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찾은 국립공원 계룡산.
그 중에서도 갑사에서 오른 적이 30년 쯤 되었고, 더욱이 기원전(記ㅇ前)이니 이참에 절구경이나 하면서 추억의 자연성릉을 걸어보자고 하였다.
‘계룡산(鷄龍山)’은 한국 4대 명산 중 하나로서 공주·논산·계룡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으며,지리산에 이어 경주·한려해상과 함께 두 번째로 국립공원에 지정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를 대표하는 산이었고, 신라통일 후에는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 조선시대에는 삼악(三嶽) 중 중악(中嶽)으로 봉해질 정도로 역사에서 검증된 산이다.
주봉인 ‘천황봉(天皇峰)’에서 ‘연천봉’, ‘삼불봉’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鷄)벼슬을 쓴 용(龍)을 닮아 계룡산이 되었다.
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찾아왔을 때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에다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해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렇듯 풍수지리에서도 명산이지만 토속(무속)신앙을 비롯한 신흥종교·유사종교도 성행하였다.
당시 이름난 점쟁이들은 하나같이 계룡산에서 도를 닦고 내려온 도사라고 자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맑다.
또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터가 되어야 큰 힘이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조선에 이런 곳이 네 군데 있으니,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은율의 구월산’과 함께 계룡산을 꼽고 있다.
‘관음봉(觀音峰 765.8)’은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따온 것.
주로 암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를 가리키며,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모양새를 ‘관음보살’에 비유했거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리는 곳이라는 이름이다.
‘연천봉(連天峰 742.9)’은 하늘(天)과 이어진(連) 곳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성계가 계룡산 연천봉에 제단을 차려 놓고, 이곳에 왕도가 서고 모든 일이 잘 되도록 천지신명께 엄숙히 기도를 드린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꿈에서 만난 신선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도록 명하는 바람에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기게 된 것.
‘계룡팔경’ 중 제3경인 연천봉은 저녁노을이 물들 때 산야는 붉게 묽들고, 멀리 백마강 물줄기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등 낙조가 아름답다.
연천봉에는 665년(문무왕 5) 등운대사가 계룡산에 정씨(정도전)가 도읍한다는 설에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창건한 ‘등운암’이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백제 때 세워진 ‘신원사’가 위치하고 있다.
‘삼불봉(三佛峰 777.1)’은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형상이 마치 세 부처(佛)의 모습과 닮아 붙여진 이름.
겨울에 눈이 내리면 설경(雪景)이 아름다워 ‘삼불봉 설화(雪花)’라 부르며 계룡팔경(鷄龍八景)의 제2경으로 꼽힌다.
‘수정봉(水晶峰 675)’은 봉우리가 수정처럼 곱다고 불려지는 이름이지만 출입제한 구역으로 금줄이 쳐져 있었고, ‘문필봉(文筆峰)’은 붓끝처럼 뾰족해 지어진 이름이나 오를 수 없었다.
‘자연성릉(自然城稜)’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성곽의 능선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관음봉에서 삼불봉에 이르는 2.1㎞ 구간이다.
‘갑사(甲寺)’는 동학사·마곡사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하는 천년고찰이다.
삼국시대 초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지었다고 전한다.
갑사라는 이름은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을 가졌다.
조선 세조때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고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제작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정유재란 때 거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없어졌다가, 선조 37년(1604)부터 중창하여 현재에 이른다.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은 마곡사는 봄이 아름답고, 갑사는 가을이 유난히 좋다는 말을 함축한 것.
국보 298호인 ‘갑사삼신괘불탱’을 비롯한 문화유산이 즐비하지만 마음 급한 산객(山客)은 그저 주마간산(走馬看山)일 수밖에 없었다.
코스: 갑사-<절구경>-연천봉 고개-연천봉(U턴)-문필봉 사면길-동학사 갈림길(재난 안전쉼터)-관음봉-<자연성릉>-743.2m-
금잔디고개 갈림길(우회)-삼불봉-금잔디고개-신흥암-대성암-갑사-주차장
계룡산과 갑사.
조금 크게.
절구경 포함하여 약 11km에 5시간 30분 정도.
고도표.
