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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신약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말씀이 주어진 당시의 정황을 먼저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란 시 ·공간적 배경을 초월하여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그렇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앞에서 신약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중간기 시대의 팔레스틴의 역사와 로마 제국의 역사, 그리고 신약 시대의 유대 역사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이어서 여기서는 신약 성경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성경 이해에 큰 도움을 얻고자 한다.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은 먼저 당시 지중해 세계의 지배 국이며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식민 통치를 실시한 로마 제국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은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서 직 ·간접적으로 사회 문화적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서도 민족적 독창성과 자치권을 어느 정도 부여 받고 있던 유대의 문화적 상황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하에서 신약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제 측면들을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는 로마 제국 전체의 관점에서, 그리고 나중은 유대의 관점에서 푸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찰할 것이다.
정치적 배경
다른 어떤 측면에서 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팔레스틴은 로마의 직접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은 로마 제국 전체의 통치 구역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어 총독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로마 제국 전체의 정치 구조와 팔레스틴에 대한 로마의 식민 통치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마 제국의 정치 구조
로마는 B.C.SC부터 공화정(共和政)을 실시하다가 B.C.27년 아우구스투스(Au撚stus)가 황제의 직위에 오르면서 제정(帝政)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 즉 공화정 때에는 원로원이 최고 실권을 행사 했으나 제정 때에는 황제가 최고 집권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제정은 동방 국가들의 전제 군주제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황제와 원로원,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1脚인으로 구성된 평민회(平民會)가 함께 있어서 황제의 독재를 방지하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A.D.3C경에 가서는 로마도 동방의 전제 군주제와 거의 유사한 체제로 변했다. 한편 황제(Emperor)가 로마 제국의 최고 통수권자이긴 하지만 황제 혼자서 넓은 제국 전체를 다 통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황제 관할 구역과 원로원 관할 구역으로 구분되었다. 황제 관할 구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 예를 들어 애굽과 같이 로마 제국에 상당한 양의 식량을 공급해 주는 지역으로서 황제의 직접적인 관리와 통치를 받는 구역이다. 그리고 그 외의 지역은 대부분 총독 관할 구역으로 편성되었다. 이런 원로원 관할 지역의 경우의 총독은 원로원 출신으로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 맡겨진 지역의 통치를 책임지며, 그 상황을 정기적으로 원로원과 황제에게 보고해 야 했다. 한편 황제 관할 지 역 의 총독들은 각각 다양한 계충 출신의 세 부류의 총독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이들은 황제로부터 각각 분할받은 관할 지역을 다시 세분하여 자기 휘하의 소총독들에게 일임하였다. 이상과 같은 로마 제국의 정치 구조를 도표화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대집정관(Legate)은 본래 공화정 때에 민의(民意)를 대변하는 집정관(Consul)이었으나 후에 황제의 직접 지휘를 받게 되었다.
② 대장관(Praetor)은 군 지휘관 출신이다.
③ 지구 사령관(Pre톤ct)은 로마 기사 계급의 지휘관이며 그에 휘하에 기사 계급 출신의 무관들이 지방사령관으로 소총독직을 수행했다. 유대 총독 빌라도도 무관 계급 출신의 소총독이었다.
① A.D.1세기경 황제 관할 지역으로서 대표적인 속주는 애굽 수리아, 갈라디아, 그리고 유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원로원 관찰 지역에는 아가야, 아시아, 비두니아. 그레데. 구브로, 마게도니아 등을 들 수 있다. A.D.1세기 이후 원로원의 세력 확대 방지를 위한 정책으로 인해 원로원 관란 구역은 축소되고 촹제 관할 구역은 확대되었다.
2. 팔레스틴에 대한 로마의 식민 통치
A.D.1세기 무렵 로마 제국은 대개 切여개의 속주(屬州)를 가지고 있었고 그 지역은 매우 광대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이 많은 속주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그 지역에 따라 그 지역에 맞는 정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 상당한 자치권(自治權)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각 속주는 로마 제국이 파견한 총독하에 각 지방의 지도층에 의해 구성된 의회가 그들 나름의 법률을 집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치권은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을 상납하고, 징병에 응하고, 황제 숭배 의식을 준수할 때에만 허용되 었다.
이런 점에서 로마는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 데 있어 큰 골머리를 앓았다. 왜냐하면 유일신(唯一神)을 숭배하며 이방인에 대해서는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황제를 숭배케 하고 세금을징수토록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로마는 헤롯 왕가를 통하여 유대를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혜롯 왕가의 유대통치는 혜롯 안디바터 2세가 일단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던 것이 그 시초였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인 헤롯 1세는 대왕의 칭호를 얻고 팔레스틴 전 지역의 왕이 되었다. 한편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팔레스틴 지역을 나누어 분봉왕의 자격으로 통치하면서 서로 어지럼게 이합집산하여 통치하였다. 시기상으로는 B.C.犯-A.D.70년으로 대략 1세기를 넘으며 그 통치 지역 및 양상면 으로는 그때 그때 심한 차이를 보였던 이 혜롯 왕가의 팔레스틴 통치에 대해서는 본서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 경'을 참조하라. 한편 팔레스틴 지역은 황제의 관할 지역으로서 황제가 파견한 총독의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편 성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있어서 총독제의 실시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게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로마 제국의 팔레스틴 정복 초창기 때부터 로마 제국을 강력히 도왔던 혜롯 가문을 통한 간접적인 팔레스틴 통치를 로마 정부가 승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롯이 죽고 난 후 팔레스틴 지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각각 분할 통치 되었다. 그 중에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아켈라오는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 사건으로 결국 아구스도 황제에게 문책되어 고울(Gaul) 지방으로 쫓겨 나게 된다. 따라서 그가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 ·지역은 헤롯 가문의 유대 통치를 반대하던 예루살렘의 바리새인과 유대인 부자들의 청원에 의해 로마 총독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되었다(A.D.6년). 이렇게 해서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서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총독 통치와 헤롯 가문의 잔존 세력들의 분할 통치가 병행되었는데, 파견된 총독의 임무는 주로 로마 정부를 위한 세금 징수와 원주민의 동태 파악 그리고 주둔군의 관리였다. 이러한 총독 통치는 초기에는 아켈라오가 다스렸던 유대와 사마리 아 지 역 에서 만 행 해지 다가 유대 지 역 의 분봉왕들인 헤롯 안디 바와 혜롯 빌 립 이 다같이 분봉왕의 직위를 박탈당한A.D.切년 경에는 갈릴리, 베레아, 드라고닛, 수리아 지역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세금 징수를 위한 로마 제국의 인구 조사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반대와 로마로부터 유대 국가의 독립을 내세우는 열심당원들에 의해 주도된 잦은 반란으로 인해 헤롯 아그립바 1세(A.D.37-설) 이후에는 로마 총독이 단독으로 팔레스틴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그립바 1세의 아들 헤롯 아그릴바 2세는 너무 어린 닻에 곧바로 아버지를 계승하여 유대 통치자가 되지 못하고 약 10년 후에 과거 헤롯 빌립이 통치하던 드라고닛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으나 유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 총독들이 계속 통치하였다. 