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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타협하고 대충 신앙생활하면서 '무늬만 크리스챤'으로서 자기 만족을 위한 삶을, 꿩(=천국)도 먹고 알(=축복)도 먹는 삶을, 적당히 욕도 들어먹는 삶을 살아갈 작정이 아닌 바에야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님의 신앙은 앞으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할 것이며 그것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태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의 소유자인양 행세를 하던 자가 한 순간에 그 신앙이 '모래성'처럼 붕괴될 뿐만 아니라 불신으로 돌아선 예를 수차례 목도하였습니다. 신학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습니다.
저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는데 전 초신자 시절 가르침에 순종하여 십일조를 냈었으며 주일성수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주일날 있을 예정이었던 취직을 위한 면접에 불참함으로써 교회에서 신앙의 모범사례로서 갈채받는 영광(?)도 맛보았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오늘날 칼빈을 비판하고 십일조를 비판하고 주일성수를 비판하고 목사를 비판하고 성도를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전면에 내세우는 삶을 사십시오. 축복은 받아도 그만이고 안받아도 그만입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이며 많이 거두었으면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충성되고 착한 종'으로서 그만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또 배타주의에 물들어 다양한 시각에 대한 접근 자체를 외면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맹목적, 기복적, 이기적 신앙의 강요와 ‘값싼 은혜’로 점철된 축복의 남발과 삯군 목자(=직업 목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있는 것입니다.
부탁인데 교회다녀서 부자되었다느니 록펠러를 비롯한 몇몇 특수한 경우를 거론하며 십일조를 합리화하지 말기 바랍니다. 목사님들이 또는 누군가가 성경의 특정 구절을 콕 찝어 이야기하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아멘’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비판하지말라’는 성경 구절도 흔히 거론됩니다만 반면에 성경에서는 불의에 대하여 용납치 말라는 말씀, 즉 그에 반하는 말씀도 많은 것이며 신약의 서신들은 대부분 불의에 대하여 비판적 논조를 펴고 있습니다.
성경은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순되는 듯한 부분들이 얼마나 절묘하게 동전의 양면과 같은 미묘한 긴장관계 속에서 서로를 보완해주며 튼실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헌금을 안하느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헌금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님은 저의 질문에 대하여는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군요. 정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왜 헌금을 냅니까?
물질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삶이 중요하다면 물질 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교회, 가정, 직장 등에서의 청지기로서의 삶.. 인생 전반에 걸쳐 청지기로서의 삶을 왜 살지 않는 것입니까?
수입의 십일조를 내는 것만이 신앙고백입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은 다른 부문에서 더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음을 외면하고 돈, 돈, 돈 만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헌금이 무엇입니까? 정직하게 말씀하여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드린다는 개념으로서 가장 확실한 말씀은 예수님의 언급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단 한번이라도 '나도 돈이 필요하니 돈을 나에게 가져오라'고 한 적이 있나요?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님의 돈을 쓰십시오. 그것보다 확실한 신앙고백은 없습니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온갖 명목의 헌금… 그것은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전형적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모아진 돈을 예배당 한가운데서 불을 지펴놓고 태워서 드려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향을 흠향하시는 동안에 예배당 전체에는 진한 감동(?)이 흐를 것입니다. 세상사람들로부터 '미친연넘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지언정 그것보다 '물질로부터의 자유함'을 확실히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쫒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누가복음 18장)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누가복음 19장)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태복음 25장)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돈이 어떻게 쓰이고 있습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 제도로서의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눔의 정신’ 입니다.
그 많은 헌금 중 구제비로서 고작 3%를 쓰면서.. 거의 모든 헌금을 교회 내에서 그것도 주로 목사의 개인 생활 유지비로 흥청망청 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돈이라구요? 그것은 일부 교회에서 나타나는 비정상적 행태가 아닙니다. '구제비 3%'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궁금하다면 인터넷을 검색하기 바랍니다.
오히려 구제비와 선교비등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교회가 비정상적으로 주목받는 기이한 현실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사치화되고 고급화 되면서 ‘내교회 중심, 내목사 최고’라는 이런 엉터리 같은 자기만족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들, 그릇됨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외면하는 위선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정 청지기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그 돈이 교회안팎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관심 내지는 침묵하고 있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기 전에 먼저 교회 내의 왜곡된 돈의 흐름을 바로잡을 생각부터 하기 바랍니다.
