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03
9월4일[연중 제2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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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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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Rmk3K0PgIw (이정한 베르나르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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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이웃의 어깨에 날개를>
오래전 경미한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사고 여파로 잠깐 의식을 잃었더랬지요. 깨어보니 응급실이었습니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또 제 몸 이곳저곳도 살펴봤는데,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 입에는 호스가 끼어있었는데, 식도를 통해 위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다 산소마스크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양팔에는 링거병이 각각 하나씩 달려있었습니다.
평소 몸에 뭐든 다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해 시계나 반지도 끼지 않던 저였는데, 호스며 산소마스크며 링거병이며 주렁주렁 매달려있으니, 정말 답답해 죽을 맛이었습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간호사 선생님은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며 경고를 줬습니다. 한 이틀 그렇게 답답하게 지냈는데,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다행히 사흘째 되는 날 상태가 호전되어 그 모든 장치들을 떼어낼 수 있었는데, 그 때 느꼈던 해방감이란 정말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억압으로 해방된다는 것, 부자유스러움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 사슬을 끊는다는 것, 종살이에서 풀려난다는 것, 감옥에서 출옥한다는 것, 그것은 곧 또 다른 천국체험입니다. 또 다른 출애굽입니다. 또 다른 탄생의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 그분의 존재, 그분의 정체성, 그분의 실존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해방자’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 가운데 정말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이 치렁치렁 달고 다니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힘겹게 지고 다니던 멍에를 끌러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해방자셨습니다.
인권, 인권 부르짖는데, 인권이란 무엇입니까? 한 인간이 자유로울 권리가 인권입니다. 한 인간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권입니다. 한 인간이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권입니다. 참된 해방감,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내 마음이 편해지는 동시에 상대방도 무장해제를 하지요. 그렇게 될 때 상대방의 내면이 들여다보입니다. 그가 아픈지, 혹은 슬픈지, 그가 기쁜지 혹은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나’의 치부가 보이고 부끄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나를 여는 작업과 더불어 내 부끄러움을 던져버릴 수 있고, 마침내 열린 마음과 창을 통해 우리는 고통과 근심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작은 사랑의 실천들이 모여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 갑니다. 병고나 죄, 고통의 사슬에 묶인 이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하여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조금씩 완성되어 갑니다. 부당하게 갇혀있는 이웃, 억울하게 묶여있는 이웃, 사랑의 결핍으로 울고 있는 이웃들을 외면하는 세상은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이웃이 좀 더 성장하도록, 이웃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이웃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은 그를 놓아주는 것,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를 다양한 유형의 압제로부터 해방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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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다양한 속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신 주님>
공생활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금의환향하십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꿈결조차 그리웠던 고향이었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갖은 추억들이 담겨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 친지들, 정겨운 친구들, 고향 사람들 만날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안식일을 맞아 나자렛 회당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며 당신에게 해당되는 구절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히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이자 메시아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이유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우리 인간들의 위로자요 해방자, 구원자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양한 속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씀에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무거운 죄의 사슬, 아무리 노력해도 호전되지 않는 영혼의 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굴레...
이토록 오랜 노예 생활과 유배 생활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반가운 말씀인지요? 육체적으로 눈먼 이들의 시력을 되돌려주시는 것은 일종의 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눈 멈, 본질적인 것, 특히 하느님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암흑으로부터의 회복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이제 우리 인간 이성의 빛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이성의 빛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빛을 통해 더 이상 어두워지지 않을 참된 광명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성의 빛(lumen rationis)은 계시의 빛(lumen revelationis)으로 변형되고 드디어는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낭독이 끝나고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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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1LsvIBKc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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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마음이 가난하단 증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당신 소명을 밝히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당신께 대한 예언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리면 분명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잡힌 이들을 해방하며 은혜로운 해가 선포됩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란 재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아가 죽어 겸손하게 된 이들이란 뜻입니다.
