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함, 그 속에 품은 도도함,
팔공산 백흥암(八公山 白興庵)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549 / 은해사 종무소 054-335-3318
산중암자 백흥암,
유독 단아하고, 정갈한 공간입니다.
수행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절집,
그 이외에는 모든것을 거부하는 수행처입니다.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도도함을 가진 암자,
백흥암을 만나고 왔습니다.
깊은 산중 암자, 백흥암.
더 이상 갈곳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무참히 짓밟고 그 보다 더 한참을 올라서야 만날수 있는 암자다. 작은 내길 삼거리에 닿아서야 백화암이 보이고, 그 자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계속 오르면 중암암으로 가는 기리이다. 팔공산 자락에 자리한 수 많은 암자들 사이로 내어져 있는 호젓한 길, 사람들은 그 길을 참 좋은 숲길 트레킹 코스로 꼽아낸다.
단아함, 그 속에 숨겨둔 도도함.
길손은 백흥암을 그렇게 말하고 싶다. 암자라 하기에 결코 작지 않은 규모, 그러나 담벼락 부터 대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정갈함이 묻어난다. 독경 소리마자 들리지 않는 수양의 터전일것만 같은 곳이아 생각이 들 정도로 반듯한 공간이다. 백흥암을 만나기 전 까지의 짐작으로는 산중 암자이니 사람이 그리운 절집일것이라는 생각에 문 활짝 열어 제껴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메아리 울리는 청아한 독경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백흥암, 길손의 생각은 완천한 착오였음을 깨닫게 된다.
암자의 문은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암자의 마당에 들어서자 떡 하니 버티고 선 보화루의 위용에 그나마 기가 죽을 기세인데, 암자로 통하는 유일의 대문은 삐끗하게 열려져 있는 상태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오롯이 스님들의 수행처였으며, 거기에 더하여 비구니 스님들의 정진 공간이었다. 관광지 내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음을 가지고 있는 절집이 되는것이다. 말 그대로 참 절집같은 암자이며, 제대로 된 수행공간의 절집인것이다.
백흥암의 단아함은 철저하게 외부와의 단절을 통하여 만들어진 자연스러온 결과라 하겠다.
은해사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9년(869년)에 혜철국사가 창건한 절집으로 창건 당시 주위로 잣나무가 많았다하여 송지사(松旨寺)라 불렸다. 임진왜란으로 절집은 모두 불에 타 소실 되었고 조선 명종1년(1546년)에 들어서 중건하며 백흥암이라 불렀다. 이 후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치고 영조 6년(1730년)에 보화루를 중건하면서 백흥암은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비구니 스님도량, 백흥암.
수행의 역사를 지닌 암자, 그 이전에 불교미술의 진가를 가진 도량으로, 수행처로의 선방이다.
보화루
어렵게 들어선 암자의 경내는 밖에서 만나는 풍경과는 또 다른 세상이다.
더욱 정갈하며 옛스러움을 더한다. 진한 갈색의 나무빛이 고색창연함을 빛내고 있으며, 발자국 소리마저도 울림으로 들릴정도의 고요함이 있었다.
단청 되지 않은 가람들의 나무빛이 풍요로웠으며, 유독 맑은 바람속에 청아한 소리를 질러대는 풍경 소리는 오히려 암자의 풍경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지경에 이른다. 이내, 고개를 들어 보화루의 앞에서 바라본 경내의 풍경,
극락전을 바라보는 순간 "아~!" 짧은 외마디의 감탄사를 흘린다.
같은 나무의 빛임에도 분명한 제색을 지닌 빛바랜 단청을 지닌 가람, 웅비하듯 날개를 멋스럽게 펼친 팔짝지붕의 조화가 예사스럽지 않음은 이 전각이 보물 제790호임을 알고 난 이후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전각의 위용에 한참을 감탄하며 서 있었으나 진가는 그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보물 제486호 백흥암 수미단이다. (직접 만나 볼수는 없었고 겨우 촬영 허가를 얻어 일행중 한분만이 들어가 촬영하였으며 이를 함께 공유하였음을 알립니다.)
아미타삼존불을 받치고 있는 불단으로 각 면마다 세밀하게 조각된 걸작이다.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아마도 직접 만나 보았다면 길손은 셔터도 누르지 않고 멍하니 바라만 봤을것이라는 생각이다.
극락전을 돌아 나오니 선실의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 있다.
이는 또 무엇인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추사선생의 글씨란다. 진영각 편액과 6개의 주련에 쓰여진 추사선생의 글씨, 보화루의 안쪽에 걸린 현판 산해숭심(山海崇深), 그 마저도 추사선생의 글씨라 전한다.
백흥암의 단아함은 스님만의 청정 수행 도량에서 나온것이었으며, 비구님 스님들만의 선방다운 정갈함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숨막히는 작품인 보물 두점, 극락전과 수미단을 품은 암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추사선생의 글씨를 걸어 놓은 암자, 이것은 백흥암의 도도함을 빛내 주는 자랑스러움이다.
일년에 딱 두번, 부처님 오신날과 동지에만 출입할 수 있는 백흥암, 길손은 그 안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산해숭심(山海崇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 원래는 山崇海深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나 백흥암 보화루에 걸린 추사의 글씨는 사뭇 다르다.
이와 같은 내용은 호암미술관에 보관중인 '산숭해심(山崇海深), 유천희애(遊天戱海)' '산은 높고 바다는 깊으며, 하늘에서 놀며 바다를 희롱한다'라는 뜻으로
추사 선생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보관되어 있는데, 백흥암의 보화루엔 어쩌자고 엇갈려 놓아 쓰셨는지..
백흥암 극락전 (白興庵 極樂殿, 보물 제 790호)
인조 21년(1643년)에 지어진 건물로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다.
정면3칸, 측면3칸늬 다포계 팔짝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양식을 충실히 다른 구조다. 익공을 넓게 펼쳐 한단위에 더 높게 지어진 이유로
날개를 화찍 펼치고 금방이라도 날아갈듯한 웅비의 모습이다.
단청 없는 빛이 고운 나무빛으로 진갈색과 연갈색의 조화가 잘 어울린 전각이다.
수미단 (白興庵 須彌檀, 보물 제486호)
수미단은 5등분으로 되어 있다. 위에서 볼 때 1단과 맨 아래 5단은 튀어나오게 구성되었는데, 각 구획 안에는 안상(眼象)을 부조로 새겨 놓았다.
가운데 3단은 다시 5등분하여 사람얼굴에 봉황, 공작, 학, 꿩, 용, 동자, 물고기, 개구리, 코끼리, 사자, 사슴 등을 연꽃잎 속에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선실의 추사선생의 글씨인 주련들
我觀維摩方丈室 사방 열자 유마의 방이니
能受九百萬菩薩 능히 구백만 보살을 살펴
三萬二千獅子座 삼만 이천 사자좌를
皆悉容受不迫? 들이고도 비좁지않으니
又能分布一鉢飯 한 바루 밥 나누어서라도
?飽十方無量衆 능히 사방 대중 배불리리라
첫댓글 백흥암 잘 보았습니다.
두번을 갔다가 못들어가고 돌아온 곳입니다...선생님~편안히 주무세요...늘 감사합니다...
저를 부르시지 15년전에는 그냥 드나들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비구니들만 있는 선원이기 때문에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 옆의 운부암도 볼 만 하고 바로 곁에 있는 경산의 환성사 수미단도 볼만합니다.
예~그렇군요...다음에는 선생님과함께 답사를 해야겠어요...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