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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아의 반역
왕상 1:1-10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
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5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왕상 1:1-10 / [다윗의 최후] 다윗왕이 늙어 나이가 많아지자 아무리 이불을 많이 덮어도 몸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2) 그래서 왕의 신하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저희가 임금님을 위하여 이스라엘 전국을 뒤져 아리따운 처녀 하나를 구해서 임금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처녀가 임금님의 품에 누워 자면 임금님의 몸이 따뜻해 질 것이니 부디 저희의 간청을 허락해 주십시오!' 3) 이리하여 신하들이 젊고 예쁜 처녀를 구하고자 이스라엘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마침 이스르엘 평원의 동쪽 마을 수넴에서 아비삭이라는 처녀를 구해 왕에게로 데려왔다. 4) 그 처녀는 매우 아리따웠다. 그녀는 왕의 시중을 들며 왕을 섬겼으나 왕의 자식을 낳지는 못하였다. 다윗은 이미 70세가 넘은 노인으로 기력이 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낳은 자식들 가운데서 후계자를 뽑아야만 되었다. 또 당시의 풍속에 따르면 왕이 생산 능력을 잃을 경우에는 농경지도 생산 능력을 잃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왕이 노쇠하여 기력을 잃을 때에는 새 왕을 뽑아야 되었다. 5) [왕이 되려는 아도니야의 음모]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은 암논과 길르압과 압살롬과 아도니야인데, 그 가운데서 위로 셋은 이미 다 죽고 넷째 아들 아도니야만 남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학깃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려고 오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더니 이제는 마침내 이렇게 공언하였다. `나는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전차와 기마병으로 특전단을 구성해 놓고 행차 때마다 수레 앞에 50명의 호위병까지 거느리고 다녔다. 다윗은 6) 아도니야가 이렇게 왕처럼 행세해도 그를 꾸짖지 않았다. 다윗이 본래 지나치게 자식을 사랑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도니야는 용모도 뛰어난데다가 의젓한 인품이어서 다윗은 항상 그를 너그럽게 봐 한번도 꾸짖은 일이 없었다. 또 아도니야는 압살롬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그 당시의 풍속에 따라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7) 그토록 유리한 입장에서 아도니야는 보수 세력과 모의하여 자기 세력을 굳혀 나갔다.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극비리에 그를 도왔다.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였고, 아비아달은 사울이 몰살시킨 놉의 제사장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사람이었다. 8) 그러나 다윗 왕궁의 신진 세력들은 아도니야의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원주민이었던 여부스 족속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장군과 예언자 나단과 다윗의 용사들과 시므이와 레이는 아도니야의 편에 서지 않았다. 9) 어느 날 아도니야는 예루살렘 성벽 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뱀바위'에서 큰 잔치를 벌였다. 그곳은 다윗성에서 남쪽으로 300미터쯤 떨어진 `세탁소의 샘' 곁에 있는데, 여기서부터 힌놈 골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들을 잡고 왕자들 모두와 궁중의 유다 사람들을 초대하였으나 10) 자기 아우 솔로몬과 예언자 나단과 브나야 장군과 다윗을 경호하는 장교들은 초청하지 않았다.
통일 왕국을 건설하였던 다윗 왕이 늙고 쇠약해져 죽음을 눈앞에 두자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모반을 도모하여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왕을 세우고 폐하는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노쇠(1-4) 30세에 왕위에 올라 헤브론에서 7년 반, 예루살렘에서 약 33년간을 통치하였던 다윗의 나이도 이제 70세가 되어 국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심히 노쇠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신복들은 다윗을 위하여 젊은 처녀 아비삭을 후궁으로 간택하여 봉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원기는 끝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현실적으로 새로운 왕위 계승자를 세우는 것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세기의 영웅이었던 다윗도 자신에게 찾아오는 노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지위와 재능, 물질을 소유하였다 할지라도 유한한 존재이며 언젠가 한계 상황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명의 창조자요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죽음과 마지막을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도니야의 모반(5-10) 다윗은 이미 솔로몬을 그의 후계자로 내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3, 17, 30). 그런데 아도니야가 다윗의 노쇠함을 틈타 스스로 차기 이스라엘 왕임을 자처하여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세워 위엄을 과시하며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포섭하고 거사 장소를 예비하여 자기의 모든 동생들과 왕의 신복, 유다 지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도니야가 치밀하게 왕위찬탈을 모의하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가 비록 다윗의 넷째 아들이기는 했지만 현재 살아있는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로 왕위 승계 1순위였고(삼하 3:2-5), 둘째, 용모가 준수하고 다윗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셋째, 요압 및 아비아달 등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교만해져 왕위찬탈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도니야가 간과한 것은 왕을 세우고 폐하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아도니야의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만용일 뿐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아도니야의 교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임의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브나야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당신은 자신의 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르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지하여 세상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자 할 때는 언제나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마땅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고 또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묻고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설 교 >
사람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몫
열왕기상/하 강해 말씀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무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의 삶의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특별히 기도로 암흑기 사사시대에서 새역사를 열었던 믿음의 여인 한나,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았던 선지자 사무엘, 다윗의 경쟁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사랑하고 지지해 주었던 요나단의 아름다운 우정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배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세워졌지만 타락해서 버림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배웠습니다. 그 시대의 영적 지도자였지만 타락하여 영적 비둔함으로 목이 꺽여서 죽은 엘리 대제사장, 그리고 혈통적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축복의 위치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경히 여겨 심판받은 홉니와 비느하스 이야기, 하나님께 세움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버림받은 사울의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또한 그 좋은 집안 배경을 가지고 인간적인 능력도 탁월했지만 한 번도 회개하지 않고 오직 인간적인 처세술로 왕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던 압살롬의 이야기도 배웠습니다.
