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02
9월3일[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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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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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bLsllCoWF4
{조학문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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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순간 규칙적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심한 질책을 받는 모습, 정말이지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탄이라는 표현은 웬만해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그래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표현이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선발하신 제자중의 우두머리 베드로 사도에게 너의 지금 생각과 행동이 사탄같다고 다그치시니 베드로 사도가 당시 받은 충격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그토록 혹독한 질책을 당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걸으셔야만 하는 수난과 죽음, 십자가길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갈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 한 가지 길 십자가 길뿐이었는데, 베드로 사도가 그 길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니 예수님 입장에서는 강력한 철퇴밖에 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탄 소리를 들은 이유는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사람들은 환대하고 먹이고 재우고 교육하느라 정신없이 보내지만, 하느님을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는지? 그분 앞에 앉아 그분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가장 가까운 동료 인간 존재 안에 하느님이 계시니,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받고 있는 형제들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니, 그들을 극진히 섬기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꾸준한 이웃사랑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매일 매 순간 규칙적으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수시로 그분 앞에 앉아 그분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분의 따뜻한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다시금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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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YZR1iwFw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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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삶이 되지 않을 때, 삶이 죽음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 나온 사례 중에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숨넘어가는 소리로 “내 돈 2억 갚아, 임마!” 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 그것에 사로잡혀 더 가지려 하고 더 즐기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소유욕, 식욕과 성욕, 그리고 지배욕이 강해지며 집착에 대한 고통과 이웃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돈 좋아하고 절제 없는 삶을 살고 자기만 아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반면 어떤 사람은 죽음을 삶과 별개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을 구하러 왔던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라이언에게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못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들이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죽음을 받아들인 척하며 실제로는 그 결정을 죽음 직전까지 미룹니다. 그러면서도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죽음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접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 보면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가 말기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신앙을 가지게 된 간증이 있습니다. 자기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한 환자는 자신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고 신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라며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습니다. 무언가를 본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수가 30 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도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지은 씨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에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 품 안에’]
이태석 신부님은 암 선고를 받고 먼저 돌보던 사람들을 돌볼 수 없게 된 것에 너무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죽음 뒤에 당연히 부활이 있으니 죽음은 그분의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금문교를 지을 때 인부들이 두려움 때문에 물에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쳤더니 아무도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내일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남에게 도움이 되는 죽음으로 살 때 그 사랑의 실천으로 부활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을 거부하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든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그 선택으로 지금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금의 삶이 죽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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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21-27: 자기 자신을 끊어버려라
지난 주일과 오늘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베드로의 모습에서 지난 주일에는 메시아로 고백한 바위 같은 신앙과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걸림돌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항상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십자가 위의 죽음이란 체험은 모든 신앙인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오늘 전례에 나타나는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무나 강하신 분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불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오늘 복음은 곧 다가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와 그에 대한 베드로의 민감한 반응(마태 16,21-23)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당신을 따라야 할 제자들의 의무에 대해 말씀하신다(24-27절).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십자가와는 무관한 영광과 권세로 가득 찬 현세적 메시아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세의 인간적 체계에 꿰맞추어 나름대로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신앙을 상실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은 더는 하느님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 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당하실 모든 것을 운명이나 숙명으로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뜻으로 인식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미래의 영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당할 어려움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떼어놓으려 했던 베드로가 이제 스승을 따라 그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면 베드로에게는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으로만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기까지 스승을 따름으로써 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지만, 이제는 또한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수난당하는 종으로서도 고백해야 한다. 이 고백은 자신 역시 스승의 고통스러운 운명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죽음의 운명이 지워진 메시아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아직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베드로에게는 참으로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하신다. 예수님의 권고 내용은 관심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이웃에게 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 밖에 관심을 두셨고, 당신을 잃으셨으며,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셨고(필립 2,7-8) 당신을 내던져 이웃들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셨지만, 부활 영광의 생명으로 당신 자신을 되찾으셨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고 우리를 잃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와 이웃의 선익을 구함(필립 2,21)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십자가란 이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신앙과 인간적인 욕구로 인한 갈등을 언제나 체험한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갈등하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이 하느님의 뜻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갔듯이, 그리고 주님께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바치신 것처럼, 모든 갈등을 이겨내고 자신을 이기고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올바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다.
