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이때에 법사 몇 사람이 와서 뵙고 말하였다.
“한 가지 묻겠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대사가 대답하였다.
“깊은 못의 달그림자를 마음대로 건지시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맑은 못에 얼굴을 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랴.”
무리가 모두 얼떨떨하였다.
조금 있다가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스님은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제도하십니까?”
“나는 어떤 법으로 사람을 제도한 일이 없다.”
“선사들은 모두가 이 모양이군.”
대사가 반대로 물었다.
“대덕은 어떤 법으로 사람을 제도하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금강반야경을 강의하였습니다.”
“몇 번이나 강의했는가?”
“20번을 강의했습니다.”
“그 경은 누가 말한 것인가?”
그 스님이 소리를 높여 말했다.
“선사는 사람을 조롱하십니까?
어찌 부처님의 말씀인 줄 모르신단 말이요.”
대사가 말했다.
“만일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다고 하면 이는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경을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면
이는 경을 비방하는 것이다. 대덕은 말을 해보라.”
그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대사가 물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일 색으로써 나를 찾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나니
이 사람은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대덕은 말해보라. 어느 것이 여래인가?“
“제가 그 문제에 있어서 도리어 미혹했습니다.”
“본래 깨닫지 못했거늘 무엇을 미혹했다 하는가?”
그 스님이 다시 청했다.
“스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대덕은 금강경을 20번이나 강의했다면서
아직도 여래를 모르다니.”
그 스님이 절을 하면서 설명해 주기를 청하니 대사가 말했다.
“여래라는 것은 모든 법의 여실한 이치라 했는데 어찌 잊었는가?”
“그렇습니다. 그것이 모든 법의 여실한 이치입니다.”
“대덕이 그렇다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경문이 분명히 그렇거늘 어찌 그렇지 않습니까?”
“대덕은 여실한가?”
“예, 그렇습니다.”
“목석도 여실한가?”
“그렇습니다.”
“대덕이 목석의 여실함과 동일한가?”
“다름이 없습니다.”
“대덕은 목석과 무엇이 다른가?”
그 스님이 대답이 없다가 찬탄하여 말하였다.
“이 스님은 상대하여 문답하기 어려운 분이다.”
조금 있다가 다시 물었다.
“어찌 하여야 큰 열반을 증득합니까?”
“생사의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것이 생사의 업입니까?“
“큰 열반을 구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며,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함을 취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며,
얻음과 증득함이 있는 것이 생사의 업이며,
대치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니라.”
“어찌하여야 해탈할 수 있겠습니까?”
“본래 속박된 일이 없으니, 해탈을 구할 필요가 없다.
바로 사용하고 바로 행함이 곧 일의 무등등한 경지이다.”
그 스님이 말했다.
“스님 같은 분은 실로 희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절을 하고 물러갔다.
출처: 돈오입도요문론 강설 성철스님 법어집
출처: 가장 행복한 공부 원문보기 글쓴이: 참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