2011년 제가 유학을 다녀와 오산성당에서 처음으로 본당신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처음으로 본당신부를 하게 되었으니 그 열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레지오 훈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한 커다란 교리실에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신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을 창문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레지오 회합치고는 인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성원을 보니 연령회장님도 있고 사목회 위원들도 있어서 그야말로 짬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성당에서 굵직한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뭐 하는 집단이냐고 물으니 ‘울뜨레야’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그것이 무슨 단체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열심히 하시라고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조직 같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저도 꾸르실료를 다녀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꾸르실료 이후를 울뜨레야라고 합니다. 저는 그 단체 분위기가 왠지 내가 다녀오지 않으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본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다 받았다는 꾸르실료 교육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3박 4일의 일정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갓 박사학위를 따고 들어온 저로서는 그 가르침이란 것이 매우 유치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빡빡한 일정 안에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 주셨던 분들에게 죄송하기는 하였습니다. 어쨌거나 그 교육을 받으니 사목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꾸르실리스따들도 저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거면 된 것입니다. 그 교육에 보니 신자들은 사제에게 순종해야 하는 내용도 있어서 사목하기 좋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교육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며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는 배울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처사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 교만이 부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교만한 사람에겐 그래서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5년 뒤 제가 꾸르실료 회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성관으로 발령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6년간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교육을 보며 많은 분이 그 짧은 시간에 회개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봉사자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때는 그렇게 부정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복음은 진정 와서 봐야 합니다. 그래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체험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꾸르실료 교육만큼 우리 신앙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교육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조금은 겸손해졌습니다. 지도신부를 맡았으니 모르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꾸르실료에 관한 모든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저를 변하게 했던 것은 신학교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성체는 은총이고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한 데 버무려지면 사람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꾸르실료 교육안에 그 은총과 진리가 가득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게 됩니다. 이 교육이 복음이고 새로운 자녀를 탄생시키는 매우 좋은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그 이후 저는 꾸르실료 재교육도 만들고 교육 내용도 나름대로 수정하며 더 나은 꾸르실료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조금은 새로워진 교육으로 많은 분이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분이 교육받으면 좋겠지만, 사정상 선택된 몇 분들만 받게 되는 것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이 교육이 분명 기름 부어진 교육이었는데 마음이 가난하지 못할 때는 저에게 복음이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많이 쌓아서 어린이처럼 겸손해지면 복음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할 믿음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이것이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가난한 이들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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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16-30: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메시아의 구원 시대가 지금 당신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시한 이사 61,1을 읽으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또 무엇을 위해서 사셔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을 읽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지만, 은총의 말씀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예수께서는 왜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지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 받을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나자렛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주님을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는데, 신앙의 눈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눈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눈은 가려져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사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정신, 주어진 시간, 가진 능력을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도 우리의 처지에서 찾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이들 앞에 작은 구세주, 다른 구원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항상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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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결실을 맺지만, 좋은 결과를 생각하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는 말을 읽었습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마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결과는 그에 따른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동네 뒷산에 성모동산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뒷산은 사유지이기 때문에 성모동산을 만들려면 먼저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모동산을 꾸미려면 비용이 많이 들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 있었기에 땅의 주인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신부님을 존경했다는 땅의 주인은 선뜻 성모동산을 꾸밀 수 있도록 땅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생각이 모이니 성모동산을 꾸미는 비용도 기적처럼 주어졌습니다. 제가 아는 분도 강남에 공연장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답니다. 비방과 비난으로 편을 가르는 세상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공연장을 만들고 싶었답니다. 은행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지점장은 요즘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을 한다니 기꺼이 대출을 해 주었고, 공연장은 20년 넘게 많은 이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좋은 생각이 결실을 본 경험이 있습니다. 본당 뒷산에 아카시아나무가 많았습니다. 뒷산은 성당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정리하면 신자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가 될 것 같았습니다. 닭도 키우고, 토끼도 키우면서 좋은 생각을 키워갔습니다. 좋은 생각은 뜻밖의 일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태풍 곤파스가 오면서 뒷산의 나무들이 쓰러졌고, 옹벽이 무너지면서 토사가 흘렀습니다. 서울 시장이 현장을 방문하였고, 저는 예방 차원에서 뒷산을 깎아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시장은 구청장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당시 매달 구청으로 직원들을 위한 미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구청장과도 인연이 있었기에 트럭 1,000대 분량의 흙을 퍼 날랐습니다. 그렇게 나른 흙은 구청장이 의도한 대로 빈터에 양분이 되었습니다. 구청장은 텃밭을 분양해서 사람들이 상추, 고추, 깻잎을 키우도록 하였습니다. 성당 뒷산에는 산을 깎아서 만든 넓은 땅이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좋은 결과만 생각했다면 저도 쉽게 포기했을 것입니다. 비용도 감당할 수 없었고, 시간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을 품고 있으니 태풍이 도와주었고, 구청장이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양재동에 가서 철쭉을 사다가 심었습니다. 