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월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죽이는 것이 옳으냐'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1사무 17,32-33. 37. 40-51
† 복음 : 마르 3,1-6
† 독서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필리스티아 사람을 이겼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32-33.37.40-51
그 무렵
32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37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40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
41 필리스티아 사람도 방패병을 앞세우고 나서서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42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
43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44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시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45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坍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46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47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도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향하여 전열 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49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50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누르고 그를 죽였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51 다윗은 달려가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밟고 선 채,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소년 다윗은 필리스티아의 용사 골리앗을 무찌른다. 칼과 창과
방패로 무장한 그를 간단한 무릿매질로 쓰러뜨린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군사력이 강해도 주님의 능력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다윗은 필리스티아인들을
무찌른 영웅으로 떠오른다(제1독서).
◎ 화답송
시편 144(143),1.2.9-10(◎ 1ㄱ)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
○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
○ 하느님, 당신께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악독한 칼에서 구하시나이다. ◎
†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평생 십자가를 안고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하시어 자유를 주려 하신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고발하려고 지켜본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복음).
◈ 묵상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평생 십자가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들의 불편함을 잘 모릅니다. 여간해서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손가락을 조금만 다쳐도 일상이 헝클어짐을
경험해 본 우리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손이 불편한 그를
자유롭게 해 주시려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엉뚱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의료 행위도 못 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노기 띤 눈빛으로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께서는 좋은 일을 하시지만, 바리사이들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곳을 떠나시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이라고 그를 낫게 하시지 않는다면, 그는 영영
‘불편한 손’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이용해 예수님을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위한 율법이고,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최우선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따르면 주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모르는 새에 기적을
통해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오그라들’ 때 바로잡아
주십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 매일 미사 -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이는 것이 옳으냐?
연중 2주간 수요일 - 죽이는 것이 옳으냐?
우리나라에서 재판을 받던 한 고등학생이 합의금과 신변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학생은
2007년 인터넷 리니지 게임을 하던 중 상대 게이머인 서울의
김모 변호사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다 천만 원 정도의 합의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학생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민하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건너가 세탁업을 하던 정씨
부부가 5400만 달러의 소송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소송을
건 사람은 피어슨이라는 판사입니다. 그가 2005년 첫 판사로서의
출근을 위해 맡긴 바지를 정씨 부부가 분실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찾기는 하였지만 정시에 주지 못했고, 또 정신적인
피해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것저것을 법으로 적용하여 5400만
달러의 피해액을 산출해 내었고 재판에서는 자신이 직접 검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물론 재판에서는 정씨 부부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몇 년 동안
재판을 받느라 정씨 부부는 돈은 돈대로 버리고 신경을 써서
눈은 거의 실명을 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법은 사람을 살리라고 있는 것인데 평생 법을 공부해서 판검사
변호사까지 하는 사람들이 결국 그 법을 통해서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춘기 학생이 욕을 한 번 한 것이 법적으로 따져 천만 원에
해당한다면 그것 때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은 과연
얼마나 되고 누가 보상해 주어야 할까요? 또 바지를 잃어버려
제 때에 손님에게 주지 못한 과실이 5400만 달러라고 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실명할 정도까지
만드는 것은 과연 얼마의 과실일까요? 그것이 과연 평생 법을
공부한 사람의 정의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 분이 병을
고쳐주시는지 안 고쳐주시는지, 즉 안식일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든, 남을
해치는 일을 하든, 목숨을 구하든, 죽이든 관심도 없고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린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규정까지도 빼놓지 않고
지키는 바리사이들에게는 자신들에 대한 일종의 모욕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사실 예수님은 참 사랑의 정신을 잃은 법을 바로잡으려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법이 참 의미를
잃고 특권층만을 보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면 그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참 정신보다는 법을 더 중요시하게 되어 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법과 권력에 저항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권력도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있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사랑과
정의에서 나와야합니다. 만약 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나의 신념대로 나아갈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만약 광주민주항쟁 때, ‘내가 군인이고 나에게 만약 시민을
쏘라는 명령이 내렸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정해봅시다. 명령을 어기면 내가 죽고, 명령을 따르자니
무고한 시민이 죽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까요?
또 예수님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셨을까요?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잘 알다시피 안식일을 둘러싼 논쟁은 복음서 도처에서 보입니다.
오늘 복음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놓고,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회중과의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같은 친숙한 장면을 대할 때는 오히려 조심했으면
합니다. 형식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잘못되었고,
생명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좋은 분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해 버리고, 그에 비춰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나 하면서
끝내면 기도가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자유롭게
영을 풀어놓는 가운데 관상에 임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해지겠지요.
