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의 강과 관련된 대부분의 상상력은 내성천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내성천의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던 한 마리의 어린 물고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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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북부지방은 백두대간의 영향권 아래 놓인 크고 작은 산이 많다. 안동·봉화·영주·예천·문경·상주 등을 포함하는 이 지역은 평야지대가 드물어 산간지역에 가깝다.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의 이미지보다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아 있다. 광활한 수평보다는 우뚝한 수직에 더 익숙한 것이다. 낙동강이 골짝골짝의 물을 모아 흐르지 않았다면 아예 이 지역은 산간 오지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예부터 경북 북부지방 중에 제일 큰 고을이 안동이었으므로 이 지역을 뭉뚱그려 흔히 안동문화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각 지역의 말씨와 풍습과 음식은 분명히 미세하게 다르다.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종결어미 ‘했습니다’를 ‘했니더’로, “했습니까”를 “했니껴”로 발음한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쓰면서도 예천·문경·상주지방은 또 그만의 독특한 종결어미가 있다. “그렇습니다”를 “그렇니더”라고도 하지만 “그래이여”라고도 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택시기사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그이의 고향이 안동인지 예천인지 나는 대부분 구별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난 ‘까치구멍집’나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소망실에서 태어났다. 예천에서 안동 방향으로 가다가 고평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둑길을 따라 내성천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차가 씽씽 달리지만 옛날에는 구불구불한 모랫둑을 한 시간 넘게 걸어가야 하던 곳이다. 여름에는 미루나무 아래 땅콩밭이 펼쳐져 있었고, 겨울에는 강바람이 귓바퀴를 매섭게 마구 할퀴던 곳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가 태어난 집은 ‘까치구멍집’ 이라고 불리던 집이었다. 이 가옥 형태는 경북 북부 지방이나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실내에 부엌과 외양간이 함께 공존하는 겹집 형태인데 용마루 밑에 연기가 빠져나갈 통로인 구멍이 있다. 그 크기가 까치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여서 까치집, 혹은 까치구멍집이라고 부른다. 이런 집은 대체로 마당 입구에 대문이 따로 없다.
마당을 건너 까치구멍집 대문을 들어서면 그 안에 부엌과 마루와 안방과 건넌방이 함께 있었다. 쇠죽솥이 걸린 아궁이와 봉당과 사랑방도 그 안에 있었다. 바깥 외양간에 있던 소를 밤에는 안으로 데리고 와 매어두었고, 그 옆에는 소 여물통도 길게 누워 있었다. 겨울철 실내의 보온을 염두에 두면서, 한편으로는 집안의 중요한 재산인 소를 호랑이와 같은 산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집 구조였다.
안방과 사랑방의 천정에는 다락이 있었고, 귀하거나 생활에 요긴한 물건들을 거기에 보관했다. 밖으로 난 창이 작거나 아예 없다 보니 실내는 대낮에도 늘 어두컴컴하였다. 낮에 안방이나 사랑방에 들어가면 어두운 영화관에 들어선 것 같았다. 어른들이 두런두런 말씀을 주고받는 것을 한참 동안 들은 뒤에야 가까스로 내 눈은 밝아지곤 하였다. 너나없이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지만, 그 안방에 모여들던 얼굴들만은 어둡게 보이지가 않았다. 여름에 대청마루에 딸린 뒷문을 열어두면 산에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남쪽 마당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을 한풀 차단한 형태의 가옥이었으므로 더없이 시원했던 것 같다.
회룡포로 가는 ‘뿅뿅다리’
▎내성천은 물이 맑고 모래가 깨끗한 강이다. 육지 속의 섬처럼 보이는 회룡포에 가려면 내성천의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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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갱빈’이라고 부르던 내성천 모랫벌에 자주 나가 놀았다. 맨발로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내성천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발원해서 영주와 예천, 문경을 지나 낙동강과 합류한다. 낙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내성천의 총 길이는 100.69㎞에 이른다.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어릴 적의 신열(身熱)처럼 뜨겁게,
▎내성천이 은모래를 드넓게 펼쳐놓다가 한 굽이 산을 휘감아 돌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용궁면의 회룡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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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은어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가는/ 외로운 세상의 강안(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낙동강/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스무 살 때 쓴 시 ‘낙동강’이다. 1981년 <대구매일 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하다. 이 시의 첫 연에서 나는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나로 이어지는 핏줄의 면면함을 표현하려고 했다. 제목은 ‘낙동강’이지만 실은 이 시를 쓰면서 내 머릿속에는 낙동강이 아니라 내성천이 흐르고 있었다. 내 시의 강과 관련된 거의 모든 상상력은 내성천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내성천의 은모래알이 나를 키웠다. 나는 내성천의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던 한 마리의 어린 물고기였다.