사도 바오로도 십자가 위의 죽음의 체험에 덧붙여 말하고 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자신을 이기면서 바치는 영적 예배가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는 아픔을 요구한다. 형제들에 대한 충실한 사랑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가 진정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형태로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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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운전하면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려면 스마트 폰을 자동차의 USB 단자에 연결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자동차의 스크린에 스마트 폰의 스크린이 옮겨집니다. 마치 스마트 폰의 내용들이 자동차의 힘에 의해서 조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USB 단자에 연결된 케이블을 뽑으면 스마트 폰은 다시금 제 자리를 찾습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카톡’도 그렇습니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던 카톡을 숙소에서 사용하게 되면 사무실의 카톡은 정지가 됩니다. 카톡을 설치할 수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카톡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래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최면치료’에서도 보았습니다. 최면 상태에 들어가면 마치 영혼이 최면을 건 사람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최면을 건 사람이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우는 것을 봅니다. 평소에 잊고 있던 일들,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간직했던 기억들이 최면에 의해서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담자는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마음이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중국 무협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이렇습니다. “운기조식이나 영약을 섭취하고 기운을 갈무리 할 때 외부에서 충격을 받거나, 심마 같은 마음에 큰 동요가 있을 때, 혹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과하게 영약을 복용했을 때 몸 안에 도는 기를 통제하지 못하여 내공이 역류하거나 폭주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쉽게 설명하면 마가 내 몸을 치고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본인은 대부분 그 상태를 잘 모르고 있으나 차츰 평소의 내 의지와는 다른 행동이나 몸의 변화가 오게 되는데 대게 건강이 악화되고 정신적인 장애가 생기며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주화입마의 대표적인 상황은 ‘마귀’에 들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라는 마귀들을 쫓아버렸습니다. 마귀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알아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귀에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버리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에게 조정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하지만 무엇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지, 무엇이 마귀로부터 오는지 식별하지 못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일곱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일곱 마귀는 ‘칠죄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칠죄종에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음욕’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반석이다. 내가 너를 통하여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 우쭐해있던 베드로 사도는 ‘교만’의 마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교만에 빠져있던 베드로 사도는 감히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사제복이 우리를 마귀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마귀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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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반석, 걸림돌>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루카복음에 있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보면, 두 제자는 메시아로 믿고 있는 분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셔야만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가 “메시아라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을 당한 것을 보니 메시아가 아니었나 보다.”라고 의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아이신 분이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5-26)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와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주셨을 텐데, 복음서에는 그 설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냥 구약성경을 설명해 주셨다는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24,27)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히브리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브 9,15)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히브 9,26)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9) 인용한 말들을 요약해서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다.”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일을 ‘대속(代贖)’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대속’은,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서 구원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왜 꼭 그런 방법이어야만 했는가?”라고 물으면, “하느님의 뜻이 그렇다.”라는 말밖에는 더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든 부활 전에는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활 후에는, 그리고 성령을 받은 후에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을 강하게 말린 것은, 수난의 의미와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꼭 그런 방식이어야 하는가? 쉽고 편한 방식은 없는가?”
<메시아를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로 오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류 구원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께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더라도 사도들은 그 설명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라는 말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바라보고 계셨는데, 베드로 사도는(사도들은) 십자가의 길이 아닌, 쉽고 편한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아’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사탄이라는 뜻도 아니고, 마귀 들렸다는 뜻도 아니고, 당신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말씀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내 뒤로 가라.”, 즉 제자로서 스승의 뒤를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말씀은,“걸림돌이 되지 말고 반석의 본분을 지켜라.”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바위’이지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반석이 되고, 예수님을 가로막으면 걸림돌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이고, ‘사람의 일’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세 번 다 그렇게 하셨습니다.(마태 17,22-23; 20,17-19)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첫 번째 예고 때에는 베드로 사도가 강하게 말리다가 크게 혼났고, 두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몹시 슬퍼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의 반응이 아예 없습니다.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들었거나 무시했고, 수난 예고 말씀에 대해서만 반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십자가는 바로 앞에 있는 생생한 현실이고, 부활은 십자가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십자가는 가깝고 부활은 멀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제자들의 그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의 끝에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와 영광과 기쁨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믿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고, 가시밭길을 걷는 것만 같아서 너무 힘들다는 생각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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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지난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메시아로 고백한 베드로 사도를 두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셨습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6,17-18)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단락인 오늘 복음에서는 베드로를 심하게 나무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두 단락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베드로에게 내려진 두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저승의 세력도 이겨 낼 교회의 반석으로 뽑힌 베드로였지만, 곧바로 사탄이요 예수님의 걸림돌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또 하느님의 계시로 예수님의 본모습을 알아보게 된 베드로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의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로 취급을 받습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아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운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가 기대하였던 메시아는 임금으로 위풍당당하게 오시며 큰 권능과 강한 힘으로 원수들을 제압하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예고처럼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쓰러져야만 하는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나약한 분이 어떻게 당신 백성을 구하실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메시아 상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당황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구원 계획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메시아의 수난을 거부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가장 큰 적대자 ‘사탄’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메시아는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정복당하심으로써, 그리고 그 십자가 운명에 순종하심으로써 당신 백성을 구하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명예와 권력, 영광과 승리를 좇는 데 익숙한 세상에서 우리는 이 역설적인 구원의 신비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보여 주듯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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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
<깊이 있는 사랑>
생각에도 깊이가 있듯이 사랑에도 깊이가 있습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대를 위해 희생은 물론 고통과 죽음까지 도 감수하려는 마음이 큽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하늘만큼 높고 바다같이 깊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깊이 있는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인간, 그것도 죄지은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시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당신 계획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당신이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를 떠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거기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과거 다윗과 솔로몬 임금처럼 군사적 승리와 정치적 성공을 이루는 메시아를 기대해 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붙들고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립니다. 이 반응에는 스승에 대한 충심도 분명 담겨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몰차게 내치십니다. "사탄아 내게 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서 사탄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만나셨던 그 사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사탄은 물질로 권력과 영화로 백성을 휘어잡고,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도구처럼 이용하라고 예수님을 유혹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악마의 제안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시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방패로 삼 아 모든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승리와 성공의 메시아 상을 고집하면서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려던 사탄의 유혹과 같다고 여기시면서 단호하게 내치신 것입니다.
