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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네 복음서에 실린 이적(異蹟) 사화 혹은 기적 사화 30편은 크게 네 가지 사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병을 치유하는 치유이적사화, 악령을 추방하는 구마이적사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소생이적사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자연이적사화 4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에는 두 가지 이적사화, 즉 치유이적사화와 소생이적사화가 동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이적사화들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치유이적사화에서 강조되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치유를 위한 가장 1차적인 조건은 믿음입니다.
치유를 이행하는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필요하지만, 치유대상자인 환자의 믿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치유되면 고맙고 되지 않아도 괜찮고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꼭 치유시켜주시리라 믿는 강한 믿음이 치유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신 이유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치유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치유자와 치유 대상자 사이의 교감과 공감입니다.
치유사화와 소생사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열두 해’라는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완전함’ ‘꽉 찬’이라는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증세는 그 어떤 명의(名醫)도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중증이었던 것입니다.
극에 달한 통증, 극단적 고통, 따라서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치유와 소생 사화를 통해 우리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분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그분은 다시 원점에서 다시 한번 출발하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낡은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 말라 죽은 고목에서도 새싹을 돋게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소생 사건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소생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그리도 간절히 반복해서 원하는 육체적 치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끝도 없는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치유, 그래서 우리가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내면의 치유요, 마음의 치유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치유요, 고정관념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살 것이라는 착각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오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바람과 희망의 차이>
복음: 마태오 9,18-26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은 엄청난 믿음을 보여줍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믿음은 하느님 능력을 말해줍니다. “당신은 손만 대면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는 하느님 능력은 물론이요,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능력자시요 자비로우신 분으로 여기게 되면 우리 마음에 생기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음과 희망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희망이 우리를 주님께로 이끕니다.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희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칫 우리는 희망과 바람을 착각합니다. 희망은 믿음이고 바람은 인간적인 욕구입니다. 바람으로 구원되지는 못하지만, 희망으로는 구원에 이릅니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김형규 씨가 담배꽁초 20만 개로 실물 크기의 자동차를 만들어 금연 캠페인을 하였습니다. 담배꽁초 수집에만 2달, 분류하는 것만 2주가 걸려 거의 3달에 걸친 작업이었습니다. 작업이 끝나자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에 가보니 면역체계가 무너졌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함께 작업한 30명 대동소이한 반응이었습니다. 그 중의 흡연자가 15명이었는데 모두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15명 모두 다시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희망한 것일까요, 아니면 원했던 것일까요? 인간적인 바람으로는 얻어지는 게 없습니다. 희망은 믿음과 함께하기에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고 끝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유학을 다녀와서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여러 병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레이저로 붉게 된 얼굴을 지졌습니다. 그래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한약도 먹어 보았습니다. 여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찾으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계면 활성제에 대한 일부 의사의 소견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10년째 비누를 쓰지 않습니다. 그때 시도해 보았더니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죽은 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면,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을 거야!’란 생각 안에 ‘방법’과 멈추지 않게 하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성녀 요셉피나 바키타는 어렸을 때 납치되어 매일 매를 안 맞는 날이 없는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쇠사슬에 묶여 900킬로를 걸어서 끌려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매일 때리고 그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아이는 자연을 만드신 분을 찾고 싶었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이 주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 매달려 이탈리아로 넘어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수단으로 보내지려 할 때 그녀는 이탈리아 법정에까지 나아가 그들과 싸우며 자유를 쟁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녀원에 들어가 겸손하고 온화하고 위로하는 수녀님으로 47년을 삽니다. 그녀는 자기 삶에 관해 쓴 책으로 많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삶입니다. 희망하는 삶이 반드시 열매를 맺는 이유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선물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연옥의 한순간의 고통은 지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더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연옥에 가지 않기를 원해야 합니다. 원하는 사람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사람은 찾습니다. 연옥에 안 가게 하는 유일한 기도가 있습니다.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사실 이것을 바치지 않는다면 원하기는 하지만, 희망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법을 찾고 꾸준할 수 있어야 기적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희망이 단순한 바람과 다른 점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9,18-26: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치유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께 나타나 예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했던 것같이(2열왕 5,11), 신앙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이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신학교에 들어가서 힘든 시간은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규칙적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익숙하지 않았고, 특히 시험 기간 중에 긴 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신학교는 무조건 규칙적인 생활이라 시험이라고 해서 밤늦게까지 공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기도하기란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적 독서를 하다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이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제단을 어디든 세울 수 있습니다.”
시험공부하느라, 또 학교 일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핑계였습니다. 제가 있는 모든 장소가 기도할 수 있는 제단이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걸을 때, 시장에 있을 때, 버스를 타고 있을 때, 일할 때, 공부할 때, 집안일을 할 때…. 그 모든 장소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쁘다고, 어렵고 힘들다고 아예 기도를 내려놓았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서 기도하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과 얼마나 소통하려고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복음에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치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치유를 받으려면 손을 얹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도 딸의 죽음을 알리면서, 예수님께 손을 얹어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총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주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서거나 무릎꿇지 않고 누워서 기도했습니다. 그의 발이 차꼬에 묶여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워서 기도했다고 주님께서 외면하셨을까요? 그는 비록 누워있었지만 뜨겁게 기도했기에, 그의 기도는 감옥을 흔들었고 땅을 요동치게 했으며, 간수와 그의 모든 가족을 참된 신앙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할 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이었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자기 상황이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주님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은 하루하루 반복해서 쏟는 작은 노력들의 총합이다(호버트 클리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 9,21)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과 희망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매달리는
간절한 믿음은
언제 어디서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보여준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신학교 들어가던 날 새벽 미사 때
성당까지 차로 태워주시고
부끄럽게 악수를 청하시던 아버지의 손을 기억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손을 통해
예수님의 손을 떠올리며 관상해봅니다.
예수님의 손을 저는 기억합니다.
아픈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셨던 따뜻한 손
슬퍼하는 저의 눈물을 닦아주셨던 위로의 손
낙담하고 좌절해 있는 저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기쁨의 손
죄인인 저의 얼룩을 닦아 주시는 용서의 손
저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셨던 노동의 손
빵과 포도주를 높이 드셨던 축복의 손
굶주리고 있는 저에게 빵을 떼어 주시는 나눔의 손
근데 그 손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구멍이 난 바로 그 손입니다.
여인의 손과 예수님의 손이 만나
치유가 이루어지고,
회당장 딸의 손과 예수님의 손이 만나
생명이 전해집니다.
지금 내 손은 어떤 손인지
예수님의 손처럼 누군가를 살리고
생명을 불어넣는 손인지
오늘 제 손을 보고 관상해 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16.17ㄷ-18.21-2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6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17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
18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21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22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