갑사의 문화유산.
<월간 산>. 클릭하면 자세히 볼 수 있음.
조금 크게.
산행기를 쓰면서 적어본 계룡산 연봉들.
갑사 주차장.
계룡산 등산로 갑사가는 길.
안내판.
먹거리 구간을 지나자...
‘계룡산 갑사(鷄龍山甲寺)’ 일주문.
일주문 현판엔 '戊寅之夏(무인지하 1988년 여름)' .
글쓴이는 ‘구당 여원구(丘堂 呂元九)’.
구당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예서와 해서의 대가이며, 대한민국 국새(國璽)를 인문(印文)한 전각가이다.
안내판.
계룡산 국립공원은 공주·계룡·대전·논산에 걸쳐 있으며, 동학사·갑사·신원사 등의 고찰에 국보 2점과 보물 11점 등 문화유산이 있다.
안내도.
갑사 자연관찰로.
사천왕문을 들어서며 현판을 올려다 본다.
‘사천왕문(四天王門)’ 편액
‘壬午年 七月(임오년 칠월 2002년)’에 갑사 주지를 역임한 장곡(長谷)스님의 글씨다.
무심코 오르다 중요한 포인터를 놓친 것 같아 우측 골짜기로 내려가...
‘공주 갑사 철당간(鐵幢竿 보물 제256호)’을 찾았다.
갑사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네면에 구름무늬를 새긴 기단위로 철당간을 높게 세우고 양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다.
윗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고, 양 지주 사이의 밑바닥 부분에는 당간을 받치는 간대(竿臺)가 있다.
정상부의 윗면은 평평하고 외측면으로 접어드는 모서리는 모를 크게 죽여서 원만한 사분원을 이루고 있다.
당간을 고정시킨 간은 상부 한 곳에만 구멍을 뚫어 장치하였는데, 철제당간의 오절철통(五節鐵筒)을 굵은 철사로 고착시켰다.
철당간은 지름 50cm의 철통28개를 연결하였던 것이나, 고종35년(1899) 벼락을 맞아 4절이 부러져 현재는 24절만 남아 있다.
높이는 철당간 15m, 지주 3m. 원위치에 철제당간에서 기단까지 모두 남아 있다.
안내판.
철당간 위 오솔길로 오르면...
‘대적전 (大寂殿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과 그 앞에 있는‘공주 갑사 승탑(公州 甲寺 僧塔 보물 제257호)’을 만난다.
대적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이고, 승탑은 본래 갑사 뒤 중사자암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
승탑은 전체 높이가 2.05m로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전하며 통일신라시대의 부도양식을 겸비하고 있다.
구조는 기본형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따르고 있으며, 8각의 높직한 지대석 위에 3층으로 구분되는 지대석이 놓였는데, 하층이 넓고 상층은 차차 줄어들었다.
하단에는 8각의 형태를 지키면서 각 귀퉁이마다 밑에서 연잎이 피어나는 모양을 하고, 각 면에는 한 구씩의 형태를 달리하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모두 원각(圓刻)에 가까운 대담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중대석은 원에 가까운데 각 귀퉁이에 꽃모양의 무늬가 튀어나왔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돋을새김되었다.
상대석은 8각으로 밑에 두툼한 부연(副椽)이 있고 상면에는 32잎의 연꽃이 둘려 있으며 중앙에 2단의 굄이 있다.<자료인용>
안내판.
대적전 옆문을 통해 합장.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木造阿彌陀三尊佛座像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은 본존인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다.
갑사가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되었다가 1657년(효종 5)을 전후로 다시 고쳐 지었으니 삼존불도 이때 함께 제작되었을 것.
삼존불의 넓적하면서도 편평한 얼굴 표현과 균형 잡힌 몸, 협시보살이 옷을 입고 있는 착의법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 점 등은 17세기 중반 충청도 지역에서 주로 만들어진 불상의 특징.
대적전은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삼존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그러나 갑사 대적전에는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상을 모셨다.
당시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이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
‘갑사 공우탑(功牛塔)’은 갑사 중건에 도움을 준 황소를 기리는 탑이다.
