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올해 5/25일까지 훈민정음 진본을 볼 수 있습니다.
첨부된 사진은 본인이 대구 간송미술관에서 직접 찍은 사진들입니다.
간송 전형필선생에 의하여 발굴되고 지켜져 세상에 알려진《훈민정음》은 1962년 12월에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서 등재되었다. 하지만 이 한 권의 책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특히 일제와 6.25전쟁 시기의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더욱 슬프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2부가 존재한다. 여기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상주본 이야기는 빼고 간송본에 얽힌 이야기만 해본다.
훈민정음 간송본(澗松本)
국보 제70호
01. 훈민정음 해례(解例)
해례(解例)는 훈민정음을 해설하고, 한글의 사용법, 한글의 창제배경, 자음 모음이 만들어진 원리, 발음, 문자의 활용 방법 등에 대한 해설서이자 가이드북인 셈이다.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해례본이 있는 글자는 한글이 유일하다.
간송본(안동본)은 1940년 무렵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이한걸 가문은 바로 진성 이씨로 퇴계 선생의 후손이다. 가로 20 센티미터, 세로 32.3 센티미터 크기이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표지와 첫 두 엽은 없어진 것을 훗날에 보충한 것이다.
02. 훈민정음이 세상에 나온 과정
해례본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1940년 8월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 진성 이씨 이한걸(1880∼1951) 집에서 발견된 세전가보(世傳家寶)가 아니라 실제는 같은 안동지역 광산 김씨 종택인 긍구당(肯構堂) 소장본을 이한걸씨의 셋째아들 이용준(1916∼?·월북)이 훔쳐 간송 전형필에게 팔아먹은 것이라고 광산김씨 종손이었던 김대중씨가 주장했다고 한다.
해례본을 빼돌린 이용준은 김씨한테 고모부가 된다. 김씨의 할아버지 김응수(1880∼1957)는 사위인 이용준을 매우 아껴, 사위가 긍구당(肯求堂)에 올 때마다 마음껏 책방을 이용하게 했다. 이용준은 이를 기회로 <매월당집>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빼돌렸다.
당시 이용준은 성균관대 전신인 경학원에서 수학하며, 국문학 연구자인 김태준에게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에 이용준은 긍구당(肯求堂)에서 빼낸 <매월당집>과 <훈민정음 해례본>을 김태준과 짜고서 전형필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해례본에 서문과 발문 부분이 없는 것은 이용준이 긍구당 소유임을 숨기기 위해 장서인이 찍힌 부분을 뜯어낸 탓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중씨는 “서문을 이용준씨가 다시 써서 붙였다는 데 긍구당에 남아있는 그의 필적과 대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 이용준씨가 장인한테 <매월당집>을 모르게 가져가서 큰 죄를 지었다면서 사죄하는 내용의 41년 12월31일(음력) 편지도 남아있다면서 <매월당집>과 함께 해례본을 가져갔으니 그 편지도 방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03. 전형필이 구입한 경위
‘조선소설사’ 와 ‘조선한문학사’를 지었던 국어학자인 김태준은 사회주의운동자로 활동하다가 총살을 당하였던 인물인데, 그는 일제강점기에 대학졸업 후에 지금의 성균관대의 전신 명륜학원(明倫學園)과 경성제국대학의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일제에 의하여 한글 사용이 금지되던 당시로 한글을 강의하거나 하였을 때 견책이나 감봉을 당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명륜학원에서 ‘조선소설사’를 강의하였는데 강의 도중에 말과 글의 중요성을 강의하였다. 그런데 그의 제자 중에 바로 안동출신의 이용준이 있었던 것이다.
1940년 8월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 그는 교무실로 와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면서 털어 놓은 말이 자신의 집에는 조상대대로 물려오는 고서문적이 많이 있으며 그 중에는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있어 대대로 전해온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용준 집안이 아닌 이용준의 부인 집안 광산김씨의 집안에 전하여져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김태준은 스승 전형필(全鎣弼)에게서 한글의 창제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훈민정음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김태준은 한남서림에 있는 간송 전형필을 찾아 갔다. 이를 간송에게 말하자 간송은 흥분되어 바로 이용준에게 가자고 하는 것을 진본여부와 매각의사를 물어야 될 것이라면서 구입의사를 확인하였으니 이용준의 집으로 찾아가서 이용준과 함께 그의 시골집으로 찾아 갔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맨 앞의 2장이 없었다.
