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치아와 북구 르네상스 화가를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수업자료에 올린 글이 길지만, 그림으로 보면 빨리 넘어가니
길더라도 읽고 오십시오.
베네치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하며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다. 또한 세계적 관광지이며, 수상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베네치아 석호 안쪽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으며, 육지로부터 약 3.7 km 떨어져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기간 동안 유럽의 해상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레판토 해전에 휘말리며 유럽의 중앙 정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도시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무역의 중심 항구로 번성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문화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유명한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고향이다.
기원후 2세기, 로마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게르만족들이 넘어와 이탈리아 본토의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고트족들이 로마를 거의 반파 직전으로 몰아갔으며,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들이 로마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하며 로마제국은 치명타를 맞게 된다. 로마 제국은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동,서로마로 나누어 각자 통치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이때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그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감독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이는 베네치아의 독립성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9세기에서 12세기 동안, 베네치아는 강력한 도시 국가로 성장했다.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대약탈을 하였으며, 성 마르코 대성당 입구 위에 올려져 있는 청동으로 된 4마리의 말들도 이때 들어온 것이다.
아드리아 해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동로마, 이슬람 세계와 거래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베네치아인들은 대부분 전쟁을 상업적 거래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그러나 거의 용병이었다.
쇠퇴의 시작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지만, 당시 국력이 승천하던 오스만 제국 군대를 상대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는 이후 베네치아의 오랜 쇠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베네치아 쇠퇴에 흑사병도 큰 역할을 했다.
베네치아 화가
1. 야코브 벨리니(아버지)(1400?-1470)
젠틸레 벨리니(형) (1429-1501)
지오반니 벨리니(동생) (1430 – 1516) - 더 유명하다.
벨리니 가문이 베네치아 화파를 연다.
038-1 젠틸레 벨리니
038-2 조반니 벨리니 성 모자상
038-3 조반니 벨리니 성 프란체스카의 기도
2. 메시나
유화의 기법을 (플랑드로에서)배워서 베네치아에 도입한다.
(이태리 전체에서도 유화를 제일 먼저 그린 화가이다.
036 메시나 수태고지
036 메시나 남자의 초상
3. 만테냐
037 만테나의 듀탈 궁 카메라 피카
3, 조르조네 (1478-1510)
그는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로 색채를 사용하여 화려한 화풍을 세운 베네치아파(派)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요절했으므로 그의 생애는 모르는 것이 많다. 태풍이 대표작이나 알려진 것이 거이 없어수수께끼에 쌓여 있다. <태풍>(1505?)은 폐허가 된 어느 조용한 촌락을 배경으로 하여, 바른쪽 잔디 위에서 젖을 물린 나체의 부인이 앉아 있고 왼쪽 끝에 젊은 병사가 서 있다.
때마침 구름은 낮게 깔려 있으며 번개마저 번쩍인다. 이것은 누구도 그릴 수 없다는 태풍을 그렸다는(이런 전설이 있다), 고대의 전설에 대한 도전이라 여겨진다.
그의 <잠자는 비너스>는 밝은 광채 아래 풍만한 미를 드러내어 놓고, 그리스의 조각가도 미치지 못하는 관능미를 현실화하고 있다. 1508년에 그리기 시작한 이 그림은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인 채 남겨졌지만 그를 계승한 티치아노에 의해 완성되었다.
039-1 성당의 제단화
039-2 태풍
039-3 잠자는 비너스
*후대의 비너스 상의 규범이 되었다.
041-1 크라나흐(북구의 화가이다.)
041-2 티치아노-우르비노 비너스
041-3 장 쿠쟁 1549
4. 티치아노
티치아노 베첼리오(1488-90년경 ~ 1576년)는 이탈리아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했던 화가이다. 그의 창작 시기는 베네치아 공화국 회화의 황금기와 맞아 떨어졌다.
9살이 되었을 때 베네치아로 가서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 형제에게 사사했다. 1513년 자신의 작업장을 열었고, 유럽 전역에서 찬양을 받는 화가로 발전했다. 1515년경에는 명백한 베네치아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전 유럽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1533년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상당히 고령이었던 티치아노가 1576년 페스트로 죽었을 때 그는,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화가였다.
646점의 작품을 제작했고, <성스런 사랑과 세속의 사랑>, <성모 승천>, <바쿠스의 축제>,〈우르비노의 비너스〉등이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이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색채주의이다. 말년에는 이미 바로크적 특성을 향해 있었다.
강렬한 색채는 루벤스와 와토, 들라크루아까지 영향을 주었다.