나는 내성천처럼 물이 맑고 모래가 깨끗한 강이 대한민국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성천 강변을 예천에서는 ‘갱빈’이라고 불렀다. 나는 여름 내내 강으로 나가 멱을 감거나 미루나무 그늘에서 검정고무신으로 자동차놀이를 했고, 모래로 몸을 덮고 놀았다. 철이 들어 고기를 잡을 줄 알 때는 피라미·모래무지·미꾸리·뚜구리(동사리의 경북 사투리)들이 내 발목을 얼마나 간질이고 지나갔는지…. 어린 나이에 대구로 유학을 가 있던 시절에는 맨발로 내성천을 건너야 했다. 경북선 완행열차가 서는 고평역까지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문을 닫아버린 고평역 앞을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큰집 식구들은 밭일을 하다가도 점심때가 되었구나, 소여물을 줘야 할 시간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던 때도 있었다.
내성천이 은모래를 드넓게 펼쳐놓다가 한 굽이 산을 휘감아 돌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용궁면의 회룡포다.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마치 육지 속의 섬처럼 보이는 이곳을 가려면 내성천에 임시로 설치한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구멍 뚫린 공사용 철판을 잇대어 사람이 건너갈 수 있게 만든 이러한 다리는 오래전부터 내성천 곳곳에 있었다. 모랫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수심이 깊지 않기 때문에 마을과 마을을 오가기 위해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나무나 합판으로 임시다리를 만들어 이용했다. 강물에 날카로운 살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겨울철에는 특히 요긴했다.
요 몇 년 전부터 내성천을 찾는 이들이 꼭 들러 가는 곳이 있는데, 바로 삼강나루터다. 회룡포를 통과 한 예천의 내성천과 문경에서 흘러드는 금천이 안동 쪽에서 내려오는 낙동강 본류와 합류하는 곳을 말한다. 예전에는 낙동강 아래쪽에서 서울로 갈 때 반드시 거쳐 쉬어가는 곳이 이 삼강나루였다. 옛 정취를 풍기는 주막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예천군에서는 이곳을 말끔하게 정비해놓았다. 옛 양반들이 집에 심어 후손들 중에 큰 인물이 나오기를 기원했다는 회화나무가 이곳에 있다. 수령이 450년이 넘는다고 한다. 과거를 보러 상경하던 경상도 선비들은 이 회화나무 그늘에 앉아 쉬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상상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금당실 송림과 천향리 석송령
▎삼강나루터는 과거에는 낙동강 하류 지방에서 서울을 갈 때 반드시 거쳐가는 곳으로 주막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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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성천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상류에 영주댐 공사가 시작되고부터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의 재앙이 4대강뿐만 아니라 그 지천까지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1조 원이 넘는 공사비를 쏟아붓고 있는 영주댐 공사현장을 초가을에 다녀왔다. 산을 깎아내리고 강모래를 준설하는 현장은 처참했다. 댐이 완공되면 하류로 모래를 공급하던 강의 오랜 기능이 마비된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땅속 20m까지 모래를 품고 있다는 내성천 모래바닥은 벌써 우거진 풀숲으로 변하고 있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풀 한 포기 돋아나지 않던 곳을 진흙을 거름삼아 풀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내성천이 깨끗한 은빛 모래를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여름에 가끔 큰물이 졌기 때문이다.
“한여름에 큰물이 질 때는 저 보문 쪽에서 물이 멍석말이를 하는 것처럼 내려왔단다.”
▎천연기념물 제 469호로 지정된 금당실 송림은 아름드리 소나무 수백 그루가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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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듣던 이야기다. 자연의 흐름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 큰물(홍수)을 재난으로 인식하지만 자연에 몸을 맡긴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야말로 자연현상의 하나일 뿐이었다. 머지않아 온통 풀밭으로 뒤덮이게 될 내성천의 운명은 어찌될까? 그 고운 은모래밭에 발자국을 찍던 물새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시커멓고 못 생긴 물고기 뚜구리를 나는 또 어디에 가서 만나야 하는가?