한편 팔레스틴 지역 가운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된 이후 유대와 동일한 행정 구역으로 편성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헬라의 직접 통치를 받다가 다시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은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데가볼리(Decapolis)란 지역이다.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이 출레스틴 지역에 헬라 문화를 이식시키기 위하여 만든 지역으로서 열개의 헬라식 도시들이 동맹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도시는 힙포(HiP렌5), 가다라(Gadara), 거라사(Gerasa) 등이다.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 사후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더 얀네우스(以exanderjanneus, B.C.103-76 년)에 의해 잠시 유대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기도 했으나 B.C.63년 로마 장군 폼페이(Pompey)에 의해 재차 정복된 이후로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한A.D.70년 이후까지 로마의 직영 도시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이방 문화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일종의 자유 도시들이었다. 예수께서도 자주 이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하셨는데 거라사 광인을 치유하신 사건이 그곳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대표적인 이적이다 (마 4 : 25 ; 막 7'31 ; 눅 8'39). 한편 서로 어울려 팔레스틴의 지역 통치 체제를 구성했던 로마 식민 정부와 헤롯 왕가의 병행 식민체제의 진행을 이해하기 위하여 헤롯 대왕 때로부터 헤롯 아그립바 2세 때까지 유대 지역에 파견된 로마 총독과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분봉왕 및 로마 황제들을 함께 모아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편 로마 제국은 팔레스틴과 그 근경을 점령한 뒤 초창기에는 팔레스틴 전체를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정하였으나 B.C.4년경 헤롯 대왕 사후 그의 세 아들들에게 그 땅을 분할하며 통치하도록 행정 구역을 보다 세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정 구역에 대한 통치자는 계속 바뀌었으나 행정구역은 A.D.70년 이스라엘 멸망까지 계속되었다.
3. 유대 자치 정부 산헤드린(the Sanhedrin)
당시 로마 제국은 많은 점령지를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점령지의 상황에 맞게 그곳에 지방 자치 정부를 허용하였다. 이러한 로마의 정책에 편승한 유대인들의 자치 기관이 바로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이다. 물론 로마는 비록 지방 자치 정부를 허용하면서도 그것을 총독의 권한 아래 예속시키기 위하여 자치장은 로마가 직접 임명하였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의장을 임명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였는데, 예수 당시 산혜드린 의장은A.D.6-10년경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코포니우스(Co멜pius)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 안나스(Annas)였다(요 18 . 13). 따라서 로마 제국은 점령지를 통치함에 있어서 항상 지방 자치 정부가 처리해야 할 문제와 로마 총독, 흑은 지방 장관(Praetor)이 처리해야 할 문제를 구분해야 했는데, 특히 유대 지역의 경우에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로마 총독은 전혀 개입치 않으려 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다가 그를 헤롯 안디바(Anti탈5)에게 넘긴 것도 예수가 유대인의 종교 문제와 관련되어 고소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눅 23 : 7). 또 로마 총독은 유대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정을 감안하여 예루살렘에 파견된 로마군의 군기 위에 황제의 초상화도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종교 양식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유대인들의 성전 제의를 존중하여 이방인들의 성전 출입을 금지시켰다. 또한 로마 제국은 모든 식민지 국가에 대해서 실시하는 징용을 유대에서 만큼은 예외로 하여 청년들을 강제 징용에서 제외 시켰는데 이는 그들이 군대에 갈 경우 반드시 황제 숭배 의식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한편 로마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유대 전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로마의 행정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그곳에는 로마의 세금 정책을 시 행하는 세관과 아울러 그 지역을 관리하는 로마군의 병력 기지가 함께 있었다. 팔레스틴 지역의 대표적인 로마 행정 도시로는 가버나운, 가이사랴, 여리고 등이다(눅 9'1, 9). 더욱이 가이사랴는 당시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던 곳인데, 유대 지역의 최고 통치자로 파견된 로마 총독은 평상시 이곳에 있다가 중요한 유대인의 명절 때에만 예루살렘에 일시적으로 장소를 옮겨 총독의 업무를 수행했 다. 그러면 이런 로마 식민 체제하에서의 유대 자치 정부 역할을 맡았던 산헤드린에 대해 보다 상술하 면 다음과 같다.
1) 산헤드린 공회의 기원
물론 산헤드린 공회의 역사가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에 총독 관저를 설치한 때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산헤드린은 바벨론 포로 시기 이후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감독하고 또한 이를 계획하던 '귀족 회의'(貴族會議)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귀족 회의'가 셀류쿠스 왕조 통치 하에서는 셀류쿠스 왕조에게 유대 민족의 민의(民意) 를 전달하는 대표 기관으로서의 '원로 회의'(元老會議)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 '원로 회의'가 하스몬 왕조 통치하에서 비로소 '산헤드린'(Sanhedrin)이라고 불리어지는데, 이 때부터 산헤드린은 유대 전지역의 율법을 관장하는 유대 최고 자치 통치 기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 지역을 통치하면서부터 산헤드린과 헤롯은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결국 헤롯은 산헤드린에서 자기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의 세습 귀족들을 축출하고 산헤드린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정치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헤롯이 죽고 그리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유대 지역에서 추방당한 후(A.D.6년) 유대의 자치를 허용하는 로마 제국에 의해 산헤드린은 다시 그 역할이 회 복되었으며 날이 갈수록 그 위상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2)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
산헤 드린 공회 는 그 의 장인 대 제사장을 제 외 하고 70명 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 그 숫자는 최 초 모세 가 자신의 통치를 보좌하고 백성들의 소송 문제를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토록 하기 위해 70인 장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45
로들을 세운 사실을 기록한 민 11 : 16에 기인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71명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집단으로 구별된다. 첫째는 대제사장과 그를 보좌하는 제사장들이다. 이들 제사장들은 성전 경비 대장, 성전 창고 관리장, 그리고 대제사장을 도와 성전 예배를 돕는 제사장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숫자는 대략 10명 정 도이 다. 둘째는 원로(元老)들이다.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세습되어 온 귀족들로서 각 지파의 두령이나 장로를 가리키는데, 신약 시대에는 이들의 사회적 역할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도 산헤드린 공회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셋째는 율법학자들이다. 이들은 당시 '랍비' 또는 '선생'이라고 불리워지던 사람들의 우두머리 들로서 유대 사회에서 신학자와 법률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율법학자들은 유대 사회에서 백성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산헤드런 공회에서 이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 었다.