십일조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수입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됨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행하여지는 것이라구요? 그 논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이 왜 물질적 축복과 연결되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또한 정직한 크리스챤이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서 돈은 '새발의 피'에 불과함을 알아야 하며 진정한 신앙고백은 '헌신'과 '순교의 정신'에서, '나의 삶 전체'를 통해서 비롯되는 것이지 '하나님께 돈 몇 푼 쥐어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한다면 돈 가지고 말장난 하는 것은 정말 사악한 일입니다. 제말에 수긍이 잘 안간다면 지금 당장 하얀 종이 위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들'을 정직한 마음으로 써 내려가 보세요!
십일조를 바친다는 기독교인들의 삶이 워낙에 개판(?)인 경우가 많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교회에 납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신앙고백' 등 포장지와 껍데기를 들어내고 속에 감추어진 내용물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를 요청드립니다. 뭐라고 둘러대든지 간에 '열매로 안다'는 말씀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째서 십일조는 누구에게나 적용해서 가진 것 없는 서민들, 세상에서 돈 때문에 찌들어 교회에서 쉼을 얻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지우는 것입니까? 수입의 십분의 일은 무조건 하나님 것이라는 명분(?)으로 빚을 졌어도 소득의 십분의 일은 일단 하나님께 바치라 강요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성도에게 부득이하게 납부하지 못했다는 십일조까지 철저히 계산해서 남김없이 바치라고 가르치니 이런 날강도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 몫(?)의 돈에 목을 매는 분이며 성도들의 고혈을 짜내야만 직성이 풀려서 축복을 내리는 분이던가요? 사기꾼이 아닌 다음에야 귀신을 섬긴다는 무당들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여유있게 사는 돈 많은 분들이 넉넉하게 헌금을 하고 생활고에 가뜩이나 찌든 서민들은 좀 편하게 심적 부담없이 교회를 찾고 주님의 사랑을 맛보게 왜 못합니까? 다음 말씀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8:13,14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십일조 내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구요? 물질에 대한 자유함과 신앙고백으로서 십일조의 교회 납부가 탁월한 가르침이며 성경적이라면 유독 한국 교회에서만 십일조가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럴듯한 '명분'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보기 바랍니다.
한국의 교회만 진실되고 온전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유독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안티분들의 원성이 자자하고 각종 허접한(?) 이단들이 득세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뻘짓(?)들은 무엇입니까? 정직하다면 문제가 곪아서 사방으로 터지고 있음을 자인해야 합니다.
세계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의 부패 정도가 심해질수록 이단의 횡행도 그만큼 커져온 것이 사실이라고 하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개인 사업하듯이 교회를 운영하며 부자교회, 빈자교회가 있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 속에서 부자가 빈자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빈자를 멸시하고 가난한 교회를 섬기는 목사는 뭔가 문제가 있으며 축복을 못받아서 그런 것이라는 등의 엉터리 정죄나 일삼고, 아니면 생색이나 내는 도움을 주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십일조가 온전한 신앙고백이라면 자발적이어야 하며 '그 맘에 원하는대로' 십이조, 십삼조... 도 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도 십일조의 대상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사라져야 하며 그 돈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여져야 합니다. 바리새인으로서 누구보다 자기의가 강했던 사도 바울이 십일조를 강요하기는 커녕 다음과 같이 말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기쁘게 헌금을 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는 커녕 협박과 공갈을 쳐서 헌금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쓰이든 상관없다 그것은 관여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백주의 날강도 짓과 다름이 없습니다. 교회에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바치고 나서 일상생활에서는 정말 섬겨야 할 부모, 형제, 이웃 등에게 ‘인색’하게 짠돌이 소리 들어가며 살고 심지어 가정에 불화를 야기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7)
그리고 님의 신앙고백은 인생 전체를 통해 치우침이 없이 고르게 고백되어져야 하며 물질로부터 진정한 자유함을 맛보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소외된 이웃을 위해 님의 돈을 써 보세요.
교회에 내는 십일조보다 기쁨이 두배 세배로 다가올 것입니다. 물질보다 시간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먼저 살아보라고 권면드립니다. 하나님께 최소한 시간의 십일조를 바쳐볼 생각은 없나요? 매일 특정한 시간에 한두시간을 내어 말씀을 읽고 영의 양식을 취하며 기도하고 영의 호흡을 통해 영의 건강을 돌보기 바라며 봉사활동과 전도활동 등에 시간을 기쁘게 투자하기 바랍니다.
1. [삯군목자] 십일조 강요는 사기다!! -> 진정한 헌금의 의미에 대하여!!!
