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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묵상글 (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 등 )
^^ 05:31.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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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부드럽게 헤아리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정성스레 보듬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든든하게 살리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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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인이 되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날이 있습니다.
일요일,
안식일,
주일.
신자인데도 주일이라고 하지 않고 일요일이라고 하고,
그래서 이들은 주일을 일요일로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아시겠지요?
그런데 ‘신자인데 주일을 지내지 않고 안식일로 지내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말이 뭔지, 그 차이가 뭔지 모를 분 있겠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사람’과 ‘신약의 사람’ 차이를 말하는 것이지요.
구약의 사람 곧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냈지만
신약의 사람 곧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일을 지냈잖습니까?
사실 주일인데도 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에겐 주일이 그저 일요일일 뿐입니다.
이 말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 만한데도 욕심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나 더 나아가
주일이 주님의 날이라는 의식이 없어 일하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주일에 일을 쉬는 사람도 많습니다.
요즘 들어 삶의 질을 따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합니다.
이런 추세를 드러내듯 많은 사람이 주일이면 캠핑카를 끌고 놀러 다닙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주일은 그저 일을 쉬는 것이요,
자기 삶을 넉넉하게하기 위해 그저 일을 쉬는 것이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정도는 못 됩니다.
이에 비해 하루를 주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신앙적으로 꽤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은 이것 이상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루를 일하지 않는 날로 지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님 안에서 쉬며 하루를 거룩히 지내는 것도 뛰어넘는 말입니다.
의식 혁명입니다.
의식을 완전히 바꾸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어떤 것도 인간의 주인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창조적으로 살고,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사랑하며 살고,
관습이나 습관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의 정신으로 살고,
주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정신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심은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고,
그래서 그 무엇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살게 하기 위함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드리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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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우선하는 사람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안식일에는 단죄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당신 계약의 표로 삼으시어, 제가 당신 자녀임을 드러내소서.
자비를 베푸는 저를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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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물러진 법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당분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 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1248조1항). 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옛날에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한글도 몰랐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기에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서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라고 하셨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법조문 보다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날이 아니라 선과 생명에 도움이 되는 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함께 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길래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지켜야 하지만 그 의미, 내용,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날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하여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바람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생각하셨습니다. 사랑을 규제하는 법은 없습니다. 분명,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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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천동설’과 ‘지동설’이 있습니다. 인류는 550년 전까지는 ‘천동설’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일출(Sunrise)와 일몰(Sunset)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천동설’입니다. 이는 상식이고, 자명한 이치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천동설을 통해 별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별의 ‘연주 시차’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계절 변화인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발사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동설’은 지구 중심이라는 사고의 폭을 우주로 향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말할 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의 전환보다, 1500년 전에 이미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습니다. 왕이 사는 곳이 궁궐이 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성공, 재력, 권력, 명예, 능력, 지위, 업적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섬기라고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행복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교회는 60년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 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의 많은 규정과 법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시대에 맞도록 바꾸었습니다. 전례, 신학,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들에 대한 해석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와 쇄신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절대시 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들도 언젠가는 지나간 것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과 법을 넘어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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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무엇이 우리 신앙생활이 중심일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사랑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알고 있는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가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랑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하는데, 간혹 우리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임을 보게 됩니다.
사랑이 아니라 자만심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교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또한 깊은 상처가 사랑을 뒤덮고 있어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그 빛을 뿜어내지 못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오늘 사람들은 그들 중심에 자기들의 고정관념을 품고 있습니다. 이 딱딱한 마음에는 더 이상 누군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사랑이 들어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쉬신 날이기에 우리도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밀 이삭을 뜯는 행위는 수확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 생각에 그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 얼마나 딱딱한 마음일까요. 이 얼마나 회칠한 마음일까요.
이 마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시려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게 하신 그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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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와 라면
국수와 라면….
한국인의 영혼과 이어져 있는 음식 중 대표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우리의 어려운 시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도 후루룩, 점심에도 후루룩, 저녁에도 후루룩
가난한 시절 집에 쌀을 살 돈이 넉넉지 않아
국수를 삶아 먹었던 시절
놀림의 의미로 사용했던 말이었다.