저는 사무엘상/하 말씀을 연구하면서 너무나도 많은 영적 진리의 보화들을 얻었습니다. 사무엘서 말씀을 강해하면서 저 자신 안에 있는 엘리 제사장과 같은 요소, 사울과 같은 불순종의 모습들 그리고 다윗과 같은 연약함으로 인한 모습들을 보면서 회개도 많이 했습니다. 더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자로 인정해 주시고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사랑으로 인해 큰 위로와 희망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허물과 연약함이 많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중심을 가진다면 누구든지 다윗과 같은 황홀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사무엘서 강해 설교를 마치고 조용히 결산해 보면서 제 자신의 신앙도 많이 성장했다는 감사가 됩니다. 이제 열왕기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큰 기대가 되고 흥분이 되는지 모릅니다.
열왕기상/하 말씀에는 사무엘상/하에 나타난 인간들의 군상보다 더 많은 종류의 인물들이 나옵니다. 마치 삼국지를 읽으면서 대면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군상들처럼 열왕기서는 방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대면하게 합니다. 열왕기서 말씀을 연구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수많은 영적 교훈들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열왕기서는 다윗의 죽음과 솔로몬의 등극에서부터 시작된 B.C 970년 이후로부터 남국 왕국의 분열(B.C 931년) 및 멸망(북왕국-B.C 722년 / 남왕국 B.C 586년)을 거쳐 유다의 마지막 왕 여호야긴의 포로생활과 출옥(B.C 561)까지 약 400년 어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특히 열왕기서는 바벨론 포로기간에 쓰여진 역사서로서 이스라엘의 군왕들을 영화롭게 하거나 또는 선민 이스라엘을 치장하려는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기록된 역사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열왕과 민족에게 임한 각종 재난, 굴욕, 성전파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 등 선민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결국 열왕기서의 역사관은 신명기사관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여부는 결코 정치적, 군사적 힘이나 외세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열왕기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성공과 실패가 어디있는지 그 기준을 다시 한 번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열왕기서 말씀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와 영적 분별력을 체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그 첫째 시간으로 ‘사람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는 제목을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존경 받았던 다윗 왕의 통치도 이제 거의 끝나 가고 있었습니다. 흐르는 세월은 어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올라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도 70세의 황혼기에 이르러서 이불을 덮어도 몸이 따뜻하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쇠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 때 신하들은 어찌하든지 다윗이 왕으로서 정성적인 업무를 진행 할 수 있도록 그의 기력을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결국 신하들이 생각한 처방법은 젊고 아름다운 처녀 아비삭을 데려다가 왕을 모시게 했습니다. 그녀의 임무는 노쇠한 다윗을 시중드는 것뿐만 아니라 다윗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치료행위까지 하도록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고 단순히 요양보호사처럼 간호만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비삭을 구하여 다윗을 간호인으로 고용했다는 소문은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아에게 다윗의 건강이 악화되어 행동하기 어려운 것으로 오판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 왕이 기력이 쇠하여 밖을 나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온 상태이지만 아직도 이스라엘 왕의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빨리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그였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 왕이 연로하여 국정을 이끌어갈 처지가 되지 못하자 자신이 왕이 될 것을 당연시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3가지 일을 시도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보좌할 군사들을 모으는 일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아도니아는 즉시 스스로 높여서 내가 왕이 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했습니다. 왜? 아도니야가 이런 결심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공식적으로 왕의 후계자로서 서열 1위였습니다. 위에 있었던 형 암논과 길르압과 압살롬이 모두 죽었기에 그는 다윗가문의 장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장자로서 다윗왕의 후계자로서 정당성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용모가 심히 준수하고 아버지 다윗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을 정도로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섭섭한 하게 한”은 히브리어로 ‘아차보’로 ‘꾸짖어 어떤 육체적 혹은 심적 불편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훈계하다는 말이그 이면에 숨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도니아는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꾸중을 들은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언질도 한 마디 없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요인 중에 가장 큰 원인은 다윗이 아버지로서 자식들을 훈육하는 일을 경시했기 때문입니다. 