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탐방>
<삶에서 그리스도가 빛나게 하십시오>
-한국구약학회 회장, 감리교신학대학 왕대일 교수
편안하고 넉넉한 웃음을 시종 잃지 않는 왕대일 교수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 초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날을 새우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춥지 않았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이, 설령 그 일이 고단한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삶의 철학이 몸에 배여 있는 마음 따뜻한 학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기에 매서운 칼바람은 오히려 게을러진 나를 일으켜 세웠다.
좀처럼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왕대일 교수가 건네 준 책을 폈다. 몇 장 읽어가는 사이 택시는 여러 차례 저만큼 사라져 버리고는 했다. 이러다 기차도 놓치고 말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책을 덮었지만 방금 읽은 구절들이 빙빙 맴돌며 내 깊은 마음 밭에 퐁당퐁당 돌을 던졌다.
“신앙이 무엇이지?”
“목회가 무엇이야?”
“교인이 누구지?”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지?”
감리교신학대학교 왕대일 교수, 그는 당신의 제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말하자면 왕대일 교수는 단순히 학생들의 선생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래서 자신의 신분이 더할 나위 없이 존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서 예수의 닮음을 보았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1990년도에 처음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하니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학생들 앞에 서면 가슴이 뛰는 사람이다. 오늘 만나는 학생들이 바로 미래의 위대한 신학자요, 위대한 목회자들이니 어찌 가슴이 뛰지 않겠는가? 왕대일 교수의 이야기가 내 귓전에 푸르게 앉았다.
“오늘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장차 우리나라 교계와 신학계를 이끌어 갈 위대한 목회자요 학자라 생각하면 강의준비부터 조금도 소홀할 수가 없지요. 더 많이 연구하고, 더 많이 사유하면서 더 많이 기도하고, 또 고뇌하면서 강의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왕대일 교수의 강의를 학생들이 좋아한다.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되는 강의이며, 죽어라 공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교수라는 정평이 나 있다.
왕대일 교수가 대학 강단을 바라보는 눈은 예리하다 못해 냉정하다.
“불행한 일이지만 신학자들의 강의는 실제 목회현장과 적지 않게 유리되어 있어요. 목회현장에서 신학자를 환영하지 않지요. 신학자들이 지적세계에 갇혀 있어서 고답적이고, 강단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현실감이 없기 때문이지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설교를 평신도들이 좋아할 리가 없어요. 교수들 역시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학문적인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목회현장이 자신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교수들이 목회현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요. 그러나 당장 목회현장으로 나가야 하는 학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신학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자들은 반드시 교회현장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현장을 떠나있는 신학자에게서 진정한 학문이 배어나올 수가 없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목회현장과 늘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감리교단이라는 배경도 있지만, 그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목회현장으로 나간 제자들이 끊임없이 그를 목회현장에 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대일 교수는 행복한 사람이다. 제자들, 혹은 선배들의 초청으로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할 때마다 평신도들의 뜨거운 열기를, 그들의 살아있음으로 해서 왕대일 교수 역시 자신의 피가 뛰기 시작함을 느낀다. 현장에서의 사역은 경건생활을 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되었다. 그러나 왕대일 교수는 현장에 설 때 마다 고민했다. ‘말씀과 말씀 사이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왕대일 교수는, 성경에는 우리가 눈으로 읽어내는 그 이상의 무엇이 들어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말씀과 말씀 사이에, 또 말씀과 신자 사이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를 깊이 묵상하고 성경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는 일에 몰두한다. 성경말씀을 그저 책장에 갇혀있는 것으로 두지 아니했다. 그는 성경말씀을 일상생활의 말로, 문학의 말로, 경험의 말로 바꾸어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것은 사경회나 헌신예배에 자신을 설교자로 세워주어 영적생활에 대한 리듬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준 많은 목회 동역자들,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일이기도 하다.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저서가 있을까마는 <삶에서 그리스도가 빛나게 하십시오>는 누구나 쉽게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절대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책이다.
삶에서 그리스도가 빛나는 것, 이것은 왕대일 교수가 이루고 싶은 거룩한 소망이다. 아니 그리스도인 모두가 이루고 싶은 소망이며 반드시 모두가 도달해야만 하는 고지일 것이다.
왕대일 교수는 한국구약학회 회장을 연임하고 있다. 구약학회 회장을 연임하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 연유일까? 그의 말이 다소 무겁게 들린다.