이유를 확인하여보니 연산군 당시 언문책소지를 엄벌해 이를 피하려 첫머리 2장을 떼어버려 없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하였다. 위의 내용과 차이가 있는데 위의 내용이 신빙성이 있을 듯하다. 이용준이 거짓말로 둘러 대었을 것이다. 그는 전형필에게 소개비로 받는 돈은 ‘경성콤그룹’의 활동자금으로 사용하여야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당시 김태준은 이현상,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지하조직으로서 김태준은 인민전선부를 맡고 있어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태준은 전형필에게 제대로 구전을 받으려면 원본과 같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경성제대 도서관에 있는 《세종실록》을 이용하여 복원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같은 조직원이 된 이용준에게 이를 밝혔다. 그러나 혹시나 이용준이 체포될 지도 모른 다고 생각해 이를 밝히지 않았고, 이용준도 역시 그 책이 예전부터 자신의 가문에서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처갓집인 광산김씨 종택 긍구당(肯求堂)에서 빌려왔고 앞장 두 장을 떼어낸 것이 연산군 때 떼어낸 것이라고 자신이 꾸며서 지어낸 말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김태준은 암기의 천재로 알려졌는데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세종실록》을 보고는 외워다가 이를 안평대군체를 잘 쓰는 이용준에게 쓰게 하였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내용의 복원과 안평대군체의 연습을 끝내고 《훈민정음》종이와 비슷한 누런색의 한지를 만들기 위하여 궁리하던 중 ‘경성콤 그룹’에 대한 검거 열풍이 불자 두 사람은 안동에 있는 이용준의 집으로 가서 한지를 쇠죽솥에 넣고 삶아 누런색이 나게 했으나 잘 안 말라서 봄이 되기를 기다렸다.
김태준은 떠나면서 종이가 완성되면 글씨를 쓴 후 연락하라고 하고서 혹시 자신이 검거되더라도 처분하지 말고 기다릴 것을 당부하고는 떠났다. 해가 바뀌면서 검거열풍이 불어닥치자 이관상, 이현상, 김삼룡이 검거되고 김태준도 붙잡혔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인 1943년 여름에야 김태준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김태준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어머니와 아내는 화병으로 몸져누워 살다가 먼저 가고, 독자 아들도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김태준은 출소한 뒤에 이와같이 우울한 시절 속에 살고 있는 중에 느닷없이 이용준이 나타나서 아직도 《훈민정음》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하며 구입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자, 김태준은 전형필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 사실을 넌지시 알렸다. 그러나 김태준은 당시 옥살이를 하며 사회주의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직접 접촉해 이를 사면 어떤 후환이 따를지 알 수 없었다.
사회주의자인 김태준으로부터 이 책을 직접 살 경우 김태준이 고문 끝에 이를 발설할 경우 그동안 모았던 각종 수장품과 간송 문고까지 문제가 되어서 문제될 것을 우려하여 편지를 불사른 후에 이순황을 만나서 김태준에게 연락하여 줄 것을 부탁하자 이순황은 자신이 아니면 누가 하겠냐면서 기꺼이 응해주었다.
전형필은 한남서림에서 김태준을 만나서 얼마나 받을 것인지 값을 묻자, 김태준은 쓸 돈을 감안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너무 과하기는 하다고 생각하며 1천원을 불렀는데 전형필은 오히려 “천태산인(김태준의 호) 그런 귀한 보물의 가치는 집 한 채가 아니라 열채라도 부족하오.” 하면서 보자기 두 개를 건네주면서 그 중에 천 원이 담긴 보자기를 김태준에게 내밀었다.
“이것은《훈민정음》값이 아니라 천태산인께 드리는 사례요. 제가 성의로 천원을 준비했고.” 이어서 “《훈민정음》값으로는 만원을 쳤습니다. 《훈민정음》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하면서 10배의 값을 불렀다. 김태준은 전형필이 통이 크고 물건 값을 정확히 계산하여서 치른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통이 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 뒤 전형필은 자신이 직접 받지 않고 이순황에게 책을 인수하게 하여 줄 것을 언급하자. 김태준은 즉석에서 “만원을 책정하여 인편으로 내려 보내니 정중히 책을 건네고 책값으로 과분하게 받았으니 다른 책도 몇 권 더 주면 좋겠다.” 고 편지를 써서는 간송 전형필에게 건네어 주었다. 그리고 전형필은 얼마 후에는 이순황을 통하여 훈민정음의 원본을 받아볼 수가 있었다.
내용을 확인하여 보니 모두 3부 33장으로서 1부는 훈민정음 본문을 4장 7면에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 해례를 26장 51면 3생에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한 자 내려 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년) 9월 상한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 해가 바로 세종 28년으로 《세종실록》에서 언급한 해례본이었다. 《실록》병인년(1446년) 9월 29일자에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례본을 만들도록 명하였다고 하였다.
간송 전형필은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수집품 중에서 이를 최고의 보물로 여겼는데 6.25전쟁 당시에 피난을 가면서도 품속에 넣고 다녔다고 하기도 하고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잘 때에도 베개로 삼아 배고 자며 지켰다고 전한다.
한편 김태준은 다음해 1944년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겠다면서 연안으로 가서 활동을 하다가 광복 후에 조국으로 돌아와 남로당 핵심간부로 활동하다가 1949년 7월 검거되어 사형을 받고 총살되었고, 이용준은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고 한다.
첫댓글
귀한 글 잘 읽었고 감사드립니다.
[ 훈민정음 해례본 ]
목숨걸고 지키며 후세에 알려준
간송 전형필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