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구원 외친 선각자 김대건
나는 약국에서 배낭을 찾아 시내버스를 타고 보령으로 향했다. 이날은 제법 걸었지만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전날 배앓이한 것과 후일 전북 장수에서 바위에 발을 헛디뎌 둔부가 새까맣게 멍들고 부었던 것 말고는 70일 간 감기 한번 안걸렸으니 크게 감사할 일이다. 장기여행에는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하다. 나는 보령에서 홍성, 예산을 거쳐 저녁 6시 경 신례원에 도착했다. 신레원에서 숙소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곳에서 합덕까지 9킬로로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 거리다. 피곤하지만 걷기로 했다. 원래는 신례원에서 여사울 성지, 신리공소, 합덕 구성당을 거쳐 솔뫼로 가는 코스인데 이를 반대로 할 생각이다. 덕분에 9킬로를 왕복해야 하는데 오히려 바라던 일이다. 이 코스는 길섶이 넓고 차량 통행이 적어 걸을만 했다. 나는 혼자 사색하며 걷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합덕에 도착 숙소를 잡고 식사하러 나섰다. 허름한 식당에서 소머리국밥을 먹었는데 맛이 꽤 좋다. 오늘은 너무 많이 걸어 푹 쉴 필요가 있다. 목욕하고 자리에 드니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개운하다. 다음 날 아침 6천원짜리 뷔페식당에서 식사했는데 음식도 다양하고 먹을만하다. 그곳에서 3킬로 쯤 걸어 솔뫼에 도착했다. 한국에 살 때 자주 찾던 곳인데 몰라보게 달라졌다. 프란치스코 교종 방문을 앞두고 합덕은 여기저기 환경정비 공사로 분주했다. 성지 입구 길은 아예 도로를 새로 만들고 있다. 솔뫼라는 이름에 걸맞는 소나무숲과 김대건 동상, 순교복자비, 성당과 피정의 집 정도로 기억되는 성지가 지금은 대성당과 기념관 그리고 야외공연장 겸 성당, 김대건 생가까지 복원되어 있다. 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한 후 10년 전 복원된 생가와 김대건 신부 동상을 둘러 보았다. 원형공연장 '아레나'는 쓸모가 많을 것 같다. 그런데 아레나를 둘러 싼 12사도 성상은 어색했다. 얼핏 성 베드로 대성당 회랑이 연상된다. 높은 석대 위에 세워진 사도상은 촌스러운 느낌마저 준다. 우리나라 첫 사제 김대건 신부 생가이며,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 성지 솔뫼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꼭 성상을 세운다면 오히려 이곳 출신인 성 김제준, 성 김데레사와 이번에 시복되는 김진후, 김종한 같은 한국 순교성인상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기념관에는 김대건과 박해시대 자료가 전시되어 한국 천주교 역사를 알리고 있다. 나는 성당에 앉아 김대건 신부 일생을 더듬으며 묵상했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 증조부 김진후 비오,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와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등 4대에 걸친 순교자들이 살던 곳이다. 이 집안은 김대건이 태어난 1821년 이미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으로 가세가 매우 기울어진 상태였다. 할아버지 김택현은 또다른 박해를 대비 김대건이 일곱살 때 식솔을 이끌고 용인 골배마실로 이사했다. 김대건 신부 일생은 너무나 잘 알려져 되풀이 할 필요가 없지만 신자아닌 벗님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한다.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당할수록 신앙이 굳어지는 특성이 있다. 우리나라 천주교는 백년이나 계속된 혹독한 박해 속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이같은 기독교 신앙의 특성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초기 로마에서도 그랬고 일본, 중국, 베트남에서도 공통된 현상이다. 신앙은 생활이 안정되고 부유해질수록 사소한 유혹에도 흔들리고 본질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 김대건 집안은 대대로 박해 때마다 순교했지만 신앙심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김대건의 신앙심과 영특함은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 눈에 띄여 15세 나이로 다른 소년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 유학한다. 김대건은 신학교를 졸업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조선인 첫사제로 서품된다. 그는 신부생활 13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지만 조선인 첫 신부로서 대단한 업적을 이뤘다.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학문을 공부한 사람으로 21편의 라틴어 서한과 한국교회사 비망록을 남겼으며, 조선지도를 만들었다. 그는 한국어, 중국어, 프랑스어, 라틴어, 영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했다. 또한 그는 전국에 흩어진 신자를 돌보는 한편 주교와 사제 등 여러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면서 연평도에서 상해까지 서해항로를 개척했다. 김대건은 조선에서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마카오에 당도하고 신학생 시절 민란을 피해 홍콩과 대만, 필리핀, 말레지아, 싱가폴 등을 여행한 조선 최고의 여행가였다. 나는 30년 전 성지연구원 행사로 윤공희 대주교를 모시고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했었다. 당시 성지연구원에서는 마카오 신학교와 필리핀 롤롬보이 신학교 자리에 김대건 신부 동상을 건립했는데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순례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직전 신자들에게 남긴 "교우들 보아라"로 시작되는 마지막 편지는 지금도 많은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내포 지역은 1784년 이승훈이 세례받기 훨씬 전 중국을 통해 천주교와 서학이 전해졌다. 내포 지식인들이 서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차츰 모든 계층에 천주교가 스며들었다. 김대건 집안은 큰할아버지 김종현과 할아버지 김택현이 입교하자 증조부 김진후도 따라 입교하면서 천주교 가문이 된다. 그러나 김진후가 1814년 해미에서 옥사하고 1816년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이 대구에서 목이 잘렸다. 두 분은 8월 시복된다. 아버지 김제준은 1839년 서소문에서 순교했고 김대건 신부도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해 모두 성인이 되었다. 천주학 때문에 망한 집안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공경받는 성인들로 부활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분은 어머니 고 우슬라다. 김대건은 마지막 서한에서 주교에게 어머니를 당부했다. 그녀는 순교는 안했으나 38세에 어린아들과 헤어지고 3년 후 남편까지 순교해 문전걸식하며 아들이 신부되어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 신부를 단 한번 만나고 1년 후 처형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십자가 밑에서 지켜보던 마리아의 모습이다. 그녀는 변함없는 신앙과 절개로 1864년 67세로 생을 마쳤지만 조선 최초의 사제 김대건 어머니로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현재 안성 미리내에 모셔져 있다. 나는 이날 김대건의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이 대구 옥중에서 형님 김종현에게 보낸 서한을 읽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편지는 누구를 가르치거나 교훈적이지 않다. 그러나 순교에 대한 갈망과 현실 고통에 힘겨워하는 인간적 약점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당시 순교자들의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문을 가다듬어 소개한다.