2. [삯군목자] 헌금, 헌금... 삯군 목자이거든 회개하십시오!
3. [삯군목자] 제 생각에 십일조를 강요하는 자들은 모두 XXX 입니다..!!
5. [삯군목자] 주일성수, 십일조로 멀쩡한 신자를 '협박'하지 말라!
6. [삯군목자] 신앙생활 10년 - 돈내기 싫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7. [크리스챤] 십일조라는 용어에 현혹되서는 안됩니다... 바른 인식!
위의 링크들을 클릭하여 글을 '반드시' 읽어 보기 바랍니다. 못본 글이 있다면 꼭 차근히 읽어보기 바라며 구체적으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세요. 삯군목자들의 약장수 같은 현란한 혀놀림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계산기 두드려 가며 '이것도 십일조 대상인가' 고민해 가면서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야만 그것이 물질로부터의 자유함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고 온전한 신앙고백으로서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통틀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들이는 삶을 사십시오. 주님의 피를 값싸고 추하게 만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순종함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고 나의 돈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며 기독교인은 인색하다거나 이기적 혹은 짠돌이라는 편견을 잠재우며 칭찬받는 크리스챤이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먼저 그 열매를 보고 그가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알아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유효한 신앙고백으로서 인정할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진정한 헌금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정직하게 말해서 '유형교회운영자금'이며 '나의 돈을 일부 내어 다른 사람을 도와줌'의 개념인 '연보'인 것입니다. 참고로 연보를 일컬어 사전적,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고 '목적헌금'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연보가 그런 정체불명의 용어로 변질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적헌금이라는 미명아래 온갖 명목의 헌금을 만들어서 돈을 뜯어내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기형적 제도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의의 실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돈을 끌어모을까' 밤낮 연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부활한' 십일조요 '각종 명목의' 헌금 봉투인 것입니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조직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일부 분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그 돈이 '교회의 이름으로'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보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를 하고 강요를 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예물로서가 아니라 '선교와 구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조직의 운영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각자 '형편대로' '성의껏' 십시일반 내어 모인 돈이 헌금이며 '필요한 사람을 위하여' 올바르게 분배되어져야 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푼도 가져가지 않습니다. 아닌가요?
돈과 관련하여 진실을 호도하기 위한 자기 변명, 자기 합리화를 하기 전에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솔직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자문자답해 보기 바랍니다. 목사들은 정녕 성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돈을 가져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을 받는 것'이며 '하늘의 재화를 쌓는 것'이며 '축복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의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려거든 최소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보다 엄격한 기준 하에서' 그 모인 돈이 쓰여져야 하며 그보다 앞서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정말 받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썩은 유형 교회'라면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중간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훼손하고 그 알량한 축복마저 중간에서 차단하는 훼방꾼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재화와 축복을 강조하는 이유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의의 실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저 인간이 이기적 욕망을 건드려 돈을 한푼이라도 더 끌어모으고자 내던지는 무책임한 사탕발림인 것입니다.
사탕발림이 달콤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해서 하늘에 재화를 쌓고 또 축복을 받는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전면에 하나님을 내세워서 순진(?)한 성도들을 현혹하여 돈을 끌어 모으고 자기 유익을 좇아 마구잡이로 그 돈을 쓰면서도 비판을 잠재우고자 하는 전형적인 '호가호위'요 사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교회가 구제 등에 등한히 하고 자기 살 찌워 권세를 얻고 희희낙낙하는데 급급하다면 저는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운영자금을 낼 뿐이며 연보는 스스로 하나님께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왼손이 하는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목자가 목회하며 구제와 선교에 힘쓰는 교회라면 연보로서의 헌금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칭찬받는 교회, 올바른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기 바랍니다.
목사들은 하나님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며 성도들 위에 군림하기 전에 현실적으로 누구 덕에 먹고 사는 것인지 냉철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헌금을 통해 물질적 축복이나 받으라 가르치고 신앙고백이니 십일조를 안내면 참신자가 아니라며 공갈을 치는 반면에 온갖 땀방울이 스며있는 그 귀한 돈으로 교회 건물이나 짓고 자기 몸 치장을 하며 권세를 얻어 교단 정치에나 기웃거리고 성도들에게 대접받으며 이것이 '축복받은 자'의 삶이라는 그릇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참종이요 선한 일꾼으로서 고난에 동참했던 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욕되게 하는 자들..
하나님을 빙자하여 돈을 울궈내려는 더러운 삯군 목자들...