먼저 회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살펴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와 있는지, 예수님은 어디쯤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바리사이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이런 모든 것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와 기운들도 어떤지를 더듬어 보세요.
그러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시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의 표정·말씀·몸짓을 살펴보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표정과 태도도 보고, 주위 사람들의 모습도 살펴보십시오.
이때 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는
내용인데요, 사실 다른 공관복음에는 이런 내용이 탈락되고
없습니다. 예수님은 화 같은 것은 내지 않는 분이라는, 다소
고지식한 전통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겐 약간의 걸림돌이
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부분이 실마리가 되어 중요한 것을
낚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죠.
- 유시찬 신부(예수회) -
◈ 연중 제2주간 수요일 : 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오그라든 손을 펴주신 날은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완고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탄식하시며 노기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을 뻗어라”고 하시며 그 사람을
고쳐줍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루카복음 6장 6절`-`11절에 나오는
구절과 같이 안식일인데도 병자를 고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아프리카 선교에서 많이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케냐에 가뭄이
와서 마을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병원 문을
닫고 케냐의 수도에 가서 우유와 쌀을 사가지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환자 치료는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파
학자들은 저와 다르게 행동했겠지요.
- 유 루시아 수녀(메리놀수녀회) -
◈ 선한 뜻
선한 뜻을 가지고 일을 할 때와 선하지 못한 뜻을 가지고 일을
할 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또 마음을 비우고 이웃을 바라볼
때와 욕심과 이기심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얼마 전 드라마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했으나 결국
결과가 좋지 않아 낭패를 본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따라 그 사람을 처벌할 수도 없고 처벌
받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선한 동기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오해까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면
고발하기 위해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의지는 결코 선한 것일 수
없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는 선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 세상에서 선한 몫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길을 지나다 불쌍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한 가지라도 채워 줍시다.
-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 -
◈ 손을 펴십시오.
사람의 손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놀라운 창조물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거나, 옷을 입을 때, 손을 사용하지요. 예술가의 섬세한
손놀림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해 냅니다. 그래서 화가의 섬세한
붓 끝에서 새로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훌륭한 악기는 훌륭한
연주자의 민감한 손을 만날 때, 제 기량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줍니다. 글씨를 쓰는데서부터 시작하여 첨단 장비를
조립하고 설치할 때와 같이 섬세한 작업을 할 때, 손은 정말
어려운 일을 척척 잘도 해내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도, 아직도 사람의 손을 능가하는 기계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 다양한 모습을 지닙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안고
쓰다듬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은 그지없이 아름답습니다.
박수를 칠 때, 우리의 손은 가장 쉬운 악기가 됨과 동시에, 단순히
손바닥 부딪히는 소리이지만, 다른 이에게 칭찬과 격려를 보낼
수 있고, 용기를 주는 소리가 됩니다. 손은 이렇게 섬세하고
사랑스런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불끈 쥔 손은 주먹이 되어 다른 이를 다치게 하는
폭력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무예를 연마한 사람의 손은 그 자체가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손은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질타하며 그를 향하고 있는 손가락은
많은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손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손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손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에서, 손이 오그라든 한 사람을 봅니다.
비단, 손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손을 펴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건만, 손을 펴지 못하는 그 사람은 어쩌면,
손이 아니라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다른 뭔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이기에, 법을 어길 수 없어서, 예수님께서
곁에 계셔도 손을 펴달라고 감히 청하지 못하고, 희망조차 갖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처럼, 우리 스스로가 만든 규제와 울타리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사랑의 의무는 행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마음을 열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습은 아닐는지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관행과 차별, 권위의식,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손을 펴지 못하고 꽉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손을 펴시오.”(마르 3, 5)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지금도 나에게 아픔을 준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용기를 내서 청하십시오. 손을
펴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다가가셔서 그렇게
펴기 힘들 던 손을 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손을 펴십시오. 마음을 여십시오. 진정 평화가 찾아들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최의정(바오로) 신부 -
◈ 인간을 살리심으로써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모습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들의 율법에 따르면 생명의
위험을 제외하고는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벽이 무너져 사람이 깔려 있을 때 그
사람이 살아 있다면 집 밖으로 낼 수는 있으나 치료는 금지되어
있었고, 죽었다면 그 시체는 그 다음 날에야 치울 수 있도록 당시
율법은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와의 전쟁 시에는 적에게
쫓기던 유대의 한 병사가 동굴에 숨어 있다가 안식일이 되어
도망도 못 가고, 저항도 못하고 불에 타 죽으면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명예 속에 죽어 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적 율법에 대항하는 하느님의 정신을 오늘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 주심으로써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이 한마디로
족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당시 청중들의 말문이 막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마치 ‘인본주의’와
동일시하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교하고자
한 것은 ‘율법의 형식적인 측면’과 ‘생명의 존엄성’이었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존엄성’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인
인간이 가진 ‘생명의 존엄성’을 선택하신 것이지요.
