에 따른 명절을 지키며, 남녀 모두 전통적인 의상을 입고 윷놀이·그네뛰기·널뛰기·축구·씨름판을 벌이고 엿·떡·찰밥·팥죽·떡국 등을 즐긴다. 또한, 용(龍)날에 우물물을 긷거나 그믐날 밤새우기 등의 세시 풍습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또한, 출산한 집에서는 비록 금줄을 치지는 않지만, 첫이레 동안은 외부인의 출입을 삼가게 하고, 백날·돌날·환갑날은 잔치를 벌이는 등 통과의례 생활도 비교적 잘 지켜진다.
가을이면 각급 학교의 운동회가 열리고,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기념대회 때에는 전 한인이 모여 대대적인 축제를 개최한다. 이때는 물동이를 이고 달리기도 하며, 장구와 꽹과리를 치면서 <노들강변>과 <아리랑> 등의 옛 민요 가락 속에 춤을 추기도 한다.
특별 행사나 집단적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문화적 전통과 전통적 생활양식이 많이 발견된다. 재래식 아궁이와 부뚜막에 큰 솥이 걸려 있고, 벽에는 바가지들이 몇 개 걸려 있는 부엌에서 머리는 흰 수건으로 싸고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치마저고리에 흰 치마를 두르고 물동이를 이고 가거나 빨래터에 모여 앉은 여인들도 흔한 풍경이다.
중국식으로 의자 생활을 하는 집도 있지만, 대부분은 온돌방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한다. 식구들은 모두 둥근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성인이 되어도 부모나 연장자 앞에서는 담배를 삼가한다. 남녀관계에 있어서 젊은 세대들 가운데에는 연애를 하는 일도 많지만, 여전히 맞선을 보아서 혼인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출산·생일·혼인·회갑에 따른 잔치와 장례는 비록 소규모의 단순한 형식이나마 지켜지며, 제사를 포함한 조상숭배 의식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모임과 행사는 더욱 활발해지고 규모도 크고 풍족하게 치러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혼인식은 대부분 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한복에 ‘너울(면사포)’을 쓰고 학교 강당에서 식을 올리고 사진을 찍고 잔치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구식 혼례를 올리는 곳도 더러 있다.
또한, 한인들은 보신탕을 즐겨 먹어 곳곳에 개장국집 혹은 포육탕(抱肉湯)이라는 간판을 붙인 식당이 많다. 불고기와 냉면 집은 비싸기도 하고 평소에 집에서 만들어 먹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인이 더 많이 간다.
전반적으로 물질적 측면에서는 현재의 한국 사회와는 차이가 많다. 여자의 한복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 장식이 없이 소박하며 40년 전의 모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음식 또한 몇몇 종류의 나물무침과 김치와 된장 종류, 갈비탕·불고기·냉면·식혜·떡·수수경단·팥죽·찰밥·쇠고기국·돼지고기찌개 등 보편적인 것들이며, 새로운 한국 음식의 개발은 없는 듯하다.
길림성은 북한 지역과 640㎞의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북한을 지지하고 있지 않으며, 북한에 대해 극히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인 동포 1세들의 고향은 북한이 3분의 1정도이고, 나머지는 대한민국 출신이다. 그들은 북한을 하나의 ‘사회주의국가’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북한의 생활 수준이 간도에 살고 있는 한인 동포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고 한다.
한인들은 한민족이라는 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연대감보다는 언어·핏줄이라는 문화적·혈연적 연대감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 3세로 이어지면서 중국에 귀화하는 현상이 점차 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인과의 혼인율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한인 교포들이 한국에 와서 취업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분은 불법 취업을 하고 있다. 교포들이 한국에 취업하고 있는 동안 한국의 발전상에 크게 감명 받는 한편 동포들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대우에 불만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 대한 호감은 점차 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간도 [間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