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
보물 제540호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탑으로, 현재의 자리인 홍천 군청 안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서 있던 원래의 위치는 일대가 절터였을 것이나, 지금은 밭으로 변하고 주변에는 기와조각들만이 흩어져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4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4사자탑(四獅子塔)이라 부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1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는데, 이 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어, 원래는 이곳에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새겼고, 가파른 경사면 탓인지 얇고 밋밋하다. 네 귀퉁이는 살짝 젖혀져 뾰족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고, 닳은 흔적이 보이나 대체로 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기단에서 보이는 안상 조각수법과 돌사자, 연꽃받침 및 지붕돌의 3단 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을 물씬 풍기고 있다. 각 재료의 구성이 통일신라의 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지만 고려시대 중기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진리석불
문화재자료 제14호
홍천읍(洪川邑) 진리(津里)의 도로변에 소재하고 있는 불상(佛像)으로 전해 내려오는 유래(由來)나 전설(傳說)이 없다. 석불(石佛)은 원래 두부(頭部)가 결실(缺失)되어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만든 것이며,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붙인 형상(形象)이며 의상(衣裳)은 좌우대칭(左右對稱)의 통견(通肩)이며 몸 전체를 가려 발등만 노출(露出)시켰고 옷 주름은 양각(陽刻)으로 소략하게 조각(彫刻)되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228㎝, 어깨 너비 80㎝로 전체적(全體的)으로 중후(重厚)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조성(造成)된 석불(石佛)로 추정하고 있다.
강원도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
보물 제80호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사찰 입구에 설치되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 곳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많은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터로 짐작되고 있다.
지주는 약 70㎝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는데, 이 두 지주의 사이가 당간이 들어갈 부분이다. 특별한 장식없이 소박하며, 중간 아래로 내려오면서 조금 굵어졌고, 밑부분에 이르러는 더욱 굵어진 모습이다. 깃대를 고정시켜주는 홈이 안쪽 윗부분에 파여져 있다.
이곳에 함께 있는 홍천희망리삼층석탑(보물 제79호)과 관련지어 볼 때, 거의 같은 시기인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강원도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
보물 제79호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갖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3층석탑으로, 원래는 홍천초등학교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군청으로 옮겨 놓았다. 보수를 하여 보존상태는 양호하나 이미 지붕돌은 깨어졌다.
현재 모습은 시멘트로 다져진 높은 바닥돌 위에 널찍한 돌 2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기단과 탑신부가 있는 상태이다. 기단 가운뎃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가운데에도 기둥조각을 두었다. 기단을 마감하는 맨 윗돌은 윗면에 약간의 경사가 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3층의 몸돌이 없어져 위층으로 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붕돌 밑에는 모두 4단씩의 받침을 새겼다. 지붕돌이 두껍지는 않지만, 네 귀퉁이 끝부분의 치켜올림이 적어서 날렵한 느낌은 없다.
이 탑은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너무 크게 조성되어 비례가 맞지 않고, 마치 탑신이 기단부의 첨가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각 부의 조각에 있어서도 약화된 모습이 보여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댓글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을 보니 화엄사의 4사자 3층석탑이 생각납니다.
제가 요즈음 정만법우님과 정원법우님 참 존경스럽습니다. 사진을 찍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정리해서 올리는게 여간 시간이 걸리는게 아니던데... 두분 참 대단하십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