과일나무도 심었습니다. 그곳에서 성모의 밤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좋은 결과를 먼저 찾았다면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셨을지 모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위험한 선동꾼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희생보다는 영광의 자리에서 얻을 높은 자리만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먼저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눈먼 이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생각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해서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신학과 교리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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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속담처럼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원전 500년경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부처, 공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서양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처는 ‘깨달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집착에서 벗어나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인의예지’의 원리입니다. ‘왜?’라는 질문은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 왜라는 질문에 부처는 깨달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공자는 인생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름을 남긴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분들 중에 세종대왕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창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묘비명’을 남기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우리의 모든 삶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사탄으로부터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사탄에게 절하면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면 안 된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유혹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서 이렇게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선포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이들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걷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처럼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고난과 모욕을 참아내셨습니다.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능력과 재능 그리고 업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능력, 재능, 업적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면 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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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구원과 해방의 완성을 향해서 끝까지 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6-21)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해방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원래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선포’는 말로만 ‘선언’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선포되는 순간 효력이 즉시 생기는, 즉 선포하신 그 일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해방되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다고 무조건 자동적으로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인간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참여해야 이루어집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고, 안 믿었으니까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의 문을 열어 주었는데도 그냥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면서, 감방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감방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은 구원도 아니고 해방도 아닙니다. 스스로 원하고, 스스로 구원과 해방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되고 해방이 됩니다. <나자렛에서 거부당하신 일을 십자가 수난의 예고편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실패하려고, 또는 일부러 거부당하려고 나자렛에 가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렇게 해석한다면,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한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하느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한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과는 반대되는 선택을 한 것이고,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시나리오대로 한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과 해방을 얻어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완전한’ 구원과 해방은 아니고, 지금은 시작 단계, 또는 진행 중인 단계일 뿐입니다. 구원과 해방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신앙생활을 중단한다면, 또는 한눈을 팔거나 옆길로 빠진다면, 완성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은총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린 것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고 잊어버려야 하고,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 전력을 다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가 아니라...)
신앙생활은 ‘대충 적당히’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것’, 그것이 바로 ‘순교 정신’입니다.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만이 순교 정신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인간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항상 박해와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시대 때에는 우리 교회의 신앙이 더 순수해지고 단단해졌는데, ‘유혹의 시대’ 때에는 너무 쉽게 타락했고, 박해 때보다 더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지금 이 시대도 그런 ‘유혹의 시대’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더욱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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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연중 제22주간부터 우리는 평일 복음에서 루카 복음서를 읽게 됩니다. 그 첫날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향하십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신 뒤에 고향을 방문하시는데(마태 13,54-58; 마르 6,1-6 참조), 루카 복음서에서는 고향 방문이 그분 공생활의 시작에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서의 나자렛 이야기는 예수님 활동의 서막을 올리며 앞으로 전개될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여 미리 제시하는 기능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는 구약의 예언, 특히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으로 주님의 영이 내리셨다는 말씀은 세례를 받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로 성령께서 오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3,21-22 참조) 그는 앞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전개되는 예수님의 활동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메시아의 앞길은 성공과 승리가 보장되는 듯 보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전혀 다른 수난과 패배의 길을 걷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겪을 그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공생활의 장엄한 시작을 알리는 단락임에도 그 시작부터 위기에 놓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을 밖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는 모습은 뒤에 당신의 백성에게 배척당하실 모습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전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공생활의 시작(나자렛 설교)에서 마침(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여정이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천 년 전 사람들에게 구원의 실현을 알리시던 이 말씀은 같은 복음을 듣고 있는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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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호 다미아노 대주교님]
<신자로서 산다는 것>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았다. 61장을 펴서 읽었고, 회중은 들었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다만 그랬을 뿐인 상황을 두고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은 무슨 차이일까?