갑사는 나라에서 토지를 내려줄 만큼 크고 중요한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년)으로 건물 몇채만 남게 되었다.
선조 37년(1604)에 나라의 지원을 받아 대웅전과 진해당 등을 다시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주지 스님의 꿈에 황소가 나타나 절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날 이후 소 한마리가 나타나 매일 공사에 필요한 재목을 등에 싣고 왔다.
그러다 갑사가 완공되는 날 갑자기 소가 죽었고, 스님들은 갑사 중건에 도움을 준 소의 공을 기리고자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사방 한 칸의 자그마한 종각.
‘갑사 동종(甲寺 銅鐘 보물 제478호)’은 청동으로 만든 종으로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조선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다.
종의 표면에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종의 내력을 적은 글이 있는데, 이를 보면 1583년에 북방 오랑캐가 난을 일으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있는 사찰의 종을 모아 무기로 만든 탓에 이듬해 갑사에서 철8천근을 들여 다시 종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여기에 갑사사(甲士寺)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갑사가 과거에 갑사사로 불렸음을 말해준다.
상대 바로 밑에 있는 4개의 유곽(乳廓) 내부에는 각각 9개의 유두(乳頭)가 3열로 배열되어 있다.
종신에는 4개의 당좌(撞座)와 그 당좌 사이에 석장(錫杖 : 중이 짚는 지팡이)을 쥐고 구름 위에 서 있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 겉면보다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종의 하단에서 떨어진 위쪽에 태조 두 줄을 돌려 마련한 하대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역시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으며, 하단에는 태조 한 줄을 돌렸다.
유곽과 승상(僧像) 사이의 한 곳에 양주종대(陽鑄縱帶)를 마련하고, 그 위에 사분(四分)으로 양각한 명문(銘文)은 이 종의 주조 내력과 연대, 소요된 쇠의 근량을 밝히고, 당시 주조에 쓰였던 물품의 시주자를 적어놓았다.<자료>
종의 가장 위쪽에 용의 모습을 한 고리인 용뉴가 잘 남아 있는 것이 특징.
갑사 동종 안내판.
‘갑사 강당(甲寺 講堂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을 올려다 본다.
강당은 승려들이 법문을 읽고 공부하던 건물로서 전통적으로 사찰을 세울 때에는 강당을 가장 뒤편에 두고 그 앞에 대웅전을 둔다.
그러나 갑사는 강당이 대웅전 앞에 있다.
강당 건물 보수 공사를 하면서 대들보에 쓰인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건물은 원래 갑사의 정문이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서 공포(栱包)는 다포식(多包式) 안팎 2출목(二出目)이다.
자연석 위에 덤벙주춧돌을 배열하고 그 위에 배흘림을 한 둥근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창방(昌枋)을 짜올렸다.<자료>
‘계룡갑사(雞龍甲寺)’ 편액
현판 관지에는 “정해국추 절도사 홍재희 서(丁亥菊秋 節度使 洪在羲 書)”라 쓰여 있는데, 정해년이면 고종 24년(1887년)이다.
기년 뒤에 쓴 국추는 9월을 의미하며 ‘季秋 暮秋 咏月’ 등과 같은 뜻.
정해년 가을(고종 24년 9월)에 충청도 지방의 병마절도사 홍재희가 쓴 글씨다.
‘雞龍甲寺(계룡갑사)’로 쓰여 있는데, 계(鷄)가 아닌 계(雞)로 쓰여 있는 것은 같은 글자로 모두 ‘닭 계’다.
홍재희는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업고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됐고,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는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을 수비하다 일본군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무장(武將)인데도 힘있는 글씨가 돋보인다.
강당 안내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갑사.
강당 안의 윤장대(輪藏臺).
팔각형으로 된 책장에 밑에는 바퀴를 달고 중앙에는 기둥을 세워 궤를 돌리면 찾고 싶은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든 책궤이다.
범종루.
정면 5칸, 측면 3칸의 조선시대 건축물인 ‘갑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2120호)’을 마주한 뒤...
현판을 올려다 본다.
‘康熙八年己酉六月日書(강희8년기유6월서)’ 라는 관지로 보아 현종 10년(1669) 기유년 6월에 썼음이 확인된다.