형님께
제례하옵고 전혀 뜻하지 않게 4월 23일(註 : 양력 5월 31일 을해 1815년) 안동 포졸들에 체포되었는데 관장은 첫 문초부터 배교하라고 다그쳤지만 굴복하지 않자 옥에 가두었습니다. 열흘 후 조정의 명을 받은 관장은 저를 때린 후 대구 감영으로 이송시켰습니다. 대구 감사는 온갖 방법으로 저를 굴복시키려 했으나 이루지 못해 매질한 후 조정에 전갈을 보냈습니다. 강제로 저를 배교시키라는 답신으로 저는 또 매질을 당했습니다. 백 명이 넘는 남,녀가 체포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이들은 고향마을에서, 어떤 이들은 감영으로 가는 길에 굶어죽거나 굴복해 13명만 남았습니다. 모두 천주의 섭리이고 감사드려야 마땅할 은총이오나 육신은 지극히 나약해 모든 것을 감내하기 어렵고 기쁜 마음으로 감내할 수 없으니 순간순간 말할 수 없이 슬픕니다. 이토록 큰 은총을 입을 만한 공로가 아무 것도 없는 불쌍한 죄인이 오직 모든 교우들의 도움에 의탁합니다. 기도해 주시고 제가 감히 이 은총을 놓치지 않기 바라오니 이를 가볍게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간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바램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제가 붙잡혀 올 때 제 처는 집에 남아있었고 천주교 서적은 발각되지 않았으며 교우 누구도 밀고되지 않은 상태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관장에게 천주교를 가르친 이는 돌아가신 형님이라 했으니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걱정마십시오. 다만 걱정은 붙잡혀 온 후 처의 소식을 듣지 못해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체포당시 옷가지들은 포졸들이 가져가고 저는 헤진 옷을 입었는데 그 후 몇 달이 지났으니 혹한을 견뎌야 하는 이때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금방 목숨을 거두어 가시려 않으시고 저는 견디기가 어려워 형님께 처지를 알립니다. 죽는 날까지는 제 목숨을 보존하도록 형님이 형제 친지들과 상의하여 겨울 의복 한 벌을 보내주십시오. 이를 가볍게 생각마시고 조카나 사위 편으로 보내주십시오. 가족이면 어려움 없이 면회가 받아들여질 것이니 염려마십시오. 형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조정에서 곧 회신이 올 터인데 사형일지 유배일지 저도 모릅니다. 다만 죽기 전 아우를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길이 멀어 아우보고 오라고 청하기는 어려우나 조카와 사위라도 보고 싶으니 형님께서 보내주시면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으니 죽기 전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많으나 종이도 붓도 없으니 만 분의 일이나 말씀드렸을까요?
(딸에게 보낸 서신) 딸아,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구나. 나는 내가 살게 될지 죽게 될지 모르는 채 옥에 갇혀 있으나 죽음이 내게 닥치기 전에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혹한을 견뎌내야 하고 굶주림과 추위에 나앉았으니 네가 모든 수고를 다해 솜저고리 한 벌을 보내거라. 나는 너만 기대하겠다. 내가 영혼을 구원하도록 기도해다오. 네게 할 말은 많으나 종이도 붓도 없으니 몇 마디 말 밖에 할 수가 없구나.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들이 들어 올 항로를 답사하기 위해 황해도 순위도에 갔다가 체포되었는데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란 조정은 어떻게든 배교시켜 그의 지식을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굳건한 신앙 앞에서는 어떠한 방법도 먹혀들지 않았다. 나는 한국사회 일부에서 김대건 신부를 서양 제국주의 앞잡이며 매국노였다고 매도하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런 비판적인 견해는 각자 자유겠지만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와 구원의 복음을 외친 선각자였다. 그가 얼마나 조선민중을 사랑했는지는 그의 서한 전반에 잘드러나 있다. 그는 聖人으로서 전세계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솔뫼성지는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 146호로 수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신앙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8월 15일 저녁 이곳을 방문하여 아시아 청년들과 만남에서 연설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교종은 어떤 형태로든 청년 김대건의 위대한 삶에 대해 언급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014.7.3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