잠언 22:6절을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도한 잠언 13장 18절을 보면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잠언 13:24절을 보면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야 할 때가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함부로 살면 분명하게 훈계해야 합니다. 훈계해도 듣지 않으면 매를 때려서라도 징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이 살고, 후에 그 자녀가 궁핍과 수욕에 이르지 않고 존귀하고 보배롭고 영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아버지 다윗은 다른 일은 다 잘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자식교육은 엄격하게 잘 훈육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밧세바와의 불륜이후에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국가적 업무로 항상 시간에 쫓겨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관용만하고 질책과 훈육이 없이 오냐 오냐 하면서 키운 자녀들은 항상 다윗의 인생에 아픔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복누이 다말을 강간했던 암논이 그랬고, 그런 암논을 죽이고 반역을 도모했던 압살롬이 그러했으며, 다윗의 황혼기 때에는 아도니아가 그랬습니다. 결국 아도니아는 아버지와 허락도 받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는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군사적 참모인 요압과 종교적 조언자인 아비아달을 측근으로 세웠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국가적인 반역은 혼자 일으킬 수 없습니다. 모든 반역하는 일에는 동참하는 자들이 있듯이 아도니아의 반역에도 동참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군대장관이었던 요압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야인시절부터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한 다윗 왕국의 개국공신과도 같은 충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의 충성은 늘 자신의 이기적 동기에서 기인되었습니다. 자신의 이권에 저해가 되면 심지어 왕의 말도 여러번 거스리고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했던 자입니다. 그는 다윗의 명령 없이 동맹을 맺으로 온 아브넬을 죽였고, 압살롬 왕자를 죽였으며, 세바의 반란 때 군대장관이었던 아마사를 죽였습니다. 요압은 순수한 동기로 아도니아 편에 선 것이 아닙니다. 아비아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왜? 아비아달은 아도니아 편에 섰을까요?
아비아달은 아론의 아들 이다말의 후손입니다. 즉 이다말의 후손인 아히둡의 아들인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로서 놉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할 때 다윗에게 피하여 그의 보호를 받았던 자입니다. 그 이후 그는 다윗의 통치하에서 사독과 더불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삼하20:25).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으로 있었을 때 또 한 명의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독입니다. 사독은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 있던 다윗에게 가담한 무리 중 한 사람으로서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후손 아히둡의 아들입니다.
다윗 왕 시대에는 두 곳의 성막이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막과 번제단이 있는 기브온 성막이었는데, 아비아달은 예루살렘 성막의 대제사장이었고, 반면에 사독은 기브온 성막의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본다면 아비아달은 사독과 경쟁관계에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무엇보다 아비아달은 사독에 비해서 대제사장의 입지가 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멸망을 선고받은 엘리 가문의 대제사장의 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독 가문에 대한 열등감 내지는 시기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요압과 아비아달은 다윗 사후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실리적 목적으로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것입니다.
셋째로 아도니아는 여러 왕자들과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모아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을 자축하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9~10절을 보겠습니다.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도니아는 스스로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는 즉위식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행정절차도 걸치지지 않는 불법적인 즉위식이었습니다. 아도니아는 자신의 즉위식에 왕자들 14명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청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습니다. 아도니아의 정치적 기반은 유다 헤브론에 있었기 때문에 남쪽 유다 사람들을 부른 것입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의 신진 세력들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아는 철저히 계산된 자신의 정치세력들을 규합한 것입니다.