3) 산헤드린 공회의 역할
첫째, 산헤드린은 유대교(the Judaism)로 통일된 유대인의 의회이니 만큼 그들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유대인들의 율법의 준수 문제에 대한 종교 재판권 행사였다. 둘째, 산헤드린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유대의 유일한 자치기관이었으며 유대에 파견된 로마 총독에게 유대인의 민의를 전달하는 기구였다. 아울러 로마 제국이 유대 지역에 어떤 정책이나 의사를 전달하는 공문서를 보낼 때도, 항상 그 수신자는 산헤드린 공회였다. 셋째, 명실공히 산헤드린은 유대의 최고 통치 기관이었기 때문에 유대 지역의 일반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가 인정하는 허용 범위 내에서만 행정을 주관하고 법을 집행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로마 제국의 세금 징수 문제는 그들이 관할할 수 없었으며 사형 집행도 반드시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를 율법의 범죄자로 규정하고서도 처형하지 못하고 그를 빌라도 총독에게 데리고 갔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눅 22 : 66-23 : 2). 한편 산헤드린 공회는 매년 일정한 회의 기간을 정해 두고 그 기간 동안 주요한 안건을 처리하곤 했는데 그 회의는 주로 유월절과 장막절 그리고 초막절 같은 유대인의 절기에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회의 결정 사항들을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산헤드린 공회는 전체 총회가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다급한 사건이나 사소한 사건들을 수시로 처리할 수 있는 각 분과 회의를 조직했는데, 이 분과 회의의 규모는 10-20명 내외로 구성되었다. 이 분 과회의는 거의 대제사장의 뜻에 따라 운영 되었으며, 예수의 처형을 계획한 것도 바로 이 분과회의 였다(눅 22:2;요 12 : 47-53).
경제적 배경
정치적 측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로마 제국이 그 식민지의 하나인 팥레스틴 지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로마 제국 전체의 경제 상황을 다 살피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로마 제국이 제국 내의 경제상황으로서 다른 속주(屬州)들에게 필연적으로 파급되었던 몇가지 경제적 요건들만을 살펴보고 나서 바로 팔레스틴 지역의 경제 상태에 대해 살 펴보도록 하겠다.
1. 로마 제국의 경제적 상황
1) 교통망의 발달
경제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교통의 발전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로마(the Roman)는 일찍부터 광범위한 제국 전체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망을 구축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도로망 구축의 일차적인 목적은 물론 군사상의 정복 전쟁 수행과 식민지역의 효과적인 통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로들이 상인들의 무역로로 활용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제국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 여하게 된 것이다. 로마는 B.C.2C초에 이미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였으며 로마 제국이 점점 확장해 가면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등서(東西)도로도 건설하였다. 또한 로마는 지상 도로 뿐만 아니라 해상 교통도 발달시켜 지중해 연안에 많은 항구를 새롭게 건설하였다. 이러한 항구 발달은 자연스럼게 국제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은 크게 발 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항구가 새롭게 건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항구가 많았다.
2) 로마 화폐의 세계적 통용
로마 제국이 세계 경제에 미친 또 하나의 큰 공헌은 로마 화폐가 오늘날의 미국 달러처럼 세계적으로 유통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유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화폐의 기본이 된 로마의 은화 데나리온(Denarius)은 로마, 안디옥, 갑바도기아의 가이사랴, 팔레스틴의 두로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도 주조되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쉽게 활용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화폐의 원활한 유통이 세계 경제를 매우 활성화시켰던 것이다. 데나리온은 헬라의 드라크마와 가치가 동 등하며, 은 한 세겔의 1/4 가치에 해당된다. 이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것이었다(마 20 : 2). 한편 데나리온 이외에도 렙돈(lepton), 고드란트(k떨rantes) 등의 로마 화폐가 유통되긴 했으나 데나리온 만큼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3) 노예제도에 기초한 경제 구조
고대 경제는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1차 산업 특히 농업에 의존하는 경제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하여 제국을 이룬 로마는 정치 경제적으로 노예제도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이 안정되어 갈수록 대지주에 의한 대단위 농업 경제가 노예 인력으로 유지되는 체제가 굳어져 갔다. 농업 경제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기본 인력은 거의 모두가 노예 인력으로 충당되었다. 노예 인력은 정복 전쟁 또는 채무에 의해서 그리고 세습에 의해서 대량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로마시대의 노예의 지위는 다른 고대 문화권은 물론 로마시대보다 후기의 다른 문화권의 노예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사회 전체의 구성원의 절반 훨씬 이상이 노예였던 로마 제국하에서는 결코 다른 문화권에서처럼 노예를 혹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귀족, 평민, 자 유시민 및 자유민, 노예 등 대략 5계충으로 구성된 로마 사회에서 노예들은 가정과 재산을 사유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졌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자유민이나 평민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노예제도 초기부터 노예들은 주인과의 계약이나 각종 제도적 장치에 의해 비교적 쉽게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신약 성경의 사건이 발생하던 제정(帝政) 초기부터는 정 적 (政離)이 성 장하는 것을 막고 특히 제 국 유지 에 필수적 인 군사력 을 유지 하기 위 하여 그리 고 병 역 의 의무가 있는 시민권을 가진 자유시민 및 자유민을 많이 육성하기 위하여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격 상시키는 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2. 팔레스틴의 경제적 상황
팔레스틴 지역은 고대로부터 농업이나 목축업을 주로 해 왔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이 지역의 경제적 상황은 크게 변하여, 농업에 비해 수공업과 상업, 무역 등이 크게 발달하였다.
1) 농업 경제의 쇠퇴
신약 시대 팔레스틴 지역의 농업 경제를 쇠하게 만든 요인은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인구 증가를 들 수 있다. 팔레스틴 지역에 거주한 인구는 과거 구약 시대보다 상당히 많이 증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거주하고 있던 디아스포라(Dias맬「a)의 유대인들이 매년 절기 때마다 예 루살렘을 방문하러 왔기 때문에 절곤 때의 인구는 평상시보다 몇배 더 많았으며 이 많은 인구를 과거의 농업과 목축업을 통해 얻는 식량으로는 다 먹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외국으로부터의 농산물 수입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많은 농산물이 수입되자 자연스럽게 국내 농업 경제는 점차 쇠퇴해가고 말았다. 둘째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넓은 영토와 많은 노예를 바탕으로 한 로마의 농업 경제의 영향을 받아 팔레스틴 지역에서도 점차 넓은 영토를 소유한 대지주(大地主)가 나타났다. 이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소규모 농가들은 대부분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일용 노동자나 실업자로 전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대지주, 즉 부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예수께서는 비유로, 또는 직접적으로 여러 번 경고하신 적이 있다(눅 6'24, 25 ; 12 : 13-21).