예천은 근대 이후 산업화의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비켜서 있던 곳이었다. 그동안 예천 사람들은 엄청난 규모로 이뤄지던 개발의 콩고물을 얻어먹지 못했다. 그것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내성천의 급격한 파괴를 목격하고 있는 예천 사람들에게 용문면 상금곡리에 있는 금당실 마을이 하나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금당실은 <정감록>에 전국 ‘십승지지’의 하나로 나와 있는 곳이다. 병마나 전쟁과 같은 난리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예천에는 ‘금당 맛질 반 서울’이라는 말이 전해져온다. 금당실과 그 인근 마을을 합치면 서울만큼이나 땅이 넓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금당실은 금곡서원, 반송재고택, 추원재, 사괴당 고택 등 전통 양반가의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고, 길고 구불구불한 돌담길이 유명하다. 금당실에서 천천히 걸으면서 전통의 멋을 느껴보고 싶은 도시인들에게 금당실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된 금당실 송림이 그것이다. 아름드리 소나무 수백 그루가 아름다운 마을숲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 속도에 쫓겨 살아온 시간을 돌아봐도 좋을 터.
<국순전> 지은 임춘은 예천 임씨 시조
▎금당실이 간직한 길고 구불구불한 돌담길은 전통의 멋을 느껴보고 싶은 도시인들에게 소중한 선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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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제294호로 지정된 감천면 천향리의 석송령(石松靈)은 스스로 재산을 가진, 세금을 내는 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예천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여했다가 두어 뼘쯤 자란 석송령 후계목을 한 뿌리 얻어왔다. 수령 600년이 넘은 석송령의 어린 새끼를 전라도 전주 땅에서 바라보면서 나는 품이 넓고 심성이 맑은 예천 사람들을 생각한다.
있잖니껴, 우리나라에서 제일 물이 맑은 곳이/ 어덴지 아니껴? 바로 여기 예천잇시더./ 물이 글쿠로 맑다는 거를 어예 아는지 아니껴?/ 저러쿠러 순한 예천 사람들 눈 좀 들이다보소./ 사람도 짐승도 벌개이도 땅도 나무도 풀도 허공도/ 마카 맑은 까닭이 다 물이 맑아서 그렇니더./ 어매가 나물 씻고 아부지가 삽을 씻는 저녁이면/ 별들이 예천의 우물 속에서 헤엄을 친다 카대요./ 우물이 뭐이껴? 대지의 눈동자 아이껴?/ 예천이 이 나라 땅의 눈동자 같은 우물 아이껴? (졸시 ‘醴泉’ 전문)
예천 읍내 흑응산(黑鷹山) 정상에 내 글씨로 된 시비가 하나 있다. 예천 문화원의 제안으로 거기에 새기기 위해 쓴 시다. 예천은 ‘단술 예(醴)’와 ‘샘 천(泉)’이 합쳐진 이름이다. 물이 맑고 그 맛이 단술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읍내 노하리 예천읍사무소 앞에는 ‘주천(酒泉)’이라는 우물이 있다. ‘군방골샘‘이라고도 부르는 이 우물은 예천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내성천이 은모래로 가득하던 시절에 모랫벌에 놀다가 목이 마르면 우리는 손으로 모래를 깊이 파 거기에 고이는 물을 떠먹었다. 그 야생의 물을 마시고 배탈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우리 집은 안동 풍산면으로 나가서 살았다. 그렇지만 방학 때면 늘 가서 머물던 곳이 호명면 직산리에 있는 외갓집이다. 내 외가 동네는 예천 임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예천 임씨의 시조로 알려진 이가 고려 의종 때의 문인 임춘(林椿)이다. 임춘은 가전체소설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를 쓴 사람으로 고전문학 시간에 익히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국순’은 누룩으로 빚은 술을 말한다. 이 작품은 술을 의인화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이들의 현실을 풍자한 소설이다.
근대 이후 우리고전문학의 기틀을 닦은 도남 조윤제 박사가 예천 출신인 것도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알기로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있는 예천 출신 문인들도 적지 않다. 문학평론가인 인하대 홍정선 교수가 유천면, 문학평론가로 순천향대 미디어 콘텐츠학과 김태현 교수가 호명면 출신이다. 서울대 국문과에서 고전을 가르치는 조현설 교수는 풍양면이 고향이다.