세상은 고통 없는 사랑,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달라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고통과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고통마저 감수하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제2독서) 이 길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갔던 길처럼 힘들고 힘 할 수도 있습니다.(제1독서) 하지만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예레 20,11) 우리 곁에 계시기에 용기를 내서 갈수 있는 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황 선출 다음 날 추기경단과 함께 거행한 미사에서 하셨던 강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속적이면 우리는 주교일 수도, 사제일 수도, 추기경일 수도, 교황일 수도 있지만, 주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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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송호섭 안드레아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
그리스도교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요소로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는 주님께서 직접 그 위에서 돌아가시어 우리를 위해 희생을 하신 사랑의 표징입니다. 이에 성당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집이나 직장에서 십자고상을 걸어 놓고 이를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의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그지 무거운 짐' 또는 '한계' 그리고 우리의 '죄'와 같이 우리를 옭아매는 것들로 여기고는 합니다. 심지어는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실 영광을 기억하면서도 그 이전에 이루신 주님의 수난을 망각하거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부정적인 요 소로 생각하고 '나의 십자가를 포기하거나 그것에 불평을 두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고 수난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알린 시점은 지난주 언급되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 때 곧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났음을 알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성경은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신명 21.22-23 참조)이라고 하였기에, 베드로는 자신이 스승으로 따르고 믿음을 고백한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에 대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하며 그분께 "반박하기 시작"(마태 16.22)하였습니다. 주님의 제 자들도 처음에는 그분께 희망을 두었음에도 수난에 대한 예고로 인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앞서 언급된 부정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이자 우리를 신앙 안에서 더욱 성숙하게 이끄는 요소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저주의 나무'로 여겨진 십자가를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나무'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구원을 위한 '당신의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억하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을 전하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수난 여정에 참여하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 고 부활하시어 당신 구원으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며 살아갈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우리 마음에 있는 '각자의 십자가'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내어줌의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고 말씀하셨듯이, 십자가를 사랑으로 변화시키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도 사랑으로 나아가는 도구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십자가가 전 해주는 희망 안에서 우리도 그분께서 보여주신 내 어둠의 사랑을 실천하며 생명으로 함께 나아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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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서웅범 베드로 신부님]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분별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다른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한 '가치관 혼란'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호와 주장은 많은데,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분열과 불신. 적대감만을 양산하는 현실입니다. 이는 사랑과 공정, 정의의 개념을 각기 달리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진리, 하느님의 뜻은 하나인데 그것을 '부족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이기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의 이런 불행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서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하느님/예수님의 바른 가르침도 듣습니다.
1독서...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멸망해가는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유다는 북쪽의 초강대국 바빌로니아와 남쪽의 이집트 사이에서 정치/군사적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임금들은 상황에 따라 저 두 나라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휘둘리고 있었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니 언제든 괜찮다. 하며 거짓 평화만을 뇌까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만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바른 소리를 냈던 것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살지 않고 불의만을 일삼는 정치/종교지도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며, 공정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편이시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빌로니아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바빌로니아 유배라는 고난의 시간을 통해 정화의 시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예레미야는 매국노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회개하지 않은 남 유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바빌로니아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소위 똑똑하고 힘 있다는 사람들의 '나라사랑' '나라 지킴'의 주장과 계획들은 다 무용지물이었던 것입니다.
복음....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시라 고백함으로써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고 또 교회의 반석이 되는 영예를 얻었던 베드로가 이내 '사탄'이라는 엄청난 꾸중 을 듣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고 돌아가시고 부활 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히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습 니다. 자신만이 '의리의 사나이'인 냥 스승님은 절대로 그렇게 실패하듯 죽으면 안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심오한 인류 구원의 뜻을 너무 단순하게 제멋 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 의 일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정치/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느님의 절대 진리를 무시하고 망각한 채 자기들만의 생각과 구호만을 외치며 가치관 혼란'의 세상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뜻보다는 자기 생각을 앞세웠던 베드로도 그릇된 자기만의 가치관에 매몰돼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현실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비근한 예로 끔찍한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람을 처참히 죽게 하고 공포와 고 통에 시달리게 하면서도 정작 전쟁의 우두머리들은 서로 그 전쟁이 '정의와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상대를 섬멸시켜야만, 상대가 내 앞에 무릎 꿇어 항복해야만 평화가 온다고 합니다. 당장 싸움을 멈추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고, 그리고 오해와 원한을 풀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정의일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가치관이 서로 충돌하고 더욱이 그것이 폭력적으로 행사되곤 하는 이 세상은 점점 더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에는 위험한 곳. 살기 힘든 곳으로 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할 때입니다. (2독서).... 그에 따라 모두가 예수님 정신으로 사랑과 정의 공정을 실천하면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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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최일호 라우렌시오 신부님]
<약점은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
언젠가 젠가 주일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어느 중년 부인이 내 신발을 유심히 보고는 "신부님, 신발이 너무 초라해 보이네요. 제가 신발 하나 사 드릴까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날에 가면 6천 원이면 살 수 있는 구멍이 뻥뻥 뚫린 하얀 신발을 보고 그랬던 것입니다. 실내에서 또는 미사 복사들이 신는 가벼운 신발입니다. 남들처럼 아무런 신발이나 신으면 좋으련만 저는 그러지 못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다친 발 때문에 신발이 물렁물렁해야 발이 편합니다. 탄력이 있는 합성 고무 신발은 너무나 편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은 저에게는 아주 좋은 편한 신발이 되었고,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일부러 동정을 사려고 또는 검소해 보이려고 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전들 왜 가죽으로 만든 좋은 신발을 신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 제 속사정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저는 지금도 외출하거나 미사를 드릴 때 이 합성 고무 같은 하얀 신을 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일명 핸디캡입니다. 다들 자신의 삶에서 떨쳐버려야 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2코린 11-12장에 보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지닌 약점은 펼쳐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라고는 약점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약점이 곧 주님을 따르는 데 져야 할 십자가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가진 약점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점이 되었고, 자랑할 것이라고는 약점, 즉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였으며, 더욱이 이 약점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제가 지닌 이 약점이 주님을 따르는 하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늘 불편하였고 그래서 힘들곤 하였지만, 이 약점이 오히려 저를 더 하느님께 다가가게끔 해주었고, 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봅니다. 즉 평생 주님께 나아가는 데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제가 지닌 핸디캡, 즉 약점 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임을, 은총임을 다시금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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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김정환 세례자요한 신부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아주 오래전에 책방에서 참 어색한 경험을 했다. 아동 도서 칸에 갔더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인전이 꽂혀 있었다. 이순신 장군, 세종 대왕 등 국내 위인전이 있고, 그 옆으로 퀴리 부인, 나폴 레옹 같은 세계 위인들이 있는 칸에 예수님 전기가 놓여 있었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2천 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활동한 역사 속의 한 인물일 뿐이다.