2) 수공업의 발달
구약 시대에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 수공업은 단지 농업과 목축업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수공업은 큰 진전을 이룩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인한 2차 산업의 필요와 아울러 헤롯 가문에 의해 진행된 여러 건축 사업 때문이었다. 특히 헬라와 로마의 문화적 유산에 심취해 있던 헤롯(Herod, TheGreat)은 유대 지역에 왕궁의 건축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그리고 항구와 망대 같은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실시했다. 활발한 건축 사업의 실시는 자연히 목수와 석공의 필요를 야기시켰고, 이에 따라 그때까지 사회에서 냉대받던 기능공들의 사회적 위치가 많이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장려되어 온 유대 지역의 목축업은 양의 틸을 가공하는 모직업과 그 가죽을 이용하는 피혁 가공업, 그리고 그것들을 염색하는 염료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아울러 왕궁과 성전 같은 대규모의 건축 사업에 동원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식품 제조업도 자연스럽게 발달되었다. 그외에도 재단사, 철공업자, 도기 제조업자, 향료업자 등 이 시대에는 많은 수공업자들이 출현하여 수공업을 발전시켰는데, 당시에는 의사도 수공업자 그룹에 속했다. 한편 신약 시대의 대부분의 수공업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당시 예루살렘 내에는 수공 업자들의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상가는 직업별로 구분되어 조합 형태(guild)를 취하기도 했다. 아울러 넓은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의 출현으로 인해 토지 경작지를 상실한 많은 농부들의 도시에로의 이주(移住)는 수공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에 당연히 수공업이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 탈무드(T릴mud)에 '자기 자식에게 수공업을 배워주지 않는 사람은 마치 강도질을 가르치는 사람과 같다'는 말이 기록될 정도였다.
3) 상업의 발달
팔레스틴 지역 내의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의 부족과 아울러 수공업의 발달은 결국 유대인들에게 해외 무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더욱이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로서는 당시 로마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를 통해 그들의 욕구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지중해 전 지역을 오가며 무역에 종사하는 거상 (巨商)들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예수의 비유 가운데 달란트 비유는 바로 이들을 배경으로 주어진 것으로 추측된다(마 25 : 14-30). 이와 함께 헤롯 가문에 의해 주도된 대규모의 건축 사업은 외국 으로부터의 많은 건축 자재의 수입을 증가시켰고 또 반대로 그 무역로를 통해 팔레스틴 지역에서 생산되는 향료가 수출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팔레스틴 지역의 무역을 담당한 중요한 곳으로는 가이사랴와 가버나움, 여리고 등이 있었는데, 가이사랴는 지중해를 본거지로 한 무역 항구였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동편의48 신약 총론
데가볼리 지역과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담당한 무역 항구였으며, 지리적으로 이 두 항구를 예루살렘과 연결시키는 곳이 바로 여리고였다. 로마 제국이 이 세 곳에 세관을 두고 군대를 주둔시킨 까닭도 이 지역들의 경제적, 지리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틴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된 상업 활동은 또한 상인들의 돈을 노리는 산적들과 해적들의 출현을 야기 시켰는데, 특히 지형이 험하고 경비가 허술한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연결하는 길목에는 산적들의 활동이 빈번 했다. 따라서 당시 로마 총독들과 헤롯 가문의 분봉왕들은 상인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산적과 해적들의 소탕에 많은 신경을 썼다.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 이 다(눅 10 : 30-37) .
사회 계층
신약 성경에 나타난 사건이 진행된 A.D.1세기 무렵은 로마의 제정 초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 로마 제국 전체는 정치, 사회적으로 상당한 변혁을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회 구조는 전통적 연속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이에 로마 제국의 사회 계층과 유대의 사회 계충을 비교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로마 제국 전체의 사회 계층
신약 성경 시대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帝政) 사회로 변하는 전환기에 있었다. 과거 원로원 (元老院)을 주축으로 하는 옛 귀족 사회가 급격히 쇠퇴하고 경제적으로 큰 부를 축적한 자들이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상승되었다. 로마 제국(the Roman Empire)의 사회 계층 구조는 대개 피라밋 형태를 이루었으며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그러한 사회 계층 구조 형태가 완전히 바꿔지는 않았다. 즉 피라밋 맨 꼭대기에는 원로원을 주축으로 하는 귀족들이 있으며 그들 밑에는 기사 계급이 있고, 그 다음에는 평민(Plebian) 계급이 있었다. 여기서 평민은 공화정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집단을 가리킨다. 그리고 피라밋의 맨 밑바닥에 해당되는 하층 계급으로는 자유시민,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 그리고 노예 가 있었다. 이러한 피라밋 형태의 사회 계층 꾸조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공화정에서 제정 사회로 넘 어가면서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기사 계급과 자유 시민의 계급이 급상승됨으로써 그 분포 상황 또는 계충간의 관계는 많이 바뀌게 되었다. 심지어 노예 출신이었다가 풀려난 자유민들이나 자유시민들이 일부 해상 무역이나 상업 부분에서 기사 계급을 몰아내고 독차지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매우 격상시켰다. 따라서 로마 사회는 계충간의 구별은 뚜렷이 있었으나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계층 상승이 가능한 개방 사회(開放社會)였다고 볼 수 있다.
2. 유대지방의 사회 계층
유대의 사회 계층 구조도 로마 제국의 사회 계층 구조에 영향을 받아 정치적, 경제적 여건에 따라 어느 정도 계충간의 이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향이 강한 유대의 사회 계층 구조는 일단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모든 민족 사회 구성원이 본질적으로는 평등하다는 원칙이 그 어느 사회보다 강했으나 그 역시 실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한편 신약 성경을 바탕으로 신약 시대의 유대의 사회 계층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상류 계급과 평민 계급 그리고 하층 계급이다.
①상류 계급-상류 계급에는 전통적으로 유대 사회에서 세습되어온 귀족과 제사장 가문, 서기관과 랄비 같은 율법 학자들이 포함된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바로 유대 사회의 대표적인 상류층이다.