예, 오늘날 특별히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대중문화가 바로 ‘뉴 에이지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여러 사상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다’라는 것이며,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기적들을 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최고의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단지 신앙이란 자신의 내적인 평온함과 평화
그리고 의식 확장을 위한 요법적인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사상과 대적되는 환생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무한한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계속
환생하여 온전히 인간의 잠재력과 신적 의식을 개발시켜 신이
되는 수단으로 간주합니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일들도 간혹 일어납니다.
예,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러한 뉴 에이지의 문화 속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요즘은 인간의 환생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를 우리는 티비나
영화, 서적 등을 통하여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존엄성보다 더 큰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때 우리는 뉴 에이지 운동의 잘못된 신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살리심으로써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모습. 오늘날과 같이 많은 생명이 위협당하는 세상에서
잊지 말아야 할 그분의 모습입니다. 아멘.
- 부산교구 박종주 신부 -
◈ 녹슨 분노
올해 우리 학교에 특수학급이 개설되어 여섯 명의 학생이
공부를 시작했다. 교사들과 모든 학생의 관심 속에 한 학기를
마쳐갈 무렵이었다. 특수반 학생 중 한 명이 ‘둘리’(만화 영화
주제곡) 노래만 들으면 화를 내고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이 노래 때문에 받은 상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한 2학년 학생 두 명이
점심식사 시간에 그 친구 옆에 가서 둘리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자 특수반 친구가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소리 지르며 발로 차고 때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둘리 노래를 불렀다는 학생들에게 전후
상황이나 변명을 들을 여지도 없이 화를 냈다.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다. 도둑도 지나가다 넘어진 아이를 보면 일으켜 세워주는데
특수반 친구를 데리고 장난친 너희는 야단맞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내가 그토록 크게 화를 낸 것을 처음 본 학생들은
놀란 나머지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화를 내고도 진정하지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 병약한 오빠를 치료하기 위해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도봉산 자락으로 이사한 적이 있었다. 이사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동네 아이들이 텃세를 부리며 철길 밑 개울에서
오빠를 때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한숨에 달려갔다.
남자 아이들 대여섯 명이 오빠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빠를 감싸 안고 악동들을 설득시켰다. “아픈 아이란다. 건강한
아이라면 함께 싸우기도 하면서 놀겠지만 이 아이는 너희와 싸울
힘이 없는 아픈 아이란다.” 심술궂어 보이던 아이들은 어머니의
애조 띤 호소 때문인지 그 이후로 아픈 오빠에게 텃세를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오빠를 보호해 주기까지 했다. 그중에는
오빠가 하늘나라 간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어머니를
찾아오는 이가 있다.
하지만 그 시절 아무 힘이 없었던 어린 내 가슴에 새겨진 옹이가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에 대한 녹슨 분노가
침전되어 있다가 이 사건을 통해 가슴 밑바닥에서 용트림하듯
분출된 것 같다. 사노라면 누구나 오그라든 마음 한구석이 있을
텐데, 왜 받아주지 못했을까? 아픈 사람, 아픈 자식, 오그라든
손`…. 누구나 얽힘과 섞임 속에서 풀지 못해 굳은살이 되어버린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삐딱하게 튕겨져 버린
오그라진 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김현숙 수녀(노틀담수녀회) -
◈ 구원을 위한 세 가지 당부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마르코 3장 1-6절
“손을 뻗어라.”
구원을 위한 세 가지 당부
언젠가 운동하다가 오른팔을 다쳐 한 달 정도 깁스를 하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정말 불편하더군요. 여름에 그랬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깁스한 부위가 가려울 때 정말 미칠 뻔 했습니다.