올해 2014년은 동학농민혁명 2주갑(120년)이 되는 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함성이 전국을 울릴 때 예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최시형이 주도한 북접에 속했던 예천의 농민군들은 관군이나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게 아니라 양반과 지주가 중심이 된 보수지배층과 전선을 형성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1894년 여름 읍내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농민군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제 영남 서북부 지방에서도 농민군의 지배지역에서는 북접의 교단에서 파견한 검찰관, 안렴사가 폐정개혁을 주도했다. 민심도 이미 농민군에 기울어졌다. (중략) 보수지배층은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그들이 소유한 사회적, 경제적 기득권을 모두 잃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자구책을 강구하는 움직임은 향리층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자구책으로 스스로 민보군을 조직하여 읍내를 수호하고 농민군에 대항하였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압도적인 농민군이 도처에서 봉기하고 있으나 중앙정부 감영에서 관군이 예천까지 파견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시우, <예천의 독립운동사>, 예천문화원, 2010)
예천 현대사의 증인 박충서 선생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자리한 초간정. 조선 선조대의 대학자인 초간 권문해가 창건한 정자로 맑은 계곡과 푸른 소나무 숲 사이의 암석 위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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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동학농민혁명사는 보수적인 기득권층의 반발이 그 어느 지역보다 강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른바 민보군을 조직해서 농민군에 대항했고, 농민군의 자치조직인 집강소를 본 따 ‘보수동학 집강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현재 예천읍 대창고등학교 향토관은 그 보수동학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보수성이 강한 예천 지역에 동학농민군이 기세를 떨치며 폐정개혁에 나섰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 그에 대한 연구 성과는 미미하고, 이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예천 일대에서 일어난 진보적인 사회운동과 함께 치밀하게 역사적인 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한 집안 사람들이 온통 몰살을 당해 어느 집이나 제삿날이 똑같은 마을도 있고, 집단학살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는 이야기도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 좌우 이념을 떠나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역사다.
한 예로 1928년생인 박충서 선생은 예천 현대사의 한 증인이다. 그는 전쟁 중에 인민군 문화공작대에 징발되어 활동했다. 인민군을 따라 중국 만주 지역까지 올라갔다가 나중에 미군에 체포되어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남한을 선택했다. 고향에 머물면서 1961년 4월에는 <민족일보> 예천지국장으로 일했고, 5·16쿠데타로 잠시 수감되었다가 유신과 3선개헌을 반대하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몽양 여운형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비전향 장기수 한 분을 오래 모시기도 했다. 예천의 한 아파트에서 잠깐 만난 적 있는 박충서 선생은 투병중임에도 목소리가 꼿꼿했다. 평생 오로지 통일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앞으로도 여생을 통일운동에 바치고 싶다고 하셨다. 건강하실 때 선생을 뵈었더라면 약주라도 한잔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부엌, 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곧잘 슬퍼져요 부엌은 늙거나 사라져버렸으니까요 덩달아 부엌, 이라는 말도 떠나가겠죠? 안 그래도 외할머니는 벌써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더는 고등어를 굽지 않아요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던 아궁이 생각나요? 아아, 나는 어릴 때 아궁이 앞에서 불꽃이 말을 타고 달린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말도 안돼, 하면서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말이 우는 소리로 밥이 익는다고 생각했어요 알아요? 아궁이는 어두워지면 부엌의 이글거리는 눈이 되어주었지요 참 크고 붉은 눈이었어요 이제 아무도 자신의 붉은 눈을 태우지 않아요 숯불 위에 말이 쓰러져요 나는 세상이 슬퍼도 분노하지 않아요(졸시 ‘붉은 눈’ 전문)
음식은 식욕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고향에 대한 기억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재생한다. 고향의 풍경이 그려내는 시각의 유혹도, 방언이 잡아당기는 청각의 매혹도 음식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혀를 통해 감지된 가장 원초적 감각인 미각의 기억! 우리가 고향이라는 케케묵은 명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케케묵은 음식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은 음식이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산해진미든 음식에 대한 기억은 서열이나 계급이 없다. 우리는 고향의 음식 앞에서 무장해제당하기 일쑤다.
경북 북부지방은 산악지대가 대부분이어서 논이 적다. 타지에 비해 식재료가 풍부한 곳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거기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거기서 길들여진 음식이 유난히 각별하고 짠할 수밖에 없다. 음식이 나라는 인간을 키운 탓이다.
이 지방 음식에는 유독 콩가루가 많이 들어간다. 칼국수나 건진국수는 타지에 비해 콩가루의 배합률이 아주 높다. 건진국수는 옛적에 여름날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만들었다는 음식이다. 칼국수를 찬물에 씻어 미리 준비해둔 멸치국물에 고명을 얹어 먹는데, 이 역시 밀가루에 콩가루를 적잖게 섞어야 면발이 고소해지고 퍼지지 않는다. 또 콩가루는 묵은 시래기찜이나 풋고추찜, 혹은 정구지찜에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태평추’라는 음식
▎개심사지 5층석탑은 ‘솔개들’로 부르는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데,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을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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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좋았다. 칼국수와 만두를 만들기 위해 반죽을 주무르는 일은 신기했고, 닭개장을 만들기 위해 암탉의 목을 비틀고 털을 뽑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놀림을 바라보는 일은 늘 아슬아슬했다. 외할머니와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피며 밥 익는 냄새를 기다릴 때, 나는 마치 붉은 불을 운전하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어느 가을날, 내가 잡아온 물고기들을 내려다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물고기는 가을 물고기가 역시 최고지!"