그리고 로마의 경제 제도의 零향을 받아 팔레스틴 지역에서도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한 대지주가 나타나는데, 이들 또한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후에 유대 사회의 상류층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는 이들을 배경으로 주어진 것이 몇몇 있다(눅 20. 9-16).
② 평민 계급-이들은 흔히 유대인들로서 팔레스틴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농부, 일정한 기술을 갖고 있는 기능인,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7,1다. 아울러 당시 혜롯 가문에 의해 실시된 대규모의 건축 사업과 농장일에 고용된 노동자들도 이 계급에 속한다.
③하충 계급-이 사람들은 흔히 유대 사회에서 '죄인'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멸시를 받던 계층이다 (막 2 : 16, 17). 창기와 세리 그리고 순수한 혈통을 강조하는 유대인 사회에서 '사생자'로 멸시받던 사마리아인, 두로인, 시돈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아울러 노예들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와 같이 노예 제도를 널리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유대 사회에서 세리를 '죄인'이라 부르며, 멸시한 이유는 그들이 정복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한다는 민족적 적대 감정 때문이었다.
종교적 배경
신약 시대의 종교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지중해의 패자(霜者)로서 결국 신약 성경 시대의 국제 사회의 배경을 이룬 로마 제국 전체의 종교 문화적 배경과 신약 성경 대부분의 직접적 배경이 되고 있는 팔레스틴 지역 유대인들의 당시 종교였던 유대교가 곧 그것이다.
1. 로마 제국의 헬레니즘 종교 문화
로마 제국은 본래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가진 광대한 지역이 강력한 로마 황제에 의해 통합된 것이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로마 제국이 자신들 이전의 제국으로서 보다 높은 문화를 구가했던 헬라 제국의 문화를 답습하여 소위 헬리니즘 문화를 국제 사회에 유포시켜 이것이 제국 문화의 근간이 되었으나 동시에 각 지역은 고유한 전통 문화도 상당히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 문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전제하고 각 지역 종교 문화는 제외하고 당시 지배자였던 로마 제국의 종교로서 결국 제국 전체의 국제적 종교 문화였던 소위 헬레니즘의 전반적인 종교 문화만 개략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마 제국 헬레니즘 종교 문화의 사상적 특징
① 인본주의-절대 초월자, 또는 절대 유일의 선과 악의 기준으로서의 신(神)의 개념이 없었다. 신들도 인간처럼 우연히 형성되고 운명에 의해 제한받는 상대적 우월자로만 인식되었다. 그리고 신들의 인식 및 가치 기준도 인간과 동일하다고 생각되었다.
②범신론 및 다신론-자존하는 자연 그 자체가 곧 신으로서 신적 속성이 전우주에 편재하고 있다는 범 신론과 특이 한 자연 현상과 사물을 모두 신격 화하여 수많은 신들이 흔재 하고 있다고 생각한 다신론적 사고가 팽 배 했다.
③ 흔합주의와 관용주의-절대 유일의 신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각 민족이 섬기는 모든 신을 서로 거부없이 인정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신을 한 체제 안에 혼합시켜 가는 양상을 보였다. ④ 현실 기복주의-세계 역사를 볼 때에 전반적으로 사후 또는 초월세계에 대한 관심이 매우 희박했던 종교 문화를 가진 시대의 하나가 바로 이 헬레니즘 시대였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는 단지 현실 생활의 길흥을 예견하고 조정하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50 신약 총론
2) 로마 제국 헬레니즘 종교의 주요 유형
①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의거한 만신 숭배-고대 헬라와 로마의 평민들의 신앙은 세계 다른 문화권에서도 흔히 그러했듯이 일상 생활에서 부딪히는 자연 만물을 신격화하여 만든, 소위 정령숭배 (animism)였다. 제우스, 곧 로마식의 쥬피터와 혜라 곧 로마식의 쥬노를 위시한 12신을 주축으로 한 이 만신 숭배 사상은 전세계 문화에서 가장 화려하고 풍부한, 심지어는 현재까지도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소위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근거한 것이었다. 신들도 인간에 비해 우월한 능력은 가졌으나, 성욕과 명예욕 등 인간과 똑같은 회노애락과 운명의 제한을 가졌다고 보는 이런 종교 사상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서 이미 단순한 신화요 조잡한 사상으로 천시되었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적어도 A.D.1세기 말엽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 신화에 포함된 신들중에서 한 신을 자신들 지방의 수호신으로 삼는 풍습에 의해 이는 민간에 깊숙이 자리잡았다(행 19 : 27, 35) .
② 황제 숭배-인본주의적 다신론에 젖어있던 헬리니즘 문화권 사람들은 이미 로마 제국이 본격 적으로 황제 숭배를 조장하기 이전에도 여러 영웅들을 신격 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이 제정(帝政) 체제로 굳어진 이후 줄리어스 시이저 때부터 통치 기반 안정을 목적으로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해가며 황제 숭배 사상을 조장하자 큰 무리없이 일반인들에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유일신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은 물론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바로 이 문제로 인하여 로마 제국의 초대 교회에 대한 대박해가 야기되었다. 이는 특히 도미티안(DomitianusA.D.81-96년) 황제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③ 밀의 종교-이 는 각종 주술과 점술 특히 신비 체 험을 조장하는 특이 한 제사의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매료시킨 종교들로서 비체계적, 비공개적인 종교들이었다. 이 밀의 종교들은 당시 헬레니즘의 전반적 종교 사상이 현실적, 집단적이었음에 반하여 개인적, 초월적 특징을 강력히 가졌던 종교로서 현실 도피적, 열광주의적 종교 성향을 가진 자들에게 큰 호웅을 얻었다. 로마 시대의 밀의 종교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별다른 구분 기준을 세을 수 없으나 대략 이집트계 및 페르시아계로 나눌 수 있었 다.
④종교적 철학 또는 철학적 종교들-실로 지식과 신념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던 이 시대에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그야말로 본질은 철학이되 다만 종교성을 강하게 가진 것에 불과한 종교적 철학인지 아니면 철학적 사변이 풍부하지만 그보다는 엄연히 종교 사상인 철학적 종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종교 사상 또는 종교 .집단이 있었다. 편의대로 대략 구분하자면 이데아와 현상세계를 구분한 플 라토니즘(Plutonism), 평정과 우애에 의한 마음의 쾌락을 추구한 에피큐리아니즘(Epicurianism)또는 냉소주의 (Cynicism)와 회 의주의 (Scepticism) 등이 전자에 속하고 초대 교회 에 주요 이 단으로 큰 영 향을 끼친 영지주의(Gnosticism)와 범신론적 숙명과 이성을 강조한 스토아 사상(Stoicism)이 후자에 속한다 하겠다.