042-1 플로라
042-2 성스러운 사랑과 속된 사랑
042-3 성모승천
042-4 바쿠스와 아드리아네
042-5 성모회전
042-6 피에타 1576
5. 틴토레토(1518-1594)
틴토레토(Tintoretto, 1518년-1594년)는 베네치아 태생으로, 티치아노에게서 배웠다. 염색공의 아들로 틴토레토는 염색공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를 목표로 하였으며, 다시 인공적인 빛과 그림자, 과장된 단축법을 써서 극적이고도 순간적인 효과를 화면에 폭발시켰다. 초기의 대표작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에서는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법을 보여 주었다. 1550년대 후반부터 공간 효과와 극적 효과가 한층 더 뚜렷이 전개되어 갔다. 1584년 <성 마르코의 기적>을 발표하여 베네치아 파로서 그의 지위가 굳어졌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지막을 장식한 화가로 이후 마니에리스모인 엘 그레코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 <천국> <최후의 만찬> 등이 있는데, 특히 <천국>은 등장 인물 700명이 넘는 대벽화이다.
043-1 마가의 기적
043-2 최후의 심판
043-3 모세의 기적 (바위에서 물이 쏟다)
6. 베로네세(1528-1588)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년 ~ 1588년 4월 19일)
르네상스에서 매너리즘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서 티치아노에게 큰 영향을 받아, 빈틈없는 구도와 화려한 색채의 장식화를 주로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 <성모의 대관>, <레비 가의 향연> 등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서 티치아노에게 큰 영향을 받아, 빈틈없는 구도와 화려한 색채의 장식화를 주로 그렸다. '베네치아파'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주요 작품으로 <성모의 대관>, <레비 가의 향연> 등이 있다.
그가 시대 역행적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카톨릭이 종교개혁 운동에 충격을 받고 엄격한 반종교개혁 운동을 펼친 시대에 르네상스의 장중·화려한 양식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044-1 레위家의 향연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의 쾌락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044-2 베네치아 승리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벗어난 지역의 화가들
1) 코레죠(1489-1534)
역동적인 구성, 관능적이고 환상적인 관점에서 그린 그의 그림은 르네상스에서
매너리즘-바로크-로코코로 이어진다고 한다.
045-1 다나에
045-2 성 히에로니무스와 성모
2) 캠팽 피시
북구의 화가로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이때는 유화가 일반화 되어 있었다.
048-1 에라스무스 상 1517
048-2 장삿꾼 부부 1517
티에폴로 (1690 – 1770
후대의 화가임으로, 뒤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북서 유럽의 르네상스
북서 유럽은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요소들이 더 강했다.
북서 유럽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났다. 이탈리아로 유학 간 사람이 돌아와서 르네상스 운동을 일으켰다.
이태리 인문학자의 연구가 인쇄술의 발달로 쉽게 북구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이태리의 복사판은 아니었다.
북구 인문학자들이 원전으로 돌아가자는 그리스-로마의 원전이 아닌, 성경으로 돌아가자 였다. 그래서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기독교 인문주의 성경적 인문주의였다.
그들은 부패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지만 대안은 미비했다.
북구 — 에라스무스(주로 교회비판을 했다.)
영국 — 토마스 모어(유토피아)
각국의 문학 —사회 비판적인 사회 분위기는 속어를 사용한 문학작품이 되어서 나타난다.
아직은 고대의 양식이 많이 남아 있지만 속어를 사용함으로 국민 문학으로 나타난다.
사회 비리를 비판하는 풍자시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1532-1564)
다음 시대로 이어지면서
스페인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프랑스 — 몽테뉴의 수상록
영국 —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미술(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고 하면 미술을 먼저 떠올린다.)
북구의 화가
1) 얀 반 에이크
얀 반 에이크(1390년경 ~ 1441년)
플랑드르의 화가이다. 후베르트 판 에이크의 동생으로, 1유화 기법을 사용한 최초의 미술가. 그가 색체 가루(안료)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서 사용, 자연에 대한 세심한 고찰, 정교한 세부 묘사 등으로 인하여 중요하게 여겨진다. 대표작은 어린 양에 대한 경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가 있다.
1422∼1424년 헤이그의 바이에른후(侯) 요한의 궁정화가, 이어 25년 이래 부르고뉴공(公) 필립[善公]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판 에이크는 제단화, 한 폭의 종교인물, 의뢰 초상화 등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를 모두 그렸다. 그는 필립에게 많은 보수를 받았는데, 필립은 화가가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예술적 자유를 얻어서 "마음 내킬 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다. 반 에이크의 작품은 국제 고딕 양식에서 나왔지만,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 대한 더 큰 강조를 통해 그는 곧 그것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유화 물감 사용의 발전으로 새로운 수준의 기교를 달성했다. 그는 매우 영향력이 있었고 그의 기술과 스타일은 초기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채택되고 다듬어졌다.
*남쪽 이태리의 르네상스 운동이 북구에 스며들어 갔고
북구의 유화에 의한 사실주의 미술이 남쪽으로 흘러갑니다.
북구의 유화를 배워서 처음으로 남쪽으로 가져온 화가가 베네치아 미술에서 본 메시나입니다.
050-1 아르롤피니 부부 1434
그가 유화기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고, 이미 여러 기름에 녹이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고, 그의 성과가 제일 뒤어났다.