그들이 하나님을 정말 믿고 경외하며 정직하다면 온갖 명목의 헌금 봉투를 먼저 버려야 할 것이며 거지 동냥하듯 바구니를 예배중에 돌리는 몰상식(?)한 행위를 금지해야 할 것이며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는 날강도 같은 짓은 더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인가요? 부자교회에 속한 삯군 목자들은 아방궁같은 당회장실도 버려야 하며 엉터리 권위 의식도 버리고 가난하고 모자란 성도들과 더더욱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외제차도 버리고 골프회원권도 버리고 사채놀이도 하지말고 부동산 투기도 하지 말아야 하며... 일일이 언급하기에도 힘들군요.. 진정 물질로부터 자유한 자로서, 주님의 종이라 스스로 일컫는 자로서 올바른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왜 목사가 되었나요?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겠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목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는 이 현실이 한국 교회의 또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헌신하겠다며 목사가 되더니 하나님이 잘 돌보라고 맡겨주신 양들의 고혈을 짜내어 자기 살을 찌우고는 '보라! 난 축복을 받았노라.' 외치는 현실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한 자들이 외제승용차를 끌고 골프를 치면서 또 성도들로부터 필요 이상의 대접 받기를 즐기면서 하는 말이 이게 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목을 곧추 세우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또다른 리그에서 서로 자기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아닌가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과 벗할 뿐만 아니라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착각하고 있음을 밝혀주실 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 아무나 하고 있죠.. 그러나 진정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선한목자)이 받을 상이 큰 만큼 그들(=삯군목자)이 받을 벌 또한 막중할 것입니다.
주의 종으로서 헌신하겠다는 숭고한 가치를 상실한 채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변화된 목회,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다음에는 이제 권력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변질된 거짓 목회를 하고 있는 그들은 이미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자이며 더러운 사탄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귀막고 눈감고 코(?)막고 거짓과 위선의 껍데기 안에서 맹신에 가까운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답답할 뿐입니다... 우리의 이성이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임을 안다면 사리분별 못하고 거짓 가르침에 '모르고 속든 알고 속든' 그것도 죄악입니다. 우연히 눈에 띄어 가져온 것일뿐이지만 다음 글도 참고하기 바랍니다.
최고급 호텔에서 만찬을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설파 하는 목사와 교인들이 있다.
에쿠스와 체어맨을 타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목사와 교인들이 있다. ... (중략)
또 다음과 같은 고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런 질문이 정상적인 태도인지 묻고 싶습니다.
① 월급을 받으면 세금을 공제하기 전 명목상의 임금으로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세금을 공제하고 난 후에 실제 수입으로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십일조와 관련하여 가장 기초적인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금 이외에 다른 것들도 공제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빚 문제까지 겹친다면 혼돈은 더욱 심해진다.
② 목회자 모임에서 빚을 먼저 갚아야 하는가, 십일조를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빚을 갚고 나면 소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십일조를 하라는 것인지, 빚을 끝까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지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③ 또 어떤 사람은 월급을 타서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돈을 쪼개어 정기적금에 들었는데 적금 만료가 되어 목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럴 때 이미 십일조를 뗀 돈으로 적금을 들었는데도 새로 목돈이 생겼다고 거기에 대한 십일조를 또 해야 하는가?
④ 어떤 교수가 특강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먼 지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가는 동안에 밥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사 먹었다. 구두 밑창이 떨어져 구둣방에 가서 수리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치러진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강의를 마치고 강의료 50만 원을 받았다.
자, 이제 강의료에 대한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 비행기 삯을 강의료에서 빼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그 다음 들어간 경비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 모든 비용들이 50만 원을 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 50만 원에 대한 십일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⑤ 아버지가 이미 십일조를 뗀 돈에서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었다. 아이들도 그 용돈에서 십일조를 떼어야 하는가?
물론 떼어야 한다는 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돈이 돌아다니는 곳이면 십일조를 계속 떼어야 하는 길고 긴 순환 고리가 이어질 것이다.
⑥ 만 원짜리 한 장이 물건을 산다든지 하여 소비되거나 축이 나지 않고 용돈처럼 1,000명의 사람들을 거쳤다고 하자. 만 원짜리 한 장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십일조로 거둔 돈이 자그마치 100만 원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무런 노동도 없는 가운데 만 원짜리 한 장이 돌아다니기만 해도 이렇게 엄청난 십일조가 거두어지니 이보다 더 기이한 산술(算術)이 어디 있는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먹어 치울 수 있는 양식의 십일조를 요구하셨는지도 모른다.