그림 신앙인이라고 다를까?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시다.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지만 가끔은 무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 좀 더 써서 아주 위대한 인물 정도로 이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베드로 역시 그러했다. 지난주일 복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고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테 16.16)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분을 온전히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야 자신이 고백한 바를 온전히 깨닫고,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선포하며 살았다.
오늘 복음에는 그런 베드로의 초기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예수님은 수제자를 훈육하기 위해 호되게 혼내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반 생각하는구나!" 요새 예수님이 이렇게 혼내셨다면 제자를 학대한 교사로 고발당하셨으리라 하지만 베드로는 훌륭한 제자였다. 그렇게 혼이 나도 끝까지 곁에 남았고, 그렇기에 그다음 가르침이 가능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베드로는 혼나는 그 순간에 이미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제자였고, 즉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다.
지난주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복음의 내용을 보면 용기를 얻는다. 나 역시 제대 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혹은 미사 때 성체를 바라보며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참 하느님이며 찬 사람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곤 한다. 그래서인지 베드로가 혼나고 넘어지며 나아가는 모습 속에서 희망을 본다. 제독서에 나오는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는 말씀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의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하며 온몸으로 예수님을 체득하려 애쓴다. 이런 평생의 과제가 내 앞에 놓여 있기에 끝까지 학생의 모습으로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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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주보》 말씀 중심의 삶
[청주교구 이길왕 바오로 신부님]
<'소통, 존경'>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또 내가 상대방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하게 됩니다.“(피에르 볼프, 하느님을 미워해도 될까요?)
"존경(respect)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피치오(respicio)'에는 '본다'라는 의미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을 밀어붙이지 않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에 가치를 두는 것. 나아가서는 그 성장과 발전을 지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존경이다. 타인을 조종하려는 태도 교정하려는 태도에는 절대 존경이 있을 수 없다.”(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2)
쉽게 말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예고가 끝나자마자 그가 예수님을 반박했다는 것은 그분과 소통 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박하던 순간, 그에게는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고를 부정하며 자기 생각을 강요할 때, 예수님에 대한 존경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 사도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그를 꾸짖으신 것이며 그러한 삶의 형태를 가진 사람이 사탄과도 같다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잘못된 삶의 모습은 또 다른 누군가를 그와 똑같은 잘못된 삶으로 물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 분명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각자의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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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김병조 프란치스코 신부님]
<십자가를 함게 메고가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해외 성지순례 중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다가 만났던 한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그 곳은 높은 돌산이었습니다. 날카로운 돌이 14처의 길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을 아프게 했고 땀이 온몸을 적셨습니다. 저마다 마음의 짐들과 삶의 고통을 안은 이들이 함께 올라갔습니다.
10처 정도 왔을 때, 한 어머니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장애를 앓고 있는 성인 아들을 등에 업고 힘겹게 십자가의 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람이 불면 넘어질 듯 작고 가녀린 체구였습니다. 비틀거리며 아들을 업고 가는 엄마의 몸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두 사람을 지탱하는 연약한 맨발의 다리는 부러질 듯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엄마의 등에 업힌 장애 아들은 어림잡아 몸무게가 백 킬로가 훨씬 넘어 보였습니다. 그 역시 힘겹게 두 팔로 엄마의 목을 꽉 감싸며 거친 숨소리를 내 쉬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힘들게 올라오는 모자를 도와주기 위해 다가갔을 때,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미소는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아들을 업고 가니 괜찮다'라는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이를 보던 사람들은 모두 길을 비켜주고 머리를 숙이며 그녀를 응원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십자가를 안고 다시 산을 올랐습니다. 14처를 마치고 바위에 앉아있을 때, 같이 갔던 이들이 한 명씩 울먹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십자가가 가장 크고 무거워 힘든 줄 알았는데, 장애 아들을 업고 오르는 엄마를 보니 자신의 십자가가 작아 보였겠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나와 함께 걸어가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을 가슴 아파하며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무겁습니다. 누구의 십자가가 덜 무겁고, 더 무겁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십자가든 모두 무겁고 고통스럽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네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혼자만의 힘으로 메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
연약한 어머니가 백 킬로가 넘는 장애 아들을 업고 돌산을 오르는 것은 여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녀는 예수님이 함께 올라가 주실 것을 믿었기에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얼마나 버리고 싶었을까요. 무겁고 고통스러워 몇 번이고 십자가를 중간에 내려놓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녀는 길이 끝나는 곳까지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이 십자가를 메고 가시는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지고 가는 십자가를 그냥 바라만 보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같이 메고 걸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힘만으로는 결코 지고 갈 수 없는 십자가를 함께 메고 가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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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김대식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하느님 감사합니다>
찬미예수님!