너무 가려운 나머지 드릴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막대기를
넣어 긁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쓰는 것, 밥 먹는 것,
물건 드는 것... 등등. 또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반가움의 표시로 많은 분들이 악수를
청합니다. 깁스를 하게 되니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불편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겪은 여러 불편 가운데 가장 큰
불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육체적 불편은
그나마 견딜만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불편은 정신적, 심리적
불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손이 오그라듦으로 인해 그는 다양한 소외감을 겪었을 것입니다.
우선 오그라든 손이 눈에 띄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시선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놀이할 때나 일할 때나 그 어떤
것을 할 때도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늘 제약을 받아왔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열등감, 소외감,
우울함, 고독감에 사로잡혀 힘겹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받지 못했던 큰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듣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일어나라 :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한 평생 의기소침해서 제대로
한번 당당하게 일어서보지 못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훌훌
털고, 안심하고, 나를 믿고 일어서라고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죄와 병고와 상처로 인해 일어나 앉아있을 힘조차 없어
드러누워만 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일어나라!”
가운데로 나와라: 그는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한평생 주변인으로
살아왔습니다.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이 세상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몰아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스스로를 자학하며 괴롭히며 왕따로 만든 그에게 가운데로
나오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도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스스로를 철저하게도 삶의 외곽으로
밀쳐내며,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니 당당하게 이 세상의 중심으로 나오라는
의미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인생마저 왜곡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손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포함해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손을 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용서하지 못하는 꽁한 마음, 그 누군가가 던진 상처로 인해
굳어진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이제 원래 하느님께서
주신 첫 마음을 회복하라, 보다 자유로워져서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라, 평화롭게 살아가라는 당부로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손을 뻗어라!”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 마르3,1-6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손이 심하게 오그라든 사람을 만나십니다. 오그라든 손 때문에
한 평생 동안 그가 겪었던 갖은 고초와 서러움을 눈여겨보십니다.
처음에는 오그라든 손으로 인한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견디는 법을 배운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불편함은 그런 대로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오그라든 손을 바라보면서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오그라든 손을 주신 이유를 끊임없이 캐묻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더할수록 점점 억울해졌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는가? 내가 무슨 못할 짓을 했었던가?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가슴 한 구석에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 불신이 점점 쌓여만 갔습니다.
예수님은 내면을 바라보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오그라든 손을
따라 점점 오그라들어가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자기
폐쇄를 통한 죽음으로 가는 그의 영혼을 안타깝게 보신 것입니다.
오그라든 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들의 오그라든 마음을
지칭합니다. 오그라든 마음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그라든
사고방식, 철저한 자기 폐쇄로 인한 극단적인 이기심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기대는 전혀 뒷전이고 나 혼자 100% 이
일을 다해내고야 말겠다는 완벽주의가 오그라든 마음입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 지기 싫어하는
삶이 오그라든 손입니다.
한편 오그라든 손은 호시탐탐 예수님으로부터 꼬투리를 찾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지칭합니다.
제 마음 안에서, 우리 수도자나 사제들 안에 "오그라든 손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권위중독(Poweraholic)"증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적으로 근심이 있고, 불안하고, 미숙한 사람이
한 공동체의 지도자 위치에 있게 되면 "권위 중독"의 증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없는 지도자는 권위와
영향력을 내세우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에
따라서만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적인 태도는 다른 사람들은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권위 중독에 빠진 지도자는 구원자가 되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곧 이런 지도자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통제하고,
충고하고, 도덕적인 훈계를 하고, 후견인으로 행동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지도자는 세례성사로 받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권위중독에서
벗어나기, 토머스 모건 참조).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계명의 참 의미
마르코 복음 3장 1-6절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계명의 참 의미
“구루가 저녁 예배를 드리고 앉았을라치면 번번이 아슈람
고양이가 끼어들어 예배자들의 마음을 산란케 하곤 했다.
그래서 구루는 저녁 예배 동안 고양이를 매어 두도록 했다.
구루가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저녁 예배 때면 고양이가 묶여
있었다. 그런데 그 고양이도 죽자, 또 다른 고양이가 아슈람에
붙들려 오게 됐다 -저녁 예배 동안 격식에 맞게 매여 있게시리.”
율법주의의 위험을 우회적으로 경고하는 것 같아 인용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에 자구에 맞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가를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 인간이 잘되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계명을
실천할 때에는 기계적으로 말마디에서 벗어나지 않게 노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계명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을 찾아 합리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안식일에 대한 계명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계명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예외 없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계명의 참된 의미를 잊고,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계명을 잘 따르기 위하여 실제로 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단지 계명의 말마디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리사이들처럼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여 비판하거나 이웃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 부산교구 구경국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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