아버지는 술안주를 생각하며 그렇게 말씀하셨겠지만, 나는 그때 ‘가을’과 ‘물고기’라는 언어가 결합할 때 어떤 향취가 나는지 처음 알았다. 음식에 관한 기억은 이렇듯 또렷해서 내가 과거에 먹은 것, 씹은 것, 마신 것, 뱉은 것을 비롯해 음식을 주인공으로 삼아 20여 편의 시를 썼다. 이 시들은 아홉 번째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2007)에 실려 있다. 태평추라는 음식을 아시는지?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는 했으나 삼십 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 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 가루를 혀끝으로 떼어 먹으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 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 저 쌀쌀맞던 80년대에, 눈이 내리면, 저 눈발은 누구를 묶으려고 땅에 저리 오랏줄을 내리는가? 하고 붉은 적의의 눈으로 겨울을 보내던 때에, 나는 태평추가 혹시 귀한 궁중음식이라는 탕평채가 변해서 생겨난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허나 세상은 줄곧 탕탕평평(蕩蕩平平)하지 않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탕평해야 태평한 것인데, 세상은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기울기 일쑤였고 그리하여 탕평채도 태평추도 먹어보지 못하고 나는 젊은 날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술집을 찾아 예천 어느 골목을 삼경(三更)에 쏘다니다가 태평추라는 세 글자가 적힌 식당의 유리문을 보고 와락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 있었던 것인데, 그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다가 대신에 때마침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인데,
그날 밤 하느님이 고맙게도 채 썰어서 내려 보내주시는 굵은 눈발을 툭툭 잘라 태평추나 한 그릇 먹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졸시 ‘예천 태평추’ 전문)
다른 지역에서는 묵밥, 혹은 묵무침 정도로 부를 것 같은 음식이다. 그렇게 쉽게 불러도 될 터인데 예천 사람들은 왜 태평추라는, 사전에도 없는 자못 심각하고 점잖은 이름을 붙였을까? 이 나라 어디에서도 나는 이런 이름을 듣지 못했다. 몇 해 전, 예천 읍내 어느 식당 간판에 태평추라는 말이 적혀 있는 걸 보고 나는 심장이 마구 요동치는 듯했다.
어린 시절 외갓집 벽장
그리하여 30년 넘게 먹어보지도 못하고 발음해보지도 못한 태평추라는 음식의 근원과 말의 뿌리를 시를 통해 따져보고 싶었다. 가난하고 힘겹게 살던 옛 사람들은 차가워진 묵을 데워 먹으며 뜨끈한 태평성대를 꿈꾸었을까? 보잘것없는 음식이지만 그 이름에 궁중음식 탕평채의 하중을 실어 스스로 무게감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을까? 음식 이름 하나에도 고향은 이렇게 알싸한 것.
내 시의 원천이 어린 시절의 사소한 기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깜짝깜짝 놀라며 느낄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외갓집의 벽장이 그렇다. 벽장 속에는 홍시·곶감·사탕·꿀·조청 등 철없는 것의 입맛을 당기는 것들이 무진장하였다. 그 벽장은 어린 나의 상상력을 키워주던 선생님이었다. 일제 때, 혹은 더 이전에 쓰던 무수한 동전과 사진첩과 한자투성이의 누런 서류들은 나에게 나 이전의 역사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그리하여 나도 그 역사의 줄기 끝에 맺힌 작은 꽃봉오리임을 일찍이 가르쳐주었다.
새로 책을 출간할 때마다 내 프로필에 경북 예천 출생이라는 것을 빠뜨리지 않고 적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예천을 잘 모른다. ‘고향’이라는 말은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아직까지 둘러보지 않은 곳도 많다. 일찍이 고향을 떠난 탕아인 탓이다. 어린 날 그저 슬쩍 지나쳤던 예천읍 남본리의 개심사지 5층석탑을 찾아가게 되면 거기서 한 시간쯤은 머물고 싶다. ‘솔개들’로 부르는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을 닮아 있다.
시간이 된다면 선몽대 잎에 펼쳐진 내성천도 보고 싶고, 용문면 초간정과 그 주변 숲도 둘러보고 싶다. 그리고 골목을 쏘다니며 어느 식당이 음식을 맛깔나게 만들어 차려내는지 입에 넣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