제가 대학교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은 대략 80%가 종교가 없거나, 신을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완전하고 변하지 않으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하고 변하지 않으며 선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의 뜻, 그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하나가 되시고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피하지 않으시고 받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스스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글로 읽거나 귀로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가만히 계시지 않고 활동하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현세의 생활과 뜻과는 달리, 더 많이 손해 보고 인정받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듯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 우리를 온전히 자유롭게 하시고자 하시는 그분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도록 하시고자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 복음의 말씀을 살아가시고자 힘쓰시는 그 시간에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용기를 잃지 말고 힘내도록 합시다. 속세에 동화되지 않고, 변화하기 위해 아침을 맞이하며 눈뜰 때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해보면 어떨까요? 감사할 것이 많아서가 아니더라도 먼저 하느님께서 오늘 하루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들에 감사해 봅시다. 분명 신비롭고 오묘한 그분의 섭리에 감사드림으로 우리의 시간은 성화되고, 우리가 만나는 일들과 사람 들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힘내어 감사를 드려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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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임동혁 우발도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시어, 약속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이들과 세상이 자신의 마음에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세상에는 중심이 없고, 모든 위치는 상대적입니다. 이는 운동경기에서도 나타나고, 별들의 운행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도 내 언행에 따라 남들의 말과 행동이 변하고 남들의 표양에 따라 나 자신이 바뀌어 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구도는 복음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행에 따라 다른 언행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아무에게 나 자비를 베풀어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간절하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아무에게나 빵을 주지 않으셨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한 군중을 보시고 측은하게 여기시어 먹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이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라고 대답하셨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반박하자, 주님께서는 분위기를 바꾸어.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일갈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 서도 풀릴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구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도 대입하여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랑과 선행으로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반대로 예수님과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이를 들은 사람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우리는 약속한 대로 회개하여,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공정과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도 나의 하느님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일컬어지는 구원의 약속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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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김정하 야누아리오 신부님]
<사랑의 일과 하느님의 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직무를 막론하고, 가장 먼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살아갈 힘을 예수님께 청한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땐 자비와 희망을 청하고, 기쁜 일에는 감사를 드린다. 때론 내 신앙이 미지근하거나, 공동체 안에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다시금 신앙의 불을 지펴주고, 내 마음에 평안을 준다. 혹, 더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냐고 따져 묻지만, 곧 침묵 속에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과 조우하며 다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것은 순례하는 신앙인들의 부활 체험, 곧 구원의 보증에 대한 믿음의 체험이며 우리 삶을 새롭고 값지게 한다.
누구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사람의 일인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일로 귀결된 것이 있다. 또 처음엔 하느님의 일인 듯 보였지만, 사람의 일에 머무른 것도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개인의 욕심이 무절제하게 섞이면, 하느님의 일은 점점 희미해지고 뻔뻔하게 사는 것이 쉬워진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현장은 자주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그런 곳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셨던 때도 시대만 다를 뿐,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님의 일을 분별해 내셨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잘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분별의 첫 번째 키워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고, 알고, 믿게 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죄와 실수가 반복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분별의 기준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번 세계 청년대회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수차례 강조하셨고, 젊은이들은 그 말씀에 뜨겁게 응답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예수님께서 누구를 만나셨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 죄인들, 아픈 사람들을 자주 만나셨음을 공통적으로 전한다. 반대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미 가난한 죄인이며 아픈 사람인 사회 지배계층들도 만나셨다. 하느님의 일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만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루카 12.14) 그분의 분별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자녀들에 대한 사랑에서 온다.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을 가늠하기 힘든 세상이 지만, 그 어떤 일 앞에서든 '주님,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기도하면 우리 신앙의 순례길은 뚜렷해진. 우리보다 앞서, 신앙의 증인이 된 순교자들 역시 외롭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한 분들이다. 각자 사연도 많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많았겠지만, 사람의 일을 넘어 하느님 일에 증인이 된 신앙선조의 삶을 기억하며 내 삶에서도 하느님의 일을 분별하는 은총을 청하는 순교성월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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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마산》
[마산교구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님]
<하느님의 유혹>
하느님은 우리를 유혹하신다. 다양한 방법으로 유혹하시지만 특히 고난과 한계를 주심 으로 우리를 유혹하신다. 그런 상황을 겪으며 인간이 '나실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그런 하느님의 유혹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초월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반대로 똑같은 고난과 한계 상황에서 악마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악마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힘 크기'를 추구한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쥐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만, 고난을 이겨내고 아니 고난을 겪지 않고 한계를 느끼지 않을 거라 여긴다. 다르게 말하면 현실에 대한 '회피'이다. 하느님 유혹에 빠진 이는 '방향'을 추구한다. 더 비워내고, 더 낮은 자리에서 철저하게 '정신'을 영글어 낸다.