미싱공장, 창문 하나 없는, 실 떠다니는 그곳의 짧은 점심시간.
빨리 끓여 먹을 수 있는 라면은
감사이며 하나라도 더 미싱해야하라는 애증이었다.
특히 찬밥에 말아먹는 라면은 위로와 설움 모두를 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영혼 음식 국수와 라면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이 둘은 더 이상 시대적 가난의 대표가 아닌 맛의 유희를 즐기는 대표주자가 되었다.
천천히, 각종 재료로 맛을 내어 더 화려하게, 더 근사하게….
오늘은 이 둘 중 하나를 즐겨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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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기 SNS 계정에 사람들은 많은 사진을 올립니다. 맛집을 찾아가 음식 사진을 찍고, 예쁜 카페에 가서 인증사진을 찍는 것도 필수라고 합니다. 멋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역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사진을 SNS 계정에 올려서 ‘좋아요’ 버튼이 눌러지면 기뻐합니다. 결국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요? 즉, “나 이렇게 재미있게 살고 있다.”, “나 잘살고 있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저 역시 2,000년 초반부터 인터넷 안에서 활동하며 많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정보 제공이라는 목적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처럼 잘살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 없는 삶이 사제에게 필요하다면서, 사실은 저를 드러낼 수 있는 것만을 인터넷에 올리곤 했습니다.
지금은 제 사진을 잘 올리지 않습니다. 비밀 없는 삶은 사진을 올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마음에 담는 사진이 더 중요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내려놓으니 훨씬 편안한 마음입니다. 새벽 묵상 글을 올린 뒤에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오탈자가 있다고, 문장이 이상하다며 사람들이 메일이나 쪽지 등을 보내시고 댓글에 글도 남겨주시지만,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잘 확인하지 않습니다.
편하게 사는 삶은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면서 내면의 나를 성숙시키는 삶이 가장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강조하시고 또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이유도 우리가 이 세상을 편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항의합니다.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즉, 자기들은 이렇게 열심히 안식일 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고, 그에 반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형편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안식일에서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열심’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남은 틀렸고 나만 옳다는 식의 생각을 갖곤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편하게 살지 못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의 삶을 살 때, 주님과 함께하면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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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소통 방식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클레이 셔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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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예수님을 닮아감)의 여정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
이런저런 묵상으로 두서없이 강론을 시작합니다. <올해 104세, 시인이 되고 싶다> 1920년생으로 올해 104세되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새해 소망을 밝힌 글 제목입니다. 제가 반세기전 1970년대 20대 청년기 대학시절 안병욱 교수와 쌍벽을 이뤘던 분으로 참 애독했던 글이 바로 이분의 글이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다니 참 고상한 소망이요 이 강론을 읽는 모든 분에게 시인이 되라 권하고 싶습니다. 문득 오래전 ‘시인(詩人)’이란 자작시가 생각나네요.
“시인(詩人)이
어디 따로 있나요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답니다
당신 향한
그리움
끊임없이 송이송이 꽃으로 피어나
시(詩)가 됩니다”-1998.5.4
다음은 김형석 명예교수의 새해 소망을 밝힌 글의 요약입니다. 윤동주 시인과 동급생이었다 하니 참 놀랍고 신기합니다.
“지난 연말 문학인들이 모이는 남산 ‘문학의 집, 서울’ 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낭독했다. 윤동주는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한 내 인생의 첫시인이다. 긴 세월이 지난후에 구상 시인이 마지막 시인이었다. 앞으로 5년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시를 쓰다 가고 싶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인생이 더 소중함을 이제야 알았다. 내 새해 소망은 시인이다. 100세가 넘으면 1년이 과거의 10년만큼 소중하다.”
