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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학교들의 개척 시대 - 강남으로 모여드는 명문 학교들
강남을 현재의 강남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들이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 명문(名文)고(高)들의 강남 이전을 빼놓을 수 없다.
1970년 대 초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 라고 하면 흔히 5대 공립과 5대 사립을 꼽았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가 5대 공립이었고, 중앙고, 양정고, 배재고,
휘문고, 보성고가 5대 사립이었다.
여학교로는 경기여고, 창덕여고가 명문 공립이었고, 이화여고, 숙명여고, 진명여고,
정신여고가 명문 사립이었다.
이 중에서 용산고와 경동고를 제외한 모든 학교는 사대문 안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이 명문 학교들 대부분이 강남으로 이전하게 된다.
영동 개발을 시작한 구자춘 시장의 다음 구상은 명문고의 강남 이전이었다.
구자춘 시장이 명문고를 강남으로 옮기기로 한 배경에는 3핵 구상(기존 사대문 안과
여의도, 영등포, 그리고 강남)의 실현과 함께 도심 교통난 완화도 있었다.
종로구와 중구에 몰려 있는 이른바 명문고에 다니는 학생들의 등 하교로 인해
도심 교통 체증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
아직 4.19혁명과 6.3학생운동의 기억이 생생할 때였고, 학생들의 힘을 잘 알고 있던
권력 집단들에게 청와대와 중앙부처 가까이에 있는 서울대학교와 고등학교들은
신경 쓰이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한편으로 사대문 안에 밀집해 있는 학교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이전은 불가피했다.
더구나 1974년부터는 서울에서 고교 평준화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당시 구자춘 시장은 서울시교육위원회 의장이자 막강한 권력자였다.
하지만 여느 사안들과 달리 명문고 이전만은 강제로 추진할 수 없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 중에서 이 지역 명문고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명문고 이전은 바로 이들의 추억과 향수를 송두리째 빼앗는 일이었다.
특히 구자춘 시장은 종로구 화동의 경기고등학교를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길 때
가장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자의 반 타의 반, 그럼에도 소위 명문고의 강남 이전은 결국 성사되었고 현재의 강남을
탄생시킨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살펴보자.
1960년대 ‘남서울계획’ 발표와 제3한강교(한남대교)의 건설로, 강남이 비로소
서울 생활권으로 편입되었지만 영동권 개발 사업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정부는 강남 개발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1975년 ‘강남구’를 신설하고 ‘부동산억제세 면제’와
‘한강 이북 택지 조성 불허’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이와 동시에 추진한 것이 한국 사회의 교육열을 역이용한 명문고 이전 조치였다.
명문고 이전은 명문고 선호 심리를 이용한 인구 유입 방안이었던 셈이다.
1972년 10월 28일 문교부 장관은 경기고등학교를 영동 제2구획정리지구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앞으로 3년 동안 사업비 6억 9천6백만 원을 들여 3만 2천여 평의 대지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교사를 지어 이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류 중 · 고교의 개념부터 바꾸겠다는 정부의 강한 의지도 담겨 있었다.
10여 일 전인 10월 17일 유신헌법 발표와 비상계엄령 선포로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인 데다 이미 고교 평준화를 통해 명문고의 의미도 상당히 퇴색해서
경기고 이전은 정부의 계획대로 추진되는 듯했다.
그런데 정부는 재학생 뿐 아니라 국내외 동문까지 합세한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결국 양측은 기존 교사(校舍)를 그대로 유지해 정독도서관으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이전에 합의했다.
1976년 3월 경기고 이전에 이어 1978년 휘문고가 강남구 대치동으로 옮겨갔다.
기존 휘문고 부지는 현대그룹이 인수했고 현대그룹은 그 자리에 사옥을 지었다.
당시 대통령 연두 순시는 다른 사안을 압도하는 권위가 있었는데 구자춘 시장은
명문고의 강남 이전을 독려하기 위해 이를 이용했다.
‘강북 각급 학교의 강남 이전’을 대통령 지시 사항에 넣어달라고 청와대 측에
미리 요청해 둔 것이다. 이에 따라 1978년 서울시에 대한 대통령 연두 순시 지시에
“강남 이전을 희망하는 학교에 대해서는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해 가능하면 많은 학교가
이전되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강남의 구획정리지구에 있는 서울시 소유의 체비지를 학교용지로
헐값에 불하해 줄 구실이 생겼고, 학교 측에 은행 융자를 알선해 줄 수도 있게 되었다.
동문을 설득할 명분을 얻은 학교들은 너도나도 강남 이전 계획을 세웠다.
경기고, 휘문고에 이어1980년에는 숙명여중, 고가 강남구 도곡동으로 이전했고,
서울고는 서초동으로 옮겨 갔다.
1984년에는 중동고가 일원동으로, 1988년에는 경기여고가 개포동으로 이전했다.
원래 경운궁터였던 정동의 경기여고 부지는 현재 미 대사관 신축을 둘러싸고 논란을
빚고 있는 곳이다.