⑦ 어느 미션 계통의 대학에서 교수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미리 십일조를 떼고 지급했다. 교수들이 항의를 하자 학교 당국에서 대답하기를, 교수들은 교내에 있는 대학 교회 소속으로 볼 수 있으므로 대학 교회에 내야 하는 십일조를 미리 떼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학교 재정난 때문에 그런 편법을 썼음에 틀림없다. 이런 편법이 가능한 것이 바로 '모든' 소득에 대한 십일조의 허점이기도 하다.
⑧ 자유 직업가로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어느 성도가 오랜만에 1,000만 원의 수입이 생겨 100만 원의 십일조를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달부터 수입이 일체 없는 기간이 반년이나 이어졌다.
그 성도는 십일조 헌금자 명단이 적힌 주보를 볼 적마다 교회의 목사님이나 다른 신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염려가 되었다. 한 달에 100만 원의 십일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십일조 액수가 많으니까 떼어먹고 있지 않나 하고 오해를 할 것 같아서였다.
⑨ 남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 전업 주부인 아내가 남편의 월급에서 십일조를 떼어 자기 이름으로 헌금을 하면서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화가 나서 교회를 찾아가 자기 월급에서 바쳐진 십일조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아내의 소득에서 십일조가 나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아내는 남의 소득을 가지고 자기 소득인 것처럼 꾸며 거짓으로 십일조를 했다는 말이었다. 구약 시대로 따지면 남의 밭 소산을 가지고 십일조를 바친 꼴이었다. 전업 주부로서의 노동의 대가를 감안하더라도 남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때 교회에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겠는가?
⑩ 중고 컴퓨터를 팔아 돈을 보태어 최신식 컴퓨터를 구입하려고 하는데 중고 컴퓨터를 팔아서 생긴 돈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중고 컴퓨터를 파는 목적은 그 돈으로 소득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최신식 컴퓨터 구입 자금으로 투입하려고 그러는 것인데 잠시 머물렀다 가는 그 돈에까지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돈이 머물러 있는 기간이 길면 십일조를 해야 하고, 머물러 있는 기간이 짧으면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작은 집을 팔아 큰 집으로 옮기려고 할 때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물론 국가에서는 거래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양도 소득세도 물리고 취득세도 물린다. 2억 정도의 돈을 굴려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나라에 바친 세금만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도 나라의 세금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가?
⑪ 나라 세법에 정통한 세무 공무원이 있는 것처럼 교회마다 십일조 내는 법에 정통한 신자들이 있다. 십일조와 관련된 갖가지 경우를 쾌도난마식으로 척척 잘 해결한다.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믿음의 차원과는 상관없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런 신자들이나 교회가 제시하는 해결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율법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⑫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고귀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신장을 하나 떼어내어 생면부지의 환자에게 이식하도록 했다고 하자. 그 신장 값을 얼마나 매겨야 할 것인가?
이때에도 십일조의 원칙을 적용하려고 할 것인가.
첫댓글 이 게시물을 당분간, 공지로 지정해 두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별도로 스크랩 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문제성을 지적해보겠습니다. 1번,세금이 우선인가 십일조가 우선인가는 그 사람의 신앙관에 맡겨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권세가 우선인가 세속권세가 우선인가의 중점은 신앙관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중심의 권세가 우선될수있기를 성경은 가르치지 않나요?.
2번, 빛을 먼저 갚아야 하는가 십일조를 먼저 떼야하는가.... 저 개인으로도 많은 갈등이 있는 문제 입니다. 빛을지게 되면 빛진자에 노예라는 성경내용때문에 먼저 세상의 노예로부터 해방 돼어야하는가?즉 빛을 모두 먼져 갚아야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될수 있는것인가 하는 갈등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노예이든 아니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것이 우선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3번, 이미 십일조를 떼고서 적금을 들었는데 이 적금을 목돈으로 찾으면서 또 십일조를 떼어야 하는가.?.. 적금의 이자수입만 계산하면 돼는것이지요.
4번, 먼곳까지 강의를 가느라 오히려 교통비가 강의료의 몇배군요. 즉 적자수입이라는건데..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이 강의료는 경비지출에 관한 탕감금액이라고 여기는 것이 현명할것입니다.