자가 크고 획이 비대하여 한석봉(韓石蜂)의 친필이라고 전해오지만 구사 오정일(龜沙 吳挺一 1610~1670)의 글씨로 추정한다.
그는 당대 제일 명필 죽남 오준( 竹南 吳竣, 1587~1666)의 조카로 그 백부의 필법을 계승하였는데, 죽남 서법이 이와 같기 때문.
신발을 벗어놓은 대웅전을 기웃거리다 "법당 안은 난방을 하고 있으니 문을 열어두지 마세요. -촬영금지-"라는 문구를 보았다.
법당 안에 '삽불좌상'과 '사보살입상'이 있지만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대웅전은 원래 대적전 부근에 있었으나, 정유재란(1597년)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7년(1604년)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건축 양식은 조선 시대에 성행하던 다포식으로 지어 외관이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지만 맞배지붕으로 된 것이 특이하다.<자료>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 지붕인 ‘삼성각(三聖閣)’.
안에는 중앙에 칠성여래, 왼쪽에는 독성, 오른쪽에는 산신이 그려진 탱화가 있다.
‘관음전(觀音殿)’은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했고, 그 배후 벽면에는 1,000구 이상의 작은 소원불을 함께 봉안했다.
절구경을 하다 고개를 들자 계룡산의 특이한 산세가 올려다 보인다.
살짝 당겨본 모습.
이리저리 주마간산 둘러보다 대웅전 앞을 지나는데, 관계자(보살님)인 듯한 두 분이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열어 놓는다.
"이때다" 하며 합장한 뒤 얼른 카메라를 들고 연거푸 셔터를 눌렀다.
안에는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사보살입상 (甲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ㆍ四菩薩立像 보물 제2076호)’이 있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중앙에 봉안하고 우측에 아미타불, 좌측에 약사불을 봉안하여 삼세불의 봉안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협시불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4대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삼존좌불과 사보살입상은 1617년(광해군 9)에 행사(幸思)등 9명의 조각승이 제작한 총 7존(尊)으로 구성된 대단위 작품이며, 특징은 진흙으로 만드 소조불상이며 평균 높이가 2.5m, 보살상은 평균 높이가 2m 이상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7존불 중 현존 최대작(最大作)이자 최고작(最高作)이라고 한다.
법당의 후불벽화인 '석가여래삼세불도(釋迦如來三世佛圖) ' 역시 보물 1651호로 지정돼 있다.
<자료사진>
국보 제298호인 ‘갑사 삼신불쾌불탱(甲寺 三身佛 掛佛幀)’은 대웅전 불상 뒤의 목곽 내에 말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규모가 크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만 꺼내 사용한다.
표충원.
‘갑사 표충원(甲寺 表忠院)’은 조선시대의 사당(祠堂).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이 사당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적을 승려의 몸으로 승병(僧兵)을 모아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충의(忠義)를 기리기 위해 1738년(영조 14)에 창건되어 삼인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있다.
표충원 앞에는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의 ‘의승장비(義僧將碑)’가 세워져 있다.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청주성을 탈환하고 최초의 승리를 거둔 승군(僧軍)을 이끌었던 인물.
‘갑사 팔상전(甲寺 八相殿 문화유산 자료)’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신중탱화(神衆幀畵)를 모신 곳.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에 삼량집 구조이다.
편액엔 '辛酉年 初秋(신유년 초추, 1981년 초가을) ㅇㅇ'. 글쓴이는 알 수 없었다.
바삐 산길을 찾아드니...
약사전 방향에...
작은 석등이 가지런히 나열된 곳.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甲寺 石造藥師如來立像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이 있다.
원래 갑사 뒷산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여래는 중생들을 병고에서 구하고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주며, 동방의 불국토인 정유리의 세계를 관장하는 부처이다.
그래서 한 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천봉(2.2km)·대자암(0.7km) 방향.
다시 연천봉 1.9km 이정표를 따라 바삐 산길을 오른다.
갑사 탐방 후 이어간 산행기 ☞ 계룡산(연천봉,관음봉,삼불봉,금잔디고개) 2편
첫댓글 고문님 수고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