힘 크기, 곧 권력과 재물을 원하는 이들이 볼 때 방향을 추구하는 이는 바보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힘 크기에 머무는 이는 가진 게 아무리 커도 딱 그 크기만큼의 힘만을 가지지만, 방향을 추구하는 이는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니 진짜 바보는 힘 크기에 집착하는 인간이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 바로 힘 크기와 방향의 싸움이다. 방향이 있다면, 제아무리 큰 덩치도 이겨낼 수 있다.
예레미야의 다섯 번에 걸친 고백은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의 한계를 깊이 체험하는지를 보여준다. 고통이 커질수록, 한계를 크게 느낄수록, 예레미야는 방향적으로 더 강해진다
로마서를 통해 바오로는 힘 크기만 추구하는 현세에 동화되지 않고 정신을 새롭게, 곧 방향을 만들어야 변화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고난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 방향을 추구하시지만, 베드로는 반박하며 악마 유혹의 길로 빠져든다. 예수님의 일은 하느님 뜻에 맞는 일, 모두에 게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지만, 베드로는 힘 크기의 관점에서만 보며,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나쁜 일이라 여긴다. 베드로의 모습이 대부분 우리 인간의 모습, 신앙인이라는 우리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이 우리를 유혹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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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김기수 바오로 신부님]
<반석과 걸림돌>
오늘 복음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 가까운 곳에서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여쭤보십니다. 이곳은 다양한 신들의 신전이 많은 곳입니다. 헤르몬산의 물이 흐르는 영험한 곳이기에, 신들의 기운을 받기에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전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들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 다.” 많은 종교의 신전들 한 가운데서 이러한 대답을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의 교회를 세울 반석으로써 '베드로'라는 이름과 땅에서 매고 풀 수 있는 '하늘나라의 열쇠'도 주십니다.
당신의 존재를 알아보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 난과 부활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당연한 순서대로 교육이 충분히 된 제자들에게 다음 단계에 대해 가르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등생의 답 을 말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박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박했다는 표현은 말대답 정도가 아니라, 제 자가 스승을 꾸짖었다는 수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거나(마태 8.26), 마귀를 꾸짖거나(마태 17,18), 사람들을 꾸짖는 경우가 보 통이지만(마태 12.16),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는 경우는 특이합니다. 반석인 베드로가 이러한 자세를 보이자, 예수님께서는 “사단”이라고 부르며,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말은 정확히는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 '몰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앞길을 막지 말고 비켜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다시 스승의 뒤를 따르는 제 자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막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에서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모습을 바라십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우등생 같은 신앙인도 한순간에 주님의 앞길을 막는 사탄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또 나의 존재가 주님께는 걸림돌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들보나 큰 벽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내가 스스로 먼저 벽을 허물고 길을 내어줘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잘 찾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며 복음 묵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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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오창열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길이란?>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온갖 고초를 겪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조롱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을 향해 온갖 불평을 터뜨리고 하느님의 꾐에 빠졌다며 한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놀리고 박해합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당하는 운명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 보지만, 뼛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입을 열어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길은 수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려면 세상과의 타협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주님께 의탁하고 도움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주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고통의 길이지만 사랑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요구에 머물지 말고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에 맞는 삶을 기쁘게 받아 주시며, 진정한 예배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도록" 힘쓰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고생스럽고 고달픈 수난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었고,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삶을 살고, 그것을 산 제물로 삼아 하느님께 바치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과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참된 신앙의 길을 제시합니다.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며 살아가는 값지고 복된 삶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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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조태현 스테파노 신부님]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성당에 나오면서 하느님께 어떤 기도를 바치게 되었습니까?"
예비자 교리를 하면서 저는 예비신자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정말 각양각색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쁜 일은 안 생기게 해주시고, 좋은 일만 생기게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시고, "불행과 고통이 비껴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혹은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해주시옵고, 죽음과도 같은 상황을 피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답하는 분들도 있었지요.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를 바라본다면,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는 그의 외침은 매우 맞는 말이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았다면 제자로서 이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한창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 그리고 인기를 가득 받던 와중에, 곧 이스라엘의 해방을 이루시고 임금이 되실 준비를 하셔야 하는 이때, 갑자기 고난과 죽음을 맞이해 백성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로서의 대업을 망치게 된다면, 제자들은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할지 쉽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가로막는 베드로 사도를 향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라고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스승님을 생각해서 했던 말이었는데, 이렇게 심하게 혼나고 나니 베드로 사도도 엄청 억울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기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신앙의 눈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면 우리는 "예수님 의 십자가와 "제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주님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사람의 일에만 우리의 시선이 머문다면, 하느님은 그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만 남게 될지 모른다는 점도 꼭 기억해야겠지요?
지금 여러분은 하느님께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나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예리하게 가슴에 꽂히는 오늘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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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윤정엽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은 연중 제 22주일입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뜨거운 열기가 그 끈을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일교차도 커지고 바람도 선선해지면서 가을은 가까이에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생각 내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고 세상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 자신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내 고집도 꺾고, 내 생각도 접으며 오로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실 때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난을 바로 앞에 둔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수난받고 부활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제자들의 대표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인간적인 마음은 예수님을 처참하게 죽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고 큰소리로 꾸중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사제로 서품되었을 때 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바로 나를 기쁜 마음으로 봉헌할 때 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는 다른 이의 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를 못 본 척 피할 수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를 지고 가기보다는 안고 가야 마음이 덜 아프고 힘이 더 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우리 눈앞에 보이는 그 십자가는 바로 자신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실 자기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을 때 손해도 보고 억울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더구나 남의 비웃음을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이 우리의 어깨를 두드려 주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너와 함께 있다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힘차게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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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랑 안에 항구하게 머물러있기를 희망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에 의하면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주님 사랑의 표징이지만 막상 짊어지려고 하면 힘이 들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가운데 감당할 힘을 주시길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당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면서 인생길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요한16,28)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한마디로 겸손의 길이요, 죽기까지 순명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25)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 먼저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릇은 비어있어야만 무엇을 담을 수 있습니다.”(노자)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비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나의 취향과 성격대로, 나의 계획을 내 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은 ‘나’중심이 아니라‘예수님’중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버리라는 말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자기 왕국을 만들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자기 안에 건설하라는 요청입니다.
