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돌고 또 돕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와 현 시대와도 이런 저런 의미로 겹쳐 보입니다. 조선시대의 왕은 모두 27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대 태조부터 9대 성종까지가 초기 조선이라고 한다면 10대 연산군부터 조선중기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조선은 고려의 군인들이 왕의 명을 어기고 궁궐로 침입해서 고려를 뒤엎고 만든 정권이자 나라입니다. 고려의 장군이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자신들의 군통수권자인 왕에게 칼을 들이댄 것입니다. 물론 당시 고려는 망해가는 상황임이 분명했지만 외세 침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군인들이 일으킨 거사로 나라가 망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입니다. 하여튼 조선은 그렇게 탄생하고 고려는 몰락했습니다.
그렇게 건국한 조선은 518년이란 상대적으로 긴세월속에 존속했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45년에 독립했습니다. 한국이 태동한지 벌써 7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한국은 대통령도 벌써 13명을 배출했습니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그렇습니다. 조선으로 치면 이제 초기단계를 넘어 중반기로 접어든 모양새입니다. 조선시대 태조 정조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으로 이어지는 계보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성격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을 때까지 나름 괜찮은 듯 보였지만 결국 이런 저런 일로 뒤로 물러나고 결국 한명은 함경도로 한명은 미국의 하와이로 피신한 것도 흡사합니다. 세번째 왕과 대통령은 강력한 권력을 소유하려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조선 태종의 왕자의 난이나 한국의 박정희의 쿠데타도 성격이 매우 닮아 있습니다. 조선의 네번째인 세종대왕과 한국의 전두환 노태우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확연히 다릅니다. 세종은 대왕으로 우러러보지만 전두환 노태우는 한국 민주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짓밟고 탄압한 역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런 저런 왕과 대통령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조선건국후 초기단계에서 중기로 접어들면서 건국 당시의 기운과 분위기가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나가 풀린 그런 상황속에 대통령의 탄핵이란 불행한 시기를 맞게 됩니다. 조카를 없애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아들이 바로 조선 8번째 왕 예종입니다. 예종은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에 나온 바로 그 왕입니다. 세조가 이런 저런 이유로 병이 깊어지자 왕위를 물려받은 인물입니다. 18살때 왕에 등극했습니다. 성격이 매우 까칠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나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는 그냥 넘기지 않은 왕입니다. 눈에서 레이저광을 발사했다고 하지요. 레이저라면 연상되는 인물이 한국의 대통령에도 존재합니다. 예종의 장인인 한명회가 예종을 좌지우지하려 했지만 예종은 버티었는데 결국 남이장군을 제거하는 자충수와 측근세력의 농간끝에 왕의 자리를 내놓게 됩니다. 예종은 나름 이런 저런 통치를 하려 했지만 나이 20살에 사망합니다. 임기가 무척 짧았다는 말입니다. 임기가 2년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등장한 왕이 바로 성종입니다. 성종은 매우 독특한 인물입니다. 낮과 밤이 달랐다는 말입니다. 성종을 평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요순이요 야걸주라...이말은 낮에는 요순임금처럼 매우 영특하고 명석한 왕이지만 밤이면 온갖 기행을 다하는 천하의 난봉꾼인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같았다는 말입니다. 세조의 아들인 예종이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부득히 세조의 손자중에 큰 손자인 이혈을 9대왕으로 정했습니다. 성종은 나름 왕권을 강화하고 경국대전을 반포했으며 국방과 관련해 압록강 이북을 정벌하고 두만강 이북 지역도 조선의 영역으로 둔 나름 나라를 위한 성군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낮과는 달리 밤에는 음주가무로 소일했으며 후일 조선의 최대 사건이 되는 두번째 부인인 제헌왕후 윤씨를 둘러싼 각종 스캔들로 성군의 이미지에 대단한 흠집이 생긴 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들인 연산군의 악행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고 합당하게 처리했으면 그 뒤로 펼쳐질 조선의 역사에 기여를 했겠지만 바로 자신의 가장 가까운 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댓가를 조선은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부부 관계에서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그 아들인 연산군이 그것을 핑게삼아 조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단히 무겁고 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종 다음의 왕은 그 악명높은 연산군입니다. 5백 년 조선 왕조 역사에서 광해군과 함께 반정 즉 쿠데타로 폐위된 후 복위되지 못하여 조나 종이라는 묘호를 영영 받지 못한 왕중의 한 명입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갑자사화때 보인 잔혹함과 규모는 경악스러울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관은 연산군이 성품이 포악하고 정치를 가혹하게 했으며 예로부터 난폭한 왕이 많았으나 연산군만큼 심한 자는 아직 있지 않았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학자들은 연산군의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뿐만 아니라 권력 강화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연산군이 그냥 멍청하고 어머니의 복수만 바란 폭군뿐 아니라 왕권 강화를 획책하며 치밀하게 계획한 흔적이 여러곳에서 보인다는 것입니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을 닮아 술을 대단히 많이 마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어릴적부터 성격이 집요하고 거친 면이 있었고 특히 자신에게 쓴 소리라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관들이 대단히 많이 처형당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때문입니다. 연산군이 패륜 군주의 대명사가 된 것에는 측근인 임사홍이 존재합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가 사사된 내막을 자세하게 알린 뒤 처벌할 인물들 즉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인물입니다. 또한 장록수라는 궁녀도 연산군의 패망에 대단히 큰 몫을 했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등에 엎고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연산군이 장녹수에게만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였습니다. 궁녀들과 기생은 물론이고 여염집 아녀자들까지 거침없이 희롱했고 심지어 친족과 간음하는 등 패륜적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전국에서 기생을 뽑아 대궐로 들여 그들을 흥청이라고 칭하고 그로 인해 흥청망청이란 단어까지 탄생하게한 장본인입니다. 연산군은 자신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도 서슴치 않아 그런 공사에 백성들이 징발되고 국가 재정도 거덜났습니다.
조선 최악의 왕인 연산군은 1506년 반란군에 의해 몰락합니다. 연산군의 행태를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었던 성희안과 박원종 등이 반정을 주도했습니다. 이른바 중종반정입니다. 궁궐을 지키던 군사들은 물론 시종들까지 도망가기 바빴다고 합니다. 아무도 연산군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뿐 아니라 당시 기득권인 양반세력에게까지 인심을 잃으면 왕도 쫓겨난다는 첫 사례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궁궐에 진입한 반정 세력들은 대비인 정현왕후의 재가를 얻어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합니다. 이가 바로 조선 11대왕인 중종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역사를 더 이상 만들지 않기 위해 지난 역사들을 들여다보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2024년 12월 22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