한편 1974년 서울 지역에서 고교 평준화와 함께 학군제가 실시됐다.
서울 시내를 5개 학군으로 나누 학군제가 실시됐다. 서울 시내를 5개 학군으로 나누고
중학교 졸업생은 같은 학군의 고교로만 진학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1978년에는 학군 수가 인구 증가와 신(新)개발지 확대 등으로 9개로 늘어났다.
이 해는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던 때였다. 경기고, 서울고, 숙명여고 등
이른바 강북 명문고가 옮겨간 강남구와 서초구는 그 유명한 ‘8학군’의 핵심이 되었다.
현재의 강남을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학군의 위상은 대단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1990년대에 걸쳐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이
강남으로의 대이동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중앙고등학교와 경복고등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명문 고등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상당수 학교는 자발적으로 강남행을 선택하기도 했다.
숙명여고, 정신여고, 배재고 등은 옛 교사의 협소함과 학생 수의 감소 등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이전한 경우였다. 그리고 강남으로 이전한 학교들은 모두 이른바
‘강남 8학군’과 ‘강남 교육특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배재고등학교는 막차를 타 다소 ‘변방’인 고덕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비해 대학교의 경우에는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서울교대)를
제외하고는 이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단국대학교가 헌릉 일대에 30만 평을 마련해
이전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해당 지역이 그린벨트로 묶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단국대는 강남 유일의 종합사립대학으로 교세를 상당히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사립대학들의 이전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막강한 동문의 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정부의 시선이 더 먼 데 있었던 탓 같기도 하다.
정부는 사립대를 아예 강남도 아닌 경기도나 더 먼 지방으로 이전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성균관대, 경희대, 한양대, 외국어대, 중앙대, 경기대, 명지대, 외국어대의 경우에는
경기도로 캠퍼스의 상당 부분이 이전했다.
고려대, 연세대, 건국대, 동국대, 홍익대 등은 아예 경기도를 넘어가서 지방 캠퍼스를 건립했다.
이는 학생운동권의 약화를 노린 정책이었지만 운동권 세력이 지방에 확대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단적으로 운동권 세력이 약했던 ‘여자대학’들이 지방 캠퍼스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부의 의도를 증명해준다.
서울대학교는 동숭동의 문리대, 을지로6가의 음대, 공릉동의 공대, 월곡동의 사범대,
소공동의 치대 등 캠퍼스가 분리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포화 상태였다.
이것이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앞서 말한 정부 측 논리가
여기서도 반복되는데 가장 강력한 반체제 세력인 대학생,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성이 큰
서울대를 외진 곳으로 이전하여 학생운동의 위력을 반감 시키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강남이 아닌 관악으로 이전한 이유도 대학생들의 데모를 신 시가가 아닌, 그야말로
대학 캠퍼스 외에 아무것도 없는 외진 관악산 기슭에 가두어 두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1990년대 초 미얀마의 군부 독재 정권이 이를 본받아 수도 양곤의 대학들을 지방으로
이전 시켰다고 하니 새마을운동만 외국에 수출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정부의 ‘조치’를 불순했다고 욕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서울대학교마저 양재동이나 대치동 쯤에 옮겨졌다고 생각해 보라. 그랬다면 강남 집중이
더했을 테니 결과적으로 서울대가 관악에 자리 잡은 게 다행이 아닐까?
명문 학교들의 개척 시대 명문 학교들의 이전은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다르게 기억되었다.
기득권자들이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학교까지 다 가지고 갔다느니, 그런 식으로 강남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 단위로 동질적 거주 집단을 형성하는 선례를 만들었고 결국 중계동이나 목동 같은
‘준강남’을 탄생시켰다는 설득력 있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1970년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허허벌판이었던 강남으로 이전했던 당사자들,
적어도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겪었던 고생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초기에 경기고 학생들은 체육 시간이나 교련 시간에 천지에 널려 있는 돌을 주워야 했고,
은마아파트까지 왕복하는 교내 단축 마라톤을 할 때면 경찰의 도로 통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오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당시 휘문고 교장이었던 김태식 씨의 증언이다.
‘주변 상황이 아주 열악했습니다. 우선 대중교통망이 제대로 되어 있질 않아 버스 노선이 별로
많지 않았죠. 그나마 학교 앞까지는 연결되지 않아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 버스를 타려면
10여 분 거리의 테헤란로나 지금의 삼성역까지 걸어가야 했어요. 도로 포장도 되어 있지 않아
비가 올 것 같으면 진흙탕 길을 걸어야 했고, 가로등도 가설되지 않아서 불편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또 어려웠던 일은 우리 학교가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위치해 있고 인근에 은마아파트를
짓기 위해 건설 인부들이 이용하는 간이식당들이 생겼어요. 그런데 이 식당에서 오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악취가 나고, 오물 주변에서 번식한 파리들이 교실, 특별실, 행정실에 날아다니고
(···) 천장과 벽에 시커멓게 붙어 있어 학생들의 위생과 수업에 지장이 많았습니다.’