바오로 사도 기억하시죠?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8-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3,20)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번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자기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동안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생과 아픔이 동반합니다. 그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로마12,2)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는 구체적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참으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속죄 제물이 되셨듯이 우리도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1,18)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그 속을 보면 다 십자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근심, 걱정,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순종하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져줄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허락하시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간 기꺼이 짊어지고 갈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새 생명에 이르는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내 뜻,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에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4-17)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한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1-62)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세상일에 미련을 버리는 일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포기하는 일이 곧 십자가를 통한 영광을 차지하는 길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1독서의 말씀처럼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위안을 얻은 예레미야’처럼 여러분도 말씀을 통해 위로받기를 빕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2)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은 다 잃어도 ‘목숨’을 얻은 것이고 그리스도를 잃은 사람은 다 얻어도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마태16,27) 갚아줄 보상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자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교훈,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며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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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분은 이 세상의 원리라는 유혹에 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논리, 예수님의 논리는 세상과는 반대로 겸손과 무상성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완전하고 굳건하게 남은 사랑, 그리고 거절하지 않고 인류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써 완성되고 드러난 사랑 말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사랑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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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공하면 행복해질까요? 대부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꿈이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할 텐데….’, ‘이 목표에 달성하면 행복할 텐데….’, ‘로또 1등에 당첨되면 행복할 텐데….’ 반면, 큰 실패를 겪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꿈은 이제 끝났어. 모든 걸 망쳤어. 목표에 이르지 못했으니 나는 불행해질 거야.’
하지만 성공해야 행복해진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실제로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얼마 뒤에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는 결과만을 봐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행복도 얼마 뒤에 다시 예전과 같아집니다. 그렇다면 성공과 행복은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공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않을 뿐, 대신 행복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줍니다.
행복 수준이 오르면 더 친절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또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 효과를 주변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이런 사람이 좋을까요? 싫을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또 함께하고 싶을 것입니다. 감정이 전달된다는 말도 있듯이, 행복한 사람의 곁에는 그 사람의 행복이 전달되기에 행복한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좋고, 더 건강하고, 더 윤리적인 세상을 함께 만들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이가 성공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바라보고 행복을 살아야 하는데, 성공만을 바라보니 힘든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우는 사람을 향해 일침을 날리시면서, 하늘나라의 진리를 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나는 과연 행복을 보는가? 아니면 성공만을 바라보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나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은 하느님께 있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영광의 시간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극도로 화를 내십니다. 예수님 신원에 대해 정확한 답을 이야기했다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셨는데, 그 베드로에게 ‘사탄’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세상의 성공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또 하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성공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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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마태오 16,21-27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언하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하느님께서
몸소 기꺼이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어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나뉠 수 있겠냐마는
어쩌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갈라져 다투는가
서로 사랑함이
하느님의 일이니
서로 사랑함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사랑할 이 미워할 이
제멋대로 갈라놓고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정성껏 품음이
하느님의 일이니
정성껏 품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좋으면 품고
싫으면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오롯한 섬김이
하느님의 일이니
오롯한 섬김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섬기지 못할망정
섬김 받음에 게걸들려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아낌없이 내어줌이
하느님의 일이니
아낌없이 내어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내어주기는커녕
빼앗지 못해 안달나서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더불어 삶이
하느님의 일이니
더불어 삶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내 편 살리고
네 편 죽여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살리기 위한 죽음이
하느님의 일이니
살리기 위한 죽음이
사람의 일이거늘
사람아 왜 그리
살리기 위해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죽임으로써
하느님을 욕보이려는가
그러니 사람아 우리
하느님의 일이어야 할 사람의 일을
사람의 일로써 하느님의 일을
신명나게 해보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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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도 가야 할 길>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에게 대단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베드로 사도는 칭찬받는데,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식을 가진 자라는 거의 극찬을 받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복음에서는 사탄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습니다. 그리고 주님 교회의 반석이라는 영예를 받았는데 걸림돌로 추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느닷없이 사탄과 걸림돌이 되었는지, 사탄과 걸림돌의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게 됩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걸림돌은 흔히 출세의 걸림돌이나 성공의 걸림돌이라고 하듯 세상사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사탄이나 걸림돌은 이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왕 노릇 못하니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사탄은 광야에서 유혹받으실 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가시고 악령과 대결하시게 되었는데 그때 악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유혹하고, 높은 산으로 주님을 데리고 가서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제의들을 다 물리치시고 유혹을 이겨 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길은 출세 가도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며, 부활의 길이요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인 것이 분명하며, 그러므로 주님께는 이 길을 막는 것이 걸림돌이고 사탄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고, 그리고 이 길은 우리도 가야 할 길입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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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예수님처럼! -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시편63,2)
화답송 후렴 시편이 마음에 절절히 와닿습니다. 오늘 9월3일도 참 좋습니다. 강론 제목도 마음에 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예수님처럼-” 얼마나 멋진 제목인지요! 교황님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몽골을 방문한 교황님에 관한 기사와 글이 가득했습니다. 흡사 풍부한 영적수확물을 발견한 듯 기뻤습니다. “Hoping Together(함께 희망하기)” 방문 모토는 얼마나 멋집니까? 교황은 희망의 순례자와 우정의 순례자로 작은 교회를 방문한다며 넘치는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제43차 몽골 사목 방문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교황님의 이런 분위기는 처음입니다. “스텝지대의 침묵중에 속삭임 소리를 들으라” 촉구하시며, 몽골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처럼 되어라(Be like the sky)” 격려하시는 말씀도 좋았습니다. 몽골 도착후 주교좌 성당에서의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연설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라 아쉽게도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540-604) 기념미사를 봉헌하지 못하지만 이 교황은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며 만능의 천재로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참으로 멋진 착한목자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을 일컫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도 그레고리오 교황으로부터 유래됩니다.