050-2 붉은 터번을 두른 남자 1433
050-3 다폭화 1426-32
053-4 성모 마리아
053-5 재상 롤랑과 성모
2)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년경 ~ 1516년)
네덜란드의 화가이다. 상상 속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로 유명하다. 쾌락의 동산이 대표작이다
특히 '지옥' 부분이 유명하다. 특이한 색채로 이상한 괴물, 납 속의 유령, 텅 비어 있는 눈과 특이한 몸을 가진 사람 등 무서운 지옥의 세계를 많이 그렸다. 일종의 종교화이다.
보스는 나무 판넬에 그려진 3개의 그림이 서로 맞붙은 3연작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다. 이 작품에는 낙원, 중간 판넬에는 지상의 쾌락의 모습이고, 오른 쪽은 지옥의 모습이다. 그의 그림에는 무서움이나 잔인한 모양 그리고 악덕과 범죄 등이 나타나 있다. 뛰어난 상상력으로써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환락의 땅》, 《성 안토니오의 유혹》 등이 유명하다.
대 피터르 브뤼헐은 보스와 비슷한 양식으로 《죽음의 승리》(1592년)등 여러 점을 그렸다. 보스는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051-1 쾌락의 동산
051-2 쾌락의 동산(상세)
051-3 피터 브뢰겔은 아버지 브뢰겔이다. 십자가를 운반하는 그림으로
양식은 쾌락의 동산과 같다.
3. 마티아스 구뤼네발트(1470년경 – 1528년)
1 6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화가이다. 알브레히트 뒤러와 같은 세대이지만 르네상스라기보다는 말기 고딕 화가로 여겨진다. 과거의 고딕 양식에 뿌리를 둔 탓인지 사후에는 거의 잊혀졌다.
감정의 고조가 독일 표현주의로 흘러가는 지 모르겠다.
052-1 이젠하임 제단화
052-2 제단화
4.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1527년경 – 1569년)
(아들 중 동생 브뢰겔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인 그는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 성을 삼았다. 1551년 안트베르펀의 화가 조합에 들어간 후, 이탈리아·프랑스에서 유학하였다.
처음에는 '민간 전설'이라는 속담 등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고, 후에 네덜란드에 대한 에스파냐의 억압을 종교적 제재로써 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어서 농민 생활을 애정과 유머를 담아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므로 '농민의 브뤼겔'이라고 불리었다.
여기서의 풍경 묘사는 풍경화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은 동판화 1점을 포함하여 45점이 알려졌지만 〈장님〉, 〈바벨탑〉, 〈농부의 혼인〉, 〈눈 속의 사냥꾼〉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는 작품에 서명과 날짜를 기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1559년부터는 작품 서명에 ‘h’를 빼고 ‘Bruegel’로 적었다.
아버지와 두 아들 모두 유명한 화가이다.
052-1 눈속의 사냥군 1565
052-2 농부의 결혼식 1568
052-3 수확자들
052-4 게으름뱅이 1567
052-5 농부의 춤 1568
052-6 이카루스의 추락은 사진을 찾아서 올립시다.
5) 알브레히트 뒤러(1471년 5월 21일 – 1528년)
독일의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이며, 특히 목판화, 동판화 및 수채화에서 독창적 재질을 보였다. 금세금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판화 등의 세밀한 공예 작업에 뛰어나다.
베네치아 여행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보았다.
1505년 뒤러는 베네치아를 향해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그림에서 베네치아에서 받은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고, 베네치아 시 위원회가 만약 그가 영구히 베네치아에 거주한다면 200두카트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를 했지만, 그는 1506년 늦가을 고향 도시(뉘른베르크)로 되돌아오는 여행길에 올랐다.
1520년 6월 12일부터 뒤러는 아내와 함께 밤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쾰른을 거쳐서 안트베르펜과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들로 여행을 갔다.
아직은 화가를 장인으로 취급하던 시기에 미술 공부를 위해 해외 유학도 하면서 미술을 지적으로 탐구하였다.
그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및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의 저서도 내고, 또 이상미(理想美)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주로 종교화·초상화·풍경화 등을 제재로 하였으며, 동판·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한 묵시록> 등이 있다.
053-1 아담과 이브 1507
053-2 제단화, 성 삼위에 대한 경배 1511
053-3 막시밀리안 1세 1519(사실적으로 그렸다.) 1519
053-4 네 명의 사도 1526
053-5 토끼(수채화) 1502
6) 한스 홀바인(1497년 ~ 1543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도 화가이다. 1532년에 영국으로 건너 가서 활동했고, 1536년에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일했다.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 작품으로는 <헨리 8세>, <모레테 상>, <에라스무스>, <죽음의 무도>, <대사들> 등이 있다.
홀바인은 유럽에 있어서 고금을 통하여 최대의 초상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으며, 뒤러와 크라나흐가 대표하는, 작품을 단순한 초상화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격에 대한 투철한 이해력 등을 그의 특색으로 한다.
054-1 예술가의 부인
054-2 헨리8세
초상화이지만, 헨리 8세의 강인한 성품도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
054-3 엘리자베스1세
054-4 대사들
(*미술사 책에 나오는 수많은 화가는 제가 생략했습니다. 우리는 미술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인문학을 공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