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월 22일은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매국노가운데 으뜸인 이완용이 정의의 칼에 맞은 날입니다.115년전인 1909년 12월 22일 낮 이재명 의사가 서울 명동성당앞에서 당시 내각 총리대신인 이완용을 흉기로 저격한 것입니다.
이재명 의사는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성당(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리오올드 2세 추도식이 있으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거사 전날 당시 영심여학교 학생이던 아내 오인성여사를 숙소로 불러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합니다. 그녀는 남편의 거사소식을 듣고도 결코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거사를 행하는 남편의 결단을 결코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이번 거사로 인해 남편이 자신의 곁으로 영원히 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날이 새자 이재명 의사는 이동수, 김병록선생들과 함께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일설에는 군밤장수로 위장했다는 말도 있고 학생복을 입고 있었다는 증언도 존재합니다. 전신주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이 대기중이던 인력거에 올라타자 신속히 달려가 인력거 뒤에서 칼로 이완용의 어깨를 힘차게 찔렀습니다. 이완용은 실신하면서 인력거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의 몸에 올라가서 다시 여러번 응징을 가했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달려온 경관들에게 체포됐습니다. 이재명의사는 대한민국 만세를 연창했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당시 이완용이 죽은 것으로 알았지만 이완용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끝에 생명을 건졌습니다. 비록 이재명 의사의 의거는 실패로 끝났지만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기려던 매국노의 수괴에게 응징을 가한 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1910년 경성 지방법원에서 1심에서 사형을,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받았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최후진술로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허거니와 생전에 이루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하고 신장하리라"라고 외쳤습니다. 방청석에 있던 그의 부인도 큰 소리로 "이완용의 생명이 보존하여 살아있는데 사형이 왠말이냐"고 외쳤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고 2001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겨우겨우 살아난 이완용은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서 정부의 전권위원이 돼 일본과 한일 병합조약을 체결했고 그 공으로 일본의 백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1926년까지 69살로 죽을 때까지 일제에 충성하며 호의호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에게 응징한 대한민국 의사로 굳건히 살아 있지만 이완용은 매국노의 수괴로 영원히 추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더러운 자로 남아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뉴라이트들이 이재명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평하고 있는 이 시점 그리고 현재 이 나라에 펼쳐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속에 이재명 의사의 나라를 위한 충정심이 더욱 가슴을 울리는 그런 날입니다.
2024년 12월 22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