어린이는 다가오는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 이미 자전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엄마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고 그래서 현실이 된 것이다. 말하는 순간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선포다.
광복절 특사 명단이 발표되는 순간 이미 석방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듯. 복음은 선포다. 말씀은 읽고 듣는 순간에 이미 현실이어야 한다.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이미 새사람이 된 것, 용서하라면 이미 화해가 이루어진 것, 나누고 사랑하라면 이미 누군가가 사랑에 넘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에 대한 친절한 주석과 묵상은 선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주님의 가르침을 언제까지나 묵상만 하고 해설만 할 것인가? 이제는 듣는 대로 느낌대로 말하고, 가르침대로 행하고, 예수님의 요청대로 우직스럽게 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들었으니 재산을 처분해 나누어 주고 제자의 길을 떠나야 한다.
신자로서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행해 보고 나서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얻었다.’ 하든지, 아니면 ‘완전히 사기당했다.’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자로 산다는 것, 보통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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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의 모습을 길게 소개한 뒤에, 세례와 광야에서의 유혹, 그리고 갈릴래아의 전교 이야기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회당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주로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서 비옥한 곡창지대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인이어서 부자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상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수도가 아닌 이방인의 땅, 아픈 이들의 땅인 갈릴래아로 가시어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성령’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루카 복음 3장 21절-22절)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시어”(루카 복음 4장 1절) 유혹을 이기시고, 그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어”(루카 복음 4장 14절)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복음 4장 18절 / 참조 : 이사야 예언서 61장 1절)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름부음 받은 이, 곧 메시아가 되시어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 빚 때문에 투옥되거나 잡혀서 유배당한 이,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둠 속에 있는 눈먼 이, 사회적으로 짓밟히고 억압받고 소외된 약한 이들, 고통에 울부짖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들과 함께 계신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이제 세례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아파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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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 죽을래? 내 입맛에 맞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상대를 지배하고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편견과 선입견을 지니면서 그 권위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지니셨지만, 섣부른 앎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바람과 기대가 자기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분 앞에 내 생각과 욕구를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녹녹지 않습니다. ‘너 죽을래!’ 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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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 좌석 앞에 비행경로를 볼 수 있는 모니터가 있습니다. 이 지도를 계속 보고 있으면, 비행기가 도무지 이동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옆에 나와 있는 거리와 비행시간 등의 숫자의 변동을 통해 어떻게든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깜빡 잠들 때가 있습니다. 곤히 자고 난 뒤, 몇 시간 만에 눈을 뜨면 깜짝 놀랍니다. 글쎄 모니터의 지도에 표시된 비행기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지켜보고 있을 때는 전혀 이동하지 않는 것 같은데, 몇 시간 만에 바라본 지도의 비행기는 목적지에 상당히 가까워졌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이제 막 주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이 과연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또 주님과 함께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꾸준히 주님과 함께하는 노력, 즉 미사, 기도와 묵상, 사랑 실천 등을 통해 어느 순간 주님의 현존을 깨닫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도 삶 안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과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함께하면서 때로는 삐딱하게 나아가기도 합니다(비행기 안에서 잠드는 것처럼).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간다면, 어느 순간 주님의 현존을 뜨겁게 느낄 것입니다. 감사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시어,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당신 자신의 신원을 소개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분과 같은 출신, 같은 혈통이라는 것이 구원을 보증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구원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놀라기만 할 뿐,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함께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굳은 믿음도 생기지 않고 각종 고정관념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자신과 너무나도 가까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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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그러하시듯>
루카 4,16-30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께서 그러하시듯>
주님께서
그러하시듯
벗들을 만나러
떠납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시듯
벗들을 만나면
멈춥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시듯
벗들에게
기쁨이 됩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시듯
벗들과 함께
다시 떠납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시듯
늘 걷고
늘 멈춥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시듯
결코 홀로 아니고
늘 함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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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적 개안의 기쁨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오늘부터 우리 전례는 루카 복음을 읽는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곳이 당신의 고향, 나자렛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시작하여 나자렛으로 가신 것으로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고향에는 왜 가셨을까?
