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농사 / 정임표
수필쓰기는 마치 농부가 힘들여 지은 곡식을 갈무리하는 일과 같다.
벼가 다 익으면 농부는 낫을 들어 벼를 벤다. 나락은 아직 볏 짚 끝에 달려 있고 농부의 소출은 볏짚이 아니라 나락에 있다. 베어 진 벼는 논 바닥위에 가지런히 눕혀져 삼사일 정도 가을 햇볕에 잘 말린 다음 타작하기 좋도록 적당한 크기의 단으로 묶는다. 탈곡기를 가져와 벼 알갱이를 털어 낸다. 짚단은 따로 비 맞지 않도록 차곡차곡 쟁여 쌓고 알갱이 속에 섞인 짚북데기와 검불들을 골라낸다. 소쿠리에 나락을 담아 어깨 위에 올리고는 부는 바람을 비켜서서 곡식을 인다. 가벼운 검불과 먼지가 날아가고 무거운 곡식과 돌멩이는 발 앞에 쌓인다. 쌓인 무더기에서 다시 돌멩이를 골라낸다. 마당에 깔린 마지막 알갱이들은 다시 키를 가져와 까불린다. 알곡을 깨끗한 가마니에 담아 뒤주에 갈무리 한다. 한 해를 날 양식이 비로소 준비 된다.
그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니다. 나락이 밥이 되어 내 몸을 살찌우려면 도정을 해야 한다. 옛날에는 연자방아나 디딜방아를 사용했다. 쌀을 감싸고 있는 왕겨를 벗겨낸다. 그 다음에 또 속 등겨를 갈아 낸다. 8분도, 9분도, 10분도의 하얀 쌀을 얻으려면 방안간의 연자 맷돌을 그 만큼 더 돌려야 한다. 다 찧어진 쌀은 부엌의 쌀독으로 갈무리 된다.
거기가 끝이 아니다. 쌀을 가지고 밥을 지으려면 씻어야 한다. 작은 돌을 골라내기 위해서 또 조리질을 해야 한다. 마지막 조리질로 바가지 바닥에 가라앉은 좁쌀 같은 돌멩이까지 골라내고서야 비로소 밥솥에다 앉힌다. 강한 불로 끓인 다음 약한 불로 뜸을 들여 자진다. 이때 밥이 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잠시 방심하면 누룽지만 잔뜩 먹게 되는 때문이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어린 내게 쌀은 여든여덟 번 손이 가야 쌀이 된다고 쌀(米)이라고 한다하셨다. 수필이 꼭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깨우친 생각 속에서 우리가 먹지 못할, 먹어서는 아니 될, 헛되고 잡된 생각들을 하나하나 걸러내는 작업이 수필을 쓰는 작업과 하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농사짓는 일을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농촌생활을 낭만적으로만 여기는 때문이다.
쌀이 우리 몸을 살찌우는 양식이라면 문학은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이다. 영혼의 양식을 만드는 일이 육신의 양식을 만드는 일보다 쉽다고 여기는 분들은 작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깨우쳤다고 다 문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내가 깨우친 것이 타인의 영혼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도록 하려면 여든여덟 번이 아니라 백번 이상의 손질을 해야 한다.
수필을 모를 때, 나는 내 자식을 가르치면서도 내가 깨우쳤다고 그들의 가슴에 멍이 들도록 말하기도 했다.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내말에 반항 했다. 영혼의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검불과 돌멩이까지 억지로 먹였으니 반항하는 게 당연하다. 수필을 알고 난 요즈음은 어떤 모임에서고 건배사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수필처럼 불필요한 말, 해로운 말을 지워버리려고 하다 보니 그리되는 것이다. 생각을 강요하면 싸움이 된다. 문학은 스스로 유익한 길을 찾아가게 한다.(2012. 4.19)
(이글은 산영수필문학회원님들을 위하여 깨우침의 세계를 감성적인 방법으로 전하는 기법(문학적인 방법)을 시범적으로 보여드리고자 쓴 초고입니다. 다양한 목적으로 또 다른 방법으로도 쓸수가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