아도니아가 이처럼 무리하게 아버지 다윗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즉위식을 올렸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아도니야는 다윗 왕이 너무 늙어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왕의 즉위식을 올린 후에 아버지 다윗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 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버지 다윗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을 책망한 일이 없었기에 이번 일도 순순히 따라 줄 것으로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이미 노쇠하고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힘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로 취급한 것입니다. 아도니아는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자신의 계획대로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아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허락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같이 인본주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신본주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사울처럼 버림받는 것이 이스라엘 왕의 자리입니다. 아도니아는 자신의 다윗 왕가의 장자라는 한 가지 명분으로 왕이 되고자 했던 지극히 철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신앙심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기도도 없고 예배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아비지 다윗으로부터 왕의 계승에 대한 언질을 받은적도 없습니다. 그는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왕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동기가 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치적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과 나단 선지자와 시위대장 브나야, 대제사장 사독, 그리고 다윗의 용사들을 초청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아도니아는 이미 솔로몬이 다윗 왕국의 후계자로 내정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역대상 22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에게서 난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 할 것이라고 미리서 말씀 해 주셨습니다.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 그나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이미 솔로몬을 다윗 왕국의 후계자로 내정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미 계시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몇몇 측근들에게 이 사실을 공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솔로몬의 왕의 즉위식을 공식적으로 미루고 있었던 것은 아직 솔로몬이 어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도니아 나이가 33~40세 정도로 추정합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늦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조금이라도 솔로몬이 더 자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미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스케줄이 마음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후계자를 준비하지 않고 무심하게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다윗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은 준비되고 있었고 역사에 나설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스스로 높아지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잠언서 18:12절을 보면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결코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높아지고자 시도하다가 얼마나 어리석은 실패를 경험합니까? 아도니아는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즉위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참여한 사람은 온갖 화려한 어투로 아도니아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다윗 왕의 명령을 받아 솔로몬이 기혼에 왕위 즉위식을 올리자 아도니아를 따르던 자들은 순식간에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아도니아를 위해서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기적인 동기로 뭉친 자들은 항상 쉽게 흩어집니다. 사명으로 뭉치지 않으면 생명을 걸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비전을 받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함께 할 때 끝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엄청난 진리를 배웁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지극히 자신을 낮추어 사람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자기를 비우고 종의 위치에 내려가서 섬기는 인생을 살면 하나님은 때가 되면 높이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남들이 무시한다고 너무 힘들어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로부터 초대받지 못했다고 너무 소외감으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광야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낮아지는 초라하고 궁핍한 삶의 자리에 내려가서 가난한 자의 위치에도 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먼저 낮은 자리에서 광야훈련을 시키십니다. 모세는 40년의 광야훈련을 통해서 철저히 낮아지고 깨지고 무너지는 훈련을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신의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으면서 나는 이방의 객이 되었다고 한탄 했겠습니까?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늘 채색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채색 옷을 입던 높은 위치에서 내려가게 했습니다. 시기심을 느낀 형들을 통해 그의 채색 옷을 찢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자랑하던 채색 옷을 찢어서 애굽의 노예로 내려가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후에 세상 만민을 살리는 생명의 부양자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낮아진 사람만이 높아졌을 때 그 축복을 끝까지 잘 감당합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많은 축복을 받고도 그것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낮아져서 짓밟혀 보지 않고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자로 살면서 제가 가슴에 날마다 외치는 구호가 있습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처음 전도사 시절 때 가졌던 그 가난한 마음으로 끝까지 목회하자”입니다. 전도사 시절 때 얼마나 마음이 가난했는지 모릅니다. 경주에서 10년 살다가 광주에 왔을 때 알던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외롭고 서글플 때가 많았습니다. 밥값이 없으면 독서관에 공부하러 간다고 동기들이 함께하는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를 생각하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면서 목사 안수식 받던 날 얼마나 감사가 되고 두렵고 떨리던지 한없이 울었습니다. 목회하면서 이런 처음 마음이 자꾸 변질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전도사 시절 때 진지하게 공부하면서 기도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영혼을 섬겼던 그 마음을 목회는 동안 내내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학생들은 고3의 마음으로 늘 공부하면 성공합니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훈련받았던 이등병의 마음으로 살면 성공합니다. 여자들은 결혼하고서 처음 시댁으로 가던 새 며느리의 마음으로 살면 성공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많이 많이 변질됩니다. 아도니아와 같이 함부로 행동하고 자기중심적으로 결단하고 나아갑니다. 그러다 실패하고 무너지고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서서 낭떠러지로 추락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번 성완종 정치자금로비 사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끈을 붙잡고, 인맥을 붙잡고, 성공의 가도를 추구하면서 달렸던 삶의 결말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늦지만 시간이 오랫동안 요구되지만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때에 높힘 받고 성공하고 축복받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주여 기다리면서 훈련 받으면서 주님의 부르신 자리에서 충성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게 합시다.
< 새숲교회 김성철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