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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세겜성에 도착한 야곱 가족 중 딸 디나가 세겜 여인들을 구경하러 나갔습니다.
그를 세겜성의 추장 세겜이 그를 겁탈하였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아버지와 함께 야곱을 찾아가고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양을 치므로 이 소식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야곱은 이 일로 인하여 심히 근심하였고 후에 아들들도 이 소식을 듣고 세겜을 향한 분을 품었습니다.
작은 일이 아니지만 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은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선하게 진행합니다.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이 일을 극도로 분노에 사로잡혀 해결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인 할례까지 사용하여 그들을 복수하고 맙니다.
물론 세겜의 요구조건이 야곱의 아들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세겜과 하몰 앞에서 하나님처럼 되어 그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나야말로 죄와 세상 앞에서 하나님처럼 행하고 있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제2 제3의 아담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마치 내 것인 양 취한 자이며 그것을 가지고 해코지 하는데 사용한 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내가 구할 것은 주의 긍휼밖에 없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것을 악용하려는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영생을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1:11-19
제목 :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만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 나의 묵상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둘러보시다가 날이 저물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가신 것 같은 뉘앙스로 보인다.
하지만 ‘나가다’란 뜻의 헬라어 ‘엑세르코마이’의 과거형인 ‘엑셀덴’이 쓰였으므로 원문의 의미는 예수께서 성전의 모든 것을 다 둘러보신 후, 곧 볼 것을 다 보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가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튿날 다시 성전으로 오셔서 15절 이하에 나오는 성전청결작업을 하신 것은 그저 어쩌다 보시고 우연히 하신 일이 아님이 확실하다.
12-14절, 예수께서는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다음날 아침에 밖으로 나오셨을 때 시장하셨다.
이 날은 예수님의 고난주간에 해당하는 첫날 곧 월요일 이른 시간에 있었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열매가 있을까하여 가셨지만 잎사귀만 있을 뿐 열매가 없었다.
그 이유는 때가 아직 무화과열매가 열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신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때를 모르셨을까?
이스라엘에서 잔뼈가 굵으신 예수님이다.
따라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전청결작업과 연관이 있었다.
주님께서는 베다니로 들어가시기 전에 성전을 다 둘러보셨다.
그곳에서 종교지도자들이 행하는 모습을 보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만 무성한 종교지도자들을 꾸짖고 책망하는 유비로써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곧 외식적이고 열매는 하나도 없이 말만 앞세우며 가르치려 드는 종교지도자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15-17절, 베다니 밖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신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신다.
그리고 누구라도 물건을 사기 위하여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성전 안이라 함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이르는 곳으로 이곳을 ‘이방인의 뜰’이라 한다.
이곳은 이방인들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구역이다.
하지만 그 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미문(美門)을 통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여인의 뜻’이 있다.
이곳은 이름처럼 여자가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유대인 남자들도 함께 들어갈 수 있다.
그 안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의 뜰’이라고 해서 유대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안쪽은 성전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으며 이를 둘러싸고 있는 제사장의 뜰이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성전’이란 가장 바깥쪽에 있는 ‘이방인의 뜻’을 가리킨다.
당시는 매일 희생 제사와 수많은 절기 순례자들의 방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로 대제사장들이 제물이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는 화폐로 환전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 매매 수익이나 환전 수익을 터무니없이 높게 받는 고리대금업과 똑같은 행위들을 한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 이들을 쫓아내신 이유가 이런 고리대금과 같은 불법을 행해서가 아니라 성전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으로 삼지 않고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수단 곧 강도의 소굴로 삼은 것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18-19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곧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행동과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대제사장들은 원래 결격 사유가 없는 아론 가문의 장자가 직무를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며 한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는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정권을 잡은 자들에 의해 대제사장을 임의로 임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직과 현직 대제사장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특히 신약 성경에서 대제사장이 복수로 나오는 경우는 주로 여러 대제사장 가문에 속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가리킨다.
당시의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였으며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장로로 불리는 사람들과 함께 당시 유대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의회의 구성원들이었다.
이와 같이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는 종교지도자들 곧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보기에 예수는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심각한 소요를 일으키는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놀라워하며 그를 따랐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 역시 언제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셨다.
주님께서는 고난주간 첫날 저녁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 모두를 둘러보셨다.
거기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제물을 팔기 위한 매매와 헌금을 위한 환전하는 일을 보셨다.
그리고 베다니로 가셔서 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어 시장하시므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곳 가까이로 가셨다.
배가 고파서 열매를 얻고자 하심이었다.
하지만 그 나무에는 무성한 잎사귀만 있을 뿐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나무를 저주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라 하셨다.
그 말을 제자들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왜 예수님께서 아무 죄도 없는 무화과나무를 그렇게 저주하여 죽이느냐.
죄 없는 무화과나무만 불쌍한 것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화과나무의 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은 하도 인권 인권 하니까 무화과나무의 인권? 아니 목권(木權)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의 모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이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도 우리 사람들을 온전히 가르치기 위해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이심으로 우리가 잎만 무성한 나무가 되지 말고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라는 뜻으로 행하신 것이다.
종교지도자들 곧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당시 막강한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와 같은 군중들을 회유하여 소요시키는 자를 없애야만 하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예수를 넘어뜨리고자 틈을 엿보곤 하였다.
그것 중 가장 좋은 일이 율법을 어기는 것을 꼬투리 삼는 것이었다.
틈만 나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것으로 시비를 걸지 않았는가?
하지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확증해 버리기도 하셨다.
(막 2:28)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내가 과연 예수님을 그렇게 믿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들이 외식적이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자는 아닌가?
주님께서 오늘 나를 향하여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책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가 바로 잎만 무성한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아닌가?
나야말로 그저 외식적인 자임이 틀림없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경건을 나타내는 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경건의 모양으로 나타내 보이는 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금식을 해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 하되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금식을 해서 왜소해진 것을 자랑삼아 보이는 자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주님은 기도를 할 때 골방에서 오직 아버지와 교제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은 끔찍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했던 자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기도 열심히 하는 목사라는 인정과 칭찬을 듣는 자였던 것이다.
이런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심판하셨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다.
그렇게 주님의 공의의 심판으로 내게 있는 모든 것 곧 섬기던 교회와 명성 그리고 권위와 같은 것들이 다 몰수되었다.
마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주님께 저주 받아 말라비틀어진 것과 똑같은 형국이다.
나는 그렇게 멸해졌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절친들까지 외면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나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
그리고 다시 복음으로 나를 찾아와 주셨다.
그 복음이 나를 살린 것이다.
내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은 주를 죽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사라져야 주님이 살아난다.’고 카톡의 닉네임으로 사용한 어느 분처럼 주님의 공의로 나는 완전히 죽는 심판을 기쁨으로 감수한다.
그 수용으로 나의 죽은 영혼이 다시 사는 것이다.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주를 위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고전 15:22) 되는 그 날을 바라며 이 하루를 시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 죄에 매여 살고 있는 나는 죄인입니다.
이러한 나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만 잘 하는 자,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가 바로 나입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그 심판의 무덤 안에서 다른 것 보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갖게 하소서.
주님이 친히 지어주신 자그마한 성전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그 말씀의 양식을 먹고 살게 하소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말라비틀어졌던 그 무화과나무가 다시 소생케 하시고 아들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 많은 이들에게 생명의 실과가 되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