2. 유대교(the Judasim)의 이해
신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시기 또는 기록되던 시기인 대략 B.C.4-A.D.100년까지의 팔레스틴에서 신 ·구약 성경을 먼저 받은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유대교의 영향이 매우 결정 적 이 었다. 단적으로 유대교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기독교의 전신이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이후에 비로소 창시된 종교가 아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신 ·구약으로 나뉘기는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태초에서 종말까지 연속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계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 믿는 정통 신앙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유대 교는 대 략 바벨론 포수(Babylon Captirity) 이 후부터 선민 이 스라엘 이 신 약으로 성 취 확장될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51
정통 구약 신앙에서 이탈하여 구약 성경의 일부 내용만을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으로 곡해하여 만든 종교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간에 유대교는 신약 성경 시대 당시 체제상으로는 신약 성경의 주요무대였던 팔레 스틴의 유일한 종교였고 그 사상면에서 도 구약 사상과 거 의 유사하면서 도 매 우 섬 세 한 오류에 서 시작하여 마침내 정통 구약 신앙을 심각히 훼손한 결과 기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확장된 구약의 본질을 망각한 것은 물론 주님이 주시는 신약도 거부하는 등 신약 성경 시대 내내 중요한 배경을 이루는 바 이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유대교의 정의와 기원 특히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행 서론 특별자료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신약 성경 시대 유대교의 제반 상황에 대해서 간략히 일고해 보기도 한다.
1) 유대교의 유래와 전개
구약 시대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 왕국마저 멸망하고 그에 따라 많은 유다인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B.C.S86년), 유대인들에게는 두 갈래의 종교적 선택의 기로가 놓여져 있었다. 즉 그것은 비록 지금까지 그들이 잘 지키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라도 철저한 여호와 신앙을 가지느냐 아니면 유대 민족의 고유한 생할 양식을 저버리고 이민족의 종교와 문화 속에 흡수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때에 유대인들은 전자의 입장에 서서 유대 민족으로서 그들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잃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흩어진 곳에서 유대 공동체를 건설하여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즉 그들은 흩어져 정착하는 곳마다 공동체를 만들며 회당(會堂)을 세우고 모세 율법 교육과 아올러 여호와에 대한 예배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것이 유대교의 초기 형태이다. 한편 포로 시대 이후 자기들의 고국으로 귀환하게 된 유대인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과 동시에 율법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에 성전을 관리하고 예배를 주관하는 과거 제사장직의 회복과 함께 율법을 해석하고 일반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학자 등 유대교의 중요한 종교 지도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유대교 신학 사상의 뼈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비로소 구약 정통신앙과 유대교가 뚜렷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B.C.2세기 중반, 즉 마카비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로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유일신 사상(唯一神思想)과 유대 민족 중심의 구원관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적 종교관이 일단 확립 되 었다. 그후 유대교 내에서도 신학적 견해 차이와 유대인들의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의 차이가 맞물려 미래에서의 개인적 구원을 내세우는 분파와 현실 상태에서 유대인의 집단적 구원을 강조하는 분파간의 첨예한 대립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사두개인(thesadducees)과 바리새인들 (the Pharisees)의 갈등인데, 대제사장이나 제사장 등 중요한 사회적 지위를 독차지 하여 많은 명예와 아울러 성전 제사에 따른 여러 가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던 사두개인들은 현실 사회에서의 정치적 해방과 독립을 통한 유대인의 집단적, 현세적 구원을 강조했다. 이와 달리 비록 일반 백성들의 존경을 받긴 했지만 단순한 율법학자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또한 전수하던 바리새인들은 현세의 권력과 야 합하며 그에 따른 이익을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의 구원관은 유대교를 타락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보고 오로지 율법 준수를 통한 내세(來世)의 개인적 구원을 주장했다. 특히 하조몬 왕조가 유대의 대제사장직을 겸임하던 시대에 바리 새인들 중에는 유대교의 세속화(世俗化)를 매우 염려하던 극단 '적인 무리들이 생겨났다. 즉 그들은 온전한 율법 생활을 위해서는 현실 사회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사막이나 광야로 나가 오로지 율법적 생활에만 전념하는 극단적이고 금욕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들이 바로 에쎄네파(Essenes)이다.
2)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의 유대교
① 대제사장 제도
신약 시대 대제사장 제도의 실행 형편을 보면 구약 시대에 지켜지던 원칙들이 철저히 무너지고 정치적 권력과 결탁되어 극도의 타락상을 보이고 있다. 사실 대제사장직은 종신직(努身職)이었고 반드시 사독 가문에서 그 임무를 맡아야 했다(대상 24'3, 6).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헤롯 가문에 의한 유대 통치가 시작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즉 대제사장의 지위가 유대 사회에 전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헤롯 대왕은 대제사장의 권위를 축소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대제사장을 임명하였다. 더욱이 그는 대제사장을 임명할 때, 자신의 통치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재력가(財力家)를 임명했다.
한편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로마가 직접 통치하게 된 총독 시대에는 그나마 명목상 종신직이었던 대제사장직은 대제사장 임명을 통해서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다는 로마 총독들의 판단 아래 임기제(任期制)로 바뀌었다. 더욱이 당시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의 최고 행정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산혜드린 공회의 의장이 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큰 권세를 얻는 셈이 되었다.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간에는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로마 총독에게 서로 많은 뇌물을 바치는 등 그 경쟁이 치열했다.
한편 총독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대제사장이 된 사람은 그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을 마련해야 했는데, 이에서 온갖 타락 행위가 자행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상인들로부터 세를 받고 성전 안에서 장사를 허용한 것이다(마 21 : 12-17 ;막 11 : 11-19).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던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들으신 것도 상인들과 대제사장과 밀약된 이익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향하여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막 11 : 15-17). 결국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에 오른 사람이기에 더이상 백성을 성결케 하며, 율법의 규례와 유대교의 전통을 보호하는 유대교의 수장(首長)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에서 단순히 정치적인 술수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속인(俗人)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약 성경에는 '대제사장들'(마 27:6;막 14 : 43 ;눅 23:4;요 19 : 6)이란 복수 명칭이 쓰였는데 이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어 임기를 마친 대제사장들까지도 명목상 계속해서 대제사장으로 일컫는 경우이거나 둘째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과 그를 보좌하는 제사장들을 총칭하여 가리키는 것이다.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53
한편 신약 성경의 시대의 대제사장직은 친로마 정책을 표방하고 또한 총독에게 막대한 정치 자금을 지불한 안나스와 그의 집안에 의해 거의 독점되었다. 이에 신약 성경 시대의 역대 대제사장들에 관하여는 앞 페이지의 도표를 참조하라.