5번, 아버지가 전체 수입의 십일조를 떼었는데도 아이는 아버지 한테서 받은 용돈에서 또다시 십일조를 뗀다... 불합리할것같은 생각 같지만 떼는것이 맞습니다. 아버지는 지출이고 아이는 당연한 몫의 수입입니다. 만약 1만원을 용돈으로 받았다면 1천원의 십일조와 9천원의 개인지출 습관은 중요한 것입니다.
6번, 숫자로 장난하는 산출입니다. 마치 A4종이를 1000번 접을수 있다고 계산하는것과 똑같습니다. 20번 접는것도 불가능한 ,,,, 한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판목적 계산이군요.
7번, 십일조를 먼저 떼고 계산하는 경우는 없어야지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면서도 형벌을 가하는 강제성이 있는 것이 아닌 자발적 고백형태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내용의글로 십일조의 신성한 내용을 격하시키는 내용인것입니다.
8번, 온전한 십일조는 주위사람을 의식하는 금액이 아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순전하게 수입이 발생된대로 없으면 없는것으로 드려지는 내용이 좋은예죠. 주위를 살피는자 대부분이 범죄하는 자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예군요.
9번, 개인 소견으로는 믿음없는 남편이 달라고 한다면 돌려주는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 내용에서 부부는 남여가 결혼으로 한몸을 이룬 것이라는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남편의 수입을 남의 수입으로 가정한것이 잘못돼었습니다. 남편의 수입은 아내의 수입이며 아내의 지출은 남편의 지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부부입니다.
10번, 성경을 잘 관찰하여 보면 소득이란 시간+노력+생산 의 산출결과물입니다. 이미있던 헌 물건을 싼값에 처분하고 새물건으로 바꾸는데 십일조는 또 뗀다... 집을 그렇게 굴릴때는 헌물건이 새 물건일때 보다 더 많은 금액을 이익으로 생기게 됩니다. 당연 이 이익분에 대하여는 세금도 십일조도 있어야지요. 파는 물건이 살때보다 적은 금액을 받을때 같은 새 물건을 구입일땐 금액을 더해야 가능하지요. 공산품과 부동산은 전혀 그 가치성격이 다름을 생각하지 않고 예를 든것은 잘못된 예입니다.
11번, 쾌도난마식으로.... 표현이 참 실랄하지만 그런 교회도 교인도 있는것은 어찌보면 가슴아프기도한 내용입니다. 그래도 이런 표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정말로 신실한 내용을 가진 십일조와 헌금이 더 많은것을 보고있지만.. 비판자에게는 안보이는 내용이겠지요.
12번, 예수님이 눈먼 소경을 눈뜨게하고 그 이익으로 한쪽눈을 떼갔을까요? 눈뜬 소경이 스스로 한쪽눈을 떼주었을까요? ... 이런식으로 말장난도 지칩니다. 십일조는 순수한 노동과 노력으로 발생한 소득분에 관하여 해야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노소득을 부추키지도 않고 그런 불노소득과 불함리한 소득으로는 감사헌금조차 받지 않으신다는것을 아셔야 합니다. 온전한 것은 드림에도 그러해야 하지만 소득에서도 온전한 노력의 댓가를 받으셔야 하는것입니다.
어떤 간증에서 십일조를 잘 내니까 부자가 되는 복을 누리고 있다, 어떤 목사님이 십오조를 하면 물질에 복을 5배나 더 받는다... 이런 내용에 혹해서 속히 물질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무리한 헌금에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십이 십오 십구조를 드리며 마치 복권에 라도 당첨된든 재산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지요.. 당연히 물질의 어려움에서 극복되지 않고 계속어려우니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입술에 죄를 범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지 않게 올바른 십일조와 헌금 신앙생활관이 필요한것입니다. 무조껀 비판만 한다고 해결되는문제가 아닌 올바른 교육과 실천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것은.. 교회에 내는 돈은 왜그토록 아까워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예배당은 어디서 공짜로 생긴 것도 아니요 운영도 거저 되는 것이 아닌데.. 내게 그토록 기쁨을 주는 예배당에 돈 내는걸 왜그리 아끼려하져.. 구제는 구제대로 또 돈 낼 수 있는거 아닌가요.. 굳이 십일조로 구제에 힘써야한다고 하는 것이 옳은 건진 모르겠어요 구제에 힘쓰는 게 중요하듯이 교회구제에도 힘써야하지않나요..
마리아라는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다 옥합을 깨뜨려 붓고머리털로 씻겼습니다. 그때 가룟유다가 이런 말을했다고 요한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데나리온(1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싹이니 요즘으로 계산하면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지요)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한이 덧붙이기를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12:5-6