위 베드로의 후계자 두 교황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끊임없이 선포함과 동시에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며칠 전 수녀원 성사를 드리고 귀원하던 중 한 수녀님이 차 안에서 저에게 수도생활 중 어느 때가 가장 행복했던지 물었고, 저는 지체없이 “매일 끝기도 후 잠자리에 들 때와 새벽 일찍 일어날 때”라 답했고 수녀님은 의외인 듯 깊이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거창한 특별한 행복한 일들을 기대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온종일 예수님과 함께 하루의 치열한 영적전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고, 또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 뵈올 기쁨에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강론을 쓰면서 하루를 새롭게 시작할 때의 행복 또한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대로 하루하루 파스카의 리듬을 사는 행복한 삶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이러하길 소망합니다. 자주 생각나 자주 인용했던 25년전 성탄절에 썼던 시가 생각납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물론 당신이 가리키는 바, 제 삶의 전부인 예수님이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시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답은 하나 사랑입니다.
첫째,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이자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예수님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은 말씀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요 영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살아 있는 현존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위로받고 치유받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실현도 불가능합니다. 고난 중에도 힘차게 일으켜 세우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불꽃같은 말씀의 사람이었고 그의 고백이 우리를 격동케 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준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합니다.”
저도 조금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도저히 차오르는 말씀이 미사주례에 관계없이 날마다 강론을 써야 살 수 있게 된 현실입니다. 때로는 “말씀의 수인(囚人)”이라 자탄(自嘆)도 해보지만 날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강론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몸이 된 듯합니다.
둘째,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십시오. 추구하십시오.
공선사후,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앞자리에 놓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요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의 일치이며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뜻따라 오롯한 사랑으로 살았던 성모님이요 성자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대로 하느님 뜻의 실현이자 하느님의 예스-맨이었습니다. 그 멋진 신앙고백으로 반석이라 극찬을 받던 수제자 바오로가 졸지에 사탄이 됐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잠시 잊고 사람의 일에 몰두할 때 였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실 우리 모두가 사탄의 가능성을 지니고 삽니다. 아니 늘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부단한 영적훈련으로 사탄을, 마음 안의 야수(野獸)를 순하게 길들여야 합니다. 아마 위 예수님의 호된 질책은 수제자 베드로를 평생 하느님의 일에 깨어 있게 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 충격적 말씀을 잊을 수 있겠는지요!
바오로 사도가 아주 시의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세속에 살되 속화되지 말고 세상을 성화하는 성인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시궁창 세속에 뿌리를 두고 있어도 거룩하고 순수한 연꽃같은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성인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분별의 잣대이자 지혜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발휘되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셋째, 예수님 추종을 사랑하십시오.
평생, 한결같이, 끊임없이 예수님 따라 사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해당되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성인의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이 주님을 따르는 길은 감정따라, 마음따라, 기분따라 사는 길이 아니라 일편단심 주님따라 사는 사랑의 길이요, 순교자 성월 9월 우리가 기리는 모든 순교성인들이 이렇게 살다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을 따라 살라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사는 길은 순교적 삶,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넘치는 은총을 주시어 끝까지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을 사랑하듯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주님을 항구히 따르게 할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힘이 되어 주십니다. 끝으로 자주 나눴던 제 좌우명 고백기도문을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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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하느님을 믿자!>
오늘 복음(마태16,21-27)은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고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반박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16,22)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3)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라고 멋진 신앙고백을 드러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합천본당이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와 가정이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신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제일 잘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을 믿지 말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가야 합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을 따라갑니다.
하느님을 믿읍시다!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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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WIjRKYMMQ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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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태 16, 23)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을
드러내며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하느님의
여정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뜻
사람의 일을
내려놓는
하느님의
가장 큰
계획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걸림돌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우리자신이
걸림돌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돌아갈 곳이
하느님임을
알게 됩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십자가를 지는
구원에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버려야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십자가를
떼어낼 수 없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의 구원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삶이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목숨을 버리고
자유를 얻는
구원은 진정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모두 다
비우고
모두 다
버리고
떠날 우리들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받으시며
십자가를
지셨듯이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섭니다.
우직하게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갈 일입니다.
십자가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십자가로
모두를 살리는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은총의 주일
아침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걸림돌을
십자가로
빼어 버립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십자가를 지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십자가로
다스리시고
십자가로
목숨을 구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실천하는
오늘의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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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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