② 성전 제사 제도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는 활발하게 행해졌다. 그것은 당시 외적인 율법 준수를 강조하던 종교 풍습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나 일반 민중들의 종교적 열정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한편 이러한 종교적 열정이 뜨거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편으로 헤롯은 포로 시대 이후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헐고 과거 솔로몬의 성전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다시금 건축하기 위해 대규모의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다(B.C.20년). 그리고 10년 만에 성전의 기초 골격을 완성했다. 물론 성전이 완공된 것은 A.D.秘년이지만 예수 당시에 이미 이 성 전에서 제의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헤롯의 성전 건축에 의해 일부 경건파 유대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전보다 성전 제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당시 성전에서는 매일 대제사장이 거행하는 두 번의 상번제(常偏祭)와 아울러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나팔절과 같은 절기들이 지켜졌다. 특히 이러한 절기들이 지켜질 때에는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성끼 순례로 인해 솔로몬 시대 보다 더욱 큰 규모로 성전 제사가 행 해 졌다. 한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정치적 결탁과 매관 매직에 의해 성전 제의가 오염되었다고 생각한 엣세네파에 속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주도하는 성전 제의를 거부하고 올바른 제의 양식의 회복과 율법 생활의 준수를 위해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사해 지역에 다수 존재했던 쿰란 공동체(Qumran Commun◎)가 대표적이다.
3) 지역별 유대교 중심지인 회당(Synagogue)의 이해
B.C.SC경부터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여 2000년이 훨씬 지난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와 유대인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회당(會垈)은 이미 예수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형 성하고 있는 곳이면 팔레스틴 안에서나 밖에서나 어디든지 건축되어 있었다. 이 회당은 각 지방별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중심지였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거나 아니면 성전이 복구된 후에도 거기서의 제사가 심각히 오염된 상황이 대부분이었던 바 바벨론 포수 이후 대부분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유대교도 실상 이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회당은 단일 중앙 성소인 성전의 이념은 전혀 해치지 않았다. 성전은 구약 율법에 따라 동물 희생제사가 사제들에 의하여 거행될 수 있는 유일한 성소로서 이스라엘 전민족의 공동 구심 점이었던 반면, 회당은 각 지역의 일상 예배와 교윽을 위한 유대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함으로써 그 조화를 잘 이루었다. 이는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성전이 무너지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열방 가운데 흩어져 있을 때에 그들 나름의 여호와신앙을 고수하고 민족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회당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나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과 초대 교회의 형성 및 복음의 세계적 전파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교두보 역할을 했다. 또한 회당에서 드려지는 예배 의식은 후에 기독교 예배 의식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회당은 비록 유대교의 오류로 인해 기독교가 소유한 참 진리 를 소유하지 못하였으나 순수한 종교 형 식 의 입 장에 서 만 볼 때 에 는 역사적 으로 기 독교 교회(Church)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다.
① 회당의 명칭과 기원
' 회당'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고게'(777777γ? )는 '함께 모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본래는 종교적, 세속적 목적을 불문하고 함께 모인 사람들의 모임, 또는 총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기서 의미가 확대되어 유대인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 또는 건물을 지칭하게 되었다.54 신약 층론
이와 유사한 의미의 헬라어로서 '에플레시아'가 있는데, 이 단어는 주로 헬라인들이 사용했으며 유대인들은 고집스럽게 '쉬나고게'만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그 용어가 구약 율법의 상징인 '시내산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실 회당의 선구적 형태가 나타난 것은 바벨론 포로 시대이지만 신약 시대와 같은 회당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애굽의 톨레미(the班olemy) 왕조가 물레스틴 지역을 통치하게 된 B.C.3C경부터이다.
당시 유대인에게 유화 정책(零和政策)을 폈던 톨레미 왕조는 그들이 건설한 도시에 유대인을 이주 시키는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비록 팔레스틴 지역을 벗어난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은 회당을 세우고 그곳을 중심으로 그들 고유의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회당의 수는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꾸준히 종가하였다. 랍비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 당시에 예루살렘에만도 480여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팔레스틴 지역 뿐만 아니라 애굽과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와 지중해, 심자어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까지 널리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 디아스포라(Diaspora) 지역의 회당의 수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엄청나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에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② 회당의 관리(조직)
회당은 본래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따라서 그 관리들도 그 회당이 위치한 마을의 어른들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대개 율법을 깊이 연구한 바리새인들은 람비(Rabbi)가 되었다. 이에 회당의 관리들과 그들의 역할을 도표로 정리하여 보았다.
③ 회당의 역할
회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안식일에 유대인의 예배 처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 에서는 단지 예배만 드렸으며 회생 제사는 오직 성전(Temple)에서만 드렸다. 이는 회당이 유대인들의 단일 중앙 성소인 성전의 본질과 중요성을 전혀 위반하거나 약화시키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조화를 이루어 유대인들의 신앙 생활의 구심점 역할을 나누어 수행했다. 한편 회당에서는 회생 제사가 거행되지 않으므로 구약 율법에 의하여 제사의 독점적 집전자로 규정된 제사장들이나 일반 레위인들이 상주하지 않았다. 대신에 일반 지파 출신의 종교 지도자들 곧 당시 람비라 불리워지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주도에 의해 유대교의 교육 장소로 사용되 었다. 즉 회당은 오늘날의 초등 교육 기관과 같이 어린이들에 대한 기초 교육과 젊은 청년들에 대한 미쉬나(Mishnah), 흑은 탈무드(Talmud) 교육의 장소로 또 성인들에 대해 토라(Tora)나 미쉬나를 기록한 율법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장소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회당은 이러한 종교, 교육 기능 이외에도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활용되었다. 즉 회당은 각 지방에 산재한 유대인 공동체의 자치 기관으로서 민사, 형사, 종교상의 문제를 판결하는 일종의 법정 구실을 했을 뿐만 아니라(마 10 . 17 :눅 12 . 11), 일반 백성들의 집회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회당에서는 형벌도 집행되었는데 기독교의 집사격에 해당하는 회당의 찾잔(Hazzan)이 형벌의 정도에 따라 채찍질 했다(마 10'17 : 23 : 34 ;막 13'9). 또 혹자에 따르면 회당은 정치적 집회 장소나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여관과 같은 기능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회당은 유대인들의 각종 사교집회 장소로도 자주 활용되었다.