제가 간혹 손님을 맞으면 정갈한(깨끗하고 깔끔한) 음식에 안내하는 수도원 부근의 “남도(南道)의 향(香)’ 음식점입니다. 이름도 시적(詩的)이다 싶었는데 참으로 평범해 보이는 남자 주인이 알고 보니 불자(佛者) 시인이었고 경이로웠습니다. 안에 보물을 숨기고 살아 온 분입니다. 음식점을 찾았던 수도형제가 전해준 시집을 보고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분이 쓴 ‘연꽃받침’이란 시입니다.
“불암산 자락 불암사
수많은 외세
불심으로 이겨내고
처마밑 풍경울림
바람에 실려 구름타고 멀리멀리
불자를 보듬어 주는
보살들의 연꽃받침 속세를 밝게 비추리”
어제 면담성사를 본 자매도 잊지 못합니다. ‘승희(勝喜) 클라라’란 이름 뜻을 풀이하며 격려의 덕담과 더불어 드린 조언입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살라고 승희에 빛을 뜻하는 클라라 성녀 세례명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사세요. 이런저런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개의치 마세요.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하느님만을 향해 일상의 평범한 ‘삶의 궤도’ 따라 한결같이 중심과 질서가 잡힌 삶에 항구하세요.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가면서 감정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마음도 순수해지고 고요해질 것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힘들수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사랑 안에 고요히 머무르는 시간과 장소 마련이 필수입니다. 나름대로의 외딴곳, 오솔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문득 오래전 써놓은 ‘너 오솔길 있는가?’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너
밖에든 안에든 오솔길 있는가?
아무도 모르는
임과 나만이 아는 오솔길
임이 그리워 목마를 때 찾는 오솔길
임과 함께 걷는 오솔길
늘 걸어도 늘 그립고 아늑한 오솔길
너 있는가?”-1998.7.28.
저에겐 수십년간 걷는 하늘과 불암산에 활짝 열려있는 배밭사이 오솔길, 하늘길입니다. 26년전 시를 이렇게 강론에 인용하니 참 놀랍고 신기하니 이 또한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늘 읽을 때 마다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는 제가 참 좋아하는 시편 성구를 어제 낮기도 성무일도 시간에 만나 기뻤습니다.
“오 내 하느님, 당신 뜻을 행하는 것이 내 기쁨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To your will, O my God, my delight,
and your law is within my heart)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마음마다 새겨져 있는 주님의 법,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니 바로 참기쁨, 참행복은 주님의 법, 사랑의 법에 따른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길말고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일뿐 참기쁨, 참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바로 이를 깨달아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며 날로 주님과 사랑과 신뢰를 깊이했던 주님의 절친(切親)인 성인들이요 주님의 절친이 되는 것은 제 간절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의 마음깊이 새겨져 있는 주님의 법, 사랑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밖엔 답이 없다, 길이 없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다윗을 비교하는 것이 이해의 핵심입니다. 다윗의 자유로운 처신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저 자유로운 처신은, 안식일법을 상대화시키는 저 자유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할까요? 신기하고도 부럽지 않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이분들의 주님과 참으로 깊은 절친 관계에 있기에 저토록 자신감이 넘치고 확신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에 대한 주님의 신뢰와 사랑을 철석같이 믿는 자존감 충일한 삶이기에 저리도 추호의 망서림이나 두려움, 불안이 없이 당당합니다. 그대로 주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주님의 신뢰와 사랑을 확신할뿐 아니라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던 두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와 일치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반영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하닮의 여정이요,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분별의 잣대임이 오늘 복음 말씀이 그대로 입증합니다. 예수님 마음이 하느님 마음이요 예수님 사랑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절대적 법은 ‘사람이 먼저’라는 사랑의 법이요, 사랑의 법 자체인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였을까 생각하면 곧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자유와 행복의, 분별의 요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자유, 참행복, 참 분별의 지혜도 주님과의 깊어가는 우정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안타깝고 아쉽지만 이점에서 실패한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사울입니다. 사무엘의 슬퍼하는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하느님께서 참 너무하시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우리에게 참 좋은 경고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떠났고 이 또한 엄중한 현실입니다. 사울의 부주의와 불순종으로 자초한 불행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매순간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보살펴야 한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즉각적인 회개와 실행입니다. 하루하루 연장되는 날은 주님과 사랑을 새로이 깊이하라 주어지는 선물과 같습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공부와 사랑,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하고 있겠는지요? 이건 제가 참 많이 누누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성찰이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나 교만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우정을 깊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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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일곱째 날
주간은 일곱 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는 노동을 위해 주셨고, 하루는 기도와 휴식과 죄 씻음을 위해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엿새 동안 이런저런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날에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교회에 가서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기도와 뉘우치는 마음으로 참회하십시오. 거룩한 하느님의 전례에 참석하고, 주님께 대한 감사로 기도를 마무리하십시오. 부서지고 쪼개어지지만 결코 없어지지 않는 그대의 스승을 묵상하십시
오.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십시오.