휘문고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점심시간에 2년 전에 먼저 와서 자리 잡은 경기고 근처의 식당을
가거나 준비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서울시에서 경기고와 휘문고를 위해 버스 노선을 많이 배정해 주었지만 이런 불편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사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경기고가 위치한 수도산 언덕에서 보이는
건물은 휘문고와 국기원, 그리고 몇몇 빌딩뿐이었다.
학원도 특별한 강남 명문 학교들이 이전하여 ‘8학군’이 형성되었지만, 이것이 바로 강남의
사교육 특구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이 과외 금지와 재학생의 학원 수강 금지 등 강력한 사교육 억제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과외 금지는 가장 강력한 반정부 세력인 대학생들의 자금줄을 끊으려는
조치였다고도 하는데, 하지만 일부 부유층은 ‘대학생 몰래 과외’를 했으며 이것이 강남 학원
문화의 근원이 되었다.
1989년 사교육 억제 정책이 풀리면서 1990년 초부터 강남의 사교육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당시 대치동 일대는 압구정동 일대에 비해 개발이 늦었는데, 이 개발의 여백을 학원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교육은 주로 전국의 재수생이 대상이었고, 서울 도심이나
노량진 유명 학원의 대중 강의가 주류였다. 하지만 대치동의 학원들은 달랐다. 이들은 소수를
대상으로 규모가 작지만 내실 있는 강의로 특정 과목을 집중 관리해주고 비교적 고가의 수강료를
받았다. 차차 입소문이 나면서 대치동이 노량진에 비해 강의 수준이 높고 또 강사들의 보수가
좋다는 평판이 널리 퍼졌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인터넷 강의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대치동 학원가의 위상은 더욱 올라가게 된다. 대치동제 인터넷 강의는 곧 ‘전국화’되었지만
이것만이 대한민국 사교육의 ‘성지’ 대치동을 만든 요인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
외환 위기였다. 이때를 계기로 조직이 개인을 책임진다는 ‘평생 직장’ 개념이 무너졌고, 이를
목도하며 자라나는 세대들은 믿을 것은 자기 자신, 즉 ‘스펙’뿐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1990년 33.2퍼센트에서 2000년 68퍼센트로
두 배 이상 올라갔다. 한국의 교육열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지나치게 높은 진학률인데,
이 말은 ‘대학 졸업장’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더 많은 학생들이 학원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학원가의 호황을
설명하기에 모자라다. 더 좋은 대학, 즉 명문대 진학의 가능성을 학생들의 손에 쥐여 줄 수
있어야 했다. 이 지점에서 대치동의 학원들은 현실적인 목표, 즉 ‘명문대 진학’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고 그럭저럭 학생들의 성적을 잘 ‘관리’해서 성과를 냈다.
이리하여 대치동 학원들은 이전까지의 통념, 즉 ‘학원’은 공교육의 보완재에 불과하다라는 통념을
깨뜨리고 2000년대에 들어 공교육까지 흔드는 ‘괴물’이 되어 갔다.
대치동 학원들이 강세를 보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수능’의 등장이다.
1993년 이전의 학력고사는 암기 위주의 시험이었기에 공교육의 ‘야자(야간 자율학습)’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수능은 ‘야자’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시험이었다.
특히 2001년에 수능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학생들의 평균 성적이 크게 하락하는 ‘수능 파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서울대 정시모집 합격자 1,103명 중 강남구가 239명, 서초구가 152명,
송파구가 89명으로 기초자치단체 순위 1~3위를 휩쓸어 버리는, 결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결과는 다시 강남 아파트 값 상승과 강남 학원가 쏠림 현상으로 이어졌다.
거기에다 수능 도입 이후 계속 바뀐 입시제도 덕에 맞춤형 사교육을 제공하는 대치동 학원들은
더욱 성장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심지어 학원을 들어가기 위한 학원이 생길 정도였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사교육은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강남 지역의 사교육 비용은 전국 평균의 세 배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대치동
학원들은 선망과 동시에 증오의 눈초리를 견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사람들이 싫어하건 말건
돈 있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수요’가 엄연히 존재하고 또 대치동 학원들이 그러한 요구에 충실히
부응하기 때문에 이들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서 수능이 쉬워지면서 대치동 학원에 대한 수요도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반가운 소식이긴
하지만 좀 더 지켜봐야 알 일이다. 대치동 학원가는 영화 《울학교 이티》와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
잡기》의 무대로 등장하기도 했다.
《강남엄마 따라 잡기》의 줄거리는 주인공인 엄마(하희라가 열연했다)가 새로 강남으로 이사까지
하며 아들을 특목고에 입학시키기 위해 뛰어다닌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나온 재밌는 비평 중
하나는 이 드라마가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는데, 강남권 학부모들은 이미 특목고가 아니라
국제중에 입학시키기 위해 뛰어다니는 시대라나 뭐라나.
어쨌든 학원 때문에 집값이 들썩이는 신화 또한 강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 한종수, 강희용 저, ‘강남의 탄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