④ 회당의 건축과 내부 양식
유대교의 구전 전승을 기록한 탈무드(Talmud)를 보면 유대인들은 회당을 건축할 때 그 마을의 시장이 서는 네모난 광장 중심지에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방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대 문헌에 의하면 그 성음의 가장 높은 곳에 회당을 건축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예루살렘 중앙 성소를 향한 유대인들의 종교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회당의 형태는 주로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모세 회막의 형태를 본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식 건축 양식을 본딴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팔레스틴 지 역에서는 주로 후자의 형태를, 기타 해외의 디아스포라지역에서는주로 전자의 형태를 따랐다. 그것은 아마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굳이 성전의 형태를 따를 필요가 없었고 디아스포라 지역의 유대인들은 회당을 통해 성전이 지닌 신성함을 맛보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회당 건물은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흑은 그 지역의 유대인들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형태와 크기가 달라졌다. 예를 들면 흘레스틴, 시리아, 로마 지역에서는 주로 바 실리카식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독일, 러시아 지역에서는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Romaneseque) 양식을 따랐다. 그러나 다른 건축물들과는 달리 유대인 회당의 건물 양식은 그렇게 첩게 변하거나 발전되지 않았다. 반면에 현대 서방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은 과거와는 달리 일반 다른 건 축물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크고 화려하게 지은 것들이 많다. 한편 회당 내부의 특징 중 하나는 남녀가 서로 분리될 수 있도록 자리를 따로 만들었으며 여자들은 주로 윗충에, 남자들은 아랫충에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에서는 법궤가 놓이는 자리에 회당에서는 토라 두루마리 보관소를 설치한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외에 회당의 내부 양식에 대한 세부 사실은 다음 삽화를 참조하라. 한편 다음 삽화는 A.D.2세기 경의 것으로 추측되는 팔레스틴의 가버나움에 있던 회당 유적지를 근거로 하여 만든 회당 모형을 다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아마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 있던 회당의 형태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⑤ 회당의 예배
유대인들은 대개 월요일, 금요일, 그리고 매 안식일과 축제일을 보면 안식일과 축제일에는 예배 절차를 다 빠짐없이 행하였
생략되는 부분도 있었다. 한편 안식일 오전에 행해지는 회당예배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쉐마낭독-사회자나 혹은 성가대석에서 '들으라 이스라엘 ! 이 라는 소리 와 함께 민 15 : 37-41, o'7-71 11 - 13-21의 세 죽복문, 즉 쉐마를 낭독함으로써 예배가 시작된다.
㉡ 대표기도-회당장이 정한 기도의 선창자(Messenger)가 기도용 법복을 두르고 회중 앞에 나와 큰 소리로 기도문을 선창하면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기도문은 18개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대개 첫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낭독한다.
㉢토라 봉독과 해설-3년 주기로 1회씩 봉독할 수 있도록 모세 오경을 155개 항목(Sedarim)으로 구분한 것 중 한 항목을 랍비가 봉독하고 어려운 부분을해설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 일을 맡기도 했다. 한편 토라 봉독 후에는 랍비나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역사서나 선지서 가운데한 구절을 읽고 거기에 적합한 설교를 할 수도있었다(눅 4 : 20-27;행 13 : 16-41). 이때 설교자는 회당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축복 기도-예배의 마지막 절차로서 대개 제사장이아론의 축복문인 민 6 : 24-26을 선포하나 제사장이 없을 때는 평신도가 하기도 한다.
4) 유대교 분파들
신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대교 분파들에는 바리새파(Pharisees), 사두개파(Sadducees), 엣세네파(Essenes), 열심당(Zealots)이 있다. 이러한 유대교 분파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B.C.2세기경 마카비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특정한 종파의 구분없이 다같이 유대교라는 하나의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마카비 가문의 시리아의 셀 류쿠스(Seleucus) 왕조의 지배 하에 있던 유대 민족을 독립시킨 뒤 마카비 가문 출신이 대제사장으로서 유대 민족의 최고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신학적,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각 분파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각 유대교 분파들은 신학적 견해 차이도 있지만 마카비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 이어 로마 식민 통치 시대를 거쳐 오면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유대교를 보호, 고수하려는 자들과 정치적인 이권을 추구하며 외부 세계에 동화하려는 자들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도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반목하던 유대교 분파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일심 단결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오직 구약의 전 인류를 위한 구속주 약속과 예언의 실체로서 이를 성취 확장하여 신약을 주고자 오신 예수께서 비록 그 정도와 일부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든 구약의 일부만을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 곡해란 점에서는 같은 유대교 각 분파 모두가 공히 잘못되었음을 동시에 지적하였기 때 문이 다. 이처럼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신학적 입장까지 달리했던 유대교 각 분파들을 이해함에 있어 절대 필요한 몇 가지 핵심 사항들을 도표로 정리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 흔히 서기관(Scribe)과 헤롯 당(Herodians)을 유대교 분파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록 서기관들이 유대교의 제반 측면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결코 독립된 분파는 아니었다. 서기관은 율법 필사(筆寫) 등을 주로 하는 전문 직업 기능인을, 헤롯당은 당시의 지배자였던 헤롯과 정치적 이해 관계로 얽힌 자들을 통칭하는 이름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서기관은 대개 바리새파 출신이었으나 원칙적으로는 엣세네 출신일 수도 있고 심지어 이들 당파와 별연관이 없는 자이기도 했다. 이들 두 집단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 서기관 . 물론 구약 왕정 시대에도 있었으나,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 율법의 필사 및 연구 전승을 전담하며 나아가 성전. 회당 또는 각종 공공 기관 및 시설 단체에 소속하여 공문서 등을 작성한 직업 기능인들을 통칭하는 직업명이다. 그들은 문자 매체및 인쇄술이 미약했던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으며 높은 대우도 받았다. 또한 그 기능상 종교적 측면에서는 유대교 경전인 율법 등을 연구 전승하는 기능을 담당하며 주로 각 회당 등에 속하여 랍비 또는 율법사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산혜드린 공회, 성전, 로마 식민 정부 체제의 각종 기관에 속하여 일종의 행정 관료로서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원칙상 어떤 종교 분파에 전속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으나 대개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헤롯당 . 헤롯 대왕이 로마 정부를 대신하여 팔레스틴을 지배하는 자가 되었을 때부터 그의 왕조가 무너지기까지, 즉 대략 묘.C.37-A.D.껄년까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모인 자들에 대한 통 칭이다. 헤롯은 본래 이방 이두매 출신으로서 민족적 폐쇄성이 강한 유대인 통치에 늘 위협을 느끼는 동시에 유대의 메시야 사상을 늘 위험시 했었다. 따라서 그를 추종한 헤롯 왕은 예수를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에 도전하는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고 탄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