그리워서 가셨을까, 부모를 만나러 가셨을까, 아니면 가파르나움에서의 성공을 고향에서도 거두고, 그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기 위해서 가셨을까?
만약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 왜 가셨을까?
그런데 묵상을 하다 보니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제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지를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설마 그런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이유로 고향을 방문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저와 같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분이셨다면 예언자는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함을 잘 아시면서 굳이 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타향과 고향을 가리지 않고 가야 할 당신의 행보를 계속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하늘나라가 누구에게나 가까이 왔음을,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오셨음을, 당신은 누구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까이 오셨음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하시지만 사람들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고향 사람들은 요셉의 아들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의 첫 반응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좋게 말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고향을 떠나 큰 인물이 되어 온 것까지는 좋지만 큰 인물 이상의 존재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성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너무도 어려운 것이고, 특히 고향 사람들, 어렸을 때부터의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니 너무 나무랄 수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고향 사람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신성이 숨어 있는데 나도 고향 사람들처럼 그것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은 아닌지.
주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하는 분이신데 그 주님을 믿는다면서 아직도 나는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고 있고, 그래서 영적으로 보는 것은 실패하는 사람은 아닌지.
그러니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숨어 있는 신성을 발견한다면 우리도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먼 사람에게는 당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나처럼 발견하라고 외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기쁘게 전하고, 영적 개안의 기쁨을 소리 높여 외치는 행복에로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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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유의 여정>
-만남, 회개, 자유-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아침 성무일도 시작 시편이 마음을 울립니다. 불철주야(不撤晝夜), 온 힘을 다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사람, 복음의 일꾼, 현재 몽골을 사목 방문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신자들의 믿음은 사랑의 갈망에 대한 답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킬 수 있다.” 어제 몽골에서의 주일미사시 강론 주제입니다.
“교황, 중국 가톨릭인들에게 좋은 시민이 될 것을 촉구하다.”
“몽골에서 ‘더불어 평화를 위한’ 기도”
“종교들이 대화, 조화, 희망을 육성(育成)하게 하소서.”
“여러분들은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교황님에 관한 기사로 가득한 교황청 홈페이지 중요 뉴스 제목 하나하가 참 좋은 묵상감입니다. 몽골에 희망의 순례자로 여정중인 교황이 참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처럼 희망의 순례자, 우애의 순례자로 자유의 여정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아주 오래전 21년전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수도형제 엘리야 수사의 모친 레나타 자매가 좋아했던 시이기도 합니다.
“수도원 정문옆 수녀원 담장안
쓸모없는 땅이라 관심도 없다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 참 넉넉한 자리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이 행복이구나
볼품이 뭐 대수랴
너와 나 편안하면 그만 아닌가
내 맘껏 가지들 뻗어 하늘 자유 맘껏 누리니 만족이다
열매 탐내는 나무 아님이 천만다행이구나
하늘 나는 새들의 쉼터 됨이 기쁨이다
흐르는 구름, 은은한 별빛, 부드러운 미풍 가슴 떨리는 감동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끌어낼 수 없다
내 이름은 참나무”-2001.3.23.
전지와 전정으로 꼴 잡혀진 분재(盆栽)처럼 열매를 목적으로한 배나무들과는 머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나무입니다. 내적자유의 상징같은 그 참나무는 지금도 울창한 거목으로 여전합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통합니다.
