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플라톤과 고갱의 의자
마음을 치유하는 예술, "사기다"
대표적인 그리스 소피스트 철학자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 스승인 플라톤은 예술을 혐오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시는 예술의 힘을 동경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부분)
예술을 혐오한 플라톤
아버지를 보며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살짝 떠오른 적이 있다. 언젠가 TV 영화 속 배우의 열연을 보며 하신 혼잣말, ‘어떻게 저렇게 거짓말들을 잘하지?’.
플라톤은 예술의 가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아가 오죽하면 예술가들은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에겐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조화로운 균형의 이성적인 국가가 인간의 행복에 무엇보다 중요했고 예술은 그 시스템에 위협이 되는 경계 대상이었다.
플라톤이 말하길, 우리의 현실은 감각으론 알 수 없는 완전 무결한 이데아(Idea)의 그림자일 뿐이니 우리는 부단한 이성의 훈련으로 이데아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실의 인간은 어두운 동굴 속 쇠사슬에 묶인 수감자와 다를바 없다. 그런데 예술은 한술 더 떠 그 현실의 2차 짝퉁들을 양산해낸다.
예를 들어 침대를 그린 그림과 화가는 침대의 구조도 모른 채 침대 제작자보다 한 단계 더 침대의 본질과 멀어진, 흉내의 흉내를 낸 것에 불과한 것이니 지금 시각으론 참으로 독단적 의견이 아닐 수 없다.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
하지만 일견 건조해보이는 이데아, 이성 중심의 미메시스 (Mimesis: 모방) 예술론은 수학과 비례, 균형과 황금 비율을 중시하는 미의 규범, ‘클래식(classic)’을 탄생시킨다.
그리스에서 출발한 이 고전적 미관념은 시대를 넘어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과시 중이니 ‘비율이 좋다’는 표현은 현재 '외모지상주의' 한국사회에서 흔한 칭찬 중 하나이다.
고갱의 의자 Gauguin's Chair (1888) /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의 <고갱의 의자> 는 그와 고갱 간의 꿈과 같던 2개월이 파국으로 치닫기 전 그려진 그림이다. 고갱이 없는 빈 의자는 고갱에 대한 고흐의 동경과 애정, 회한이 담겨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얼마 뒤 고갱은 결국 고흐를 떠나고 고흐는 귀를 자른다. 아마도 플라톤에게 이 의자 그림은 우리가 앉아 쉴 수조차 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한 거짓말, 흉내에 지나지 않거니와 그린 이는 의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의 모범에서 벗어난 반이성적 광기로 뭉친 자이니 참으로 볼썽사나운 총체적 난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그림을 보고 고흐와 고갱의 관계, 만남과 이별, 떠나간, 떠나갈 누군가의 빈자리를 상상하며 마치 자신이 고흐가 된 듯 그림 앞에 오래 머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빈자리를 떠올리는 심상 (心象, imagery) 은 우리 모두 한번씩 그려보는 마음의 정물화이기도 하니깐.
예술을 옹호한 아리스토텔레스
예술과 감응하는 찰나적 감성이 영원한 이성과 진리를 흐리게 한다고 한 플라톤과 달리,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따뜻하게 옹호하였다. 그
에겐 예술이 진리이건 짝퉁이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정화(카타르시스 katharsis)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니 그 대표적 예로 비극을 들었다.
21세기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도 “예술은 사기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마음을 치유하는 예술은 아주 좋은 고등 사기일 것이다.
플라톤의 완고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따뜻한 예술론은 차이는 있으나 모두 예술이 인간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데엔 동의한다.
사실 필자의 아버지도 그 거짓말 투성이인 영화를 자주 즐기시고 때로는 눈물도 훔치다 들키시곤 하니, 멋진 사기를 종종 자처해서 당하시는 셈이다.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