-재세례에 관한 설교-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예언자는 창조주의 유력한 말, 곧 일단 발설되면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야 마는 말에 한몫 끼도록 초대를 받는다. 창조적인 말은 예언자의 말이 된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러한 신성한 소명과 책무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한다. 예언자의 말은 메시지와 책무를 세우기도 하고 뿌리째 뽑기도 할 것이다. “예언자의 말은 야훼의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예언자의 말은 검보다 무섭고, 태워 버리는 불과 같다(참조: 예레 5,14: 잃어버리다3,.29)." 성서적인 말씀의 신학에서 말과 행위는 일치한다. 예레미야서의 이 구절에서 예언자의 선재(先在) 개념이 발견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엑카르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수많은 주석학자들이 엑카르트가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선재 개념을 받아들였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선재 개념은 나중에 지혜의 선재 개념으로 바뀐다.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유력하고 창조적인 말을, 요구하고 훼방하는 예언자의 말과 연결했다. 우리가 온 세계에 세워진 것은, 하느님의 말이 성취되고 새로워져서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서다.(102)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예수님, 왕 중의 왕이신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예수님, 영원하신 하느님의 이들이요
펑화의 왕이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예수님, 충실한 왕으로서 저에게 생명 을 주신 당신을 믿나이다!
오, 어서 와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합시다.
와서 주님께 환호하세.
우리 구원의 바위 앞에서 환성 올리세.
감사드리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주님께서는 위대하신 하느님, 모든 신들 위에 위대히신 임금님.
땅 깊은 곳들도 그분 손 안에 있고 산봉우리들도 그분 것이네.
바다도 그분 것,몸소 만드시었네.
마른 땅도 그분 손수 빚으시었네.
들어가 몸을 굽혀 경배드리세.
우리를 만드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세.
그분께서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수 이끄시는 양떼로세.(시편 95,1-7)
0 어서 와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합시다.
(침묵 기운데 반복한다.)(233)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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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었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을 어기는 것임을 알았지만
배가 고픈 나머지
밀 이삭을 뜯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계명을 지키는 것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누리는 것과
연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즉 계명은 지키기 위한 규정이 아니라
생명을 얻어 누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보면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즉 밀 이삭이라도 먹지 않으면
걸을 힘조차 없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두 상황 모두
계명을 지키는 것과 밀 이삭을 먹는 것 모두
생명을 위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방식을 보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굶어야 하고
이삭을 먹으려면 계명을 어겨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삭을 먹는 것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리사이들의 생각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처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 때문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기도 했습니다.
두 방식은 정말 모순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밀 이삭을 먹는 것을 선택하신 것은
제자들이 인간임을 인정하신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인간이기에 먹어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영적인 방식이고
이삭을 먹는 것은 육적인 방식이라고
구분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영과 육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육적인 방식을 거부하는
좋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시지
인간적인 모습을 뛰어넘어서
소위 말하는 고상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시며
그래서 인간적인 모습, 배고픔을
잘못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즉 우리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지키는 방식입니다.
밀 이삭을 먹는 것이
좁게는 안식일 법을 어기는 행동으로 보이지만
넓게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행동입니다.
결국 밀 이삭을 먹는 것과
하느님의 말씀인 계명을 지키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육적인 부분, 인간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큰 잘못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너무 세상적인 것으로 치우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적당한 수면과 적당한 식사가
함께하는 기도생활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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