참으로 자유자체이신 하느님께 파견 받은 주님의 종, 대 자유인 예수님입니다. 갈릴래아 전도와 더불어 공생애가 펼쳐지기전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참 장엄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이웃을 위한 주님의 섬김의 종, 대 자유인 예수님이신지요! 예수님의 평생 사명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 이런 예수님만이 인간 무지와 허무, 자유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자 답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만날 때 회개의 은총과 더불어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자유입니다. 한두번 만남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새롭게 만나야 날로 깊어지는 자유의 여정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과 자유의 은총이 참으로 자유로운 해방의 기쁨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무지의 불신으로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공생애 시작부터 좌절을 안겨주는 고향 사람들, 이 또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고향인들을 향한 깊은 좌절과 환멸을 감지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어 엘리야 시대의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만, 즉 이교인들의 겸손한 믿음의 사례를 들면서 고향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지만 마이동풍입니다. 참으로 회개가 절실한 편견의 무지에 눈먼 고향인들입니다. 이런 장면 모두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지들입니다.
이들의 무지의 분노가 점입가경, 마침내 주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합니다. 마지막 이들을 유유히, 표표히, 홀가분하게 이들을 정면돌파하여 홀연히 떠나 당신의 길을 계속 가시는 대 자유인 예수님의 다음 장면은 얼마나 멋진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예수님의 이 자유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종으로서 파견받은 자의 파견의식입니다. 결코 우연한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파견받은 존재요 언젠가는 돌아갈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바로 샘솟는 열정의 근원이었음을 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 똑같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불림 받은 성소자임과 동시에 파견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를 깨달아 확신이 날로 깊어갈 때 정체성 또렷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겠습니다. 이를 깨닫지 못해 표류하고 방황하는 천박한 삶입니다. 이래서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괴물도 되고 일상의 무기력과 허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파견받은 자로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자유와 희망의 내적 여정을 살아갑니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늘 함께 계시는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 되고 영원한 도반이,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샘이 됩니다. 바로 제1독서 바오로가 전해 주는 주님의 재림을 통해 파스카 주님이 우리의 희망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바오로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을 향한 자유의 여정, 희망의 여정이요 우리를 맞이하게 위해 마중나오는 천상의 주님이 바로 우리 모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희망의 여정, 자유의 여정에 항구하게 합니다. 끝으로 예전에 영원한 자유인을 꿈꾸며 썼던 제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자작 애송시를 나눕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이 되어
임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 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 마냥 걷다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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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희년을 살자!>
오늘 복음(루카4,16-30)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희년(禧年)에 관한 규정은 구약성경 레위기 25장 8절에서 22절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매 50년마다 1년을 은혜로운 해로 삼아 모든 주민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제 소유지를 되찾게 해 주는 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이 희년을 나자렛에서 선포하시면서 당신께서 이 세상 오신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 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
그 분명한 이유와 목적은 '해방'입니다. '자유'입니다. '기쁨'입니다. 때문에 이것이 또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고 있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누려야 할 '은총'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을 거부한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희년을 거부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희년을 거부하지 말고, 이 희년을 받아들이고, 이 희년을 살도록 합시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나에게 자유와 해방과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왜 예수님을 믿을까? 왜 성당엘 나오고, 왜 성체를 받아모실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며, 지금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 매일 희년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제대 위로 내려오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이십니다.
희년을 거부하지 말고, 희년을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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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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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말씀과 주님이
한 몸이 되는
오늘이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말씀으로
오늘이라는
하루가 활짝
열립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을
만납니다.
비극과
희극 사이에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힘겹게
들어올립니다.
말씀으로
위로받고
말씀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말씀으로
오늘의 마음을
뜨겁게
만납니다.
서로의 만남이
애틋한 것은
주님 말씀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길은
서로를 살리는
말씀의 길입니다.
매일매일
받아 먹어야 할
말씀이라는
양식입니다.
가장 좋은
말씀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갑니다.
말씀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오늘을
듣게 하고
오늘을
사랑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 삶에서
말씀이라는
인격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을
우리에게
빌려주신
하느님께
말씀을
봉헌합니다.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오늘입니다.
말씀으로
잃어버린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격을 되찾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친 소중한
우리자신을
만나는
은총 가득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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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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