“우리나라에는 성서신학자가 500명가량 됩니다. 양적으로 엄청나지요. 그리고 질적인 것도 양적인 것에 조금도 뒤지 않습니다. 우리 신학자들은 미국, 영국, 이스라엘, 스웨덴, 독일 등 참으로 다양하게 세계 곳곳에서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개인적인 역량은 물론 학문적인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구에서 배워 온 것들을 역수출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서구의 학문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 보고 배운 것을 한국교회 토양에서, 한국의 목회적인 상황에서 새롭게 살아난 깨달음을 가지고 성경을 다시 이해하고, 다시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학자들이 먼저 성경을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음성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놀라운 신학을, 동양의 신학을 수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들이 아직은 우리 신학계에서 부족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학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학술진흥재단에서도 신학은 독자적인 학문으로 분류되지도 못했었습니다. 신학분류도 최근에야 이루어진 일입니다. 신학자들은 그 동안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저 나 한사람의 학문적인 성취에 그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은 다른 학문과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신학은 인문학과도, 경영학과도, 심지어는 실생활과 가장 연관이 있는 과학이나 법학과도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저 우물 안에 갇혀있었던 거지요. 그러다 보니 성서신학이 일반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신학자들의 놀음정도로 치부되었고,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직업교육에 불과한 학문이라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학자들이 학자로서 인정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신학자들은 상당히 큰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니 뛰고 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신진학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신학자들은 학술대회로 봄과 가을에 모이는 것은 물론, 사이사이에 적지 않은 포럼들이 있습니다. 자주 만나서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도 하고, 교회를 돕는 일에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합니다.”
“교회를 돕는 일에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고요?”
놀라며 질문을 던지자 왕대일 교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교회를 돕지 않는 신학은 숨을 쉬지 않는 학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를 돕는 일에 목표를 둘 때 신학교도 건강해지고, 신학자들도 건강해 집니다. 해마다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목회현장으로 떠납니다. 제자들을 보낼 때, 저의 마음이 하얗게 타들어 갑니다. 잘 할 거라 믿지만 제자들의 고생이 눈에 훤히 보여 마음이 몹시 쓰립니다. 가끔은 목회자의 아내가 된 제자들이 찾아와 탄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옆의 교회는 날마다 부흥을 거듭하는데 남편 목사는 부흥은커녕 날마다 더 졸아든다고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능력이 있어 보였는데, 그렇게 무능력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척교회가 능력이 없어서 안 됩니까? 능력은 거의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이 결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다. 지금 한국교회 풍토에서는 개척교회가 도저히 성장할 수 없다. 간혹 성장하는 교회가 있는데, 만약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대형교회에서 재정지원은 물론 인적자원까지 절대적인 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이 움직이는데, 그런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마치 재벌이 기업을 하나 더 만들어 자식이나 친척에게 주듯이 말이다. 그래서 개척교회서 겨우겨우 신앙을 얻은 사람도 교회의 생리를 알면 대형교회로 가고 싶어 한다. 대형교회, 사실 얼마나 좋으냐? 그런 분위기에서는 어떤 설교도 은혜가 되지. 그러니 남편을 무능력하다고 하지 마라. 남편은 능력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남편을 크게 쓰실 것이다. 때를 기다리면서 오늘을 건강하게,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 있어야 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튼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대형교회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교회에 들어간다. 그러나 작은 교회는 문 앞에서 아무리 간절하게 기다려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제발 우리 교회에도 좀 오시오.” 그러나 어떻게 대형교회 앞에 가서 소리를 지르겠는가? 그저 속만 타고 있을 제자들을 생각하면 어느 때는 밥을 먹다가도 울컥 눈물이 솟구친다는 왕대일 교수, 그러나 제자들이 제자이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이기에 고난의 시간을 즐겁게 견뎌 낼 것을 믿는다고 한다.
왕대일 교수는 악수를 하면서 한 마디 더 붙였다.
“대형교회도 중요하지만 100명 미만의 교회들이 건강해야 한국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100명 미만의 교회들이 건강해 질 수 있도록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를 위해 신학자들은 물론 목회자와 평신도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며 서로를 가슴에 품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100명 미만의 교회들이 건강해야 한국교회가 건강해진다는 왕대일 교수의 생각, 아마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시지 않으실까? 그런데 100명 미만의 교회들은 생존 그 자체가 건강한 것이 아닐까?
(크리스챤신문, 2008. 12. 13)
첫댓글 왕대일교수님 강의때마다 은혜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할렐루야!!
감동이 오는 글 감사합니다.
좋은 신앙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밝고 희망적인 교수님 강의는 많은 감동과 함께 기쁨이 넘쳤습니다 다시듣고 싶은 강의입니다 교수님 건강하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